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李鍾贊 前 국가정보원장 (上)

야촌(1) 2012. 8. 12. 23:43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李鍾贊 前 국가정보원장(上)

 

- “盧泰愚 후계는 1980년에 이미 결정” (兪學聖)

- 1962년 최고회의에서 全斗煥과 처음 만나, 12·12 후 재회

- 2·12 총선 앞두고 “서대문 출마 막아 달라”던 盧泰愚, 대통령 된 후 “이종찬이 내 출마 막았다”

- 盧泰愚 당선 후 만난 權翊鉉, “黨이 순탄치 않을 거요”

 

 

■李鍾贊
  〇76세. 육사 졸업(16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〇중앙정보부 총무국장·기획조정실장, 11~14대 국회의원, 민정당 원내총무·사무총장,

정무제1장관, 새한국당 대표, 제14대 대통령후보,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제15대대통령직 인수위원장, 국가정보원장 역임. 現 우당장학회 이사장.
1962년 5월 23일 경기도 연천 제28사단 연대 교육장교로 있던 내게 인사명령이 내려왔다. “5월 24일 10시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 옆 옛 문화체육관광부 청사에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출두하고 나서야 나는 재정담당 최고위원 유원식(柳原植) 장군의 부관으로 임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원식 장군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유 장군의 집안은 우리 집안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유 장군의 아버지인 단주 유림(丹洲 柳林) 선생은 내 할아버지(友堂 李會榮)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계열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 全斗煥과의 첫 만남

 

유원식 장군을 뵙고 물러나온 나는 촌닭처럼 어리벙벙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의 전두환 대위

 

“이종찬 중위인가?”

“네, 그렇습니다.”

 

“난 의장실에 있는 11기 전두환(全斗煥) 대위네. 자네가 부임했단 말을 들었어. 점심 약속이 없으면 점심이나 같이 하지 않겠나?”

 

당장 점심식사는 어디서 해야 하는지, 식권은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나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얘기였다. 전두환 대위가 일하고 있는 3층 의장실로 올라갔다.

전두환 대위는 그때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매사에 자신만만해 보였다.

 

“앉게. 노태우(盧泰愚) 대위하고 배명국(裵命國) 중위가 곧 올 테니까 함께 나가지.”

잠시 후 두 사람이 나타났다. 우리는 근처 불고기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육사 14기인 배명국 중위(후일 11·12·14대 국회의원 역임)는 학창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지만, 노태우 대위와는 그때가 첫 만남이었다.

 

전두환 대위는 “최고회의란 데는 복잡하고, 특히 재정위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니 말조심하라.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이권(利權)과 관련된 사람들이니깐 항상 경계하는 것이 좋다”는 등 근무에 필요한 조언을 해 주었다.

 

노태우 대위는 말수가 적었고,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시 최고회의 의장실에는 전두환 대위 말고도 박정희 의장의 부관이었던 손영길(孫永吉·수경사 참모장 역임) 대위, 최성택(崔性澤·예비역 육군중장) 대위 등의 선배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배에게 마음을 쓰는 것은 전두환 대위뿐이었다.

전두환 대위는 기회만 있으면 불러내 밥을 샀지만, 다른 선배들은 커피 한 잔 하자는 법이 없었다.

 

■ 중앙정보부에 발을 들여놓다

 

그해 6월 제2차 통화개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유원식 장군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도 나는 한동안 유 장군을 모시다가 1962년 9월 육사 교육장교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정보부 대공지도계장 시절이던 1968년 김신조(왼쪽)와 함께 1·21사태 당시 공비들의 침투로를 돌아봤다.

 

1964년 나는 미(美) 특수전(特殊戰)학교 심리전(心理戰) 과정에 응시, 합격했다. 그런데 도미(渡美)유학을 위해 부관(副官)학교에서 3개월간의 영어교육을 받고 있는 중에 미 특수전학교 심리전 과정이 취소돼 버렸다.

 

대신 나는 영어교육을 받은 자원이라는 이유로 군사정보부대로 전속됐다. 여기서 나는 미국이 제공해 주는 정보 관련 문건들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군사정보부대에 근무하면서 미국의 셔먼 켄트(Sherman Kent)가 지은 《전략정보론(The Strategic Intelligence)》이라는 책에 빠져들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정보가 군(軍) 운영의 중추신경일 뿐 아니라 국가경영에도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인식하게 됐다. 그와 함께 ‘이왕 정보 일을 할거면, 정보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1965년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에서 공채(公採) 1기 요원을 선발했다.

여기에는 당시 중앙정보학교장이던 강창성(姜昌成·육사8기) 장군이 큰 역할을 했다.

 

국내 유수대학 및 각군(各軍) 사관학교 출신자 20명이 최종 합격했는데, 나는 20명 가운데 수석이었다.

이후 15년간 중정에 근무하면서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공비사건, 1971년 대선(大選), 10·2항명파동, 10월유신 선포, 윤필용(尹必鏞)사건, 10·26사태, 5공 출범 등을 지켜보았다.

 

■ 尹必鏞 사건에 연루된 金宇中

 

1970년 12월 부임한 이후락(李厚洛) 부장은 이듬해 제7대 대통령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부정부패와 공작정치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그는 1972년 7·4공동성명으로 국민적 영웅이 됐다.

이어 10월유신(維新)까지 성사시키면서 이 부장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그의 독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경기고교 2학년 때 친구 김우중(왼쪽)과 함께

 

1973년 4월 윤필용(尹必鏞)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측근으로 군부(軍部) 실세(實勢)이던 윤필용(육사8기) 수도경비사령관이 사석(私席)에서 “박 대통령은 이제 노쇠했으니 2선으로 물러나고 이후락 부장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운운의 발언을 했다 하여 모반(謀反)을 획책한 것으로 몰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 장군은 물론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육사11기) 등 13명이 옥고(獄苦)를 치렀고, 권익현(權翊鉉·육사11기) 대령 등 30여 명의 하나회 멤버들이 군복을 벗었다.

 

내가 보기에 윤필용사건은 이후락 중정부장을 견제하려던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윤 장군의 사석 발언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사건 초기만 해도 윤필용사건을 단순 독직(瀆職)사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경기고 동기인 이우복(李雨馥·대우그룹 회장 역임) 대우실업 전무가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큰일났어! 우중이(김우중)가 어제 보안사령부로 잡혀갔어!”

김우중과 이우복은 경기고 시절 나와 절친한 사이였다. 당시만 해도 대우실업은 수출을 주로 하는 유망한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왜?”

“잘 모르지만 윤 장군 측근들에게 돈을 준게 문제가 된 것 같아.”

‘전에 중정에서 함께 근무했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측근 김종진 보안사 보안처장(대령)에게 부탁하면 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우복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아랫사람에게 부탁해서 될 일이 아니야. 네가 꼭 강 사령관을 직접 만나서 부탁해야 우중이가 풀려날 수 있어.”

 

 

▲군법회의 재판정에 선 윤필용사건 관계자들. 앞줄 오른쪽 끝이 윤필용 소장,

  그 옆이 손영길 준장, 왼쪽 끝이 권익현 대령.

 

■ 강창성 장군에 부탁해 김우중 구명

 

강창성 사령관이 중정 보안차장보로 있을 때, 나는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1971년 7대 대선을 치른 인연이 있었다.

 

강 장군은 1971년 9월 보안사령관으로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할 정도로 총애했다. 하지만 나는 군(軍)으로 돌아갈 경우 군내 파벌싸움에 휘말릴 것 같아, 육군소령으로 예편하는 길을 택했었다.

