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李鍾贊 前 국가정보원장 (中)

야촌(1) 2012. 8. 12. 23:52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李鍾贊 前 국가정보원장(中)

 

- 92년 大選 후 만난 DJ, “무조건 해외로 나가라”

- 盧泰愚, 정무장관 임명장 주면서 “자네에 대해 軍部에서 말이 많아”

- 金復東, “가족 모임에서 YS 지지 결정, 이제 포기하라”

- 93년 6월 영국에서 DJ 만나 야권 통합 논의

- 95년 지방선거 앞두고 DJ 지시로 서울시장 후보로 李會昌 영입 추진

 

 

1987년 12월의 제13대 대선(大選)에서는 노태우(盧泰愚) 후보가 양 김(兩金)씨의 분열에 힘입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노 대통령이 정국(政局)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이듬해 제13대 총선(總選)에서 원내 과반수(過半數)를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많은 사람이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식을 전후해 총선이 실시될 것으로 보았다. 

1985년 제12대 총선도 2월에 치러졌었다. 민정당 입장에서도 김영삼(金泳三·YS)-김대중(金大中·DJ)씨가 이끄는 야당이 대선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전에 총선을 치르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최병렬(崔秉烈)·박철언(朴哲彦)씨 등 노태우 당선자 측근 책사(策士)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로서는 총선 승리도 중요했지만, 민정당 내 전두환(全斗煥) 사람들을 솎아내고 노 당선자의 사람들로 물갈이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이를 위해 그들은 총선 시기를 최대한 늦출 것과, 소(小)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했다. 

그들은 1구(區) 2인(人)인 중선거구제가 유신(維新)시절과 5공(共)의 잔재라는 점을 내세웠다. 

나는 선거법 개정을 앞두고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 YS의 돌연한 변심

 

“감성적인 우리 국민들의 성격상 총선은 ‘바람선거’가 되기 쉽습니다. 

여기에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면 도농(都農) 간의 표 쏠림, 지역에 따른 표 쏠림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더욱 심화되는 것은 물론, 지역에 따라 특정정당이 우위를 차지하는 지역당 현상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극단적인 지역편중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그런 분열적인 요소를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나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호남이라는 단단한 지역기반을 갖고 있던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평민당)은 처음부터 1구1인의 소선거구제를 주장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지역기반이 불안했던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민주당)과 김종필(金鍾泌)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은 중·대선거구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4당 원내총무는 농촌에서는 1구1인, 대도시에서는 1구 2~3인을 선출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YS의 입장이 돌변했다. 그는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재직에서 물러나 지방에서 쉬고 있었다. 

한완상(韓完相) 교수가 그를 찾아가 소선거구제를 수용하라고 설득했다. 

그가 어떤 논리를 전개하였는지 몰라도 하루 밤사이 YS의 마음이 변했다. 

 

그는 “민주주의에 적합한 법은 소선거구제”라며 김동영(金東英) 원내총무에게 소선거구제 수용을 지시했다. 

나는 한완상 교수가 누구의 주문을 받고 지방까지 내려가 YS를 설득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 蔡汶植, “표가 너무 많이 나올까 봐 걱정”

 

이어 3월 ‘금요일의 대학살’이 벌어졌다. 

권익현(權翊鉉) 전 대표, 권정달(權正達) 전 사무총장 등 ‘5공 인사’ 30여 명이 공천에서 탈락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나와 가까웠던 이찬혁·정남·봉두완·홍성우·박권흠·박경석·염길정 의원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직전 월요일에 노태우 대통령은 30년 친구인 권익현 전 대표와 만나 점심을 같이하면서 “앞으로 국회운영을 잘 부탁한다”고 했었다. 권 전 대표는 “앞으로 가라 해놓고 뒤에서 총을 쏜 격”이라며 분개했다.

 

나에 대해서도 공천탈락을 검토했다고 한다. 나도 그 소식을 접하고 유사시 무소속 출마를 강행할 결심까지 했다. 

하지만 은밀한 여론조사 결과 내가 우세한 것으로 나오자, “자칫 공천에서 탈락시키면 무소속으로 나와서 공연히 이종찬을 영웅으로 만들어주게 된다”는 생각에서 나를 낙천(落薦)시키려던 계획은 결국 철회됐다.

 

총선을 앞두고 언론에서는 연일 전경환(全敬煥)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등이 연루된 5공 비리를 터뜨렸다. 

언론의 속성을 잘 아는 누군가가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그런 식으로 5공과 차별화하면 선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거 직전인 4월 25일에는 염보현(廉普鉉) 전 서울시장의 비위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나는 채문식(蔡汶植) 대표를 찾아가 “서울 선거를 망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채 대표는 “지금 추세대로 가면 표가 너무 많이 나올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세상에 선거에서 자기 당 의석이 너무 많이 나올까 봐 걱정하는 정당이 어디 있단 말인가?

 

채 대표의 말은 내가 현장에서 느끼는 감(感)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우리 국민은 여당에 정권을 주면 반드시 야당에 견제세력을 만들어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채 대표는 “국민이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당을 지지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며 결과를 낙관했다.

 

4·26 총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자체적으로 156석까지 바라보던 민정당은 125석에 그쳤고,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이 70석을 차지해 제1 야당이 됐다.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은 59석,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은 35석을 차지했다. 무소속은 10석이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의 시작이었다.

 

■ 잘못된 정치의 시발점

 

노태우 정권 초입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은, 바로 그때의 잘못된 선택이 노태우 정권, 더 나아가 1987년 이후의 한국정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88년 4·26 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 후인 5월 28일 

노태우 대통령이 야당대표인 YS·DJ·JP와 청와대에서 회동을 갖고 있다.

 

소선거구제는 구조적인 지역당 구도와 여소야대를 만들었다. 

5년 단임(單任)인 대통령은 그런 제약 속에서 임기 동안 자신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런 대통령의 곁에 만사를 정치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책사들이 기생(寄生)했다. 

 

그들에 의해 3당 합당(合黨)이나 야당 의원 빼오기, 의원 빌려주기 등 온갖 편법이 자행됐다. 

당을 장악하기 위한 ‘공천학살’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렇게 당을 손에 넣은 후에는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임덕 현상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집권당의 인기가 떨어진 상황에서 차기 대권(大權) 주자는 정당이라는 공(公)조직 대신 사(私)조직에 의존하게 된다. ‘이념’이 아니라 ‘개인적 욕망’으로 뭉친 사조직은 대통령 임기 내내 어김없이 부패의 온상이 된다.

 

사조직 하면 떠오르는 것은 제13대 대선 당시 노태우 후보 주위에서 활동했던 월계수회다. 

사실 월계수회는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대선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철언씨가 월계수회의 실적을 과장해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옥숙(金玉淑) 여사에게 주입했고, 더 나아가 월계수회를 자기 정치의 기반으로 삼으려 하면서 문제가 됐다.

