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유인(李有仁)

야촌(1) 2014. 5. 22. 17:06

■ 이유인(李有仁)

 

◇생졸년 : 1431년(세종 13) ∼1492(성종 23)./61歲

◇문과 :  세조(世祖) 5년(14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3위(13/33)

◇생원시 :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9위(69/200)

◇거주지 : 죽산(竹山)

◇출생년 : 1431년(세종 13)은 점필재집 제2권 제이이천포미유서후(題李利川褒美諭書後)란 제하의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글에서 본인과 동년(同年)이라고 밝히고 있음

◇題李利川褒美諭書後의 포미(褒美)는 찬미하다. 찬양하다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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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인「1431년(세종 13) ∼1492(성종 23)」의 자(字)는 산수(山叟). 본관은 경주(慶州).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여흥군사(驪興郡事) 덕림(德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안찰사(按察使) 신(伸)이고, 아버지는 낙안군수(樂安郡守/전남 순천군수) 계번(繼蕃)이고, 어머니는 현감(縣監) 윤상(尹常)의 딸 정부인(貞夫人) 무송윤씨(茂松尹氏)이다.

 

1459년(세조 5)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에 급제하였다. 세조대부터 성종 대에 걸쳐 1465년(세조 11)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正五品),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正三品堂下衙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정3품)·1477년(성종 8년)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사복시정(行司僕寺正-正三品), 1478년(성종 9년)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正三品), 1479년(성종 10년) 통정대부 전주부윤(全州府尹-從二品)·행 호군(行 護軍-正四品), 1484년(성종 15)《구양수집(歐陽脩集)》글자주조의 감독직을 맡다.

 

1485년(성종 16)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지(兵曹參知-正三品堂上官), 통정대부 우부승지(右副承旨-正三品) 9월에 성종은 “근래에 경의 기색을 살펴보니, 쇠약해져서 승지(承旨)의 직임(職任)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이제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는다.

 

이보다 앞서 승지를 갈아서 다른 관직(官職)을 제수할 때에는 혹 가자(加資)하기도 하고, 혹 가자하지 않기도 하였는데, 경은 승지가 된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가자하지 않는 것이다.

 

경은 가서 직임에 충실 하라. 훌륭한 치적(治績)이 있을 것 같으면 내가 마땅히 포상(褒賞)할 것이다.”하며 9월 29일 통정대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아갔다. 1487년(성종 18) 3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로 4월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나주목사(羅州牧使-正三品) 등을 두루 거치면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1491년(성종 22)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從二品)이 되고 재임 중 발병하여 사임하자, 곧바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로 옮기고, 치유 후 다음해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從二品)에 제수되었다. 

 

오늘날의 전남 나주시  과원동 109-5에 위치한 나주금성관 (羅州錦城館)은 그가 나주목사로 재임중[1475년 성종 6)~1479년(성종 10)] 건립하였다. 모양사우(牟陽祠宇)에 배향되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세조실록(世祖實錄)』『성종실록(成宗實錄)』『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국조방목(國朝榜目)』『전고대방(典故大方)』

 

[예조 참판 이유인의 졸기] /성종 23/03/14(갑신)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유인(李有仁)이 졸(卒)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유인은 공근(恭謹)하고 염정(廉靜)한 성품으로, 치민(治民)을 잘하여 이르는 곳마다 모두 명성(名聲)과 업적(業績)이 있었다. 성품이 엄격하여 함부로 웃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적에는 재능(才能)과 식견(識見)이 천단(淺短=얕다)하여 탄핵(彈劾)을 받았으니, 그것은 그의 소장(所長)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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