 

다음 날 보안사로 갔다. 강 사령관의 보좌관에게 윤필용사건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이 사건은 국가변란 음모”라고 단언했다. 강창성 장군을 만난 나는 말했다.

 

“대우실업의 김우중 사장이라고, 저와 둘도 없는 친구인데 지금 윤 장군 사건으로 연행되었습니다.

맨손으로 기업을 일구어 낸 유능한 사업가인데, 선처를 부탁 드립니다.”

강 장군은 서랍에서 사건 관련자 명단을 꺼내 보더니 한마디 했다.

 

“웬 돈을 이렇게 많이 줬어?”

“정치는 잘 모르는 친구인데, 사업을 하자니 권력층과 가까이 지낸 것 같습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김우중은 다음 날 풀려났다. 그는 그 길로 지방으로 잠적해 버렸다.

얼마 후에는 이재걸(李載杰) 중정 감찰실장이 보안사로 끌려갔다.

 

이후락 부장과 동향(同鄕)인 울산 출신의 그는 윤필용 장군의 측근인 손영길 수경사 참모장과는 친구 사이였다.

윤필용사건이 이후락 부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이 점점 분명해졌다.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김동근(金東根) 보안차장보였다.

그는 육사 8기 출신으로 강창성 사령관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후락 부장 밑에서도 중용됐던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차장보 자리에서 해임되어 주영(駐英) 공사로 나가게 됐다.

김 차장보는 내게 같이 영국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노부모님을 모시고 있던 처지라 망설였지만, 조만간 이후락 부장이 중정 내에서 강창성 사령관과 가까운 사람들을 쳐낼 것이라는 소문이 결심을 재촉했다. 결국 나는 김동근 차장보와 함께 영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해외파견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윤필용사건은 계속 확대되고 있었다.

 

■ 姜昌成, “李厚洛은 반역자!”

 

영국으로 떠나기 1주일 전, 나는 출국(出國) 인사차 강창성 사령관을 찾아갔다.

 

 

▲보안사령관 시절의 강창성 장군.

 

“떠나기 전 한 가지만 건의 드리고자 합니다.

‘장수(將帥)는 양면에 적(敵)을 두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윤필용 장군을 수사하는 것도 큰일인데, 이후락 부장까지 건드리는 것은 너무 큰일입니다. 반드시 반격이 들어옵니다. 이런 점을 살펴 가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 불벼락이 떨어졌다.

“무슨 소리야. 이후락은 나쁜 놈이야! 반역자라고!”

나도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상관에게 무슨 충언을 더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화가 안 풀린 나는 보안처장 김종진 대령을 찾아갔다.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김 대령에게 나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측근이라는 게 뭡니까? 사령관님이 잘못 판단하면 아니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령관님 하는 일에 옳다고 맞장구만 치면 어떻게 합니까?”

 

김종진 대령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런데 밖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사령관실에서 나를 찾는데, 내가 아직 위병소를 나가지 않았다고 하자 병사들이 찾아 나선 것이다.

사령관실로 가자 강 사령관이 말했다.

 

“아까는 화내서 미안하네. 자네 얘기에도 일리가 있어. 그런데 무슨 구체적인 정보가 있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인가?”

“정보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후락·윤필용 두 사람이 심어 놓은 사람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반드시 그들이 반격하는 상황이 옵니다.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강 사령관은 “알겠다”면서 전별금을 주었다. 나는 김동근 공사를 모시고 1973년 6월 영국으로 떠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이(李) 모 중정 수사국장은 강창성 장군의 약점을 캐기 위해 나를 조사하려 했지만, 이후락 부장과 김치열(金致烈) 차장이 중단시켰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강창성 장군은 대전에 있는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됐다.

 

윤필용사건으로 강창성 장군은 하나회와 원수가 됐다.

1980년 신(新)군부가 등장할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만난 강창성 장군은 전 사령관의 협조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5·17조치 후 강 장군은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나는 보안사의 한용원(韓鎔源) 대령을 만나 “삼청교육대행(行)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이러면 하나회의 사감(私感)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 장군을 도울 힘은 내게 없었다.

 

李厚洛 “아무려면 DJ를 죽이려고 납치했겠나”

 

영국에서 근무하던 1973년 12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귀국해서 약 열흘간 몇 가지 장례 뒤처리를 한 후 나는 영국행 캐세이퍼시픽 비행기에 올랐다.

타이완과 홍콩 등을 경유하는 비행기였다.

 

 

▲주영대사관 근무 시절 왕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정장을 한 이종찬 부부

 

그런데 타이완공항 대기실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바로 그 직전에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락 전 중정부장이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공항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순간 ‘저분이 몰래 빠져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내가 홍콩을 경유해 영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자 그는 반색을 했다.

 

“아, 잘됐소. 나도 홍콩으로 가는 길인데 마중 나올 사람도 없고 호텔 예약도 안되어 있으니 좀 도와 주게.”

 

순간 ‘이 양반이 정말 망명(亡命)이라도 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됐다.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장으로 모시던 분인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홍콩 힐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스위트룸 하나와 일반실 하나를 얻었다. 이 전 부장은 ‘일절 외부에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때 이후락 전 부장은 재직 중의 부정부패 등을 이유로 사법처리될 것을 우려해 외국으로 몸을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사흘 동안 이후락 전 부장을 곁에서 모시면서, 7·4공동성명이나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널리 알려진 얘기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베일에 감추어졌던 이야기였다.

“김대중은 왜 납치한 거냐?”고 묻자, 그는 “이 사람아, 아무려면 내가 그 사람을 죽이려고 그랬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날짜가 지났다.

나는 이 전 부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함께 영국으로 가자고 권했다. 그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결국 나 혼자 영국으로 돌아갔다.

 

김동근 공사를 통해 내가 이후락 전 부장과 함께 지냈다는 보고가 올라가자 이철희(李哲熙·육사2기) 중정 차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다짜고짜 “왜 이 전 부장과 같이 있다는 걸 바로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야단을 쳤다.

 

당시 한국에서는 이후락 전 부장이 해외망명을 한 것으로 보고 비상이 걸려 있었다.

나도 화가 나서 맞대응했다.

“엊그제까지 부장으로 모시던 분인데,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어떻게 그렇게 야박하게 굽니까?”

 

그러고는 회사를 그만둔다는 생각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차장님이 그런 처지가 된다고 해도 의리를 지키겠습니다.”

 

이철희 차장은 “뭐야,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라면서 펄펄 뛰었다.

이후락 전 부장은 나중에 영국으로 왔지만, 내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령(領) 바하마군도(群島) 등을 떠돌다가 정부로부터 신변안전을 보장받고서야 귀국했다.

 

 

클러프, 한국정치 변혁의 안전판으로 軍·중앙정보부 꼽아

 

1976년 6월 나는 본부로 복귀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코리아게이트의 여파로 신직수(申稙秀) 부장이 물러나고 김재규(金載圭) 건설부장관이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 말기의 정국은 살얼음판 같았다.

1978년 12월 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득표율로 공화당을 1.1% 앞섰다.

 

이듬해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유신정권에 대해 강경노선을 선언한 김영삼(金泳三) 총재가 당권(黨權)을 탈환했다. 8월에는 YH사건이 일어났다. 이어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기사가 파문을 일으켰고, 김영삼 총재직 정지 가처분(假處分) 신청과 총재직 박탈,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등이 이어졌다.

 

밖에서는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를 무기로 박정희정권을 압박했다.