 

사조직은 정당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나타난 ‘악성 종양(腫瘍)’이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공조직인 민정당 대신 사조직에 의존했던 것은 자기모순이었다. 

노 대통령은 ‘민정당은 전두환의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자신이 이재형(李載灐)씨를 추천하는 등 민정당 창당 과정에 개입했다. 

1985년 2·12 총선 후에는 당 대표위원을 맡았다. 그에게는 민정당을 개혁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정당을 개혁하는 대신 사조직과 책사들에게 의존하고 3당 합당을 했다.

 

첫 조각(組閣)을 앞두고 노태우 당선자는 김준엽(金俊燁) 전 고려대 총장을 국무총리로 생각했다. 

내가 김 전 총장을 영입하는 창구역할을 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은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면서 거절했다. 

 

그는 자신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는 노 당선자의 뜻을 간파했던 것이다. 

김준엽 전 총장이 거절하자 이현재(李賢宰) 전 서울대 총장이 노태우 정부의 첫 국무총리가 됐다. 

이후 대학교수나 총장이 국무총리가 되는 일이 많아졌다.

 

■ 舊 공화당 TK 인맥의 부활

 

노태우 정부의 실권(實權)을 쥔 것은 TK(대구-경북) 출신의 구(舊) 공화당 인맥이었다.

5공 출범 당시 정치규제에 묶였던 박준규(朴浚圭) 전 공화당 의장, 김재순(金在淳) 전 공화당 원내총무 등이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옛 공화당 사람들을 중용하면 민정당을 창당한 의미가 없다. 

5공 출범 당시 정치규제를 했던 사람들을 쓰는 것은 자기모순이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내가 반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1988년 5월 2일 민정당 당직개편 시 내가 정무 제1장관이 된 것도 어떻게 보면 TK 인맥의 대부(代父)이자, 노태우 대통령의 정치멘토였던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의 천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 전 총리의 측근으로부터 “신 전 총리가 노 대통령에게 당신을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추천했다”는 귀띔을 받았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사무총장에는 박준병(朴俊炳·육사12기)씨가 임명됐다. 대신 나는 정무장관으로 임명됐다. 

 

내가 정무장관이 된 것은 한마디로 대야용(對野用)이었다.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야당과의 대화창구로는 내가 적격으로 꼽혔던 것이다.

정무장관 임명장을 받던 날, 노태우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 대하여 군부(軍部)에서 말이 많았다는 것을 명심하게. 지난번 공천 때도 여러 사람이 자네를 나쁘게 말하더군. 이제 언행(言行)을 조심하고, 야당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 주기 바라네.”

순간 곤혹스러웠다. ‘군부’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물었다.

“각하께서 특별히 군부라고 하셨는데, 군부라면 제가 누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마치 따지듯이 물은 게 실수였다. 노 대통령의 안색이 바뀌었다.

“군부라면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노 대통령이 말한 ‘군부’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무엇이든 에둘러 말하는 그의 성격상 ‘군부’라는 말을 빌려 나에 대한 못마땅한 심정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YS, “우리가 제1 야당”

 

정무장관이 된 나는 야당 총재들을 예방(禮訪)했다. 

제1야당인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부터 만나야 했지만, 김 총재 측 일정 때문에 뒤로 미루어졌다.

 

그래서 제2 야당인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면담 신청을 했다. 

당장 그날 저녁 상도동 자택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것이 YS와의 첫 번째 단독 대면이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후, YS는 내게 녹차를 직접 타 주면서 물었다.

“동교동에는 갔다 왔소?”

순간 ‘아! 

이분이 동교동을 의식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아직 안 갔습니다. 일정이 잡히면 인사 가려고 합니다.”

 

YS의 다음 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야지. 우리가 제1당이라는 사실을 알지요? 

표는 우리가 많이 받았소. 의석 수는 우리가 약간 적지만 말이오. 알지요?”

“네. 압니다.”

“앞으로 그쪽과 대화를 할 때 조심하시오. 

너무 정치하는 데 거짓이 많소.”

 

그러더니 YS는 선언이라도 하듯이 “민주주의는 정의로운 정치를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내가 올림픽을 화제로 올리면서 야당의 협조를 부탁하자 그는 “협조해야지요”라고 했다. 

그리고 또 침묵이 계속되었다. 잠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삼이란 분은 몹시 화제가 빈곤하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YS의 자택을 나서는 나를 붙잡고, 기자들이 “무슨 말을 나누었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전혀 없었다.

며칠 후 만난 DJ는 달랐다. 

 

그는 “이 장관이(종로의) 호남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더라. 

호남에 대해 배려를 많이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덕담을 건넨 후 메모를 꺼내놓고 정치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88서울올림픽에 북한을 초청하는 문제, 광주사태 해결 방안, 지역감정 해소 문제, 정치범 사면복권 같은 문제에서부터 “보안사가 재야(在野) 운동가인 박형규 목사를 제일교회에서 쫓아내려 공작하고 있는데, 중단해 달라”는 요청까지 다양했다.

 

그러다가 DJ는 자기가 나를 너무 몰아붙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역사와 세계 돌아가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의 화제는 아널드 토인비에서부터, 막스 베버와 슘페터까지 무궁무진했다. 

‘현역 정치인 중에 이 정도로 공부한 사람도 흔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만남은 4시간 넘게 계속됐다. 어느덧 자정이 다 되었다. 

나는 너무 오래 지체한 것 같아서 서둘러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5월 30일 13대 국회가 개원했다. 국회의장은 민정당의 김재순 의원이 됐지만, 부의장 두 자리는 야당의 몫이 됐다. 

상임위원장 자리도 다수당이 독점하던 관례를 깨고, 각 당이 의석 비례에 따라 나누어 가졌다. 

 

청문회 제도도 도입됐다. 6월 27일 국회는 ‘5공비리특별위원회(5공특위)’를 비롯해 7개 특위 구성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노태우 정부 앞에 험로(險路)가 예고된 것이었다.

 

■ 중간평가 실시 건의

 

다행히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정국은 일시 소강사태에 접어들었다. 

노사(勞使)분규와 학생시위도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기간 중 내놓았던 ‘중간평가’를 하느냐 마느냐, 한다면 재(再)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의 형태로 할 것인지 여부 등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1975년 신임투표를 통해 정국을 타개했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사례를 들어,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 형태의 중간평가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나는 올림픽 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65%에 달하는 상황에서 국민투표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고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을 자신의 전범(典範)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이모저모 재는 듯하더니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해 11월 ‘5공 청산’ 청문회가 시작됐다. 

이듬해까지 계속된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 역사의 교훈으로 삼으려 하기보다는 뭔가 튀는 언행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데 급급해 했다.

 

청문회에 불려 나온 5공 주역들도 실망스러웠다. 

