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李鍾贊 前 국가정보원장 (下)

야촌(1) 2012. 8. 12. 23:57

■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李鍾贊 前국가정보원장(下)

 

◈1995년 조순 서울시장 후보에 DJ가 10억 만들어줘

◈1996년 5월, 李康來·朴琴玉 등과 ‘동북아연구모임’이라는 위장 명칭으로 DJ대권프로젝트팀 가동

◈ 1996년 제주도에서 DJ를 발가벗기는 비밀 워크숍 열어, DJ의 약점 중점 점검

◈ 클린턴, DJ 당선 직후 전화 걸어 IMF협약 이행 강요. 金基桓씨 도움으로 고비 넘겨

◈ 제16대 총선 낙선 후 만난 노무현, “박지원이하고, DJ는 나쁜 놈들” 욕해

 

 

1995년 지방선거는 내연(內燃)해 오던 김대중(DJ)씨와 이기택(李基澤) 민주당 총재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계기가 됐다. DJ는 조순(趙淳)씨를 서울시장, 나를 경기도 지사 후보로 내세워 수도권을 석권하려던 전략이 이 총재의 비협조로 불발된 데 대해 불만이 컸다.
 
결국 지방선거가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DJ의 정계복귀와 신당(新黨) 창당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신당 창당과 관련해서는 DJ 측근들 사이에서 양론(兩論)이 있었다. 김상현(金相賢)씨는 “딴살림 차릴 것 없이 민주당으로 들어가서 당을 접수하자”고 주장했다.
 
나는 창당을 주장하는 쪽이었다. 민주당에 들어가 흙탕물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주면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되므로 새 당을 만들어 DJ를 옹립하자는 생각이었다. DJ도 “민주당에 들어가 당권(黨權) 싸움을 벌이면 국민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느니 아예 새로 시작하자”고 했다.

 

●趙淳 서울시장의 이탈

 

이기택 총재는 1995년 지방선거 당시 장경우 경기지사 후보는 열심히 챙겼지만조순 후보는 팽개치다시피 했다.

비상이 걸렸다. 서교호텔에서 조순 후보와 만난 자리에서 DJ는 조 후보에게 선거자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다.

 

조 후보는 “3억원 있다”고 했다. DJ는 그 자리에 동석해 있던 나와 권노갑(權魯甲)씨 등 다섯 명에게 각각 1억원씩 만들어 오라고 했다. DJ도 5억원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나는 서울 동숭동에 있던 우당기념관 건물을 담보로 해서 돈을 마련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10억원을 만들어 조순 후보에게 주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나중에 나는 이해찬, 김민석씨와 함께 63빌딩에서 조순 후원회 행사를 열었다. 우리 세 사람은 각각 1억원씩 3억원을 만들어 조순 후보를 지원했다.

 

그렇게 DJ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조순 시장은 당선 직후부터 DJ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DJ가 《대중참여경제론》 개정판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저명한 경제학자인 조순 시장에게 축사를 부탁했지만, 조 시장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더니 결국 신당에도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DJ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DJ는 “조순씨가 그럴 수는 없지”라며 서운해하기는 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순 시장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기택 민주당 총재와 함께 신한국당에 합류, 한나라당을 만들었다. 정치무상(無常)이었다.

 

신당의 이름은 새정치국민회의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내 생각이 상당히 반영됐다. 

나는 “굳이 ‘당’이라는 이름을 고집할 필요가 있나? 

 

프랑스의 공화국연합이나 인도의 국민회의 등 보다 열린 이름을 생각해 보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DJ는 ‘민주당’이라는 당명(黨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4년 후 다시 신당을 만들면서 ‘새천년민주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 DJP 연대 제의

 

1996년 4월 11일 제15대 총선이 실시됐다. 민주당은 DJ의 정계복귀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집중공격했다. 

‘야당분열’이었다. 내 지역구인 서울 종로에서 민주당은 노무현(盧武鉉) 후보를 내세웠다. 

 

여당인 신한국당에서는 이명박(李明博) 후보가 나왔다. 

노무현 후보는 이명박 후보를 제쳐 두고 나만 공격했다.

 

결국 이명박 후보가 4만표, 내가 3만 3000표, 노무현후보가 1만 7000표를 얻었다. 

1981년 정치 입문 이래 첫 낙선이었다. 선거 초반만 해도 내가 유리했었는데, 난데없이 노무현 후보가 뛰어들어 나를 집중공격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니 황당했다.

 

이 선거에서 신한국당은 139석, 국민회의는 79석, 민주당은 15석, 그리고 김종필(JP) 총재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50석을 얻었다. 국민회의는 제1야당이 되기는 했지만, DJ의 정계복귀에 대한 국민의 정서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됐다. 정대철(鄭大哲)씨는 노골적으로 “DJ는 끝났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다.

 

나는 15대 총선 후인 4월 말 DJ에게 선거 결과를 분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권노갑씨가 동석했다. 나는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YS) 대통령은 997만 표를 얻어 당선됐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490만 표, 민주당은 220만 표를 얻었는데, 이걸로는 도저히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 

317만 표를 얻은 자민련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내년 대선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DJ는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의원은 나를 혁명투사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의회주의자입니다.”

  자기는 어떤 정치적 타협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말했다.

“그러시다면 됐습니다.”

 DJ는 권노갑씨에게 아태재단 건물에 내사무실을 마련해 주라고 지시했다.

 

JP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한 DJ는 그런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 다음 주에 DJ는 이화여대에서 특강을 했다.  그런데 그 주제가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의 정치사상’에 관한 것이었다.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왕조를 창업한 정도전은 신권(臣權)으로 강력한 왕권(王權)을 견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인물이다. 정도전의 주장은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내각책임제’와도 통한다. 

 

DJ는 정도전에 대해 말하면서 JP에게 ‘내각제를 받을 수도 있으니 손을 잡자’는 사인을 보낸 것이다. 

이와 함께 DJ는 소속의원들에게 JP와 자민련을 공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 DJ 대권프로젝트 착수

 

1996년 5월 6일 아태재단 건물 3층에 DJ 대권프로젝트팀 사무실이 문을 열었다. 

여기에는 ‘동북아연구모임’이라는 위장 명칭을 붙였다. DJ는 내게 “기획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을 하나 붙여주겠다”고 했다. 

 

그가 바로 이강래(李康來·국정원 기획조정실장·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16~18대 국회의원 역임)씨였다. 

나중에 DJ정권 시절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지낸 박금옥(朴琴玉)씨가 팀의 총무 역할을 맡았다.

 

 

↑1997년 대선당시 기획능력을 발휘한 이강래 의원(왼쪽)과

    홍보 및 여론조사에서 활약한 윤흥렬 ‘밝은 세상’대표(오른쪽).