이 와중에 미국 등에 파견된 중정 요원들이 망명하는 일들까지 이어지면서 중정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정의 해외파트라고 편할 수는 없었다.

우리도 한국사태에 대한 외국정부의 반응이나 언론보도를 파악하느라 연일 야근을 했다.

 

이 무렵 미국의 아시아문제 전문가인 랠프 클러프(Ralph N. Clough) 박사의 보고서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보고서를 요약하면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무력화(無力化·decapitate)될 때 어떤 사태가 일어나겠느냐?’하는 글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얘기였다.

더욱이 클러프가 사용한 ‘decapitate’라는 용어에 특히 신경이 쓰였다. 이 말은 ‘목을 자르다.

참수(斬首) 하다’는 의미였다. ‘박 대통령을 강제로 물러나게 한다’는 해석이 가능한 얘기였다.

 

그러면서 클러프는 유사시 정치적 변혁으로부터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는 집단으로 군부(The Military), 관료조직(The Government Bureaucracy), 기업가(The Business Men), 중앙정보부(KCIA) 등 네 개를 꼽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클러프가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한국의 정당이나 정치인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10·26 이후 상황은 중앙정보부가 대통령을 시해한 주범으로 낙인찍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만 제외하면 클러프의 예견과 비슷하게 전개됐다.

 

 

全斗煥과의 재회

 

나는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덕분에 과장급 중에서는 선두 주자로 부국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1978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왼쪽)으로 부터 부국장

   임명장을 받는 이종찬.

 

김재규 부장은 내게 비밀특명(特命)을 내리기도 했다.

바로 1975년 월남패망 이후 공산베트남에 억류된 이대용(李大鎔) 전 주월(駐越)공사 등 세 명의 외교관을 구출하는 일이었다. 구출공작은 1960~70년대 한국의 외자(外資) 도입을 주물렀던 유대인 사업가 아이젠버그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다.

 

10·26사태 후 중정이 추진하던 기존의 사업들은 사실상 마비됐다.

나는 구출공작건(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2·12사태 후 나는 보안사로 찾아가 비서실장 허화평(許和平·육사17기) 대령을 통해 전 사령관 면담을 신청했다.

전 사령관은 17년 만에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그간의 억류 외교관 구출공작에 대해 설명하고, 그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김재규를 만나 관련 서류를 받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사령관은 김재규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연금(軟禁) 중이던 김재규의 비서실장 김갑수 장군이 보관하고 있던 관련 서류를 입수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이대용 공사 등은 이듬해 4월, 5년간의 억류에서 풀려나 아이젠버그의 전용기편으로 귀국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전두환 장군은 나를 신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중앙정보부 개편 작업

 

10·26사태 후 중정은 대통령을 시해한 대역(大逆)집단으로 낙인찍혔다.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모두 보안사로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보안사에서 최예섭(崔禮燮) 장군이 감독관으로 나와서 중정 업무를 감독했다.

 

나는 중정부장 서리(署理) 이희성(李熺性·육사8기) 장군에게 “10·26사태는 비록 김재규 개인이 저지른 행위이지만 사실 원인을 따지면 중정이 정치에 개입하여 일어난 사건이며, 이 기회에 중정의 국내부서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작업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를 올렸다. 며칠 후 12·12사태가 발생했고, 이희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면서 부(部)를 떠났다.

 

1980년 2월 9일 권정달(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에게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인 서린호텔로 나가 보니 권정달 대령 외에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 행정처장 허삼수(許三守·육사17기) 대령, 수사처장 이학봉(李鶴捧·육사18기·민정수석, 안기부2차장, 13대 국회의원 역임) 대령 등이 모여 있었다.

권정달 대령은 “정보부 개혁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기 위해 모이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권정달 대령은 내게 중정 개혁방안을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전두환 사령관이 정보부장을 맡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 허화평·허삼수 대령, 그리고 중정 수송과장으로 있다가 국방연구원 파견 교육 중이던 김용갑(金容甲·육사17기)씨와 만나 중정 개혁방안을 논의했다. 3월 12일 나는 중정 개혁방안을 작성해 권정달 대령에게 넘겨주었다.

 

1980년 4월 15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됐다.

그는 취임사에서부터 강도 높은 개혁을 다짐했다.

 

다음 날 부서장급 이상 40명 가운데 33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후 나는 총무국장으로 중정의 조직 및 인사개편을 추진했다.

 

국내정보 기구는 대폭 줄이고, 해외 및 대북(對北) 정보 부서를 강화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정국(政局)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다.

학생들은 광화문까지 진출해 “계엄해제” “전두환 퇴진”을 구호로 외치기 시작했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이 탈취한 버스에 전투경찰 한 명이 깔려 죽었다.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자 중동(中東)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5월 16일 급거 귀국했다.

그리고 5·17 계엄확대 조치가 단행됐다.

 

 

全斗煥의 친구를 자르다

 

김대중씨는 국기문란 혐의로 중정으로, 김종필(金鍾泌)씨는 부정부패 혐의로 보안사로 연행됐다.

김영삼씨는 자택연금 됐다. 5월 18일 아침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김근수(金瑾洙) 보안수사국장을 만났다.

그가 한 말이 나를 긴장시켰다.

“김영삼은 놔두고, 김대중(金大中)만 저렇게 잡아들이면 전라도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걱정입니다.”

그의 말은 적중했다. 부산·마산은 평온했지만, 광주(光州)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5월 29일 나는 전두환 부장서리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중정 조직개편안을 설명하고 재가를 받았다.

이어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몇 차례의 인사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약 100명을 추려서 결재서류를 만들어 보안사령관실로 갔다. 결재서류와 인사카드를 살펴보던 전두환 부장서리가 인사카드 한 장을 꺼내 들더니 물었다.

 

“이 사람은 왜 안된다는 거야?”

나는 그의 비위사실들을 설명했다.

“이 사람이 누가 추천해서 부원이 된 줄 아나?”

 

그는 전두환 장군과 고교 동기로서 전 장군이 중정 인사과장 시절에 추천해 입사시킨 사람이었다.

인사서류의 추천인란에도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적혀 있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께서 추천한 사람이어서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인사위원들이 이런 사람을 두면서 다른 사람을 자르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여 고민 끝에 포함시켰습니다.”

 

전 부장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재서류에 서명했다.

“뻔히 내가 추천한 줄 알면서도 정리대상에 포함시킨 것을 보니 이 심사는 공정하다고 믿고 결재하는 거야.

다만 퇴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퇴직 후 생계문제에 신경을 써 주기 바라네.”

 

 

新黨 창당 착수

 

 

▲1980년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중앙정보부 간부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종찬 총무국장, 맨오른쪽이 허문도 부장비서실장.

 

5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설치됐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됐고, 노태우 장군 등 신군부(新軍部)의 핵심인사들이 국보위에 참여했다.

이제 전두환 장군의 집권은 시간문제였다.

이때의 일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해 신군부 핵심인사들은 김영삼 정권 시절, 내란죄(內亂罪)로 단죄됐다.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나 당시 신군부 핵심들은 아직도 “당초 집권할 의사가 없었으나, 상황에 떠밀리다 보니 정권을 맡게 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10·26 이후 국난(國難) 상황에서 국정을 담당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그래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당당하지 않을까?

 

실제로 나는 당시 대한민국호(號)가 난파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상황을 막는 데 일조하겠다는 생각으로 5공(共)정권에 참여했다. 나는 지금도 5공 참여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1980년 7월 3일 아침 나는 서울 삼청동에 있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불려갔다.