어깨에 별을 몇 개씩 달고, 장군으로, 장관으로 한 시대를 호령했던 사람들이 “나는 의사결정 계통에 없었다”거나 

“몰랐다”로 일관했다. “국난(國難)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평소 나를 좋아했고, 1987년 급박한 정국 상황 속에서 의논상대였던 정호용(鄭鎬溶·육사11기) 선배에게 “청문회에 나가거든 당당하게 소신껏 발언하세요”라고 말씀드리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비리에 나도 실망했다. 

형제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제사 지낼 사람도 없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해 초 나를 찾아왔던 전경환씨의 모습을 떠올렸다.

 

1981년 국회에서 새마을본부 예산을 깎은 후 소원(疏遠)한 관계였던 그는 그때 호기롭게 말했다.

“그동안 형님이 청와대에 계셔서 정치를 하고 싶어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점퍼 입고 새마을운동만 열심히 하면서 참고 기다렸는데, 이제 태우 형님이 당선되셨으니 나도 국회에 진출해서 그분을 도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나는 “노태우 당선자의 뜻이 중요하니, 그분의 뜻부터 알아보라”며 돌려보냈었다.

 

■ 盧泰愚, “왜 날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는가”

 

노태우 정권의 5공 청산작업을 지켜보면서 나는 ‘노 대통령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5공의 공범(共犯)이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해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對)국민사과성명을 발표한 후, 백담사로 유배(流配)를 떠났다.

그렇게 1988년이 저물어 가는데도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서울올림픽의 감격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초조해졌다. 

어느 날 업무보고차 청와대에 들어간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조심스럽게 “제 판단으로는 올해 중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진언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표정이 흐려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1988년 11월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후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6·29 때 한번 벼랑에 서서 결단을 내렸으면 됐지, 

왜 자네는 자꾸 나를 벼랑 끝으로만 몰고 가려는가?”

 

순간 ‘이분이 생각이 달라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평가는 그걸로 물 건너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해 11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나를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내게 “언제든 대사(大事)를 치를 수 있도록 당 체제를 정비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이 말을 ‘중간평가에 대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힘이 났다. 

나도 “전투태세를 완비해 놓겠습니다”고 다짐했다.

 

그해 연말 내내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부지만 대통령책임제 정부임을 명심하라”면서 당의 체제정비, 사회 불순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전선(戰線) 형성, 대통령 공약사항 이행 점검 등을 강조했다. 

그런 지시를 받을 때마다 나는 ‘중간평가가 임박했다’고 생각하고, 중앙당 및 지구당의 체제정비와 조직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1989년이 밝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1월 1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간평가를 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했다. 

야당은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5공 청문회의 불씨를 다시 살리기 위해 전두환·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 5공 비리 청산을 위한 특검제(特檢制) 도입 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민정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였다. 

김윤환 원내총무와 나는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중간평가로 정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 5共 청산과 중간평가 유보

 

당시 야당은 중간평가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다. 

제2 야당 총재로 내려 앉은 YS는 “중간평가는 국민과의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신임투표에서 노 대통령이 패배하면, 자기에게 정치적 기회가 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반면 여소야대 상황에서 제1야당의 지위를 만끽하고 있던 DJ는 중간평가 국민투표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승리해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신임투표 형태로 중간평가를 하는 것은 위헌(違憲)의 소지가 있다”며 중간평가에 반대했다. 

JP는 아예 “그런 공약을 한 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태도였다. 

야당 총재 가운데 두 사람이 중간평가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청와대도 중간평가에 미온적이었다. 이후 중간평가를 한다, 안 한다를 놓고 무성한 말들이 오갔다. 

나는 중간평가를 해서 정국을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989년 3월,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와 김원기(金元基) 평민당 원내총무는 물밑교섭 끝에 정호용씨의 공직사퇴 등을 조건으로 중간평가 유보(留保)에 합의했다. 3월 20일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 유보’를 선언했다.

 

이후 정국은 ‘5공청산 정국’을 마무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민정당도 ‘5공 청산’에 대한 원칙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민정당의 정체성(正體性)과 관련되는 문제인데도, 그 문제가 의원총회나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제대로 토론에 부쳐진 기억은 없다. 청와대는 ‘소리 내지 말고 빨리빨리 지나가자’는 태도인 듯했다. 

1989년의 마지막 밤은 백담사에서 불려 내려온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마무리됐다.

 

■ 3당 合黨의 폐해

 

1990년 새해 벽두, 폭탄이 터졌다.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발표한 것이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이 YS와 JP가 지켜보는 

 가운데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명색이 원내총무와 사무총장, 정무장관을 역임한 당 중진이었지만, 그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중간평가가 무산된 이후 언론 등에서는 ‘합당을 통한 정계개편’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합당’이라면 고작 해야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 정도를 상상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보다는 ‘정책연합’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정책연합’의 대상은 DJ였다. 

정치에 몸을 담은 5공 시절 이후는 물론이고,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나는 DJ를 ‘용공(容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민주사회주의자도 못 되는, 미국의 민주당 리버럴 정도였다.

 

제13대 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 후, DJ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것은 황금분할”이라면서 “4당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자”고 주장했었다. 그는 “‘반대를 위한 반대’는 하지 않겠다. 정부·여당에 협조할 일은 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가 7·7선언을 통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내놓자, 자신이 진작부터 주장해 오던 공화국연합제 통일방안과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박철언 정무장관에게도 “이왕 정계개편을 하려면 지역을 초월해야 한다”면서 DJ와의 연합(정책연합)을 권유했었다. 하지만 3당 합당은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 진행됐다. 

 

JP는 물론 YS까지 끌어들여 DJ와 호남을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3당 합당은 1987년 제13대 대선을 치르면서 극명하게 드러난 지역감정을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DJ는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재야 운동권 출신들에게 의존하게 됐고, 그 결과 그가 이끄는 야당은 점점 더 보수야당의 전통에서 멀어졌다. 노태우 정권 초기 시작된 우리 정치의 병폐는 3당 합당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됐다. 

 

나중에 가서는 국회의원을 사고파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이처럼 정치적 윤리가 무너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3당 합당에 원인이 있다. 북방정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권의 이러한 잘못은 후대(後代)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3당 합당을 추인(追認)하기 위해 열린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다. 

나도 가만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민주당의 김상현(金相賢)·노무현(盧武鉉) 의원 등이 그랬던 것처럼 반대의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 그때 침묵했던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그때 우리가 소극적으로나마 3당 합당에 따라갔던 것은 내각제(內閣制)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재희(南載熙) 의원 등 가깝게 어울리던 동료 의원들과 이 문제를 토론했었는데, “내각제를 한다면 3당 합당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제가 바람직하지만, 내각제도 못 할 것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민정계는 자연스럽게 박태준(朴泰俊)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뭉치게 됐다.

 

박철언 정무장관 등 3당 합당을 추진했던 이들은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이 된 YS에게는 내각제하의 상징적 존재인 대통령 자리를 내주겠다는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민정계인 박태준 최고위원이 총리(수상)를 한 후에는, 민정계의 다음 주자(走者)들이 총리를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YS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YS는 오히려 “이번에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게 지원해 주면, 차기에는 당신을 밀어주겠다”며 박철언 장관을 설득하려 했다. 박철언 장관은 이를 거부했다. YS 방소(訪蘇) 당시 YS와 박철언 장관의 신경전,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 등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 YS의 역습

 

그러는 가운데 1992년 제14대 총선이 다가왔다. 

