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박인환 시인 묘(朴寅煥詩人墓)

야촌(1) 2014. 7. 25. 11:33

↑박인환 묘 : 서울 망우리 공동묘역 : 묘지번호-102308] 

 

↑ⓒ빈 들녘 (cafeinfofam) 

 

 

 

↑묘비 뒷면의 비문은 풍우에 마모가 되서 글자를 알수없다.

 

↑박인환선생 초상(1926년∼1956년)/향년31세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에 호숫가 가을에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朴寅煥)

 

1926년∼1956년. 시인. 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박광선(朴光善)의 아들로, 모친은 함숙형(咸淑亨)이며, 4남 2녀 중 장남이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이한직(李漢稷)‧김수영(金洙暎)‧김경린(金璟麟)‧오장환(吳章煥)‧김기림(金起林)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김규동(金奎東)‧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시작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梁秉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밤의 미매장(未埋藏)〉‧〈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죽기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朴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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