1시간쯤 기다린 후에 나는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정보처 보좌관 이상연(李相淵·내무부장관·안기부장 역임) 대령, ‘강기덕’이라는 가명(假名)을 쓰던 합동수사본부 언론검열팀의 이상재(李相宰·12·14대 국회의원 역임) 보좌관, 곽회정 중정 정치과장 등과 함께 위원장실로 들어갔다.

 

차(茶)를 한잔 마시면서 전두환 위원장은 “이제부터 권 처장을 중심으로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권정달 처장 등과 함께 보안사로 내려왔는데, 복도에서 허문도(許文道) 중정부장 비서실장과 마주쳤다.

그는 웃으면서 “이 선배님, 정당을 만드는데 윤석순(尹碩淳·11대 국회의원·총리비서실장 역임)이도 한몫해야잖겠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중정 총무국 부국장으로 있던 윤석순은 허문도 실장과는 부산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순간 나는 삼청동에서 만난 멤버들이 새로운 집권당을 만들기 위한 태스크포스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보안사 뒤편 건물 2층 사무실에서 회합을 가졌다.

권 처장은 특별히 보안을 당부하면서 “이제부터 신당에 참여할 인사를 고르는 작업을 해달라”고 했다.

강기덕(이상재) 보좌관은 언론계, 이상연 대령은 군부(예비역 포함), 나와 곽회정은 정치인·교수·사회저명인사들을 맡기로 했다.

 

 

李載灐 선생 영입 작전

 

인선작업에 구체적인 지침은 없었다.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나는 새 정당이 사후(事後)에라도 분명한 명분과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새 정당에 참여하는 인물들은 과거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민족의식이 강한 분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열단(義烈團)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석현(劉錫鉉) 선생을 비롯해, 민족일보사건으로 수난을 받은 언론인 송지영(宋志英·11대 국회의원 역임) 선생, 진보당 사건으로 6년 옥고를 치른 윤길중(尹吉重·2·11~13대 국회의원, 민정당 대표위원 역임) 선생, 재야(在野)여성계 대표 김정례(金正禮·11·12대 국회의원, 보건사회부 장관 역임) 선생 등은 그렇게 해서 모시게 됐다.

 

 

▲운경 이재형.

 

제일 어려운 것은 당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 선정이었다.

고심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청와대에서 운경 이재형(雲耕 李載灐) 선생을 모시는 문제를 논의해 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때는 이미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된 다음이었다.

 

이재형 선생은 제헌(制憲)국회 때부터 정치에 몸담았던 정계 원로로 한때 신민당 내에서 진산계(珍山系)에 맞서는 파벌을 이끌기도 했으나, 유신 이후에는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다.

 

마침 이재형 선생은 내 친구인 이준용(李埈鎔) 현 대림산업 명예회장의 큰아버지였다.

나는 이준용에게 이재형 선생과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1980년 9월 4일 아침 나는 권정달 처장과 함께 이재형 선생 댁을 찾아갔다.

보안을 지켜 달라는 부탁 때문에 이준용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자기가 직접 차를 내오는 등 접대를 했다.

 

권정달 처장으로부터 민주정의당(민정당) 참여 요청을 받은 이재형 선생은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와 나라 걱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원칙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면서 “당신들 얘기만 듣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 대통령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훗날 이재형 선생의 자서전을 보니, 이재형 선생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민주주의뿐인데, 각하는 정말로 민주주의를 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전 대통령은 “바로 그것입니다. 꼭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이재형 선생을 모시면서 과거 3공시절 공화당이 존경받는 원로 법조인인 정구영(鄭求瑛) 선생을 ‘얼굴마담’ 격으로 모셨다가 버린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재형 선생도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을 맡은 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당에서 병영 색채를 빼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힘은 군 출신인 권정달 사무총장에게 있었다.

 

이재형 선생은 내게 늘 “구름(雲)만 가지고는 안 돼. 구름을 갈아야(耕) 해”라고 말하곤 했다.

구름은 이상(理想), 구름을 간다는 것은 현실을 의미했다. 즉 이상(理想)과 현실의 조화를 강조한 말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재형 선생을 내가 만났던 정치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분, 나의 정치 멘토(mentor)로 여기고 있다.

 

吳有邦, 정치참여 규제 반대하며 잠적

 

민정당 창당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오유방(吳有邦) 전 의원이다.

그는 9·10대 공화당 의원으로 10·26 후에는 정풍파(整風派)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당초 민정당 정강정책 마련 작업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던 차에 국가보위입법회의에 구(舊) 정치인의 정치참여를 규제하는 정치풍토쇄신법이 상정됐다.

 

그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정치활동을 강제로 규제하는 그런 법은 절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공정하게 경쟁하여 국민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합니다. 새정치를 하겠다면 정정당당하게 해야지요.

이 국장이 막아 주세요.”

 

하지만 내가 막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정치풍토쇄신법이 통과되자 오유방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꼭 새 정당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를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정치풍토쇄신법에 묶여 11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한 것은 물론, 1985년 12대 총선에도 출마하지 않았다. 그가 정치를 재개한 것은 1988년 13대 국회에서였다.

 

민정당 창당을 위해 뛰어다니는 사이에 나는 중정 총무국장에서 기획조정실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이미 중정 일은 뒷전으로 밀려 있었다.

 

창당 작업 초기에만 해도 나는 일을 마치면 중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위원까지 맡은 나는 이미 사실상 정치인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유학성(兪學聖) 중정부장도 내게 “이제 창당 작업에 전념하라”고 주문했다.

결국 1980년 10월 30일 나는 기획조정실장을 끝으로 15년간 몸 담았던 중정을 떠났다.

 

許和平, 대통령 직선제 주장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 보자.

1980년 7월 15일 보안사 사무실에서 조직책 명단 작업을 하고 있는데 허삼수 대령에게서 사령관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사령관실에는 전두환 사령관을 비롯해 정도영(鄭棹永·육사14기, 보안사 참모장 역임) 장군, 권정달·허화평·이학봉 대령 등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카키색 군복 차림의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말채찍을 휘두르며 들어왔다.

그는 전두환 사령관에게 깍듯이 거수경례를 했다.

 

 

▲1981년 11대 총선 당시 선거운동을 하는 이종찬.

 

자리가 정리되자 권정달 처장이 개헌안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특히 논란이 됐던 것은 대통령 간선제(間選制)였다.

 

허화평 대령은 “국민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태우 장군은 “직선제는 시기상조이며 정국안정을 위해서는 간선제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전두환 사령관은 안전한 간선제 쪽의 손을 들어 주었다.

1980년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던 전두환 대통령은 그해 12월 신헌법에 의해 7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81년 3·24 총선에서 나는 서울 종로·중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사실 그해 1월까지만 해도 나는 출마를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권정달 사무총장은 종로·중구 국회의원 후보로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吳制道)씨를 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오제도씨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었다.

 

1981년 1월 13일 나는 보고차 청와대로 갔다. 보좌관실에는 허화평·허삼수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허화평 대통령비서실 보좌관이 “다른 당을 창당하려던 사람(오제도씨는 당초 반공보수정당 창당을 추진하다가 민정당에 입당)을 정치1번지라는 종로·중구에 내세우면 민정당은 뭐가 되느냐?”면서 “선배님이 나가십시오”라고 말했다.

 

당황하는 내게 허 보좌관은 “우리가 모든 걸 걸고 심판을 받는게 정정당당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나는 바로 전 대통령의 집무실로 들어가서 종로·중구 출마 의사를 밝혔다.