YS는 “먼저 제14대 대통령 후보를 정하고 난 후 제14대 총선을 치르자”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당을 자기에게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우리가 보기에 YS는 이미 옛날의 YS가 아니었다. 

YS는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싸우던 영웅이 아니라, 내각제 약속을 깨뜨린 ‘퇴색한 영웅’이었다. 

그가 전면에 나서면 총선은 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YS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타협책으로 나온 것이 ‘YS 책임 아래 총선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YS도 “선거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3월 24일 치른 총선 결과는 참패(慘敗)였다. 

 

218석의 공룡정당이던 민자당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149석을 얻는 데 그쳤다. 

김대중-이기택(李基澤)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이 97석을,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이 31석을 차지했다.

 

3·24총선 이틀 후 칩거 중이던 JP를 찾아갔다. 

그는 “자기 책임 아래 선거를 치르겠다고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면서 YS에 대해 막 화를 냈다. 

그러면서 JP는 이런 얘기를 했다.

 

“선거 기간 중에 저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최형우(崔炯佑) 의원이 우리(공화계) 의원들을 반줄(종로에 있던 유명한 룸살롱)로 불러내 YS지지선언서에 도장 찍게 했어요.”

 

총선 직후 당내에서 제기된 총선 참패 책임론이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하자 YS는 특유의 돌파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3월 27일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단독회담에서 “대선후보를 결정하기 위해 5월에 조기(早期) 전당대회를 열자”고 치고 나왔다. 승부사다운 역습(逆襲)이었다. 3월 28일 YS는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민정계 내에서는 5월에 후보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 빠르고, 8월쯤 결정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다수(多數)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태우 대통령은 YS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태준 최고위원도, JP도 놀랐다. 

 

노 대통령이 YS의 조기 전당대회 주장을 수용한 것은 그와 YS진영 간에 그때 이미 사후(事後)보장에 대한 밀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민정계는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4월 2일 김윤환·남재희·김용태·정순덕·김종호·정재철·금진호·김진재·이웅희 의원 등 9명의 친(親) YS 민정계(신민주계) 의원들이 ‘김영삼대통령후보추대위원회’ 결성을 선언했다. 

 

나는 YS추대위에 남재희 의원이 참여한 데 대해 많이 놀라고 실망했다. 

남재희 의원은 나와 민정당 창당을 같이했다. 

 

이후 정치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그가 YS에 대해 호의적인 발언을 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그는 내각제에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랬던 그가 YS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지식인의 허약함’에 대해 생각했다.

 

■ 盧泰愚, “朴泰俊은 안 된다”

 

3월 28일 YS가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한 직후 나는 박태준 최고위원을 찾아가 민정계의 대책을 의논했다. 

박 최고위원은 대선 출마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나는 박철언·심명보·이자헌(李慈憲)·장경우(張慶宇) 등 민정계 의원들과도 의견을 나눈 후 노태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3월 30일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나는 후보 경선은 완전자유경선제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박태준 최고위원에게 경선 출마 의사가 있음을 조심스럽게 알렸다. 노 대통령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이 의원, 박태준 최고위원은 안 됩니다.”

“우리(민정계) 수장(首長)인데 왜 안 됩니까?”

 

노 대통령은 박태준 최고위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재산문제 같은 것보다 훨씬 치명적인, 지금도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얘기였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대로 YS에게 모든 것을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박 최고위원의 출마를 반대하신다면 저라도 나가야겠습니다. 

자유경선이므로 누구라도 뜻이 있으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노 대통령이 반대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의외로 나를 응시하면서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날 대화가 와전(訛傳)되었다. 

내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박태준 최고위원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전하면서 “박 최고위원은 안 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청와대에서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청와대에서 나온 나는 아현동 박태준 최고위원 자택으로 갔다. 

노태우 대통령이 했던 얘기를 그대로 전하지는 못하고 에둘러 말했다.

 

“청와대에서 최고위원님을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박 최고위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소? 미국 정보기관에서는 내가 거의 완벽하다(후보가 되는 것이 틀림없다)고 하던데….”

 

박태준 최고위원은 자기가 직접 청와대로 가서 노태우 대통령의 의사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 만난 박태준 최고위원은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이어 이한동(李漢東) 의원도 청와대를 방문한 후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이제 육사(陸士) 출신은 그만 나와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 盧泰愚의 주장

 

《노태우회고록》(조선뉴스프레스 刊·2011년)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 대표가 선언을 한 다음 날 이종찬 의원이 긴급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저는 각하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으니 승낙해 주십시오’하는 승인을 받으려고 뵙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후보 경선에 나섭니다’하고 통보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후배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中略) 

그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되어서 YS의 돌출행동을 왜 다스리지 못했습니까? 

이 꼴이 무엇입니까?”라고 따지는 것 같았다.(中略)

 

이 의원은 자신도 후보 경선에 나가야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하는 한편, 경선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몇 가지를 요구했다. 그는 경선 과정에서 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주장이 옳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공정하고 대쪽 같은 이춘구 사무총장이 경선 실무를 관리하고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근까지도, 박태준 최고위원이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후 출마의사를 접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태우회고록》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기술(記述)되어 있다.

 

<나는 박 최고위원에게 “출마하지 마십시오”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 말이 많았다. 내가 이중 플레이를 한다느니, 결단력이 약하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원래 남의 의견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내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中略) 

나는 박 최고위원에게 “박 선배께서는 포철(浦鐵)을 성공시킴으로써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해 신화적인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경쟁자들이 온갖 약점을 과장해 상처를 입히려 할 텐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中略)

 

나는 이 정도로 내 뜻을 이야기하면 그가 적당한 명분을 찾아 후보 출마를 철회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보고를 받고 보니 철회는커녕 그대로 밀고 나갈 태세라는 것이었다.(中略)

 

나는 박 최고위원을 다시 만나려 했으나 마침 남부지방에 행사가 계획되어 있어 그냥 전화로 얘기하기로 했다. 

박 최고위원에게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내 참모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시고 결정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후, 그 참모에게 “그분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올바른 결심을 할 수 있게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지방에 있는 동안 전화보고가 있었다.

 “그분과 관계되는 자료를 정리해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심사숙고한 끝에 후보 철회를 결심했다”는 내용이었다.>

 

 

■ 민정계 후보 단일화

 

↑이종찬 의원은 1992년 4월 민정계 단일후보로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박철언 전 정무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의하면, 노태우 대통령이 말한 ‘참모’는 이상연(李相淵) 당시 안기부장이었다. 박 전 장관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태준 최고위원은 4월 17일 아침 이상연 안기부장과 조찬을 같이한 후, 출마포기 결심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생각해 보니, 노태우 대통령의 성격상 박태준 최고위원 면전에서 출마포기를 요구하기보다는 안기부장을 통해 출마를 단념시켰을 것 같다. 내 기억이나, 노태우 대통령, 박철언 장관의 회고를 막론하고, 어찌됐건 노태우 대통령 측이 박태준 최고위원의 ‘약점’을 가지고 그를 주저앉힌 것은 사실인 셈이다.