 

우리 세 사람은 동북아연구모임의 기획위원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김홍일(金弘一·DJ의 장남)씨의 처남인 윤흥렬(尹興烈·스포츠서울21사장 역임)씨가 이끄는 여론조사팀 ‘밝은 세상’이 외곽에서 우리를 도왔다.


 DJ의 제15대 대선 도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북아연구모임에는 기획위원들이 만든 연구결과를 가지고 토론하고 검토하는 전략위원들이 있었다.


 박지원(朴智元), 정세균(丁世均), 정동영(鄭東泳), 임동원(林東源), 나종일(羅鍾一), 배기선(裵基善·14, 16, 17대 국회의원), 천정배(千正培·15~19대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 역임), 전병헌(田炳憲·17~19대 국회의원), 황용배(아태재단후원회 사무국장)씨 등이 그들이었다.

 

 당시 ‘밝은 세상’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대선후보로서의 DJ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은 17%밖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PI(President Identity)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FGI(Focus Group Interview)를 통해 DJ의 약점과 한계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일에 주력했다.

 

그해 8월 15~16일 우리는 제주도에서 워크숍을 가졌다. 친구가 하는 바닷가 씨빌리지모텔을 통째로 빌렸다. 

참석자들은 여름휴가를 핑계 대고 삼삼오오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워크숍이 있기 전에 이강래씨가 보고서를 가져왔다. 참 잘 쓴 보고서였다. 

이강래씨는 보고서 마지막에 DJ가 꼭 고쳐야 할 10가지를 적시(摘示)했다. 

 

전라도 억양을 고쳐라, 어디 나갈 때는 동교동 가신(家臣) 그룹 대신 소수(少數)의 젊은 사람들이 수행하도록 하라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내가 말했다.

 

“총재에게 10가지를 고치라고 하면 하나도 못 고칠 겁니다. 그러니 딱 두 가지만 고치라고 합시다.”

그 두 가지는 당내(黨內)에서 DJ를 대신할 대행(代行)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DJ 스케줄 관리 권한을 아래로 넘기라는 것이었다.

 

● “후보는 배우”

 

워크숍을 시작하면서 나는 DJ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브레인스토밍입니다. 비위에 거슬리더라도 참고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날 워크숍은 정말 DJ를 철저하게 발가벗기는 것이었다. 

1971년 대선 도전 이래 30년 가까이 우상(偶像)처럼 떠받들어지기만 했던 DJ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DJ가 붉으락 푸르락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꾹 참고 경청했다. 

브리핑 말미에 가서 나는 DJ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화감독이 배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그가 배우보다 노련하거나 연기를 잘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를 만들려면 영화감독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배우는 감독이 울라면 울고 웃으라면 웃어야 합니다.

 

배우가 감독이 잘못이라면서 따라오지 않고 감독이 할 일까지 자기가 하려고 들면 그 영화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영화감독이고, 총재님은 배우입니다.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해주셔야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총재님이 대선에 세 번이나 실패한 이유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걸 총재님이 다 하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선거운동이랄 것도 없이 따라다니기만 한 것입니다. 

그럴 거면 선거운동이나 계획이 왜 필요합니까? 그때그때 그냥 상황에 맞게 처리하면 되지....”

 

DJ는 따가운 지적이 이어지자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DJ가 말했다. “알았습니다. 뭐든지 얘기하세요. 따르겠습니다.”

나는 이강래씨와 얘기했던 ‘DJ가 꼭 고쳐야 할 두 가지’에 대해 말했다.

 

“총재님께서는 두 가지를 꼭 고쳐야 합니다.

첫째, 지금은 총재가 10만원짜리 지출까지 직접 결재를 하고 있습니다. 

          총재가 당사에 나와 결재를 할 때까지는 당이 마비되다시피 합니다. 

          총재대행을 둬서 권한을 위임해야 합니다.”

 

       “총재대행은 누구를 시키라는 거요?”

         나는 내게 당무(黨務)를 맡으라고 할 것 같아 얼른 이야기했다.

 

       “저는 대선 준비를 해야 하므로 당무는 맡을 수 없습니다. 부총재단 중에서 최연장자는 조세형(趙世衡)씨입니

        다, 조세형씨를 시키십시오.”

 

● “수첩을 내놓으시오”

 

DJ는 조세형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게 못마땅하시면 두 달 후에 그다음 연장자인 김영배(金令培)씨를 시키시죠. 

그런 식으로 연령순으로 돌아가면서 대행을 맡으면 됩니다.”

 

 

우리 세사람은 동북아연구모임의 기획위원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김홍일(金弘一: DJ의 장남)씨의 처남인 윤흥렬(尹興烈·스포츠서울21 사장 역임)씨가 이끄는 여론조사팀 ‘밝은 세상’이 외곽에서 우리를 도왔다.
 
DJ의 제15대 대선 도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북아연구모임에는 기획위원들이 만든 연구결과를 가지고 토론하고 검토하는 전략위원들이 있었다.
 
박지원(朴智元), 정세균(丁世均), 정동영(鄭東泳), 임동원(林東源), 나종일(羅鍾一), 배기선(裵基善·14, 16, 17대 국회의원), 천정배(千正培·15~19대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 역임), 전병헌(田炳憲·17~19대 국회의원), 황용배(아태재단후원회 사무국장)씨 등이 그들이었다.

 

“지금은 모든 스케줄을 총재님 혼자 짜고 있습니다. 총재님의 일정을 아랫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모든 일정을 대선 중심으로 짜야 합니다. 일정 자체가 선거전략인데, 총재님이 일정을 혼자 짜고 있으면 우린 어떻게 합니까? 그 수첩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총재권한대행 제도도입에는 바로 동의했던 DJ지만, 이번에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 일정은 공개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공개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오. 그건 안되겠습니다.”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DJ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기본 일정은 우리가 짜되, 스케줄에 공란을 남겨놓겠습니다. 사적(私的)인 일정은 총재님이 거기다 채워넣으십시오.”

 

사실 DJ가 모든 당무와 일정을 직접 챙기는 것은 오랜 기간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참모회의 같은 개념이 없었다. 밑의 사람을 부릴 때에도 1대1로 상대했다. 보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DJ는 다시 대선에 도전하면서 수십 년 동안 몸에 익은 이런 체질들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DJ도, 동교동 가신들도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DJ의 대선 준비는 이날 나온 얘기들을 바탕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 DJ 후보비서실장직 고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는 DJ의 대권 도전에 대한 비관론이 만만치 않았다. 