전 대통령은 “이종찬! 잘 생각했다. 나도 동감이다. 그래, 정정 당당하게 싸워야지. 안 그래?”라며 격려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렵게 “종로·중구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게 됐다”고 말했다.

아내는 바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총선 결과 나는 48.7%를 득표, 당선됐다.

민주한국당의 김판술(金判述) 후보가 동반 당선됐다.

 

 

‘51%주의자’

 

제11대 국회 개원(開院)과 함께 나는 민정당 원내총무가 됐다. 솔직히 나는 원내총무가 어떤 자리인지도 잘 몰랐다.

총무라면 어떤 단체든 심부름 잘하면 되는 자리인 줄로만 알았다.

 

초선(初選)의 정치신인인 내가 원내총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의 정치1번지’인 서울 종로·중구에 나가 당선된 것을 전두환 대통령이 좋게 봐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야당인 민주한국당의 고재청(高在淸), 한국국민당의 이동진(李東鎭) 의원은 모두 정계 선배였다.

 

흔히 11대 국회는 5공 초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그것도 투쟁적인 야당 정치인들을 정치풍토쇄신법으로 묶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원내총무 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밖에서는 ‘2중대’니 ‘관제(官製) 야당’이니 했지만, 야당은 어디까지나 야당이었다.

 

1981년 9월 정기국회 때 야당이 새마을운동본부 예산 삭감을 요구하며 예산심의를 보이콧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허화평 보좌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하자 전 대통령은 “예산안 심사권은 국회가 갖고 있지 않으냐?

 

국회에서 심사하는데 성역(聖域)이 어디 있느냐? 소신껏 하라”고 전해 왔다.

이후 학원안정법 파동 때까지 전두환 대통령은 국회운영에 관해서는 나에게 맡겼다.

 

그게 전두환 리더십의 장점이었다.

그는 사람을 신중하게 골라 썼고, 일단 사람을 쓰면 그에게 전권을 주었다.

 

정치를 하면서 여러 대통령을 봤지만, 그후 어떤 대통령도 전 대통령만큼 권한을 전폭 위임(mandate)하여 정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지도자는 보지 못했다.

 

당시 허화평 보좌관(나중에 정무수석)도 ‘실세 중의 실세’로 꼽혔지만, 구체적인 현안을 가지고 국회운영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 민정당은 국회 전체의석 276석 가운데 151석을 차지하는 다수당(多數黨)이었지만, 나는 ‘51%주의자’를 자처했다. ‘여당은 51%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지 말자. 여당이 모든 것을 다 가지려 하면, 의회주의가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권정달 퇴진시켜

 

1982년 5월 희대의 어음사기 사건인 이철희·장영자(張英子) 사건이 일어났다.

장영자의 남편은 중정 차장을 지낸 이철희 장군, 그녀의 형부는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李圭光)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이었다.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의 이름도 거론됐다. 장영자에게 엮여 들어간 공영토건 오너가 권 총장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철희 장영자 부부는 물론 이규광 사장까지 구속했지만 여론은 쉬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론은 권정달의 목을 요구하고 있었다.

 

5월 19일 전두환 대통령은 소년체전 참석차 대전에 있었다.

장세동(張世東) 경호실장으로부터 급히 내려오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 전용기차에서 대통령을 만났다.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안되겠다. 권정달의 사표를 받으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각하, 권 총장만 사퇴하면 그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인정하는 게 됩니다.

원내총무인 저까지 그만두어야 그런 혐의를 희석시킬 수 있고, 민심(民心) 수습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럼 차라리 당직도 전면 개편하고, 내각도 바꾸지. 그게 민심수습에 더 낫지 않겠나?

지금 당장 올라가 당직자 전원의 사표를 받아 오게. 이재형 대표와 자네의 사표는 반려하도록 하겠네.”

 

전두환 대통령은 일단 결심을 하면 행동이 빠르다.

그는 즉시 벨을 눌러 장세동 실장을 부르더니 국회수첩을 가져오라고 했다.

전 대통령은 장 실장이 가져온 국회수첩을 뒤적이면서 “사무총장은 누가 좋겠나?”라고 물었다.

 

나는 권익현 의원을 추천했다.

정무장관으로는 오세응(吳世應) 의원, 대표비서실장으로는 남재두(南在斗) 의원을 추천했다.

내친 김에 여성인 김정례 의원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추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나를 서울로 올려 보내면서 보안유지를 당부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허화평 정무수석이 전화를 걸어 “대전에서 대통령과 무슨 얘기가 있었느냐?”고 물어 왔지만, 적당히 둘러댔다.

 

다음 날 민정당 당직자들은 일괄 사표를 제출했고, 권정달 사무총장은 퇴진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동서인 김상구(金相求) 평통사무차장까지 물러나게 하면서 민심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싸늘하게 돌아선 민심은 돌아서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정의사회구현’을 외치며 출범한 5공은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金玉淑, “서울 출마, 우린 못해요”

 

1984년 8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지구당원들과 함께 경기도 천마산에서 당원 하계(夏季) 연수회를 갖고 있었다.

갑자기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급히 만나자는 것이었다.

 

자리를 뜨기 어렵다고 하자, 자기가 오겠다고 했다. 1시간 후 정말 노태우 위원장이 나타났다.

그는 차도 마시지 않고 용건부터 꺼냈다.

 

 

▲1983년 당 원내총무 회담을 하는 3당 원내총무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종기(민한당), 이동진(국민당), 이종찬(민정당).

 

“각하께서 내년 선거에 서울 서대문에서 출마하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고향 대구라면 몰라도, 서울은 기반도 없고 생소하다’고 말씀드렸더니, 각하는 ‘이종찬이도 종로에서 됐는데, 당신이 왜 안 되느냐. 서울에서 당선돼야 전국적인 인물로 클 수 있다’고 하시더군. 내가 서대문에서 나오면 될 수 있을까?”

 

12·12사태 직후부터 ‘2인자’ 소리를 듣던 그가 서대문에서 출마하면 야당의 집중공격 대상이 될 것이 뻔했다.

나는 솔직하게 “야당의 집중공격 대상이 될 것이고, 잘해야 2등으로 당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태우 위원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내가 어렵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니, 이 의원이 잘 좀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위원장 사이에서 논의된 일인데,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육사 동기생인 정순덕(鄭順德)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과 만나 의논했다.

그는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너는 끼어들지 마라”고 했다.

권익현 대표와도 의논했으나 “각하께서 다 생각이 있어서 한 결정이니 당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포공항에서 열린 외국 국빈(國賓) 환송행사에 나갔다가 노태우 위원장 내외와 조우했다.

노 위원장은 “행사가 끝나면 연희동 우리 집에 좀 들러 달라”고 했다. 무거운 걸음으로 연희동으로 갔다.

 

노태우 위원장은 “어떻게, 말씀은 드려 보았나? 잘 안되는 것 아닌가?”라며 걱정했다.

김옥숙(金玉淑) 여사는 더 직설적으로 얘기했다.

“우리는 이 의원에게 모든 것이 달렸다고 생각해요. 서울 출마, 우리는 못해요.”

 

 

“애써 줘서 고맙다”더니

 

 

▲이종찬(좌) 노태우(右)

 

나는 얼마 후 권익현 대표가 12대 총선 공천후보자 명단을 가지고 청와대로 올라갈 때 따라나섰다. 권 대표는 “이미 각하의 결심이 굳으니, 노태우 위원장 얘기는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대통령 집무실 밖 대기실에서 만난 정순덕 수석도 “며칠 전 각하께 다시 확인해 봤는데 확고하시더라”고 했다.