 

4월 1일 저녁, 나는 오유방(吳有邦)·김현욱·김중위·장경우 등 가까운 의원들과 식사를 같이하면서 경선 출마의사를 밝혔다. 그들도 동의해 주었다. 다음 날 나는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민정계 중진 모임에서 경선 출마의사를 처음으로 밝혔다.

 

4월 3일 나는 청구동 자택으로 JP를 찾아가 경선 출마의사를 밝히고 지지를 청했다. 

JP는 YS의 경선 출마선언에 대해 강하게 불쾌감을 표하면서도 나를 지지하겠다는 뜻도 표하지 않았다.

 

4월 8일 당무를 계속 거부하던 JP가 노태우 대통령과 저녁식사를 같이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즉시 청구동으로 달려갔다. JP는 “나도 이제는 할 말을 하겠다”면서 결연한 모습이었다. 

 

청와대에서 나온 JP는 하얏트 호텔로 직행했다. 

나는 JP의 비서관을 통해 찾아가겠다고 청했다. 

 

JP는 “피로하니 다음 날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YS 측에서 “JP가 YS 지지의사를 표했다”고 발표했다.

 

■ JP의 변심

 

JP의 변심을 본 나와 오유방, 장경우 등은 무엇인가 청와대나 YS 측에서 숨기고 있는 어떤 시나리오가 있다고 판단했다. 

4월 13일 나와 만난 JP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현실일세. 꼭 최선만 있는 것은 아니고 차선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기 바라네.” 

자신이 YS를 지지하게 된 것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암시였다.

 

1992년 4월 17일 오후 롯데 호텔에서 민정계 중진 7명(박태준·이종찬·이한동·심명보·박준병·박철언·양창식)이 모였다. 민정계 후보 단일화를 위해서였다. 오후 3시부터 열린 회의는 자정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참석자들은 두 차례 나와 이한동 의원만을 같은 방에 밀어넣고, 스스로 타협하도록 압박했다. 

이한동 의원은 딱 부러지게 자기가 꼭 해야겠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다른 자리에서 얘기했던 “이제 육사 출신은 그만해야 한다”는 의사만 표시하면서 내가 양보하기를 은근히 종용했다. 

결국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민정계 중진들이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박태준 최고위원도 내게 힘을 실어줬다. 결국 내가 민정계 후보로 결정됐다.

 

지금 생각하면 “육사 출신은 이제 그만”이라던 이한동씨의 주장을 내가 받아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무리 유연하고 온건하다 해도, 나 역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육사 출신이었다. 

 

박태준 최고위원뿐 아니라 나도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내가 한 발 물러서서 이한동 의원을 밀어줬으면 아름답지 않았겠나 생각이 든다.

 

■ 추천장 받는 것부터 봉쇄

 

우여곡절 끝에 내가 민정계 후보가 되기는 했지만, 선거운동은 쉽지 않았다. 

경선 후보 등록을 위해 대의원들의 서명을 받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경선을 하려면 7개 지구당에서 각각 대의원 10명씩 70명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당시 서울 중구지구당 위원장은 5공 시절 내가 종로-중구지구당 위원장을 할 때, 내 밑에서 부위원장을 했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나는 중구에서 대의원 10명의 추천을 받는 것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중구지구당 위원장에게 대의원 도장을 받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추천장 양식만 보냈다. 

그런데 등록일 하루 전, 중구의 추천서만 들어오지 않았다.

 

깜짝 놀랐다. 

아내가 중구지구당으로 달려갔다. 

지구당 위원장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고, 지구당 사무국장만 남아 있었다. 

그는 5공 시절 종로-중구지구당에서 조직부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아내가 “추천장은 어떻게 됐느냐?”고 다그치자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어물어물했다. 

아내는 다시 “그럼 추천장 양식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그로부터 추천장 양식을 돌려받은 후, 직접 대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추천장에 날인(捺印)을 받았다.

박정수(朴定洙·외교통상부장관 역임) 의원은 자기 아래 있는 20명의 대의원 가운데 10명은 나를, 다른 10명은 YS를 추천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박 의원은 YS에게 밉보여 나중에 어려움을 겪었다.

 

정견을 발표하려 해도 대의원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지구당위원장들은 압력을 받고, 내가 연설회를 하려 하면 대의원들을 모아주지 않았다. 

부산에 갔을 때에는 곽정출(郭正出) 의원 한 사람만 나타났을 뿐, 대의원들은 안 보이고 정보기관원과 형사들의 모습만 보였다. 

강원도당 위원장은 내 아래서 종로-중구지구당 부위원장을 했던 김문기(金文起) 의원이었다. 

강원도 유세장에 갔을 때, 대의원들은 200여 명이 모여 있었지만 도당 위원장인 김문기 의원은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나는 중앙정보부장으로 모셨던 유학성(兪學聖) 의원을 찾아가 호소했다.

“부장님, 다른 분은 몰라도 부장님께서는 저를 좀 지지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 의원, 내가 이 의원 지지선언을 하면 노태우 대통령이 이 의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어요. 

나로서는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으니, 이해해 주시오.”

 

그런데 다음 날 유학성 의원은 YS를 수행, 지역을 돌았다. 

유 의원의 말대로라면 노태우 대통령이 YS를 지지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기가 막혔다.

 

■ 나의 아내, 金玉淑 만나 “YS 믿지 말라”

 

누가 우리 선거캠프에 들어오더라도, 다음 날이면 사라졌다. 

외압(外壓) 때문이었다. 5월 10일 김복동(金復東) 의원에게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힐튼 호텔에서 만났다. 김 의원이 말했다.

 

“아우님, 이제 그만 하시게. 이제 다 끝났어.”

“그게 무슨 얘깁니까?”

“가족회의에서 YS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어.”

 

순간 나는 화가 났다.

“아니, 대한민국의 운명을 노 대통령 가족회의에서 결정한다는 얘깁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아우님이 안 될 수고를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서 이러는 거요. 

잘 생각해 봐요.”

며칠 후 다시 힐튼 호텔에서 김복동 의원을 만났다. 

김 의원은 다시 한 번 “이 의원, 안 되는 일이니까 정말 그만두시오”라고 권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화가 나서, “이젠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내 얘기를 듣고 난 아내는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내가 김옥숙 여사를 만나보겠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아내와 김옥숙 여사 간에는 이런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YS를 지지하는 건지 아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노 대통령이 YS를 지지하는 거라면, 우리는 내일이라도 그만두겠습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노 대통령이 YS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

“그럼 김윤환씨가 YS 지지 도장을 받고 다니는 건 뭡니까?”