1996년 말 정대철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DJ를 대통령 만들겠다고 그러는데, 그 양반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아십니까? 

그 양반이 또 노욕(老慾)을 부리는 걸 돕는다면, 형님이 또 한 번 DJ 망신시키는 겁니다.

DJ는 절대로 대통령 못 됩니다.”

 

DJ가 새정치국민회의의 대선 후보가 되려면 먼저 당내 경선을 거쳐야 했다. 

김상현-정대철 두 사람이 반(反) DJ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원래는 김상현씨가 대선 후보로 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보사건에 연루되면서 김상현씨는 당권으로 방향을 돌리고, 정대철씨가 대권에 도전하기로 했다. 

 

나는 김대중 후보추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당내 경선이 있기 전, DJ가 충고했다.

“김상현이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는 지방조직을 꾸리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는 사람입니다.”

 

DJ의 얘기를 듣고 나는 전국을 열심히 돌았다. 특히 영남이나 강원, 제주에서 김상현씨의 세(勢)를 실감했다. 

제주에서 나는 “당신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민정당 하던 사람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김상현을 무시하지 말라”던 DJ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1997년 5월 19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DJ가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후보로 선출된 후 DJ는 내게 후보비서실장 자리를 제안했다. 

 

DJ의 비서실장직은 그의 ‘측근’으로 확실하게 공인받는 자리였다. 

당내 역학구도로 볼 때, 비서실장이 총재권한대행보다 힘이 셌다. 나는 사양했다.

 

“후보 비서실장을 맡으면 일하는 데 불편합니다.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후보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는 것은 당내 기반이 약한 이 의원을 배려해서 하는 얘깁니다. 

앞으로 당의 중심 역할을 해달라는 건데...,”

 

사실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에 합류한 뒤부터 내게는 이런저런 불편한 얘기들이 따라다녔다. 

민주당 시절에는 “DJ가 이종찬을 이기택의 대항마(對抗馬)로 키우려 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국민회의를 창당한 후 내가 DJ 대선 준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갑자기 뜨자 

“저 사람이 실권자”라는 얘기도 들렸다. 알게 모르게 견제도 많이 들어왔다. 

나는 권노갑· 한화갑(韓和甲)씨 등 동교동 가신들과 잘 지내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그들과 잘 지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동교동에 함몰되고 싶지는 않다. 

정치인으로서 나의 독립적인 입지(立地)를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후보비서실장직을 고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DJ도 내 생각을 읽은 듯했다.

‘이 사람이 녹록지 않구나. 나와 당당한 관계를 원하는구나’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후 DJ를 대할 때면 전보다 조금 서먹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임동원씨 영입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나와 경우가 다르다. 1994년 여름 무렵이었다. 

DJ가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임동원씨를 잘 아느냐”고 물었다. 임동원씨는 1993년 통일원 차관을 그만두고 쉬고 있었다. 육사 13기인 임동원씨는 우리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다. “잘 안다”고 했더니, DJ가 말했다.

 

 

↑이종찬 안기부장(오른쪽)과 임동원 외교안보 수석이 1998년 

    7월 9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아태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는데 정동채(鄭東采·15~17대 국회의원, 문화관광부 장관 역임) 비서가 임 차관을 소개했어요. 
 
정 비서를 보내 사무총장을 맡아달라고 했는데 거절하더군요. 
이 의원이 좀 설득해 주시오.” 그래서 부부 동반으로 임동원씨와 식사를 같이하면서 DJ의 뜻을 전했다. 
임동원씨는 거절했다.


“난 안 하겠소.”
“이유가 뭡니까?”
“DJ에게 가면 군(軍)에서 뭐라고 그럴 텐데, 거기 몸담고 싶지 않아요.”


“DJ의 통일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내 생각하고 비슷합니다. 


나도 ‘단계적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가서 같이 한번 일해 보시지요.

 

 내가 김 총재께 권한을 대폭 위임하도록 말씀드려서 행정은 사무총장이 총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임동원씨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DJ를 만나서 말했다.

“잘 될 것 같은데, 지금처럼 자꾸 이사장이 이것저것 간섭하면 일을 못 합니다.

 

임동원씨는 행정능력은 있는데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확실하게 권한위임을 해줘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태재단 사무총장으로 영입된 임동원씨는 DJ의 공화국연합제통일방안을 다듬어 3단계 통일방안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DJ정권 기간 동안 그는 외교안보수석비서관 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 통일부 장관, 국정원장,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별보좌역 등을 지내면서 햇볕정책 추진에 앞장섰다. 

 

항간에는 임동원씨가 ‘레드(Red·빨갱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나중에 나는 정동채 전의원에게 “어떻게 임동원씨를 DJ에게 추천하게 됐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한겨레 기자시절 통일원을 출입할 때 보니까 차관으로서 업무 장악력이 뛰어나고 존경할 만해서 추천했다”고 말했다.

 

● DJP 연대

 

다시 1997년 대선 이야기로 돌아가자. DJ는 당내 경선에서는 70%의 득표로 압승했지만, 대선 본선(本選)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DJP연합이 성사된 후에야 대선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다. 

 

DJP연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DJ 측에서는 한광옥(韓光玉), JP 측에서는 김용환(金龍煥) 의원이 주된 창구가 되었다.

 

 

↑DJ와 JP는 1997년 11월 6일 DJP연대를 박태준 의원을 포함한 

 구여권 인사들까지 포섭하는 DJT연대로 발전시켰다.

 

DJP연대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JP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JP에게는 3당통합 후 YS에게 당했던 것처럼 또다시 당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3당합당 때처럼 JP는 이번에도 내각제를 요구했다. 

DJ는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분점(power sharing)을 해서 내각제적인 운영을 해본 후, 국민들이 내각제에 수긍할 때까지는 개헌(改憲)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도 DJ는 JP와의 연대를 성사시키기 위해 성심을 다했다. JP도 DJ의 그런 성의는 인정했다. 

몇 번 고비가 있었지만 결국 DJP연대는 성사됐다.

 

DJ는 내게도 DJP연대 성사를 지원하라고 주문했다. 나는 김현욱(金顯煜·민주평통 수석부의장), 강창희(姜昌熙·국회의장 후보자), 이동복(李東馥) 의원 등과 만나 “DJ는 절대로 레드가 아니다. 미국의 민주당 리버럴 정도다. 믿어도 된다”고 설득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후의 얘기다. YS가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APEC회의에 나갈 일이 있었다. 하지만 YS의 외유(外遊)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YS는 DJ와 박태준(TJ) 자민련 총재,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후보를 청와대로 초청해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JP 등과 조선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청와대 회동을 마친 DJ와 박 총재가 왔다. 박 총재가 말했다.

