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칼 럼

도올의 ‘교육입국론’

야촌(1) 2014. 6. 17. 22:34

김용옥 “진보교육감 13석, 노무현 당선보다 더 큰 의미”

한겨레>등록 : 2014.06.16. 20:24 l 수정 : 2014.06.17. 15:05

 

혁신 교육감 시대’를 위한 도올의 ‘교육입국론’

 

① 총론

 

전국 13개 시·도의 진보 성향 교육감 당선은 교육 현장, 나아가 우리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기회와 위기의 갈림길에 선 한국 교육에 던지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제언을 5회에 걸쳐 싣는다.

 

진보교육감 13명, 진보세력의 기회이자 위기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파랑을 격파하며 나아간다.”(讀萬卷書, 破萬里浪) 진리 탐구를 위해 눈물겨운 여정을 감행하였던 신라의 구법승들이 유학 장도에서 읊었던 장쾌한 절구의 한 소절! 어찌 만 리의 파랑이 서해바다의 파랑일 뿐이리오? 

 

그것은 기구한 우리 인생의 파랑이요, 기나긴 반만년 역사의 격랑이요, 충절과 반역, 수구와 혁명, 억압과 자유의 기복으로 점철된 우리 정치사의 풍랑이리라! 공자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열 가호쯤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나처럼 충직하고 신의있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공자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의 인간됨의 특징을 “호학”(好學)이라는 한마디로 규정했다. 끊임없이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늙어 죽을 때까지 배움 앞에 자신의 가슴을 열어놓고 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 도올은 묻겠다. 진실로 진실로 우리 한민족처럼 배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보냐?

 

다카쿠스 준지로가 세계 불교성전의 최고 권위있는 에디션인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오직 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의 위압적인 목판 경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판 한 판 한 판 매 글자에 새겨져 있는 고려인들의 숨결, 그 방대하고도 광활한 지식결구의 지극한 정성을 회상하는 나의 눈시울에는 뜨거운 경외의 기운이 서린다.

 

고려청자의 그 단아하고 세련된 빛깔과 곡선미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과연 요즘처럼 시험만 잘 보는 이지적 계산에 밝은 영수의 천재, 그런 인간들이었을까? 삼천대천세계를 한 공간에 압축해놓은 듯한 석굴암의 장중웅려한 화장세계의 한 땀 한 땀의 끌자국이 과연 김대성 한 사람의 작품일까보냐? 

 

이 모든 것, 우리 민족이 문아(文雅)하고, 화려하고도 세련된 자취를 이 지구상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최근 기러기아빠들의 피눈물 나는 인생역정이 말해주듯, 이 민족 전체가 호학의 열정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 존재의 결실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국민의 심상 속에 박근혜는 선거에 관한 한 헤라클레스처럼 보인다. 헤라클레스는 영웅이다. 희랍신화에서 영웅(hero)이란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는 중간자적 존재이다. 그래서 영웅은 무수한 운명적 과업을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극복해나간다. 그러나 영웅은 결국 죽는다. 아버지가 신이지만 인간 엄마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의 죽음을 살펴보면 “휘브리스”와 관계되어 있다. 휘브리스란 자기에 대한 지나친 과신, 오만을 의미한다.

 

 <일리아드> 속의 아킬레스도 휘브리스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만다. 박정희의 신화가 살아있는 한 박근혜는 헤라클레스처럼 많은 과업을 무난히 수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근혜의 휘브리스는 박정희 신화 그 자체를 소멸시켜가고 있다. 

 

제우스의 방패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요번 선거는 박근혜의 눈물이 지켜낸 헤라클레스적 대과업의 일환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 와중에도 혁신교육감 시대가 도래했다.

 

우익보수의 한 진실한 대부임을 자만하는 언론인이 이와 같이 말했다.

“새누리당이 6·4 지방선거에서 참패해도 전 학생인구의 40%를 관장하는 서울·경기도의 교육감만 장악하면 승리하는 것이요, 반대로 대승한다 하여도 서울·경기도 교육감을 놓치게 되면 대패하는 것이다. 

 

이것은 헌법정신이 사느냐 죽느냐의 대결전이다.” 참으로 통찰력 있는 명언이다. 도대체 그분이 생각하는 헌법담론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국가의 운명을 통시적으로 생각하는 혜안은 가상한 것이 있다.