“이 의원도 지지 도장을 받으면 될 거 아니에요?”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두고 보세요. 

YS는 반드시 정치보복을 합니다. 

설사 YS가 안 하려 한다 해도 주변에서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YS가 한 사후(事後) 보장을 절대로 믿지 마세요.”>

 

■ 경선거부 선언

 

5·19 전당대회를 앞둔 5월 16일 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대의원들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대의원들 앞에서 제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만 한 번 주십시오. 

 

제게도 10분, YS에게도 10분.”

“그러면 전당대회 보이콧은 하지 않을 겁니까?”

“네. 안 하겠습니다.”

 

노태우 대통령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김중권(金重權) 정무수석에게 노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를 해주고, 그런 뜻을 당과 상도동에 전해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중권 수석은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가서 “이렇게 됐으니, 전당대회에서 두 분 모두 연설을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YS는 “연설은 무슨 연설.... 치워버려라”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당에서는 “전당대회에서 정견발표하는 그런 전당대회가 어디 있느냐?”는 기상천외의 답변이 왔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전당대회에서 10분이라는 발언시간이 주어진들, 그 시간에 내가 불공정 경선에 대한 비판만 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승복하겠다”는 말을 했을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잘 풀렸을 것이다. YS가 내 마지막 제안을 어른스럽게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YS의 거부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는 다음 날 롯데 호텔에서 긴급회의를 했다. 

박태준·채문식·김용환(金龍煥)·이한동·박준병·유수호·양창식 등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전당대회 불참을 결정했다. 회의가 끝난 후 나는 경선거부를 선언했다.

 

5월 19일 열린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후보가 66.3%를 얻어 대통령 후보가 됐다. 

경선을 제대로 치르지도 못한 나는 33.4%를 득표했다. 

그것은 YS의 전횡에 대한 민정계의 분노의 표시였다.

 

경선 과정에서 YS의 비민주적 행태를 지켜본 나는 그가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하면 민주주의고 남이 하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민자당 경선 후보 등록을 한 후, 노태우 대통령이 YS와 나를 청와대로 초치해 점심을 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경선은 공정해야 한다. 

각하 밑에 있는 정무수석(손주환)이 대세론(大勢論)을 얘기하고 다니는데, 이건 불공정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다소 잡음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 

5월 7일 손주환(孫柱煥) 정무수석이 경질되고 김중권씨가 수석이 됐다.

 

노태우 대통령의 말처럼 그때의 불공정 경선을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다소 잡음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았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나의 운명은,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어찌됐거나 19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집권당이 경선에 의해 후보를 선출하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를 지명했던 것을 생각하면, 경선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경선을 거부했다. 

이후 1997년 이인제(李仁濟) 후보가, 2007년에는 손학규(孫鶴圭) 후보가 경선결과에 불복(不服)하고 탈당했다. ‘

경선불복’이라는 나쁜 전통이 1992년 나의 경선거부와 탈당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이 있는 것을 잘 안다. 

그런 비판을 받아들인다. 내가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 나쁜 선례가 된 것은 사실이다.

 

■ YS, 백기 투항 강요

 

전당대회가 끝났지만, 민자당을 떠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박태준·윤길중(尹吉重)·채문식 등 날 늘 아껴주던 분들이 마음에 걸렸다. 

 

나와 YS 간의 화해를 추진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교 동창인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은 “앞으로 어딜 가게 되든, 일단 YS와 만나 대화를 해봐라. 

그러지 않으면 대인(大人)이라고 할 수 없지 않으냐?”고 했다. 

정재문(鄭在文) 의원이 YS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종찬 의원이 5월 22일 새정치모임 결성에 앞서 윤길중 고문(오른쪽)에게서 받은 현판글씨를 들어 보이고 있다.

 

전당대회 후 하얏트 호텔에서 YS를 만났다. 

나는 직설적으로 따졌다. “저희는 대표님을 민주화 지도자라고 존경해 왔는데 경선판을 이렇게 만드실 수 있습니까? 

이번 경선을 멋있게 치렀으면 대통령 선거가 훨씬 유리했을 것입니다. 

이래서야 많은 국민이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懷疑)를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YS는 “지난 일은 그만 얘기하자”면서 “당으로 돌아와서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동지들과 의논해 보겠다”고만 했다.

 

그런데 다음 날, YS가 광화문에 있던 우리 캠프사무실로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경선 과정의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던 때라 YS 수행원들과 우리 캠프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YS가 말했다.

“이 의원,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고 같이 갑시다.”

“알겠습니다. 내일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찌꺼기가 청산되지 않겠습니까?”

 

YS도 승낙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기자실로 전화를 걸었다. 

기자실 관계자는 나와 YS의 기자회견 일정은 잡혀 있지 않다고 했다. 

 

나는 YS의 김기수(전 청와대수행실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비서는 당황해 하더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했다. 

 

다시 수화기를 든 김 비서는 “이 의원 혼자 기자들을 만나서 회견을 끝내 달라고 한다”고 전했다. 

나보고 백기(白旗) 투항을 하라는 얘기였다. 

나는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이후 나는 새정치모임을 만들어 지방을 순방하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묻고 다녔다. 

결론은 ‘지금처럼 YS에 대해 무조건 복종만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더 이상 민자당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 金宇中의 출마 만류

 

나는 1992년 8월 17일 민자당을 탈당해 새한국당 창당에 나섰다. 

채문식·김용환·장경우·이자헌 의원 등이 합류했다. 

새한국당이라는 이름은 김용환 의원이 지었다.

 

새한국당의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국민후보론’이 나왔다. 

국민의 신망이 있는 인사를 후보로 추대하자는 것이었다. 

강영훈(姜英勳) 전 국무총리,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 등이‘국민후보’로 거론됐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1992년 10월 29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김우중 회장은 나나 김용환 의원과 가까운 사이였다. 

새한국당 창당을 추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창당에 소요되는 자금을 김우중 회장에게 의지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암암리에 있었다. 

 

대우그룹으로서도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만들어 기세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언론에서는 김우중 회장 출마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김우중 회장도 출마의사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나는 재벌의 정치참여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10월 29일 힐튼 호텔에서 김우중 회장과 만났다. 

김우중 회장이 에둘러서 자신의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다. 

 

내가 물었다.

"너.....출마할 생각이 있는 거냐?”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하겠다고 나서는데, 나라고 못할 것 있겠느냐? 

 

나이로 봐도 정주영 회장이야 고령이지만, 난 연부역강(年富力强)하지 않니?”

“너와 정주영씨가 경쟁을 하게 되면, 이 나라 정치판은 재벌 싸움판으로 바뀌지 않겠느냐?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래도 너는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신화를 만든 사람인데, 정치판에 끼어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나?”

 

결국 김우중 회장은 그날 대선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나는 박철언 전 장관과 함께 강영훈 전 국무총리를 찾아가기도 했다. 

