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렴(鄭磏)
1505(연산군 11)∼1549(명종 4). 조선 중기의 유의(儒醫).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순붕(順鵬)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천문·지리·의서·복서(卜筮)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약의 이치에 밝았는데, 1544년 중종의 병환에 약을 짓기 위하여 내의원제조들의 추천을 받아 입진(入診)하기도 하였다. 포천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가 일상경험한 처방을 모아 편찬한 것이라는 『정북창방(鄭北窓方)』이 있었으나 유실되었다.
이 책은 양예수(楊禮壽)가 지은 『의림촬요(醫林撮要)』에 인용되어 있다.
조선시대 도가(道家) 내단(內丹)사상, 즉 단학(丹學)의 비조(鼻祖)로,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 3대 기인으로 불리는 북창 정렴. 그는 상제님께서“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산에 도 닦으러 가서 3일 만에 천하의 모든 일을 알게 됐다고 평하실 만큼 뛰어난 도인(道人)이다.
유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금기시 되던 조선시대에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고, 신선술(神仙術) 수련법을 담은『용호비결』을 저술했으며, ‘용호대사(龍虎大師)’라고도 불렸다.
북창 정렴, 그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심법세계를 알아보자.
배우지 않아도 하늘 아래 모르는 것이 없어, 정북창(鄭北窓, 1506∼1549)의 본관은 온양으로 조선조 중종 즉위년(1506년)에 정순붕(1484~1548)과 완산 이씨 사이에 6남 5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를 기반 삼아 우의정까지 출세했던‘을사 삼간(三奸)’중 한 명이고, 모친은 세종의 장형(長兄)인 양녕대군의 증손녀이다. 정북창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아주 뛰어났으며 천문, 지리, 음률, 의약, 수학, 한문, 복서(卜筮) 등 배우지 않아도 어릴 적부터 하늘아래 있는 온갖 학문에 뛰어났으며, 스승 없이 혼자 터득하여 깨쳤다고 전해진다(장유의「북창고옥양선생시집서」中에서 ).
또한 그는 어느 나라 어느 지방 말도 배우지 않고도 듣는 대로 통했다.
14세 때 부친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배운 적도 없는 중국어와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대만) 언어를 구사하여 그곳에 온 외국사절에게『주역』,『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등 어려운 경전(經典)들을 쉽게 가르쳐주어 그들을 놀라게 했다.
이 해(1520년)에 부친 정순붕은‘전주 부윤’에 있다가 면직되는데, 이듬해에는‘종놈처럼 아첨한다’고 하여 관작까지 삭탈 당한다. 1520년부터 1537년까지 17년간, 정북창의 집안은 부친의 면직과 관작 삭탈로 의식이 궁색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워진다.
이때가 정북창의 나이 15세에서 32세에 해당되는데, 그는 이 기간에 과거시험 공부를 단념하고 유학사회에선 잡학으로 치부하는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 등의 학문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부친이 복직된 1537년에 그는 사마시(생원, 진사시험)에 급제한다.
그러나 사마시는 예비시험격인 소과(小科)여서 관직을 받으려면 대과(大科)를 치러야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과거를 치르지 않는다.
그가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급제한 것은 본인의 의도보다는 부모의 강압적 권유와 관직을 얻은 비슷한 연배들의 영향이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사마시 급제이후 과거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렸는데,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유훈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 처함에는 겸손하고 물러남에 힘써서, 고관(高官) 벼슬에 나가지 말고 낮은 지위에 머물 것이다.
혼인은 고귀한 가문에 의탁하지 말 것이며, 때가 화(和)하면 벼슬을 하되, 세상이 어그러지면 임야(林野)에 물러가 힘써 땅을 갈아 자급(自給)할 것이다.”(북창 정렴의「온성세고」유훈中에서)
정북창의 이런 견해는 유교적 처세와도 상통하지만, 17년간의 궁핍했던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부귀와 물욕에 빠지지 않고 주체성을 지키려는 자세로 살려고 했던 것이었다.
●조정 출사와 은퇴
정북창이 천문, 지리, 음률, 의약 등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인재로 추천 발탁하여 장악원(掌樂院: 음악,무용 담당청) ‘주부’겸관상감(觀象監: 천문,지리,책력 담당청)과 혜민서(惠民署: 의약,치료 담당청) ‘교수’직을 준다.
그는 또한 의술이 뛰어나고 약리(藥理)에도 정통하여 중종이 위독했을 때 내의원들이 북창을‘명의’라고 천거할 정도였고, 인종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도 그가 직접 진찰하기도 했다. 이렇듯 비상한 재주로 인해 당시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공부방 병풍 위에‘우의정 정북창’이라 써놓았고 3정승 중 한 명으로 이미 마음속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으로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던 인종은 안타깝게도 9개월의 짧은 치세 끝에 문정왕후(13대 명종의 모후)에 의해 독살됨으로써정북창은 큰 뜻을 펼칠 기회가 없어진다.
