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이건창선생묘(李建昌先生墓)

야촌(1) 2011. 10. 20. 22:38

↑이건창선생묘역(李建昌先生墓域)ㅣ사진>ⓒ한국의능원묘 ㅣ광나루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9호 ㅣ 묘의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55-27번지

묘의 주인을 알리는 작은 표석하나 없이 봉분 한 기만 달랑 있는 묘가 참 안스럽게 보입니다. 

 

↑이건창선생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ㅣ 사진>ⓒ한국의능원묘 ㅣ광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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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 거두의 묘엔 묘비 하나 없이 풀벌레만…

chosun.com>강화 김경은기자 입력 : 2011.10.10. 03:01

 

[길 위의 인문학] 양명학 정신의 산실 강화

 

주자학이 지고의 진리인 조선에서 주자를 비판한 양명학은 대세를 거스른 비주류였다. 양명학자들은 주류의 도끼눈을 피해 서울을 떠나 섬, 강화도에 깃들었다. 서울과 가깝지만 바다로 막힌 강화도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양명학의 태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와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흔적을 곳곳에 담고 있다. 

 

8일 조선일보·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가 주최하는 '길 위의 인문학' 탐방단 80여명은 '양명학의 정신을 따라 걷다'를 주제로 강화를 걸었다. 강화읍에서 마니산으로 가는 하우고개에서 강화 사람들이 1997년 세웠다는 정제두 숭모비를 먼저 살피고, 200여m를 내려가니 왼쪽에 두 개의 묘가 나왔다. 

 

정제두와 그의 부친 정상징의 묘였다. 소론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정제두는 23세(현종 12년) 때부터 가족이 잇달아 죽고 줄곧 당쟁에 연유되자 세상을 등지려 했다. 이희목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는 "그때 그에게 정신적 위안을 준 학문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은 자기 마음 속 참된 앎을 이루는 사람은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 말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양명학의 거두 이건창의 묘를 찾은 탐방단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묘비를 갖춘 정제두의 묘에 비해 이건창의 묘는 봉분만 남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삐죽빼죽 솟은 잔디 사이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애꿎은 풀벌레만 사방팔방 튀어올랐다.

 

가학으로 양명학을 계승한 이건창은 15세(고종 3년) 때 문과에 급제했다. 조부 이시원의 뒤를 이어 암행어사로 활약하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조선 중기 이후의 당쟁을 평가한 명저 '당의통략(黨議通略)'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매천 황현이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1년 전 이건창의 무덤을 찾아 '홀로 누웠다고 어찌 슬퍼하랴/ 살았을 적에도 무리와 떨어져 있었는걸'이라 읊었을 만큼 외로운 사람이었다. 23세 때, 세계정세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지만 실제 목도한 것은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 당하는 중국의 모습뿐이었다. 

 

그때부터 이건창은 서양에 관심을 기울였고, 개화파 인사들의 추파를 과감히 뿌리친 채 일반 백성들의 삶에 눈을 돌렸다. 이건창의 무덤 앞에서 듣는 증손자 이형주의 삶은 탐방단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이 교수가 말했다. "이형주씨는 1970년대에 중랑교 밑에서 넝마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조를 기리기 위해 이건창의 사상을 다룬 책 두 권을 냈고, 평생 지니고 있던 집안 전적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습니다. 최근에는 집안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를 성균관대 존경각에 기증했고요."

 

강의가 끝나자 김주연(44)씨가 무덤에 난 잡초를 말없이 솎았다. ㄱ자 초가집 형태인 이건창의 생가도 무덤만큼이나 수수했다. 이 교수는 "한말 가장 위대한 문인 중 한 명의 묘가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삶을 죽어서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의미 있다"고 덧붙였다.

 

오후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을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광성보로 향했다. 미군과 싸우다 전사한 51명의 전사자들을 7개의 무덤에 나눠 합장한 군락과 자연 암반을 용머리처럼 쌓은 용두돈대 등을 둘러봤다.

 

초등학교 5학년 딸과 함께 온 임동식(49·서울 목동)씨는 "이게 바로 살아 있는 교육"이라 말했다.  소설가 구효서씨는 "정제두 선생이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읽어라. 읽되 실천에 옮겨라. 실천하지 않을 지식은 쌓지 마라'라는 가훈을 남겼다"며 "길 위의 인문학은 책을 통해 쌓은 통찰력이 길 위에서 꽃피는 아름다운 여행"이라 정의했다.

 

출처 :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