 

진보교육감들이 ‘진보교육’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기존의 악에 대한 혁신적 해체만을

진보교육으로 생각한다면

보수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교육의 기강과 질서 감각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국민대중의 외면의 구렁텅이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최근 나는 어느 유수 대학에서 이공계 1·2학년 500여명을 상대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변 이후의 참담한 분위기였고, 강연자인 나의 가슴에는 무엇인가 조국의 앞날에 관하여 우려를 전하고 싶은 파토스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40분 정도였다. 여하한 대중이든 40분 정도의 시간 동안 나의 말에 집중을 시키지 못하게 만든 경험은 나의 기억에 있지 않다. 나의 강의는 한 달 전부터 학생들에게 예고되었고, 총장과 교수님들도 참석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도 강연장을 가득 메운 상태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매우 조용하게 앉아 있었으며 주변 학생들과 담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이크가 쩌렁쩌렁 울리는 매우 좋은 시설의 강론장이었는데, 5분이 지나도록 나의 언변에 귀를 기울이는 학생이 없었다.

 

차라리 담벼락에 대고 이야기하라면 그런대로 일방적인 담론을 쏟아놓을 수도 있겠지만, 살아있는 인간 앞에서 1밀리미터도 교감의 통로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는 울화가 치밀고 말았지만, 계속 학생들을 달래면서 강론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그 학생들은 출석체크가 되기 때문에 앉아 있는 것 뿐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책상 밑으로 눈을 깔고 카톡에 열중하였고, 카톡을 안 하는 학생들은 조용히 잘 뿐이었다. 도올이 누구인지, 자기들이 공부하는 과학의 위대성이 무엇인지, 도올의 강론이 자기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일체 자기향상에 관한 의지나 호기심이 부재한 상태였다.

 

500여명 중에 내 말을 듣는 초롱초롱한 눈빛은 몇몇 눈동자에 불과했다. 초현실주의적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에게는 진실로 깊은 상처를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내가 사랑해온 내 나라 대한민국이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그 자리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특징지은 것은 오직 아파티(apathy), 즉 무감(無感), 그리고 개별화된 시공간 속에 자기를 단절시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창문 없는 모나드에게는 예정조화라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감각만 있는 것이다.

 

세월호 안에서 무기력하게 스러져간 어린 생령들의 행동은 주어진 상황에서 누구라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최선의 방도였다는 것을 우리는 공감하고 가슴아프게 생각한다. 그 학생들의 상당수가 애절하게 부모님들과 카톡을 했다. 

 

그 덕분에 귀중한 자료가 많이 남았다. 그래서 국가 시스템의 무능의 실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적 차원에서 안타깝게 반추해볼 수도 있는 또하나의 가설은 카톡이 아닌 생존의 방법의 모색을 위한 진지한 호상적 토론이 우선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선중의 마이크에서 울려퍼지는 “가만히 있으라”는 절대명령이 있었다 할지라도 생사의 기로에서는 생존을 향한 본능적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충분한 토론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공간은 카톡과 더불어 개별화될 수밖에 없었던 문명의 구조적 현실태에 종속되어 있었고, 절대적 권위에 대한 물리적 순응만이 그들의 행위를 지배했다.

 

앞서 지방선거를 예견한 언론인이 헌법 수호를 운운했지만, 헌법이라 하는 것도 필요에 따라서는 개정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헌법 수정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헌법도 수정될 수 있는 것이 거늘 “가만히 있으라”는 마이크 소리가 개정의 대상일 수는 없겠는가? 

 

생존의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탐색대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긴밀한 상황연락을 취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요번 6·4 지방선거는 “가만히 있으라” 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기존 세력의 역사몰이 전체에 대한 응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순결한 단원고 학생들은 우리 시대의 교육이 저지른 죄업의 희생양이었다.

 

보수는 표가 갈리고 진보는 단일화되었기 때문에 진보가 이긴 것이 아니다. 보수를 표방하는 교육감들의 정책방향이 근원적으로 불성실하고 이 땅의 자녀들을 사지로 휘몰고 있다는 불안감이 국민들의 일반정서를 각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교육감들의 정책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나 요구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진보교육감들이 좀더 성실하고 신중한 느낌을 준다는 것, 그리고 보수교육감들의 정책이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는 마당에는 진보세력에게 일단 기대를 걸고 보자는 애절한 마음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17명의 교육감 자리 중에서 13석을 진보세력이 차지했다는 것은, 내가 단언 하건대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보다도 더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 사건이다.
 