조정 관직을 역임하고 포천 현감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정북창은 관직에서 물러나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경기도 과천의 청계산과 양주 괘라리(掛蘿里, 현재의 양주시 산북동 일대)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그토록 재주가 뛰어났던 그가 관직을 버리고 은둔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명종실록』,『 조선고금 명현전』,『 용주선생유고』등의 기록을 보면 그 내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북창의 욕심 없는 처세와 달리, 부친 정순붕은 17년간의 경제적, 정신적 고초를 벗어나고자 출세에 대한 야망을 불태운다
1545년(명종1년), 부친 정순붕과 동생 정현은 작당하여 당시 권력의 횡포를 휘두르며 백성의 고혈을 짜내던 명종의 외척, 윤원형 등의 소윤(小尹) 세력에 붙어 대윤(大尹;인종 외척)과 청렴한 사림파 인물을 모함 하여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이때 정북창은 부친과 동생이 불의한 일로 출세하려는 의도를 알고는 이를 만류하고 자 눈물로써 부친께 간(諫)한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동생(정현)이 몽둥이를 들고 형 북창을 패서 죽이고자 한다.
이 일에 대해 대제학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인『용주선생유고』에는“북창의 대효로도 부친과 동생이 남을 무함(誣陷)하여 출세하려는 사악한 짓을 막을 수 없었다. … 이는‘순(舜)임금의 고사(古事)’와도 비슷하나, 실제는 북창이 순임금보다 더 고통과 어려움이 많았다.”고 적혀 있다.
부친은 비록 불의했으나, 정북창의 효심어린 처신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정북창은 동네에 애경상문(哀慶喪問)이 있으면 가장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음해하여,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 불의에 대해, “고약한 놈, 나쁜 놈”하며 욕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북창은 학식도 많고 명성이 있었기에 자신이 앉아있으면 부친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으니, 가장 먼저 가서 앉아 있다가 가장 나중에 일어나곤 했다. 을사사화의 다음 해(1546년) 정북창은 산속으로 은둔하는데, 출세욕에 빠진 부친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동생이 형을 죽이려고 하는 천륜파괴의 고통스런 상황으로 인해 그는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도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북창은 산속에서 도학, 역학, 수학 등의 학문을 연구하고 신선술을 연마하며 도인(道人)의 삶을 살아간다.
이때 그는 산속에 살면서 한양으로는 머리도 돌리기 싫어 드나드는 대문과 방안의 창문을 모두 북쪽으로만 낸 채 살았다. 북창(北窓)이라는 별호도 이때 생긴 것이라 한다.
●도를 닦으며 은둔생활
정북창은 풍채가 학과 같았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서너 말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품 또한 맑고 깨끗했으며, 친구를사귈 때에도 인정(人情)과 도(道)에 바탕을 둔 도반(道伴)으로서 깊이 있는 벗을 사귀었다.
그는 선도(仙道)에 함께 몰두하며 뜻이 통했던 동생 정작과 박지화 그리고 불승(佛僧)들과 만나서 산수를 즐기며, 유(儒), 불(佛), 선(仙)에 대해 도담(道談)을 나누면서 삼교(三敎)에 두루 통했다고 한다.
이들과 정북창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고, 상대방의 사상을 인정해 주었던 진정한 도반(道伴)들이었다.
박지화(1513~1592)는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운 제자인데 후에 정작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정북창은 시도 아주 빼어났는데, 시 평론가 홍만종(1643~1725)은‘정작, 박지화, 정북창 중에 북창의 시가 가장 뛰어났고 당시(唐詩)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했다.
정북창은 선도(仙道)에 밝았던 도인 유학자 서경덕(1489~1546)을 존경하며 스승처럼 여긴다.
화담 서경덕은 어릴 적 천자문을 공부할 때, ‘하늘 천(天)’자에 문득 크게 깨우치고는‘천(天)’자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글자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덕은 소강절의『황극경세서』에 나오는‘우주일년의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선후천 시간대’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전해질만큼 수리학(數理學)과 역학(易學)에 아주 밝았던 도인이었다. 선도에 몰두했던 정북창도 말년에는‘이유 없이 몸이 마르는 병’을 앓았는데, 이 병은 특별한 증세없이 심신이 고달플 때 생긴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울화병’으로 불의했던 부친과 다투다가 근심으로 얻은 병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연단술(煉丹術)로써 스스로 치료했다. 그 방법은‘폐기-현빈일규-태식-주천화후-결태’의 신선수련법으로, 효과가 뛰어나서 한 달 정도만 하면 백가지 병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의『용호비결』에 기록하고 있다.
“폐기(閉氣)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책상다리로 단정히 앉아서 위 눈꺼풀을 내려뜨려 내려다보고 눈으로는 코끝을대하고, 코로는배꼽둘레를대하고 숨을들이마시기를 오래 계속하고 내쉬기를 조금씩 하여, 늘 신기(神氣)가 배꼽아래 한 치 세 푼에 있는 단전에 머물게 하는데, 그것이 현빈일규(玄牝一竅)이며, 그 다음에 태식(胎息)이 되고, 태식에서 주천화후(周天火候)가 되고, 주천화후에서결태(結胎)가된다.”([용호비결] 中에서)
●조선시대 단학의 중시조(中始祖)
정북창의 학문은 처음에는 유학으로 출발했지만 어릴 적부터 남달리 천문, 지리, 의학 등 잡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말년에 은둔하면서는 도학, 수학, 역학 등과 신선수련법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스승 없이 모든 이치를 스스로 터득했고, 제자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손 또한 손자 대에 가서 대(代)가 끊기어 양자를 받아들인다. 그는 유(儒),불(佛),선(仙) 3교에 두루 통했는데, 삼교(三敎)를 평하기를“유학은 인륜, 불·선은 견성(見性)과 명심(明心)을 주로 하여 셋은 다르지만 불·선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허목의「북창선생행적」中에서)고 했다.