“이회창씨, 굉장히 무서운 사람입디다. YS에게 ‘나라를 부도낸 사람이 무슨 낯으로 외국엘 나가겠다는 것이냐?’면서 YS를 아주 떡을 만들어놓더군요.”

 

DJ와 JP, TJ, 그리고 YS는 정치적 입장이야 어떻든 같은 시대를 호흡했던 사람이었다. 

이회창씨는 그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설사 1997년 대선 때 JP가 이회창씨와 손을 잡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었을 것이다. 

당시 JP가 DJ와 손잡은 것은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DJ는 JP에게 많은 배려를 했다. 

국정원장 시절 내가 DJ에게 정보보고를 하면, “그건 총리(JP)께도 브리핑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 김정일, “권영해는 우리보고 총 쏴달라고 한 놈”

 

DJ에게는 항상 이념적으로 ‘용공(容共)’이라는 딱지가 따라다녔다.

1997년 대선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북풍(北風)’이 재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시도가 있었다.

 

11월 20일, 그해 8월 15일 월북(越北)한 오익제(吳益濟) 전 천도교 교령(敎領)이 DJ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12월 7일에는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김병식이 DJ 승리를 기원하는 편지를 김원길(金元吉)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등에게 보내왔다. DJ는 “나는 선거 때마다 북한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푸념했다.

 

우리는 국회 정보위원인 천용택(千容宅) 의원을 통해 권영해(權寧海) 안기부장에게 “수사를 하는 건 좋지만, 공개해서 DJ와 연결시키는 등 정치적 이용은 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12월 8일 고성진 안기부 대공실장은 검찰청 기자실에서 오익제와 김병식의 편지가 온 사실을 공개했다. 

 

선거 막바지에 흑금성(대북 공작원 가명)의 제보에 의하면, 한성기(진로 고문), 오정은(청와대 행정관), 장석중(안기부 공작원) 등이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해 대선을 앞두고 총격사건을 일으켜 긴장국면을 조성해 달라고 주문했다는 총풍(銃風)사건도 벌어졌다.

 

후일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김정일은 방북(訪北)인사와 잡담하다가 “권영해 안기부장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선거때 우리에게 총을 쏴달라고 했으니 말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련의 북풍사건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는 JP가 많은 역할을 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안기부는 장난치지 마라. 북한은 선거에 개입할 생각 마라”고 경고했다.

 

선거 막판에 DJ비자금 사건도 터졌다. 

배재욱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DJ의 계좌를 뒤져 이회창 후보 캠프에 전해준 것이다. 

한나라당은 YS정권과 검찰에 DJ비자금을 수사하라고 압박했다. 

 

YS는 당 총재비서실장이던 박범진(朴範珍) 의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다. 

박 의원은 “수사해서는 자칫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김태정(金泰政) 검찰총장도 고검장회의를 열어 의견을 수렴한 끝에 수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 MBC, 법 어기고 “DJ가 앞서고 있다” 보도

 

 

↑1997년 12월 명동에서의 마지막 대선 유세에서 DJ가 연설을 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드디어 1997년 12월 17일이 됐다. 결과는 38만여 표 차DJ의 승리였다. 

DJ의 승리는 DJ캠프의 선거전략전술의 승리이기도 했다. DJ는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을 요구했고 거기에 적응했다.

 

첫 TV 방송연설을 앞두고서였다. 저마다 원고 초안을 가져왔는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운운하는 우국지사 투의 내용들이었다. DJ는 “좀 더 특별한 원고를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선거대책 회의에서 박선숙(朴仙淑·청와대공보수석비서관·18대 국회의원 역임) 부대변인이 그때 막 뜨기 시작했던 박세리 선수 얘기를 꺼냈다. 김한길 의원이 “신선하다”면서 “박찬호 얘기도 덧붙이자”고 했다.

 

방송연설에 나선 DJ는 “박세리 선수가 우승을 했죠? 박찬호 선수도....”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YS가 공직자들 골프를 못 치게 했는데, 사회주의자인 DJ가 정권을 잡으면 아예 골프장을 갈아엎어 보리밭을 만들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첫 방송연설이 나간 후 경직된 DJ의 모습이 훨씬 유연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성공적이었다.

반면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캠프의 선거전을 이끈 이들은 기본적으로 1987년 노태우 캠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92년에도 YS의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1997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감각이 낡아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DJ 당선의 1등 공신은 홍보와 여론조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윤흥렬씨의 ‘밝은 세상’팀이었다. 기획을 담당했던 이강래·배기선, TV홍보를 담당했던 김한길, 홍보위원장 전병헌씨 등도 큰 역할을 했다.

 

대선을 앞두고 방송 3사가 실시한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DJ가 1%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해찬 의원은 “DJ가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방송에 나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DJ가 대선에서 계속 졌기 때문에, DJ가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 방송되지 않을 경우 영남지역 등 취약지역의 우리 측 개표참관인들이 일찍 자리를 뜰 우려가 있다. 그러면 혹시 개표부정이 발생해도 막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선거법상 결과를 공표할 수는 없지만 DJ가 앞서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수준의 방송이라도 내보내야 했다.

홍두표(洪斗杓) KBS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요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득렬(李得烈) MBC사장은 응낙, MBC는 DJ가 앞서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 DJ의 짜증

 

선거기간 중 우리는 한국갤럽에 여론조사를 의뢰했다. 

나는 최시중(崔時中) 갤럽 회장과 자주 조찬을 하면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DJ는 대체로 오차 범위 이내에서 박빙(薄氷)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여론조사 결과는 DJ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선거 막바지가 될수록 DJ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영작(李英作) 박사가 보고하는 바에 의하면, 내가 10% 이상 앞서가는 걸로 나오는데, 왜 자꾸 안 좋은 얘기만 하는 거요?”

DJ의 처조카로 통계학자인 이영작 박사가 독자적으로 여론조사를 해서, 그 결과를 나보다 앞서 보고하곤 했던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해도 DJ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선거 초반에는 그렇게 변화요구에 부응하려 애쓰던 그도 선거 막바지가 되자 듣기 좋은 얘기에 솔깃해 하는 것 같았다.

 

이해찬 부본부장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 때문에 초 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했다. 

나는 이영작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쓸데없이 간여하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이 박사는 경기고 4년 후배였다.

 

1997년 대선에서 DJ가 승리하는 데는 IMF사태의 영향도 컸다. 

미증유(未曾有)의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기성체제에 평생 맞서왔던, ‘준비된 대통령’인 DJ를 선택했다. 