 

권익현 대표가 보고를 마치고 나온 후 나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각하! 한 가지 제가 개인적으로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말해 봐.”

전두환 대통령은 조금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민정당을 창당하면서 과거에 야당을 했던 조종호(趙鍾昊·4·5·11·12대 국회의원 역임)·김정례·윤길중씨 등을 영입했습니다. 조종호씨는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비서를 지낸 분이고, 윤길중씨는 대표적인 혁신계 인사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조종호씨의 지역구인 동작에 허청일(許淸一·육사20기, 11·12대 국회의원 역임)씨를, 윤길중씨의 지역구인 서대문에 노태우 선배를 공천한다면 세상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과거 야당 사람들을 데려다가 일회용으로 써먹고 버리면서, 육사 나온 TK 출신으로 그 자리를 메운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종찬! 나는 거기까지 생각 못했다. 좋은 것을 지적해 주었어!”

 

이런 솔직함이 전두환 대통령의 장점이었다. 전 대통령은 “둘 중 한 사람만 공천한다면, 누가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허청일은 오래 전부터 동작에서 준비를 했는데, 노 선배는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다. 전 대통령은 “그럼 노태우는 빼고, 대신 전국구 1번으로 하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당사로 돌아와 권익현 대표에게 보고했더니 “노태우를 위해서나 당을 위해서나 잘된 일”이라며 좋아했다. 노태우 위원장도 내 얘기를 듣고 “잘됐다”고 기뻐하면서 “애써 줘서 고맙다”고 했다.

 

만일 2·12 총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대문에서 출마했다면, 그는 야당의 집중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이후 대권가도(大權街道)에도 지장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 되자 이상한 얘기가 나왔다.

“노태우 대통령의 서대문 출마를 이종찬이 기를 쓰고 막은 것은 자기가 서울의 맹주(盟主) 노릇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당시 모든 각오를 하고 서대문 출마에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중간에 이종찬의 방해로 좌절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나는 그래도 ‘노태우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의 일이다.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있던 안교덕(安敎德·육사11기)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왜 85년 총선거 때 노 대통령의 서울 출마를 막았소?

그게 당신이 오해를 받게 되는 원인이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노태우 대통령이 1985년 총선을 앞두고 나의 개인적 야심 때문에 그의 서대문 출마를 막았다는 얘기를 믿고서 나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노태우, “金復東 출마 막아달라”

 

나중의 일이지만, 1987년 대선 직후의 일이다.

강창성 장군이 김복동(金復東) 장군과 내게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강 장군이 사단장 시절에 김 장군이 그 아래서 대대장을 했던 인연이 있어 두 사람은 무척 가까웠다.

나는 조심스러웠다.

 

윤필용사건 당시 노태우 당선자도 조사를 받고 군복을 벗을 뻔했기 때문에, 노 당선자는 강 장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노태우 당선자와 함께 차를 타고 여의도 국회로 가는 길에 “내일 강창성 장군, 김복동 장군과 점심약속이 있다”고 보고했다. 노태우 당선자는 “잘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복동 장군이 이번 총선 때 대구에서 출마하겠다고 하는데, 당신이 후배로서 좀 말려 주시오.

요새 내가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소.” 식사 자리에서 그 얘기를 어떻게 꺼내나 고민하고 있는데, 강창성 장군이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

 

“김 장군, 이번에 출마하려고 그러나?”

“전두환 시절 내내 물먹고 있다가 이번에 출마 좀 해 보려 했더니, 웬 잡소리가 그렇게 많은지...,

어제 사무실 문을 닫았습니다.”

 

강 장군은 “잘 생각했다. 2선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잘 도와주고, 다음에 출마해도 된다”며 김 장군을 격려했다.

나도 “선배님, 결심 잘하였습니다. 노 대통령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얼마 후 김복동 장군이 만나자고 했다. 그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왜 당신이 나서서 내 출마를 가로막은 거요? 그럴 수가 있소?

내가 당신의 정치적 진로에 무슨 걸림돌이라도 된다는 거요?”

 

나는 펄쩍 뛰었다.

“오해입니다. 노 대통령으로부터 선배님의 출마를 만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지난 번 식사 자리에서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김복동 장군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이종찬 등 후배들이 김복동 장군의 출마를 말려야 한다고 했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요 ...,”

노태우 대통령은 다른 사람을 둘러대면서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바람에 나는 여러 번 바가지를 썼다.

 

 

‘개종찬!’ 소리 들으며 2·12총선 치러

 

1985년 2·12 총선을 치렀다.

선거 전까지만 해도 민정당은 그간의 실적으로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여당 원내총무로서 나름대로 의회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나의 모교이기도 한 창신국민학교에서 열린 합동정견발표회에서 나는 증오로 이글거리는 유권자들의 눈빛을 봤다.

서울고등학교 교정(경희궁)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에서는 “개종찬!”이라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정치 1번지’라는 종로·중구에서 격전을 치른 나는 돌아선 민심을 실감했다.

하지만 당 지도부는 나처럼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11대 때 151석이던 의석에서 3석만 잃었을 뿐이니 평년작(平年作)은 했다는 것이 중론(衆論)이었다.

이 일로 나는 권익현 대표와 언쟁을 벌였다.

 

“사실상 패배한 선거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내게 권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35.3%의 지지를 받았다.

지난 11대에 비해 불과 0.2%포인트 감소했을 뿐인데, ‘패배한 선거’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나도 반박했다.

 

“서울선거를 보십시오. 나하고 성동의 이세기(李世基)만 1등 했고, 나머지는 모두 2등 당선입니다.

만약 1구(區) 1인(人)의 소(小) 선거구제였다면 모두 떨어지는 선거였습니다.”

 

하지만 권 대표는 “왜 서울선거만 말하는 거냐? 서울이나 지방이나 똑같은 1석 아니냐?”고 받아쳤다.

이어 노태우 대표 체제가 들어섰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총선 직후 민정당 내에서 나오던 자성(自省)의 목소리는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렸다.

 

2·12 총선 후 나는 여당의 원내총무로서 원(院)구성을 추진해야 했다.

3월 21일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김병오(金炳午) 의원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김동영(金東英) 신한민주당 원내총무와 조우했다.

 

사진기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와 악수하는 것조차 거절하였다.

그는 “국회 개원되면 만납시다”라는 말만 남기고 쌀쌀하게 돌아섰다.

 

이는 이후 험난한 정국(政局)의 예고편이었다. 4월 1일 첫 총무 접촉이 있었다.

이후 12대 국회 원구성 협상은 한 달 반을 끌었다.

도대체 국회의원이 등원(登院)을 조건으로 협상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얘기였지만, 나는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신민당의 공식적인 대표는 이민우(李敏雨) 총재였지만, 그 뒤에는 김영삼·김대중씨가 있었다.

상도동과 동교동의 이해관계는 또 달랐다.

 

어렵게 개원협상이 타결된 것은 김동영 총무와 거의 매일같이 만나면서 어느 정도 신뢰관계가 형성된 덕분이었다.

나와 친한 친구인 서울대 학생위원장 출신의 김인학, 서울대 문리대 학생위원장 출신의 윤항렬 등이 김동영 총무의 친구였던 것도 우리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 도움이 됐다.

 

 

美문화원 점거사건후 나온 학원안정법

 

1985년 2·12 총선으로 한 번 민심이 폭발하자, 5공 정권에 대한 저항은 점점 거세졌다.

