■ 경주이씨/선세자료

이벽(李鼊)등 흥덕사에 놀러간 유생들을 국문하도록 하다.

야촌(1) 2011. 1. 21. 17:06

朝鮮王朝実録성종 228권,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5월 11일(무진) 4번째기사

 

이벽(李鼊)등 흥덕사에 놀러간 유생들을 국문하도록 하다.


유생(儒生) 홍덕창(洪德昌)·이벽(李鼊)·유중익(兪仲翼)·윤양보(尹良輔)·양희수(楊希洙)·박안영(朴安榮)이 흥덕사(興德寺)에서 놀았는데, 대비(大妃)가 듣고 내관을 보내 가서 살펴보게 하고 이름을 갖춰 아뢰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유생이 절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은 법령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지금 이 유생은 법령을 돌아보지 않고 떼지어 절에 올라갔으니, 그들을 유사(攸司)에 내려 국문하라.

 

유생이 비록 불교를 배척하기는 하지만 각각 자기네의 도를 행하는 것이 가하다. 이후부터는 엄히 금하여 절에 올라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 들으니, 흥덕사 뒤에 있는 길은 막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 다시 길을 뚫어 산의 맥을 끊었다고 하니, 속히 상지관(相地官)을 보내 길을 여는 것과 막는 것의 편부(便否)를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가 일찍이 불상을 만들게 하여 정업원(淨業院)에 보냈는데 유생 이벽 등이 불상을 가져다 태워 버렸다. 사성(司成) 이문흥(李文興)이 그 유생들을 벌하려 하자, 사성(司成) 김율(金硉)이 ‘유생으로서 불교를 배격한 것에 무슨 불가함이 있는가?’ 하였다.

 

대비가 이 소식을 듣고 이벽 등을 국문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통해 아뢰자 임금이 거절하기를, ‘이 사건은 밖에서 들은 소문이라고 해도 유생을 추국하면 대간(臺諫)이 반드시 말할 것인데, 하물며 내간(內間)에서 듣고 유생을 추국하도록 명한다면 임금으로서 할 정사가 아니다.’ 하였다. 그래서 대비도 강요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1책 4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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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제17권>성종조 3 >1489년(성종 20 기유)

 

○ 1월, 겸 장령 이승건(李承健)이 명을 받들고 황해도에 향시(鄕試)를 설행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본도의 악질(惡疾)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책문(策問)을 내었는데, 영유(永柔)의 훈도(訓導) 권계동(權季仝)이 대책(對策)에서 부처를 받들어 모시면 구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명교(名敎)에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뽑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권계동의 말을 듣고 보니 매우 통분스럽다. 국가에서 현재(賢才)를 뽑는 날 요순(堯舜)의 도를 진달하지 않고 앞장서서 부처의 법을 떠들다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 무제(梁武帝)처럼 절에 몸을 바치고 당종(唐宗)처럼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절을 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것인가?” 하였다.

 

이어 사헌부에 명하여 권계동을 잡아다가 아주 먼 변방에 귀양보내게 하고, 또 해조에 신칙하여 다시는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였다.


○ 2월, 무비(武備)가 소홀하다 하여 시재 절목(試才節目)을 갖추어 아뢰도록 병조에 신칙하였다.

○ 3월.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정랑 김응기(金應箕)를 불러 오음 육률(五音六律)의 이치를 강하게 하였다. 김응기가 대답하기를, “순(舜) 임금은, ‘내가 오음과 육률을 듣고 잘 다스리는지 소홀이 하는지를 살핀다.’ 하였고 계찰(季札)은 주(周) 나라의 음악만 듣고서도 나라의 치란과 흥망을 알았으니, 정치의 득실을 성률(聲律)로 알 수 있는 것이 대체로 그러합니다.

옛날 세종조에 유사눌(柳思訥)의 말을 따라 당월(當月)의 율을 두었는데, 어느 때 폐지하고 쓰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춘추관에 명하여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 5월. 삼수군(三水郡)의 인차외진(仁遮外鎭)에 성을 쌓고 만호(萬戶)를 두었는데, 영안도 관찰사 이봉(李封)의 계청을 따른 것이었다.


○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불상(佛像)을 만들어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내자 유생 이벽(李鼊) 등이 가져다 불태워 버렸다. 대비가 이벽 등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자, 상이 거절하기를, “유생이 부처를 물리치는 것은 상을 주어야지 죄를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안에서 듣고 유생을 추국하도록 명하는 것은 임금의 정사가 아닙니다.” 하니 대비가 강요하지 못했다.


○ 6월. 정원에 하교하기를, “당 나라 문종(文宗)이 조서를 내려 백료(百僚)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가 농사짓는 것을 보게 하였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행함으로써 백성들이 국가에서 농사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에 돈녕부 영사 이상, 정부, 육조, 한성부의 각 1명, 좌승지 한건(韓健)에게 명하여 동교(東郊)로 가서 농사짓는 것을 보게 하였다.