 

강 전 총리에게 출마를 권하자, 

강 전 총리는 “나는 돈도, 조직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저희가 총리님을 모시면서, 총리님께 돈까지 내라고야 하겠습니까? 

돈을 만드는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총리님께서 나서시면 호응이 있을 것입니다.”

 

강 총리는 입을 쩝쩝 다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게 적절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광복 후 잠시 북한에 있을 때, 반(反) 김일성운동 모임에 나간 일이 있어요. 

그때 동료들이 ‘네가 앞장서면, 우리 모두 따라가겠다’고 하기에 얼결에 내가 모임의 대표가 됐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느 사이엔가 나를 따라오겠다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버리고 나 혼자만 덜렁 남아 있습디다.”

‘지금은 너희가 나를 추대한다고 하지만, 나만 나무 위에 올려놓고 없어져 버리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

 

이분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전 총리댁을 나서는데 사모님이 따라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저 양반을 그냥 조용히 살게 내버려둬 주세요.”

 

■ DJ와 정주영의 러브콜

 

새한국당 창당이 가시화되면서 김대중 후보의 민주당과 정주영 후보의 통일국민당으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왔다. 

어느 날 옛 상사(上司)이던 강창성(姜昌成) 민주당 의원이 편지를 보내왔다. 

‘당 대 당 통합’을 하자는 것과 나에 대한 예우와 지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논의가 가능하다는 DJ의 제안이 담겨 있었다. 

 

DJ의 측근 중 한 명인 조승형(趙昇衡) 의원도 오유방 의원을 통해 비슷한 제안을 해왔다. 

김원기 의원이 DJ의 특사로 와서 강창성 의원이 편지에서 말한 내용을 확인해 주었다.

 

이어 우리 측 장경우 사무총장과 DJ 측 한광옥(韓光玉) 사무총장 사이에 구체적인 당 대 당 통합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DJ 측근들 가운데 일부가 견제를 하는 바람에 더 이상 진척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조승형 의원이 일을 성사시키려 진심으로 애를 많이 썼다.

 

새한국당의 의견은 갈렸다. 국민당으로 합류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정식으로 창당을 하기 전에 그런 식으로 합류하면 야합(野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당 대 당’ 통합으로 해야 제대로 대접을 받으면서 합당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이 때문에 비난을 많이 받았다. “자기가 대통령 후보가 되려 저런다” 

“지분 욕심 때문이다” 등등.... 하나 둘 국민당으로 떠나갔다.

 

■ 국민당 行

 

11월 17일 새한국당이 정식으로 창당됐다. 나는 새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나는 후보수락연설에서 “정치개혁에 도움이 된다면 어느 누구와도 연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고 협상의 문을 열어놓았다. 

민주당과의 연대가 물 건너가자 국민당의 구애는 더욱 강해졌다. 

윤길중, 박종태 고문 등은 “어차피 이기긴 힘들고 YS 집권은 막아야 한다. 

국민당과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 YS에게 갈 보수표를 최대한 분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장경우 의원을 불러 국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은 시원시원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이기면, 나는 나이도 있고 당수 할 마음도 없으니 이 의원이 당수를 하세요.”

지분협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완전히 ‘모개(한묶음) 흥정’하는 식이었다. 

 

12월 12일 나는 후보 사퇴와 함께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당원들은 난리가 났다. “당신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배신당했다”는 비난은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YS를 꺾을 것만 생각했다.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하기는 했어도, 정 후보가 당선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주영 후보가 YS표를 많이 깎아먹어 야당이 집권하는 것도 민주주의 발전에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선 일정 때문에 정식 합당절차는 밟지 못한 상태에서 합동선거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정주영 회장은 회의 때면 나를 옆자리에 앉혀 공동대표처럼 대접해 주었다.

 

서울 종로 효제국민학교에서의 마지막 유세를 마치고 당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정주영 회장은 “이제 다 됐어”라며 승리를 장담했다. 내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정 회장은 “미국 CIA에서 나온 자료”라고 했다.

 

■ DJ, “YS는 무슨 일이든 할 사람”

 

물론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승자가 된 것은 김영삼 후보였다. 

김대중 후보는 즉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에게 힘이 쏠리면서 정국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대선 전에 있었던 합당 관련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할 상황이 못 됐다. 

 

1993년으로 해가 바뀐 지 얼마 안 되어, 통일국민당 총재였던 정주영 회장이 DJ를 방문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 보도를 보고 DJ를 찾아갔다. DJ가 말했다.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DJ가 민주당사를 떠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이 야권통합을 제안했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왜 거절하셨습니까?”

“이 의원, 정주영씨는 기업인입니다. 정부가 한마디만 하면 기업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정주영씨가 어떻게 정치를 계속할 수 있겠어요?”

실제로 이후 상황은 DJ가 말한 대로 전개됐다. 

 

YS정권 출범을 전후해서 정부가 현대그룹을 전방위로 압박하자, 정주영 회장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통일국민당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다. 사실은 나도 내심 야권통합을 제안하기 위해 동교동을 찾은 것이었기에 DJ의 말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내게 DJ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YS시대입니다. YS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이럴 때일수록 위기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 의원은 위기관리에 취약한 것 같아요.”

순간 ‘위기관리’라는 말이 머리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DJ가 정계은퇴와 영국행을 선언한 것이 바로 ‘위기관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확인시켜 주듯 DJ가 말했다.

“이 의원, 지금은 무조건 나처럼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절대 국내에 있지 마세요.”

 

DJ의 충고는 고마웠지만, 나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외유(外遊) 길에 올라 미국과 함께 평소 가보고 싶었던 이스라엘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DJ의 경고는 현실로 다가왔다. 

YS정권은 처가 친가 할 것 없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샅샅이 털었다. 

사업을 하던 처남은 하도 시달린 나머지 미국 LA로 가서 이후 5년 동안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국한 나는 그해 3월부터 이기택 민주당 대표, 통일국민당의 김동길(金東吉) 대표 등과 함께 야권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말로는 하자고 하면서 지지부진했다.

 

■ 영국에서 DJ와 만나

 

1992년 6월 22일 런던에 유학 중이던 아들을 만나러 영국으로 갔다. 

아들은 뜻밖의 얘기를 했다. 얼마 전 DJ의 런던 강연 때 갔다가 인사를 했더니 “아버지는 언제 영국에 오시느냐? 

 

오시거든 꼭 내게 연락을 해달라고 전해달라”면서 연락처를 주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DJ는 당장 만나자면서 차를 보내겠다고 했다.

 

 

↑1994년 이기택 민주당 대표, 김동길 국민당 대표와 만나 

 야권 통합을 논의하는 이종찬 새한국당 대표.

 

나는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케임브리지로 갔다. 

DJ 곁에서는 이강래(李康來·정무수석비서관·국정원 기조실장·국회의원 역임) 비서가 수발을 들고 있었다. 

 

나와 DJ는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말했다.

