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榮江院誌(全) - 나주영강사(羅州榮江祠)

야촌(1) 2014. 5. 25. 16:43

1947년 간행본

 

 

 

 

 

 

 

 

■ 榮江院誌(全)

 

『영강원지』는 2권 1책 활자본으로 1947년에 간행되었다. 구성은 서(序), 본문, 발(跋) 순으로 되어 있다. 

서는 이병수(李炳壽), 발은 이규봉(李圭逢), 이종석(李鍾奭)이 작성하였다. 서와 발에서는 배향인물의 배향 이유, 사우 건립에서 훼철까지의 과정, 사우지(祠宇誌) 간행의 필요성에 대해 기록하였다.

 

본문은 배향인물의 행적과 사우 훼철 내용을 기록하였다. 

사우 연혁, 건물 규모, 면적, 용도를 알 수 있는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다. 

 

권1의 사선생행적(四先生行蹟)에서는 배향인물의 충절과 도의를 지킨 행적을 기록하였다. 

향사축문(享祀祝文)을 통해서는 배향인물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을 정리하였다.

 

권2의 집사록(執事錄)은 봉안 때 영강사(榮江祠) 임원의 직무를 기록하였다. 

각 배향인물에 따라 기록되었으며, 상례(相禮), 선교(宣敎),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宗憲), 등황(謄黃), 제주(題주) 등 직책에 따른 담당자를 기록하였다. 철원시사실기(撤院時事實記)에서는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유림들의 복설(復設) 의지를 정리하였다.

 

영강사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선현선조의 학덕을 배향 및 선양하는 사우이다.

1712년(숙종 38) 경주이씨 후손과 사림이 이해(李蟹, 1468~1525), 이영우(李永祐, ?~?)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1713년(숙종 39) 이해의 손자 이유경(李有慶, ?~1609)과 1732년(영조 8) 이부(李孵, ?~1504)를 추배하였다.

 

1796년(정조 20) 동․서재(東․西齋)를 새로 짓고, 1805년(순조 5) 사우를 중수하였다.

1818년 송계(松溪) 류공신(柳公信, ?~?)이 추배되었으나 그의 위패는 1823년(순조 23) 송산사(松山祠, 전남 영암)로 이안되었다.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1960년 복설되었고, 이석(李碩, ?~?)을 추배하였다. 1978~1979년 이인정(李仁挺, ?~?)을 추배하여 주벽에 모셨다. 주요 유적으로는 영강사기적비(榮江祠紀蹟碑), 영강사묘정비(榮江祠廟庭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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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강사(榮江祠)

 

○ 지정번호 : 나주향토문화유산 제18호

○ 지정일자 : 2011. 7. 26.

○ 소 재 지 : 전남 나주시 영산동 39-8번지

○ 토지소유자 : 경주이씨성암공파 나주대종중(영강사)

○ 지정구역 : 나주시 영산동 39-8번지 667㎡(202평)

○ 시 대 : 1712년 최초 건립, 1956년 재건

○ 지정사유

     영강사는 경주이씨 명현선조 6위를 享祀하는 祠宇로, 1712년(숙종38)에 창건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己卯名賢 李蟹(1468~1525)와 조카 李永祐, 이해의 증손이자 효행으로 이름이 높던 李有慶(1543~1609) 3인을 배향하였다. 그 후 1722년에 강당을 지어 사우가 아닌 ‘서원’의 구색을 갖추었고, 1732년에는 李黿(? ~1504)을 추배하였다.

 

이원(李黿)은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나주로 유배 왔던 인물로, 그의 배향을 계기로 영강서원은 경주이씨만의 문중서원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났다. 영강사(榮江祠)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문중사우이지만 향촌사회사의 관점에서 볼 때 당대의 나주사회와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어 보전할 가치가 있다는 사유로 나주향토문화유산 제1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