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별초의 항쟁「三別抄의抗爭,1270~1273(원종 14)」
1258년 3월 고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최의를 타도함으로써 4대 63년에 걸친 최씨정권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아직 무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대몽강경론은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태자가 몽고로 입조하는 것을 반대하며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다시 몽고의 침입을 유발하여 1258년 4월 몽고군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몽고군은 서 북 지방을 거쳐 경기, 황해, 충청 지방을 제압할 뿐만 아니라 동북 지방으로 남진하여 1259년에는 인제 방면까지 진출하였다. 피해는 극심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낀 끝에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군에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몽고군은 강화도 건너편 경기지방에 공격을 집중하여 이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강화를 고립시키자, 고려는 드디어 1259년 3월 태자의 직접 조공을 조건으로 한 휴전에 합의하였다.
1259년 4월 약속대로 태자 이 몽고로 출발하였다. 6월, 고려에서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몽고와의 전쟁으로 보낸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7월에는 몽고 황제 헌종도 병사하였다. 고려와 몽고의 새로운 계승자인 전과 쿠빌라이가 개봉에서 만났고, 양국 간의 전쟁은 이로써 종식되었다.
몽고로부터 돌아온 세자 전은 1260년 3월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원종이다. 어쨌든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되자, 이를 실질적으로 성사시킨 국왕 원종과 문신 관료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무신세력이 도태된 것은 아니었다. 강화도에서는 무신 김준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국왕을 배제하고 개경 환도를 늦추면서 세력기반을 확충하려 하였다.
이에 몽고는 개경 환도를 재촉하면서 김준을 소환하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강화 이후 위축 되던 무신들은 몽고와의 재대결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뒤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의 재대결을 기도하였다.
이에 원종은 몽고에 원군을 청하였고, 강화도에서 문신관료들이 임연의 아들인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1270년 무신들의 정권은 완전히 종식 되었다. 그러나 모든 고려인이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조정에서 강화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하자, 이를 몽고에 대한 항복과 종속으로 받아들이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들은 원종의 해산명령을 무시하고 몽고군과 굴욕적인 유전에 반대하며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원래 최우가 수도의 치안유지를 위해 창설한 야별초로부터 시작하였다.
야별초는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고와의 항전기간 동안에는 몽고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온 장정들로 신의군을 조직하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최씨정권을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사적으로 양성한 군대가 있었음에도 불가하고 국가의 공병 조직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둘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자기 가문의 사병들과 별도로 국고에 의해 운영되는 공병으로서 삼별초를 육성하여 정권의 무력기반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수족으로서만 가능하였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대몽항쟁 기간 중 그래도 국가의 공병으로 몽고군과 교전을 벌인 집단이 바로 이 삼별초이다.
삼별초는 백성들이 농성 중인 산성이나 섬 방어별감과 함께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파견되어 함께 싸우기도 하고, 때로 유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몽고군에 대항해 함께 싸운 경험은 훗날 삼별초의 항쟁에 농민들이 적극 호응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1270년 6월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승화 후 온을 옹립하고 강화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것을 순수한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것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별초의 반란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원종이 삼별초의 해체를 명한 데 있었으며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활용되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삼별초 항쟁은 부분적으로 배제되어 가는 무신정권의 잔여 세력들이 왕권강화와 친정체제 구축을 시도하는 원종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원종의 이런 정치적 움직임은 몽고의 후원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반대편에서 움직인 삼별초는 자연히 반몽적인 민족 항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6월 3일 강화도의 삼별초군은 1천여 척의 함선을 타고 진도로 이동하였다.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을 제압하였고 제주도까지 장악하였다.
삼별초의 반란에 당황한 것은 개경의 원종 조정이었다.
반란 당시 이를 진압할 병력조차 제댁로 없었던 개경 조정 은 몽고에 원군을 요청, 1270년 11월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 앞바다에 진출하 였으나 울둘목에서 삼별초군이 반격으로 대패하였다.
삼별초군은 수차의 전투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방심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271년 5월, 삼별초군 중 상당수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 개경의 정부군과 몽고군은 기습적으로 진도에 상륙,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삼별초군이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사이도 없이 진도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였다.
진도를 잃고 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지도자로 하여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1272년부터 삼별초군은 다시 활동을 제개하여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273년 2월 여몽연합 군 1만여 명이 제주의 삼별초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끝까지 용전분투하였으나 지도자 김방경은 산중으로 도피하였다가 죽고, 나머지도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됨으로써 3년여에 걸친 항쟁도 종식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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