 

구제금융이 결정된 후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대선 후보들에게, 당선될 경우 구제금융협약을 준수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다른 후보들은 군말 없이 각서에 서명했지만, DJ는 “상황이 호전되면 재협상을 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한나라당에서는 DJ 때문에 구제금융 집행이 늦어지고 있는 것처럼 공격을 했다.

 

● 클린턴, DJ에 전화해 IMF 구제금융 재고 시사

 

1997년 12월 18일 DJ는 국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참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데, “클린턴 미 대통령이 축하전화를 걸어왔다. 통화를 원한다”는 연락이 왔다.

 

클린턴이 연결됐다. 통역은 강경화(康京和·현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 국회의장 국제담당비서관이 맡았다. 그런데 10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던 통화가 40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것이었다.

 

 

↑당선 직후 미국의 사상검증 위기에 처한 DJ에게 도움을 준 김기환 전 한국개발연구원장.

 

통화를 마치고 나온 DJ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었다. 강경화 비서관의 낯빛도 무척 안 좋았다. 

DJ는 “일산 집으로 가겠으니, 다른 일정은 모두 조정해 달라”고 말했다.

 

강경화 비서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강 비서관은 속기(速記)했던 수첩을 보여주면서 통화내용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으니 클린턴은 DJ가 IMF구제금융 이행을 담보하는 각서에 서명하면서 토를 단 데 대해 따지는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클린턴은 “당신은 IMF에 비협조적인 것 아닌가? 

그래서야 우리가 어떻게 한국을 도울 수 있겠는가?”라면서 “재무부 차관을 보내겠으니, 우리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DJ의 대답 여하에 따라 IMF의 구제금융을 재고(再考)할 수도 있다는 위협이었다.

 

의례적인 당선 축하인사라 생각하고 클린턴의 전화를 받았던 DJ에게는 날벼락 같은 얘기였다. 

DJ에게는 당선 후 첫 도전이기도 했다. DJ가 사저로 서둘러 돌아간 것은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DJ의 일산 사저(私邸)로 달려갔다. 

그런데 2층에서 뜻밖의 인물이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전두환 정권시절 상공부차관·한국개발연구원장 등을 지낸 김기환(金基桓)씨였다. 

그는 나를 보고서도 눈인사만 하고 떠났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났나?’의아했다.

 

● 립튼, DJ를 시험하다

 

DJ를 모시고 국민회의 당사로 갔다. 잠시 후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부 차관이 보스워스 대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티모시 가이트너 차관보(현 미 재무부 장관)도 함께였다. DJ 측에서는 장재식(張在植)·유종근(柳鍾根)씨 등 경제참모들이 동석했다. 립튼이 물었다.

 

“한국 기업이 잘되려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선자(president-elect)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립튼의 질문은 마치 DJ를 사회주의자라고 단정하고 하는 것 같았다. 유종근씨가 통역을 맡았는데, 나는 그때 ‘president-elect’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DJ가 답했다.

 

“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대해 대단히 유연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DJ는 자기가 생각하는 시장경제의 개념에 대해 청산유수(靑山流水)로 설명했다.

 

그의 말에 립튼의 표정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립튼이 미국으로 돌아간 직후, IMF의 구제금융이 집행됐다. 

그걸 보면서 나는 ‘IMF의 수도꼭지는 역시 미국이 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해서 DJ는 당선 후 첫 도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에는 김기환씨의 역할이 컸다. 

대선 무렵 미국에 있던 그는 미국 정부가 DJ를 사회주의자라고 불신하고 있으며, DJ의 사상을 확인하기 위해 립튼 차관을 한국으로 보낼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DJ를 위해 미국측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하는 답변서까지 작성했다. 12월 19일 아침 일산 사저에 김기환씨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DJ가 나를 인수위원장에 앉힌 이유

 

그해 12월 26일 어느 행사장에 갔다 오는 차 안에서 DJ는 내게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인수위에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6대 4의 비율로 참여하고 있었다. 

DJ는 국정 경험이 있는 내가 인수위원장을 맡아야 자민련 측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9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의 모습왼쪽부터 신건

  이해찬, 이종찬,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 시절 활동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외무부에 통상(通商) 기능을 붙여 외교통상부로 개편한 일이다. 

당시 통상산업부에서 통상기능을 분리해 한국무역대표부(KTR)를 만들자는 주장이 많았다. 

 

인수위에서는 격론 끝에 외교통상부에 통상교섭본부를 두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장춘 외무부 대사는 나를 찾아와 “지금 우리 외무부는 통상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 

 

통상업무를 외무부로 가져오면 통상기능을 죽이는 결과가 된다”고 반대했다. 

우리는 DJ의 대선 공약 중에서 급하게 실천해야 할 일을 ‘신정부 100대 과제’로 정리해 내놓기도 했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그렇게 정부조직 개편, 국정과제 설정 등의 일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취임을 앞둔 대통령 당선자의 통치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작업을 할 기구는 인수위 말고는 없다. 다만 인수위를 방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인수위원은 분야별로 4~5명 정도로 하고, 대통령 취임 후 그들이 총리와 해당 분야의 장관을 맡도록 하는 일종의 사전 집권팀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안기부에 서는 매일같이 기밀문서들을 소각했다. 

아마 DJ에 대한 정치공작과 관련된 문서들이었을 것이다. 

권영해 안기부장에게 문서 소각을 중단하라고 경고했지만, 어떤 문서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안기부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를 당한 적이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비록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안기부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DJ에 대한 부정적 자료들을 가지고 언제든 반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초 안기부장으로 조승형(趙昇衡) 변호사를 추천했다. 

1992년 민주당과 새한국당 통합 논의 때 보니 참 진실한 분이었다. 

 

그는 자식 문제 등에 대해 DJ에게 직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DJ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 국정원장 때 민혁당 자료 캐내

 

↑1998년 5월 안기부 부훈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꾼 후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부훈석 제막식을 가졌다.

 

DJ 취임 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내정된 김중권(金重權)씨와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했다. 

김중권씨는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내 아내는 “선거는 이제 그만 좀 하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서울시장 출마는 나도 생각이 있어서 그에 대비하기 위한 사무실을 냈다.

 

하지만 DJ는 1998년 3월 4일 나를 안기부장으로 임명했다. 그 전날 DJ는 “아무리 봐도 사람이 없다”면서 내게 안기부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중앙정보부 공채1기 출신으로 밑에서부터 기획조정실장까지 올라갔던 나는 늘 ‘우리나라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는 그만 간여하고 국제·대북(對北) 정보에 전념하는 제대로 된 애국적 기관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DJ로부터 부장직을 제안받고 보니, 그 일을 해보고 싶었다.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얘기를 들었는지, DJ는 내게 임명장을 주던 날 아내에게 “이제 선거 안 치러도 되니까 얼마나 좋으냐?”고 말했다. 안기부장이 된 나는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국내 정치에 간여하던 부서들을 폐지하고, 국제 및 대북정보 부서를 강화했다. 1980년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으로 개혁작업을 할 때와 기조가 같았다.