그해 5월 23일 삼민투위(三民鬪委·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산하 ‘광주학살원흉처단투쟁위원회’ 소속 대학생 73명이 서울 을지로에 있는 미(美)문화원을 점거했다.

 

▲1985년 5월 서울 을지로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대학생들이 창밖으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광주학살 진상 규명’과 ‘광주학살을 지원한 미국의 공개사과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정부는 이 사건의 주동자인 서울대 학생회장 함운경(咸雲炅) 등 25명을 구속하고,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 겸 서울대 총학생회장 김민석(金民錫·15 ·16대 국회의원 역임), 삼민투위 위원장 허인회(許仁會) 등을 수배했다.

 

미 문화원 점거사건이 있은 지 며칠 후, 노신영(盧信永) 국무총리가 만나자고 했다. 총리실에 갔더니, 노 총리는 김석휘(金錫輝) 법무장관과 요담 중이었다. 노 총리가 내 의견을 물었다.

 

“미 문화원 점거사건 주동자들에 대해서 위에서는 모두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하라고 하는데, 김 장관은 지나친 조치라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총무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사회통념상 국가보안법은 간첩을 다루는 법인데, 이것을 학생운동 처벌하는 데 적용하는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칼은 칼집에 있어야 권위를 갖는 것인데, 한번 칼집에서 뽑으면 권위가 없어집니다.”

 

김석휘 장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노 총리도 “이 총무 말씀이 맞는 것 같다”면서 김 장관에게 청와대로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자세는 강경했다. 학생운동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는 이유로 김석휘 법무장관과 이현재(李賢宰) 서울대 총장이 잇따라 경질됐다.

 

경찰의 학원사찰과 수색이 일상화됐다.

이어 허문도 정무수석비서관과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 등 강경파는 5000명의 학생들을 강제수용해 순화교육을 하는 내용의 ‘학원안정법안’을 내놓았다. 5공 초기 삼청교육대를 연상시키는 이 법안이 나오자 여론이 들끓었다.

 

 

■ 학원안정법 반대로 원내총무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의 당정(黨政)협의가 있은 후, 그해 7월 26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문도 정무수석, 그리고 나와 이한동(李漢東) 민정당 정책위의장 등이 만났다. 정부측에서는 학원안정법을 의원입법으로 처리해 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학원안정법을 만든다고 대학가가 조용해질지도 의문이거니와, 정당한 사법(司法)절차도 거치지 않고 단순히 학원소요의 주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인신(人身)을 강제로 구속한다는 것은 위헌(違憲) 소지가 크다고 생각해 계속 반대했다.

 

갑론을박(甲論乙駁)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한동 정책위의장이 절충안을 냈다.

순화교육 대상자들을 준(準)사법적 위원회가 아니라 판사가 결정하도록 법안을 수정하면 자기는 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이 의장, 당신은 검사도 해 보고 판사도 해 본 사람 아니오?

판사가 검사의 공소장을 보고 판단하지, 어디 한 사람의 인생을 보고 판단합니까? 나는 찬성할 수 없어요.”

 

그러자 장세동 부장과 허문도 정무수석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7월 31일 정재철(鄭在哲) 정무장관과 만나 대책을 숙의하고 있는데, 노태우 대표로부터 급히 당사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를 맞은 노 대표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남대에 가 계신 각하로부터 급히 오라는 지시를 받고 헬기편으로 다녀오는 길이오.

이 총무를 경질하라고 하시는군. 학원안정법에 대해서는 나도 이의가 있지만, 각하가 너무 강경하셔서 아무 말 없이 돌아왔소. 그동안 심려가 많았을 터이니 좀 쉬면서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합시다.”

 

나의 원내총무 시절은 그렇게 끝났다.

정부는 내가 원내총무를 그만둔 이후에도 학원안정법을 계속 밀어붙였으나, 여론과 야당의 반대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鄭鎬溶, “이대로 가면 10·26 직전처럼 된다”

 

야당의 직선제(直選制) 개헌 공세에 맞서 민정당이 들고 나온 카드는 내각제 개헌이었다.

여야(與野)의 주장이 엇갈리면서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1986년 12월 24일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내놓았다.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보장, 국회의원선거법 개정, 지방자치제 실시 등 7개 조건이 충족되면 내각제 개헌도 검토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민우 총재는 김영삼·김대중씨의 반격을 받아 정치적으로 매장되다시피 했다.

 

김영삼·김대중 두 사람은 이민우 총재를 고사(枯死)시키기 위해 통일민주당 창당 작업에 나섰다.

1987년 벽두에 박종철 사건이 터졌다. 대학생이 대공(對共)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점점 더 거세졌다.

 

4월 초 어느 날 정호용(鄭鎬溶) 내무부장관을 만났더니, 장세동 안기부장이 작성한 정국 판단서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민우 구상’의 여파로 야당은 분열한다. 신민당에 잔류하는 의원은 약 40명, 신당으로 가는 의원은 30명 정도 될 것으로 보이며, 신당은 제2야당으로 전락할 것이다. 분당으로 야당이 국민의 비난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개헌유보 결단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마디로 4·13 호헌(護憲)조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호용 장관은 “청와대로 들어가 전 대통령에게 장세동 부장의 판단은 적절치 못하다고 말씀드렸지만, ‘국내정치 문제는 장 부장의 일이니 정 장관은 개입하지 말라’고 하더라”면서 “이대로 가면 정국은 10·26 직전처럼 될 것”이라며 걱정했다.

 

정 장관은 내가 장세동 부장과 육사 동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장 부장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4·13호헌조치는 김영삼·김대중씨가 추진하던 신당 추진을 가속화했다.

 

신민당 의원 74명이 새 야당인 통일민주당으로 합류했다.

자신들의 판단이 엇나가자 안기부는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기 위해 깡패들을 동원했다.

이른바 ‘용팔이사건’이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고문치사(致死)사건 가담자가 더 있으며, 사건의 진상이 은폐됐다”고 폭로했다. 분노한 민심에 직면한 전두환 대통령은 5월 26일 개각(改閣)을 단행했다. 한때 후계자설(說)이 있던 노신영 총리와 장세동 안기부장이 경질됐다.

 

 

全斗煥, “이종찬, 노태우 잘 받들어

 

1987년 6월 2일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전원을 청와대 상춘재로 부른 자리에서 노태우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노 대표는 “각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지명을 받고 보니 두려움이 앞선다”면서 전 대통령에게 사의(謝意)를 표했다.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후보지명대회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가 손을 들고 참석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이어 술이 돌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이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나가 옆에 있던 새 잔에 술을 따라 올렸다.

 

그러면 전 대통령은 술을 조금 마시는 시늉을 한 후, 다른 잔에 술을 따라서 돌려주었다. 내 차례가 왔다.

 

내가 전 대통령에게 술잔을 올리는 순간, 취기가 돌았는지 전두환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이종찬! 내가 누군지 알지? 자네가 잘해야 돼! 노태우 후보를 잘 받들어야 해! 알지?”

 

자리가 얼어붙었다. 노태우 대표도 나를 응시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순간 나는 전 대통령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짐작이 갔다.

얼마 전 친하게 지내는 기자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김영일(金榮馹) 청와대 사정(司正) 비서관의 방에 갔다가 나에 대한 파일을 우연히 봤는데, 거기에는 “이종찬은 노태우 대표에 대하여 불만을 포지(抱持)하였다. 이종찬은 ‘노태우가 우유부단하고,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만큼의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언동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시 정권 내부에서는 “이종찬은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라는 식의 비방이 횡행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각하께서 하신 말씀의 뜻, 잘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파일에 있는 모략은 믿지 말아 달라’는 의미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래, 알았어. 자네가 앞장서야 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兪學聖의 독백

 

다음 날 노태우 대표를 정식으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 위한 중앙집행위원회가 소집됐다.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유학성 의원이 독백(獨白)처럼 말했다.