정북창에게 스승이 없었다는 기록은 조선의 도가열전(道家列傳)인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조금 달라진다.
이 책에는 그가 말년에‘승(僧) 대주(大珠)’에게 도를 전수 받았다고 전해져온다. 우리나라의 선맥(仙脈)을 살펴보면, 조선조에 와서 거의 끊어질 뻔했던 도가의 맥(脈)이 김시습에 의해 다시 계승된다.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세상을 등졌던‘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뛰어난 문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진면 모는 오히려‘도인(道人)’과‘생불(生佛)’에 가깝다.
이율곡이 쓴『김시습전』에 의하면, 김시습이 죽은 지 3년 후 절 옆에 묻힌 그의 시신 관 뚜껑을 열어보고 불승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시신이 썩지 않았고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생불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김시습을 시조로 조선의 선도(仙道)는‘김시습→정희량→대주(승려)→정북창, 정작’으로 이어지는데, 정북창은 조선시대 선도에서‘ 단학의 중시조(中始祖)’또는‘비조(鼻祖)’로 평가받고 있다.
●정북창의 도력과 기국
정북창은 앞일을 예견했고, 역술(易術)과 수학에 능통하여 사후 수십년 후까지도 궁중에서 그의 천재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지 46년이 지난 1595년, 선조와 이항복, 정경세 등이 별전(別殿)에서『주역』‘건괘(乾卦)’를 강론한 자리에서 “북창은 타심통지술(他心通之術: 타인의 마음을 읽는 도술)을 터득했으며, 의술과 점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라고 거론되었다.
그리고 1601년에도 궁중 별전에서『주역』을 강론하다가‘수학에 정통한 인물’로 화제가 미치자, “북창은 서경덕에 못지않게 수학에 뛰어났으며, 모든 일에 있어 앞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거론되었다. 그는 1659년 노봉서원에 봉안되었다.
정북창은 정통유학자라기보다는 신선수련법을 행했던 도가적 인물에 가까웠기에, 그에 관해 신비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총명함이 남달랐던 정북창은 어릴 적부터 신명(神明)과도 통할 수 있었다.
가까이는 다른 집의 방안에서부터 멀리는 이민족의 풍속과 기질까지 다 알았으며, 개 짖는 소리며 백로 울음소리 등도 귀신처럼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가 산속에서 살 적에 새와 짐승소리를 모두 알아듣고는“아무개 집에 잔치가 벌어졌다”,
“아무개 집에는 초상이 났다”고 말하면 틀림없이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정북창의 이러한 모습은『증산도 도전』에 어린 소녀 김호연 성도가 신안이 열려 사물의 모습을 훤히 꿰뚫어 보고 짐승의 소리를 모두 알아듣는 광경과 유사하다. “호연이 수도 공부를 하매 신안(神眼)이 열려서 보니 다른 집의 방 안 광경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제사 지내는 모습, 청소하는 모습, 내외가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 등이 마치 곁에서 보는 듯 세세하게 보이더라.
또 구릿골에 사람이 오면 주머니에 돈이 얼마 든 것, ‘내놓을까 말까.’하며 아까워서 벌벌 떠는 것이 다 보이고 까치, 까마귀 등 새가 날아와 ‘내 일 어디서 누가 오는데 이러저러하다.’고 일러 주는 것을 다 알아들으니 모르는 것이 없더라. (道典3:150:1∼4)
또 한 번은 정북창의 절친한 친구가 중병이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부친이 와서 살려주기를 간청했다.
정북창은 친구의 천명이 다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3대 독자인 아들을 꼭 살려달라고 하소연하자 한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아무 날 저녁에 아무 산에 올라가면 산 위에서 푸른 도포와 노란 도포를 입은 두 노인이 바둑을 두며 놀고 있을 테니, 바둑이 끝날 무렵에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지성으로 권하며 사연을 고하면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일러준다.
이리하여 정북창은 노인들을 통해 자신의 수명에서 10년을 떼어 친구의 수명을 이어주었다는 신비한 일화도 전해진다.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사물을 관찰하면 3일 만에 생각한 것을 환하게 깨우치고, 백리 밖의 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알아맞히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예견했던, 그야말로 뛰어난 도인이었던 용호대사 정북창!
산속에서 도반들과 함께 산과 호수, 계곡을 거닐며 바람과 달을 벗 삼아 신선술을 연마했던 정북창은‘자만(自挽)’이란 시(詩)를 남기며 44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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