 

이때의 개혁작업으로 유능한 정보요원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대북정보 기능이 약화됐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때 안기부를 그만둔 요원들은 대부분 국내 정치부서에 근무하다가 부서가 없어지면서 그만두게 된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유력인사들 대화를 녹음하여 말썽이 난 미림팀도 그때 없앴다. 오히려 대북 및 국제정보 부서는 강화됐다. 해군이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에서 건져 올린 훼손된 자료들을 복원해 민족혁명당 관련 정보들을 캐낸 것도, 주독(駐獨) 대사관의 우리 요원이 북한 공관원의 컴퓨터를 통째로 입수해서 송두율과 유럽에 있는 친북(親北) 지하조직에 대한 정보들을 손에 넣은 것도 내가 국정원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국정원이 송두율을 구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 확보한 정보 덕분이었다. 

송두율 귀국을 앞두고 파리 주재 국정원 요원은 송의 귀국을 추진하던 모 교수에게 “송두율이 귀국하면 우리는 입건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송두율이나 우리 정부나 모두 곤란해지니, 그만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과시했다고 한다.

 

1998년 5월에는 부훈(部訓)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꾸었다. 

이전의 부훈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는데, 초대 부장인 JP가 지은 것이었다. 

 

DJ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했던 경험이 있어서 ‘음지’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 부훈을 꼭 바꾸고 싶어했다. 

그는 부훈을 바꾸기에 앞서 JP에게 양해를 구하도록 했다. 이듬해 1월에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DJ, 대통령정보비 사용 거부

 

DJ는 국정원을 국내 정치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당시 DJ정부는 농·수·축협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단위 조합장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지지부진했다. 

그때 “해당 지역 정보관들이 움직이면 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지역 조합장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정보관들로 하여금 압력을 가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DJ에게 업무보고를 할 때, 나는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DJ는 조용히 말했다.

“이 원장, 우리가 어렵더라도 이런 일은 안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안기부장 취임 초의 일이었다. 이강래 기조실장이 안기부 예산에 대해 보고하는데 ‘대통령정보비’라는 항목이 있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었다. 내가 알기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은 물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도 그런 명목의 돈은 없었다. 

 

아마 YS 시절, YS가 정치자금을 받지 않으면서 ‘대통령정보비’가 생긴 듯했다.

DJ에게 첫 업무보고를 하면서 ‘대통령정보비’가 있음을 얘기하고, “필요한 만큼 매달 비서실로 보낼까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DJ가 말했다.

“우리, 이거 쓰지 맙시다.”

‘부장 정보비’라는 돈도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러니 나도 ‘부장정보비’를 쓸 수가 없었다(부장판공비는 별도로 있었고, 그 돈은 나도 썼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터졌던 북풍 관련 사건들을 수사한 것도,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총풍사건의 경우 사건을 수사하다 보니, 앞에서 말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인 한성기가 이회창 후보 측근과 수시로 만났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장석중씨는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건(辛建) 차장은 그런 소리가 나올 것을 우려해 그를 강남경찰서 유치장에서 재우고 낮에만 조사하도록 했다. 

 

담당 수사관이 신건 차장에게 “매일 수사 요원들이 데리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불편하니, 안기부 조사실에서 재우면서 조사하자”고 했지만 신건 차장은 단호히 거부했다. 

 

만일 장석중씨의 말처럼 고문을 당했다면 “매일 경찰서 유치장으로 내보내 재우면서 어떻게 고문이 가능했겠는가?”라고 반문하여 재판과정에서도 확실하게 해명하였다.

 

 

● DJ, “김정일, 국가주석 안 맡을 것”

 

1997년은 김정일(金正日)이 김일성(金日成)의 3년상을 마치는 해였다. 

해외 각국에 있는 주체사상연구소에서는 김정일을 국가주석으로 추대하자는 청원서를 작성해 평양으로 보냈다. 

 

박성철 북한 부주석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는 길에 태국에 들렀다. 한 기자가 “국가주석은 누가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박성철은 “한 분밖에 더 있느냐?”고 했다.

 

이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김정일이 국가주석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찜찜했다. 

나는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노동당 비서에게도 물어보라”고 지시했다. 

 

황장엽씨는 “김정일은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그에 필적하는 다른 자리를 만들어서 그 자리에 취임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주례보고에서 DJ에게 북한정세에 대한 정보판단보고를 하면서 “김정일이 국가주석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라 고 결론을 내리면서 한편 작은 글씨로 황장엽씨의 의견을 부기(附記)한 것을 참고로 보고했다. 

 

DJ는 보고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황장엽씨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DJ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북한의 경제가 몹시 어렵지 않아요? 국가주석을 맡으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합니다. 

 김정일로서는 권한만 행사하면 되지, 책임질 일을 뭐하러 하겠어요?”

 

다음 날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을 개정, 김일성을 ‘영원한 국가주석’으로 추대하면서 국가주석직을 폐지했다.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자격으로 북한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장 시절 내가 보기에 북한은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한번은 북한이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런데 휴전선 근처까지 내려온 북한군 기갑부대가 돌아갈 생각을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혹시 남침(南侵)의 징후가 아닌가 싶어 비상이 걸렸다. 

후에 알고 보니 원인은 유류(油類)가 떨어져 다시 북상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 1994년부터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작업 착수

 

2000년 DJ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자, 국정원이 수상 공작을 했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DJ가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해 오래전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국정원이 간여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2000년 12월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축하연에서 한영우

   (오른쪽) 선배 부부와 함께

 

1994년의 어느 날이었다. DJ가 “사람을 보낼 테니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정동채 비서가 한 사람을 데려왔다. 

유종근(전북지사 역임)씨였다. 그는 그때까지 국내에서는 무명(無名)이었다. 

그가 가져온 DJ의 편지에는 “내가 믿는 사람이니 함께 사업을 했으면 한다. 

협조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에 언급한 사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유종근씨는 노벨평화상 얘기를 꺼냈다.

 

“DJ는 1987년부터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YS가 ‘지미 카터 인권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을 주선했던 권영민 애틀랜타 총영사가 갑자기 주노르웨이대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YS가 노벨평화상을 받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DJ의 수상은 어려워질 것입니다. 

의원님께서 DJ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하는 데 나서주십시오. 

전직 장관이 나서주면 좋은데, DJ 주변에는 그런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그럽니다.”