“오늘까지 오는 데 7년이 걸렸소.”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중정부장으로 가기로 결정된 1980년 6월 27일,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표와 나, 세 사람이 술자리를 가졌어요. 그 자리에서 ‘다음은 노태우’라는 약속이 있었어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여기에 이르니 감개무량합니다.”

 

12·12사태 직후부터 노태우 대표는 신군부의 2인자로,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꼽혀 왔다. 하지만 과거 김종필씨의 전례(前例)도 있어서 그가 과연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내가 노태우 대표가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게 된 것은 1985년 그가 민정당 대표가 되었을 때부터였다. 하지만 유학성 의원의 말을 듣고 보니, 12·12 주도세력 내에서는 일찌감치 노태우 장군이 후계자로 확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6월 10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노태우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다.

실내는 축하 분위기 일색이었지만, 밖에서는 최루탄이 터지고 있었다. 상황은 나날이 악화됐다.

 

 

홍성우·이용훈, “직선제로 돌파” 주장

 

 

▲1987년 6월사태 당시 서울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화요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6월 20일 서울지역 국회의원들이 여의도에 있는 중국음식점 ‘도원’에 모였다. 홍성우(洪性宇) 의원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이제 체육관선거는 그만해야 해! 더 이상 안 돼! 이게 국민의 소리야!”

 

드디어 당내에서도 이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6월 21일 아침 9시부터 서울 가락동 민정당 연수원에서 의원총회가 소집되었다. 의원총회에 앞서 각 지역별로 분임토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홍성우 의원은 다시 한 번 ‘체육관선거 불가론’을 역설했다.

 

의원총회가 시작되자 법제처장을 지낸 이용훈(李龍薰) 의원(전국구)이 등단해서 외쳤다.

“이제 잔재주 그만 피우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대해야 합니다.

 

직선제로 가자고 대담하게 주장하고 정면 돌파해야지 무엇을 주저합니까!”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홍성우 의원도 단상으로 올라가 “직선제로 정말 돌파하세요!”라고 주장했다.

 

6월 22일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간담회가 있었다. 전날 의원총회 분위기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지, 노태우 대표의 표정은 대단히 어두웠다. 중집위원들도 노 대표의 눈치를 살피느라 특별히 공개적인 발언을 삼갔다.

간담회가 끝난 후 근처 한식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노태우 대표가 말했다.

 

“의원들이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와서 말해야지, 의원총회라는 공개된 회의에서 노골적으로 발언을 하면 당이 분열된 것처럼 비쳐질 것 아니오? 당내에서도 나에게 압력을 가하는 게 옳은 일이오?” 이렇게 말하는 동안, 노 대표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서울지역 의원들의 의견분출이 내가 수수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대로 가다가는 서로 오해가 쌓일 것 같아, 그날 오후 노태우 대표를 면담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육사 시절 ‘후퇴를 해야 할 때에는 과감하게 확 후퇴해서 전선(戰線)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한강을 방어선으로 해서 싸우다 안되면 수원까지 후퇴해서 싸워 보고, 그게 안되면 다시 오산까지 후퇴해서 싸워 보는 식으로 찔끔찔끔 후퇴하다가는 싸움에서 지고 맙니다.

 

차라리 대전까지 확 후퇴해서 거기서 전선을 다시 구축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카드를 한 장씩 내놓는 식의 전술적인 접근을 할 게 아니라, 뭔가 알맹이가 있는 포괄적인 제안을 해야 합니다.”

 

노 대표는 내가 말하는 ‘포괄적 제안’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나는 4·13 조치 철회와 개헌을 위한 실세간 대화, 구속자 석방, 김대중 연금해제, 사면복권 등을 꼽았다.

 

노 대표는 내 말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마음먹고 한 건의가 거부당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힘없이 의원회관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제 나도 정치와 하직할 때가 되었구나’ 하는 무거운 마음이었다.

 

6월 25일 노태우 대표는 중앙집행위원들과의 오찬간담회를 마친 후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내게 “이용희(李龍熙) 의원을 통해 동교동계와 물밑대화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상도동 쪽은 유학성 의원과 박준병 의원이 맡기로 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지난번 자네가 한 말처럼 대도(大道)를 걸을 결심을 하고 있네. 필요하다면 국민이 바라는 것을 수용할 생각이네.”

나는 노태우 대표의 태도가 상당히 달라졌다고 느꼈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전날 전두환 대통령은 노 대표에게 “직선제를 수용해서 정면 돌파하자”고 제안했다.

 

노 대표도 직선제 수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박철언(朴哲彦) 안기부장 보좌관, 이병기(李丙琪·의전수석·안기부 2차장 역임) 민정당 대표 보좌역에게 은밀하게 시국선언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나흘 후 노태우 대표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 중재로 YS·DJ 대권·당권 각서 써

 

6·29 선언이 나오자 온 나라가 기뻐했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여야 합의로 국민들이 고대해 온 직선제 개헌도 이루어졌다.

개헌 과정에서 나는 광복군 출신인 김준엽(金俊燁) 전 고려대 총장의 제안에 따라 헌법 전문(前文)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法統) 계승’이라는 문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썼다.

 

12월 19일 실시된 제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는 28.0%,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는 27.1%의 표를 얻었다.

여기서 보듯,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양김(兩金)씨의 분열에 힘입은 것이었다.

 

훗날 김병관(金炳琯) 동아일보 회장은 나와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밀리에 양김씨를 만나서 한 분은 대권(大權), 다른 한 분은 당권(黨權)을 갖도록 하는 내용의 각서를 쓰도록 했어요.

 

김대중씨는 내 설명을 듣고 바로 각서를 써 주었고, 김영삼씨도 한참 생각하더니 써 주더군요.

그런데 다음날 김영삼씨가 김덕룡(金德龍) 의원을 내게 보냈어요. ‘

 

어제 써 준 각서는 없던 것으로 하자’고 전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그 자리에서 각서를 찢어 버렸지요.”

 

나는 놀라서 김 회장에게 말했다.

“아니 그 각서를 찢기는 왜 찢어요. 역사의 중요한 기록인데...,”

그는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두어서 무얼 하게요. 그 후부터 나는 양김씨와 거리를 두게 됐습니다.”

 

 

權翊鉉의 불안감

 

198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 승리한 후 노태우 당선자의 연희동 사저(私邸)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노 당선자의 최측근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민정당에서는 노 당선자의 육사 동기생이자 민정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수고한 권익현 고문만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

노태우 당선자의 향후 정국 구상이 궁금했던 나는 다음날 아침 아현동에 있는 권익현 고문의 집을 찾아갔다.

 

권 고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는 나를 안방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말했다.

“당(黨)의 앞날이 매우 걱정됩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권 고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 김옥숙 여사가 ‘이번 대선에서 민정당이 한 일이 뭐가 있나요.

사▲실 선거는 월계수회와 태림회가 다 한 것 아니에요’라고 말합디다.

민정당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그 집안을 잘 아는데, 김옥숙 여사가 그렇게 말한 것은 노태우 당선자의 말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권익현 고문은 담배를 꺼내 물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당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거요”.

 

- 배진영 (2012년 5월호)

출처> 사선암(四仙岩) ㅣ 풍월(風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