 

제천정(濟川亭)에서 술과 음악을 하사하고, 다시 응교 민사건(閔師騫), 교리 강경서(姜景敍), 수찬 박증영(朴增榮)에게 명하여 가서 선온하게 하였다.


○ 7월. 상이 형조 판서 김종직(金宗直)이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휴가를 주고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을 지어 주게 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천도(天道)를 살펴보면 한서(寒暑)가 고를 때이고, 월수(月數)에서 취한 것은 섬토(蟾兎)가 둥글 때이니, 옛사람이 달을 구경한 것은 실로 까닭이 있어서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풍습이 없지만 마침 가절(佳節)을 만났으니, 임금의 은혜를빌려 청량(淸涼)한 곳을 골라 태평의 기상을 즐기는 것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정부, 육조 판서, 경연의 당상, 홍문관, 예문관, 승지와 주서로 하여금 장악원에서 달을 구경하게 하고, 술과 음악을 하사하였다.


○ 상이 후원(後苑)에 나아가 양전(兩殿)에 진연(進宴)하였는데, 내외 명부(命婦)가 모두 참석하였다. 다시 종친, 돈녕부 영사 이상, 정부, 육조의 참판 이상, 충훈부, 한성부, 의빈부, 정원, 홍문관, 예문관, 도총관을 불러 북소(北所)에 모이게 하고 술과 음악을하사하였다.

 

이어 사후(射侯)와 투호(投壺)를 명하고, 또 어서(御書)를 내리고 진수(珍羞)를 내려 주었다. 김응기(金應箕)가 일찍이 모시고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하였으나 현재 홍문관 직임을 맡고 있지 않은 관계로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다하여 그의 집에 양고기와 술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강을 마치고 검열 이주(李冑)가 아뢰기를, “사기(史記)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 역사책을 살펴보면, ‘표정이 확 변하였다'거나 ‘목소리와 표정이 모두 거칠어졌다'거나 ‘용모가 태연자약하였다’ 하였는데, 사관이 만약 표정을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중국의 사관은 붓을 쥐고 황제의 좌우에 서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사관은 엎드려서 일을 기록하니, 신은 삼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명하기를, “지금부터 사관은 앉아서 일을 기록하라.” 하였다.


○ 상이 고려의 명유(名儒) 최충(崔冲), 최유선(崔惟善), 조간(趙簡)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자 하여 예조와 홍문관에 물었다. 모두 대답하기를, “세 사람의 문장과 도덕은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균관에 종사하는 것은 지나치니, 단지 향묘(鄕廟)에 배향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9월. 상이 장차 열무(閱武)하려 하면서 좌상(左廂), 우상(右廂)의 대장에게 하교하기를, “군대의 진퇴는 기와 북에 달려 있다. 그러나 깃발을 흔들어도 밤이면 어두워서 보이지 않고, 북을 쳐도 산이 가로막혀 있으면 들리지 않으니, 이러한 때에 삼군(三軍)의 진퇴는 반드시 부험(符驗)을 기다려서 움직여야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외영(外營)의 대장이 군대를 거느리고 수렵하는 예(禮)에 나가게 되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 10월. 《장감박의(將鑑博議)》를 여러 도에 나누어 주어 간행한 다음 널리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 11월.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진서(晉書)》 곽영전(郭瑛傳)에,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살피면 사람들과 괴리된다.’ 하였으니, 임금은 과연 분명히 살피는 것을 귀중히 여기지 말아야 하는가?”하니, 기사관 남궁찬(南宮璨)이 아뢰기를, “한 선제(漢宣帝)는 명실(名實)을 종합적으로 밝혔으나 화의 기틀을 만드는 군주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고, 당 선종(唐宣宗)은 지나칠 정도로 밝게 살폈으나 쇠미(衰微)한 폐단을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상서》에 이르기를, ‘임금이 잗달게 모든 일을 다 살피면 신하들이 게을러져서 만사가 그르쳐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신하들의 일을 해버리면 아랫사람들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만사가 반드시 그르쳐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매우 옳게 여겼다.


○ 《주례집해(周禮集解)》를 간행하여 중외에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설경(說經) 성희안(成希顔)이 좌랑 남세담(南世聃)의 집에서이 책을 보고 해석이 상세하다고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 12월. 영의정 윤 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관상(觀象)과 추보(推步)는 국가의 대사(大事)입니다. 조종조에 김담(金淡)이 역법(曆法)에 정통했는데 김담 이후로는 그만한 사람이 없으니, 나이 젊고 총명한 문신을 가려 뽑아 천문(天文)과 수법(數法)을 익히게 하소서. 또 전에는 관상감에 누각 두 칸을 세워 기상을 관측하는 장소로 삼고, 겨울이면 호구(狐裘)를 하사하여 천상(天象)을 살피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각을 버려둔 지 오래이니, 누각을 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