 

나는 “노벨상에 대해 잘 모르니 공부부터 좀 하고 다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다. 

이후 노벨상 수상 추진 작업은 미국에 있는 DJ의 처조카 이영작씨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는 1995년 6월, 비밀리에 노르웨이로 가서 가이르 룬데슈타트 노벨평화상위원회 사무총장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DJ가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다.

 

룬데슈타트 총장은 설명을 다 듣고 이렇게 말했다.

“사실 1987년에 DJ가 거의 노벨평화상을 받을 뻔했는데, 야당을 깨고 나와 대선에 출마하는 바람에 아리아스 산체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에게 상이 돌아가게 된 겁니다.”

 

나는 그가 우리 국내 문제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DJ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무언가 새로운 전기(轉機)가 있기 전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DJ가 다시 정치를 할 건가요?”

“그분이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치고, 삶 자체가 정치인 분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현역 정당정치인은 아닙니다.”

 

“지금 그가 활동하고 있는 것들이 대선을 겨냥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후 DJ는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 개최나 동티모르 독립운동· 미얀마(버마) 민주화운동 지원 등이 모두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 노벨평화상 수행자 명단에서 제외돼

 

국정원장 시절, 나는 DJ 노벨평화상 수상 문제에 대해 임동원·김한정(金漢正)씨와 의논했다. 나는 “국정원에서 작업을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국정원장 대외협력보좌관으로 있던 김한정씨를 FDLAP 사무총장으로 보내 노벨상 수상 작업을 추진하도록 했다.

 

나는 FDLAP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한승주(韓昇洲) 전 외무부 장관을 설득해 이사장으로 영입했다. 

양재봉 대신증권 회장이 FDLAP 활동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는 “목포상고 동창이면서도 과거에 정권의 눈치 때문에 DJ를 돕지 못한 게 미안하다”며 FDLAP를 많이 도왔다.

 

1999년 국정원장을 그만두고 난 후, 나는 다시 노르웨이로 가서 룬데슈타트 노벨상위 사무총장을 만났다. 

나는 DJ의 햇볕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베를린선언 등 DJ의 남북간 긴장완화 노력과 미얀마·동티모르 등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남북관계에서 좀 더 분명한 전기를 마련하면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10월, 드디어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발표됐다. 

노벨평화상은 수상자 선정을 맡은 노르웨이에서 시상식을 하지만, 스웨덴에서도 국왕 주최의 수상 축하연을 성대하게 개최한다. 하지만 관련 행사 참석을 위해 출국하는 DJ 수행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스웨덴 노벨상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던 한영우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경기고 5년 선배인 그는 DJ옥중서신을 외국어로 출간하는 등 DJ의 수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내가 애쓰고 다닌 것을 아는 그는 “수행원 명단에 네 이름이 없던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어물어물하자 그는 짐작을 한다는 듯 자기가 스웨덴 국왕 명의의 축하연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했다.

 

얼마 후 정말 초청장이 왔다. 

초청장에는 연미복에 보타이를 매고 훈장을 패용(佩用)하라는 등 드레스코드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12월 12일 그런 복장으로 내가 축하연장에 나타났다. 

 

나를 발견한 DJ는 “아니 어떻게 여기에...”라며 깜짝 놀랐다. 

연회가 끝난 후 호텔에 가보니 그의 수행원으로 한승헌 변호사, 한완상 총장, 최열(崔冽) 환경연합 대표 등이 대기하고 있었다.

 

 

● 국정원장 퇴임

 

국정원장으로 있으면서 나는 외부인사들과 자주 접촉했다. 국정원장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임동원 수석은 내게 “이종찬 원장이 대통령 되기 위한 운동을 하고 다닌다는 얘기가 들려서 DJ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사실 그건 오해였다. 나는 1997년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신세를 졌다. 

그들은 야당 출신 DJ 사람들이 커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DJ가 당선돼 그들에게 인사라도 해야 했지만, 국정원장을 맡고 보니 밖에서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원장 공관으로 초청해 식사를 같이한 것이었다.

 

내가 국정원장을 맡은 것은 조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아무리 중앙정보부 공채 출신이라고 해도 한번 조직을 떠나 정치에 오염됐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장은 정권이 바뀌어도 그 자리를 지켰던 조지 테넷 미 CIA국장처럼 프로페셔널 정보맨이 맡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을 키워내지 못한 것은 정치권의 잘못이기도 하다.

 

1999년 5월 말, 나는 국정원장을 그만두었다. 

새천년민주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DJ는 내게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들을 영입할 수 있도록 애써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대전 등 전국을 순회하면서 DJ정부의 시책을 알리는 강연을 하고, 지역여론도 살폈다.

 

이듬해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나는 종로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1998년 이명박 한나라당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후 실시된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당선됐던 노무현 의원은 부산(북·강서을)으로 내려갔다.

 

세간에는 나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종로구를 놓고 불편한 관계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렇지 않다. 

1998년 보궐선거 때에는 아내가 노무현 후보의 선거운동을 지원해 줄 정도였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 의원은 “이제 부산에서 DJ당으로 나서도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 최열, 모처 연락받고 나를 총선 낙선대상에 포함시켜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계복귀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복병이 나타났다. 

박원순(朴元淳) 변호사 등이 주도한 총선 낙천낙선(落薦落選)운동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대상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명단을 확정짓기 직전에 최열 환경연합 대표가 모처에서 온 전화를 받더니 “이종찬과 김상현을 넣어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했던 지인에게서 들었다. 

최열씨가 어디서 온 전화를 받고 그랬던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낙천낙선운동 대상자에 내 이름이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총선연대에 참여하고 있던 재야(在野) 운동가 김상근(金祥根·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국정원장으로 있을 때에 이런저런 부탁을 많이 해왔던 그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성운동가 지은희(池銀姬)씨는 23일간의 선거운동기간 동안 21번 종로에서 나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는 내가 구체적으로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적시하지도 않은 채, 그냥 ‘부패비리정치인’이라고 쓴 낙천낙선대상자 명단을 담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나는 낙선하고 말았다.

 

나는 총선연대와 박원순 변호사를 상대로 민·형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내 손을 들어주었다. 

비록 1억원을 청구했던 손해배상금액이 1000만원으로 깎이기는 했지만.....

 

박원순 변호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낙천낙선 대상자 명단에 나와 김상현 의원을 포함시킨 것은 잘못이었다고 사과하면서 내게 “항고(抗告)하지 말고 여기서 끝내자”고 했다. 하지만 왜 나를 명단에 포함시켰는지, 그렇게 시킨 배후는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얘기하지 않았다.

