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生母인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
덕혜옹주의 生母,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 1882~1929)는 高宗의 후궁이다.
덕수궁의 宮女로 있다가 高宗의 承恩을 입어 1912년 5월 25일 덕혜옹주를 낳아 복녕(福寧)이라는 당호(堂호)를 받았다.
그녀는 덕혜옹주 외에 2男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1929년 4월 22일 유방암으로 48세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사삼릉 권역 내 후궁묘역에 있다.
↑오늘날 서울 충무로의 극동빌딩 자리에 있던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 재학시절의 덕혜옹주 모습
↑덕혜옹주 첫돌사진
우연이도 아버지 고종의 나이 환갑이고, 어머니 양씨의 나이
32세 때인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출생했다.
↑1917년 6세가 되던 해, 일제의 강요로 일본인 학교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 입학.
일신초등교의 前身
↑덕혜옹주와 남편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
1929년 덕혜옹주의 生母인 귀인양씨(貴人梁氏)가 사망하였다. 검은 양장차림으로 잠시 귀국한 덕혜
옹주는 창덕궁에 들어가 어머니가 머물렀던 관물헌(觀物軒)에서 잠깐 기거한 뒤 서둘러 일본 귀국길
에 오른다.
그 후 20살 때인 1931년 5월 덕혜옹주는 일본 동경대 출신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
한다. 훤칠한 키에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지닌 그는 덕혜옹주와 결혼 후 대마도(對馬島)가 아닌 도
쿄(東京)에 저택을 두고 생활하였다.
그들의 결혼은 다분히 정략적이었지만, 결혼 초반에는 행복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혼 2년 뒤에는
딸을 낳았다.
이 비(碑)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시 대마도(對馬島)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相愛會)"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옹주의 離婚 이후 쓰러뜨
렸다가, 2001년 씨훌라워號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
시 세운 것이다.
↑덕혜옹주 작품들
↑덕혜옹주 작품들덕혜옹주 묘(德惠翁主 墓)/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洪裕陵) 경내
■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 05. 25~1989. 04. 21)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의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옹주.
◈ 본관 : 전주
◈ 국적 : 한국
◈ 출생지 : 서울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고명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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