더구나 노무현도 “바보”가 되고 말았던 부산과 경남 지역마저 진보교육의 정신에 겸허하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은 군사독재 시절의 부마민중항쟁에 비견할 수도 있는 민중역량의 표출이다
.
정치적 혁명이야말로 역사에서 강렬하게 표출되는 진정한 전변의 계기인 듯이 보이지만, 대부분의 정치혁명은 권좌의 인간들을 환치시키는 데 그치고 말 뿐이며, 교육혁명을 수반하지 않는 한 좌절로 끝나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서 정치혁명보다. 교육혁명이 역사의 진로를 더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부형태 이상의 것이며 그것은 공동생활의 형식이요, 

공유하는 경험의 양식이다. 교육받은 유권자 없이는 보통선거권은 의미가 없으며, 사회가 민주화되지 않으면 국민이 평등한 교육기회를 가질 수 없다.

민주와 교육은 한몸이며, 교육은 민주사회의 지표이다. 교육의 바른 방향을 주도하는 세력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주체이며 정치권력의 구현자이다. 철학만 해도 그렇다! 철학은 존재론이나 인식론, 형 이상학을 운운하는 한가한 소수의 게으른 담론이 아니다. 

 

철학이 추구하는 모든 진리나 가치의 기준은 오로지 교육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은 철학의 목적이며, 소이연이다. 플라톤의 <국가>도 결국 이상국가 건설을 위한 교육론이며, 공자의 모든 철학도 교육의 방법론으로 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교육철학이 없는 철학자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상가가 될 수 없다. 교육철학이 인식론의 지평을 주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자녀의 교육에 관한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란 공통된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방법론적 견해의 차이일 뿐이다.

 

체험의 공통기반이 없다면 애초로부터 싸움을 할 건덕지가 없다. 공통기반이 확보된 싸움은 자신들이 고집하는 방법론의 제약을 초극하는 전체적 비전을 획득할 때 해소될 수 있다. 모든 악은 스피노자의 말대로 부분적인 앎의 소산이다. 

 

앎이 전체의 상에 도달하면 부분적 앎의 악은 사라지고 만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진보와 보수를 갈라서는 아니되지만, 역사적으로 서양교육사에 흔히 논의되어온 양자의 입장을 일별해보자! 우선 인간을 규정하는 시각이 다르다. 인간 본성에 관하여 보수주의자들은 몸(Mom)이라는 인간의 총체적 사태를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몸을 정욕이나 감정의 타락의 물질적 장으로 비하하고, 그 신체적 몸과는 구분되는 마음, 흔히 영혼이나 이성으로 불리는 특수한 측면만을 배양해야 할 고귀한 부분으로 고양시킨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들은 몸이라는 총체적 사태에 대한 선악의 규정성을 거부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육체와 정신에 대한 선악적 규정성을 확고하게 전제하고 들어간다. 

 

대부분의 기독교적 신앙의 소유자들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이원론에 빠지게 되며, 도심·인심을 운운하는 신유학의 주리론자들도 이러한 경향성을 노출한다. 인식, 즉 앎에 대한 시각도 달라진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성의 능력, 수학과 같은 연역적 추리활동을 계발하거나 이성의 추리활동을 도와주는 사실적 자료를 암기시키는 것을 학업의 고차적 원리로 간주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은 인간의 총체적 경험을 강조하며 귀납적 추리를 매 상황에 따라 학습시키며 자신의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도와준다.

 

진리에 대한 견해도 다르다. 보수주의자들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절대적인 진리가 인간 앞에 선재한다고 본다. 절대적 진리는 결국 이성의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재하는 진리를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문명화된 세계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절대적이고도 초월적인 진리로 학생을 이끌어주는 것이 유일한 교육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신성한 것으로 간주된 모든 기존의 진리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탐구의 과정이야말로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진리에 대한 상대론적·상황론적 관점이야말로 물리적 우주와 사회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사태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들은 확실성의 성취를 추구하는 데 반하여 진보주의자들은 불확실성과 회의의 태도를 조장한다. 보수주의자들의 진리는 항구적인 데 반하여 진보주의자들의 진리는 역동적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