 

 

●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에 나와 이홍구씨가 역할

 

총선이 끝난 후 나는 부산에서 낙선한 노무현씨와 만나 식사를 같이하면서 위로했다. 

그는 “박지원이하고 DJ는 나쁜 놈들”이라고 마구 욕을 했다. 

 

선거 초기만 해도 자기가 유리했었는데 3월 12일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남북정상회담 개최 발표를 한 후, 역풍(逆風)이 부는 바람에 졌다는 얘기였다.

 

 

↑1996년 제15대 총선 당시 유세장에서 노무현 후보와 함께

    노 후보는 야권분열을 이유로 국민회의를 집중공격했다.

 

후일 그가 대통령이 된 후 한나라당이 대북비밀송금 특검(特檢) 법안을 발의했다. 

많은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을 거절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노 대통령이 특검법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보았다. 

 

2000년 총선 후 박지원과 DJ를 욕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비밀송금 특검법안을 받아들였고, 박지원씨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 상당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노무현 후보와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인연이 이어진다. 2002년 여름이었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때 노 후보는 정몽준(鄭夢準)씨와 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이다가 결렬된 상황이었다. 

노 후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정몽준 의원과 다시 단일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선배님이 다리를 놔주십시오.”

“단일화를 할 경우, 당신이 대선 후보가 되고 정몽준 의원은 도우미 역할만 하기를 기대하는 거요, 

 

아니면 정 의원이 후보가 되고 당신이 그를 돕는 경우도 생각하고 있는 거요? 

정 의원이 후보가 되면 당신과 성향이 다른데도 흔쾌히 도울 수 있겠소?”

 

“아, 그야 물론이지요.”

 나는 “진정이냐”고 거듭 물었다. 노 후보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나는 정몽준 의원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던 이홍구(李洪九) 전 총리를 만났다. 

나는 “지금으로서는 노무현이나 정몽준 모두 어려운 상황이니, 한번 두 사람을 붙여주기나 해보자”고 말했다.

 

이 전 총리도 응낙했다. 이후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 논의 끝에 노무현 후보로의 단일화에 성공했다. 

노 후보는 그 여세를 몰아 대통령에까지 당선됐다.

 

그전인 2001년 9월 나는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를 모시고 청와대에 가서 DJ에게 한국을 동북아물류(物流) 중심국가로 만들어야 발전하는 중국경제에 발맞추어 한국에 새로운 먹거리가 생길 것이라는 방안을 설명했다. 

 

DJ는 이 방안을 해양수산부에 보내 정부의 차세대 정책 중점방안으로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한 노무현씨가 후보가 된 이후, 나는 박병윤 의원과 함께 한국선진화포럼에서 마련한 동북아중심국가 발전방안을 다시 공약으로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

 

노무현 후보는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당선된 이후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동북아 중심시대를 열자”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동북아중심국가’라는 아이디어는 슬며시 사라지고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에 접근하자는 ‘동북아균형자론’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 후 이마저 흐지부지되고 동북아역사재단만이 남았다.

 

 

● 소신을 지키려 노력했다.

 

내 정치인생은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막을 내렸다. 

우리 세대와는 생각하는 바탕이 다른 후배세대가 정치권에 등장했다. 

정치는 점점 명분보다 실리에 치우쳐 가고 있다. 

그들이 나를 낙천낙선 대상자로 올려놓고 거부했는데, 계속 정치를 하겠다고 미련을 두다가는 망신만 당하겠다 싶었다

 

내 정치인생을 돌아보면 성공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 소신을 꺾지 않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려 노력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부한다.

 

정치를 그만둔 것에 후회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때 정치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동안 정치를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을 다시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정치하는 동안 귀한 책을 사서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만 했는데 마음껏 읽을 수 있어 그것도 행복했다. 

또 덕분에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지만 지지부진했던 우당(友堂·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 할아버지의 기념사업을 재개하게 되었고, 독립운동가 후손을 돕는 사업도 할 수 있었다.

 

[취재후기]

 →햇볕정책 정당성 강조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준비된 증언자’였다. 

그는 지난 4월 말 첫 만남 때부터 “이 인터뷰를 하는데, 좀 얘깃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서울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만날 때면, 그는 큰 서류가방에 자료를 잔뜩 담아가지고 나타났다. 

인터뷰 질문지에 대한 답변과 자신이 얘기하고 싶은 내용을 가득 적은 종이를 꺼내놓고 답변하곤 했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1992년 대선 당시 앞에서는 김우중 대우회장에게 출마하도록 부추기고 뒤에서는 못 나오게 막았다는 얘기가 있다”는 식으로 그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져도, 그는 “내가 김우중씨에게 나오지 말라고 한 것은 사실”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국정원장 시절의 일을 얘기할 때는, DJ정권 시절 국정원의 대공기능이 약화됐다는 주장이나, 호남지역 편중인사 논란, 국정원 해직자 문제 등에 대해 열심히 해명했다.

 

이종찬 원장에게 듣고 싶었던 얘기 중 하나는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였다. 

노무현 정권시절 《월간조선》에 노무현 정권의 좌경맹동적인 대외정책을 비판하고 안보와 외교를 걱정하는 글을 곧잘 기고했던 그라면, DJ정권의 햇볕정책에 대해 반성의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옹호 입장을 견지했다. 

“지난 수십년간, 그리고 이명박 정부 들어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썼지만 얻은 게 뭐냐”면서 “결국 ‘접근을 통한 변화’밖에는 답이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북한을 변하게 한다고 했지만, 북한이 변한 게 뭐냐? 

결국 우리 내부의 안보태세만 이완되고, 우리만 변한 게 아니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그는 “개성공단을 봐라. 왜 북한이 변한 게 없느냐?”면서 “개성공단 같은 걸 늘려서 북한을 무력화(無力化)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핵문제에 대해서도 “김정일·김정은 입장에서 생각하면 핵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고, 천안함사태와 연평도포격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에 대한 북한의 리액션”이라고 말했다. 

 

다만 DJ정권 시절 우리가 북한에 해주는 것만큼 국군포로 송환을 성사시키는 등 상호주의를 철저히 하지 못한 부분은 인정했다.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구(舊) 여권 출신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포퓰리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포퓰리스트’라는 말은 꼭 부정적 의미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상대방(그게 유권자가 됐건, 기자가 됐건)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를 읽고 거기에 부합하려 애쓰는 정치인’이라는 의미다. 

그런 감각을 가진 그의 말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혹은 그가 1992년 민자당 경선에 불복하고 뛰쳐나오지 않고 당내에서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면,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을 거쳐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구 여권 계열 정당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배진영 (2012년 7월호)

출처> 사선암(四仙岩) ㅣ 풍월(風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