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조우희(曺遇禧). 조익수(曺益修) 장군묘

야촌(1) 2014. 6. 21. 22:55

↑창성부원군조우희묘(昌城府院君曺遇禧墓) 배위 증정경부인성산이씨配贈貞敬夫人星山李氏墓)묘와 합폄

   (合窆)이다. /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남지읍 성사리(관동) 산172-1

 

↑창성부원군조우희선생묘(昌城府院君曺遇禧先生墓)

 

봉분의 전면에 거대한 화강암 장대석이 호석(護石) 처럼 봉토를 받치며 전면에 무덤의 주인공을 알리는 묘비가 새

겨저 있다. 장대석의 크기는 아래변 길이가 3.m, 윗변 2.4m, 높이가 70cm로[麗朝正順大夫判典儀寺事贈左侍

中府院君昌寧曺公諱遇禧之墓]라고 새겨저 있고, 좌편에는 [配贈貞敬夫人星山李氏墓有昌寧龍藏寺西子坐]

라고 새겨져 있다.  

 

 

↑위(上)의 묘는 고려말(高麗末)의 명신(名臣)으로, 판전의사좌시중(判典儀寺左侍中)을 역임한 창성부원군

    우희선생묘(昌城府院君曺遇禧先生墓)이고 앞의 묘는 그의 아들 조선초기에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正三

    品)를 역임한 조익수(曺益修)의 묘이다.

 

 

↑조익수(曺益修) 선생 묘비의 비신(碑身)은 높이 120cm, 너비 50cm, 두께 21cm이며, 좌대는 거북 형상인데

    길이 130cm, 높이가 20cm, 폭이 67cm이며, 이수는 용의 조각이 아름다운데, 높이가 60cm로 전체 높이는

    200cm 이다.

 

↑묘의 뒤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60호>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성사리(관동) 산172-1에 있는 고려말(高麗末)의 명신(名臣) 판전의사좌시중(判典儀寺左侍中)을 역임한 창성부원군 조우희(昌城府院君(曺遇禧)선생과, 그의 아들로 조선 초기(朝鮮初期) 경상도병마젤제사(慶尙道兵馬節制使-正三品) 및 초토안무사(招討按撫使)를 역임한 조익수(曺益修) 선생의 묘역이다.

 

이 묘들은 고려와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묘제(墓制) 양식(樣式)으로 묘 둘레에는 둘레돌(護石)을 두르고, 묘 앞에는 상석(床石), 향로(香爐)가 있다. 묘비석(墓碑石)은 고려와 조선 초기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익수(曺益修)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그의 아버지는 판전의사사를 지낸 조우희(曺遇禧), 조부는 조원계(曺元桂), 증조부는 소감을 지낸 조인취(曺仁取)다.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개성유수를 지낸 요산재 이억년(李億年/부인은 경주이씨)의 딸이기에 다정가의 작가로 유명한 정당문학 문열공 매운당 이조년 (李兆年/星州人)은 그의 외종조부다.조익수는 3형제 중 둘째로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회군을 주도했으나 이후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문하시중 조민수(曺敏修), 조경수(曺敬修)와 동기간이다.

 

또한 그는 고려말 권세가 문하시중 이인임(李仁任), 판삼사사 문충공 초은 이은복(李殷復), 이성계의 사돈 이인립(李仁立/星州人) 등과 내외재종간이다. 아들은 무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 판한성부사 등을 지낸 안무공 조비형(曺備衡)이다. 조익수(曺益修)의 형 조민수(曺敏修)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조선 개국에 반대하다가 생을 마감했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형이 죽음으로 막고자했던 조선 개국에 그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겠으나 개국 이후 그가 경상도병마절제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문경공 독곡 성석린(成石磷), 양경공 정희계(鄭煕啓/保寧(慶州)鄭氏)의 뒤를 이어 개국 후 세번째로 판한성부사에 올랐던 것을 보면 그는 조선 개국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조비형(曺備衡) 역시 태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이숙번(李叔蕃)과 가까이 하며 정2품의 고위관직에 올랐던 것을 감안해보면 그와 후손들은 조민수(曺敏修)와는 확실히 생각이 달랐다. 조익수는 고려말 명망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무예를 바탕으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대세를 따르며 높은 관직을 지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