“YS가 대통령을 하고 있으니, 총재님도 대통령을 한번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정계를 은퇴했어요. 이제는 이 의원의 시대요. 

이 의원이 대통령을 해야지요.”

 

나는 김동길, 이기택 대표와의 야권통합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DJ가 단호하게 말했다.

“야권통합은 해야 합니다!”

 

그 순간, 나는 ‘이분이 정치를 떠난 게 아니구나’ 확신하게 됐다. 

DJ는 내게 “이기택 대표에게 전달하겠으니, 귀국하거든 야권통합 노력을 계속하라”면서 “껄끄럽겠지만, 박찬종(朴燦鍾)·김근태(金槿泰)씨와도 함께하라”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한나절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귀국하자 권노갑(權魯甲)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해 8월부터 나는 1년여 동안 이기택·박찬종·김동길씨 등과 야권통합을 논의했다. 

하지만 진전은 없었다. 박찬종씨는 DJ-이기택씨와는 통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기택 대표는 1997년에 DJ가 자기를 밀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나나 김동길 대표가 민주당에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의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동길 대표는 DJ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니 야권통합 논의가 진전을 볼 리 없었다.

 

결국 1995년 2월, 새한국당은 민주당과 통합했다. 

나는 부총재급인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이때 경기고 후배인 김근태씨도 민주당에 입당, 부총재가 됐다.

 

■ DJ, 서울시장 후보로 李會昌 영입 시도

 

1993년 7월 4일 DJ가 귀국했다. 

이듬해 1월 그는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차츰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DJ는 나를 자주 불렀다. 때문에 ‘DJ가 나를 이기택 대표를 견제하는 기둥으로 키우려 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1994년 11월 초 권노갑씨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DJ는 “이회창(李會昌)씨가 내년 지방선거에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으면 좋겠다”면서 “그를 잘 아느냐”고 물었다. 

 

YS정권에서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씨는 ‘대쪽’ 이미지로 당시 인기가 높았다. 

이회창씨는 경기고 선배여서 잘 아는 사이였다.

 

내가 안다고 했더니, DJ는 내게 이회창씨에게 의사를 타진해 보라고 했다. 

11월 9일 이회창씨와 식사를 같이했다. 

내가 말을 꺼냈다.

“선배님, 서울시장 한번 안 하시겠습니까?”

 

이회창씨는 펄쩍 뛰었다.

“아니, 왜 그런 소릴 하는 거요?”

“많은 사람이 선배님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면 좋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국무총리를 한 사람인데, 이제 서울시장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 같소.”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임명직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이제 선출직이 되면 서울시장의 위상은 굉장히 올라갑니다. 국무총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대권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나는 당시 파리시장으로 대권에 도전하고 있던 자크 시라크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없어 했다.

“나는 안 하겠소. 그런데 이게 누구 얘깁니까?”

“사실은 DJ의 뜻입니다.”

“뜻은 고맙지만, 나는 안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다음 날 이회창씨의 뜻을 전하자, DJ는 “그럼 조순(趙淳)씨는 어떠냐?”면서 그를 아느냐고 물었다. 

“잘 안다”고 했더니, DJ는 “한번 만나서 내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얼마 후 조순 교수를 만나 서울시장 출마를 권유했더니, 그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요?”

“그야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등을 지내면서 많은 분에게 좋은 인상을 주셨기 때문이죠.”

“고맙소. 하지만 다른 좋은 분들도 많을 테니 그분들 의사를 타진해 보고, 최종적으로 내가 꼭 나가야 한다면 해보겠소.”

■ DJ, 경기지사 출마 제안

 

권노갑씨가 고건(高建)씨 등을 접촉해 보았지만, 결국 조순 교수로 낙착을 봤다. 

권노갑씨가 이기택 민주당 대표를 찾아가 “서울시장 후보로 조순 교수를 출마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기택 대표는 “왜 그렇게 인선을 맘대로 하느냐”면서 “경선을 거쳐야 한다”고 고집했다. 

 

경선에 앞서 조순씨가 입당 절차를 밟기 위해 당사에 왔을 때에도 이기택 대표는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느냐?”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조순 교수를 무시했다.

 

1995년 3월 23일 DJ가 동교동 자택으로 나를 불렀다. 

그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기지사 후보로는 이 의원 말고는 없어요. 

이 의원이 경기지사로 나가줘야겠소.”

 

순간 나는 장경우 의원을 떠올렸다. 

민정당 시절부터 줄곧 내 밑에 있었고, 1992년 대선 이후에도 나를 따라다니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던 그는, 얼마 전에 내게 경기지사 출마 의사를 표했었다. 나도 찬성이었다.

 

나는 장경우 의원의 뜻을 이기택 대표에게 전했다. 

이 대표는 잠시 입맛을 다시더니 “그렇게 해보자”고 했다.

 

장 의원은 이기택 대표의 고려대 동창이었다. 

그런데 DJ가 나보고 경기지사로 나가라니 난감했다.

“제가 종로 사람인데, 어떻게 경기지사를 나갑니까?”

“종로 사람, 서울 사람이 어디 있소? 

따지고 보면 다 경기도 사람 아니오? 

이 의원도 경기도에 연고가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데, 마다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장경우 의원의 일을 설명했다.

“제가 경기지사로 나서려면, 먼저 장경우 의원의 경기지사 출마에 대해 이기택 대표에게 말했던 것부터 거두어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됐소. 어차피 이기택 대표에게도 얘길 해야 하니 이 의원이 이 대표에게 직접 얘기하세요.”

 

다음 날 나는 이기택 대표를 만났다.

“지난번에 경기지사로 장경우 의원을 추천했는데 지금 선거판 돌아가는 것을 보니 장 의원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요. 

내가 직접 경기지사로 나서보겠소.”

그러자 이기택 대표는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李基澤의 반발

 

“그거 DJ의 뜻 아닙니까?”

“그분이 권한 건 맞아요.”

“난 못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1995년 5월 조순 서울시장 후보(오른쪽)의 선거유세를 

  지원하는 이종찬 의원.

 

“이건 DJ의 정계 복귀 시나리옵니다. 난 못 합니다.”

“아니 이보시오. 

내년 지방선거에서 어차피 영호남이나 충청은 지역구도로 갈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아닙니까? 여기서 승리하면 그 영광이 이 대표에게 가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하지만 이기택 대표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이건 DJ의 정계 복귀 시나리오여서 나는 못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기택 대표의 말을 그대로 DJ에게 전했다가는 내가 두 사람을 싸움붙이는 형국이 될 것 같았다. 

나는 고민 끝에 DJ에게 “이기택 대표에게는 다른 복안이 있는 모양입니다”라고 말했다.

 

DJ도 눈치가 빨랐다. 대뜸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오?”라고 짚었다. 

그렇다고 이기택 대표가 “이건 DJ의 정계 복귀 시나리오”라며 거절하더라는 얘기는 할 수는 없었다.

“아마 조순 서울시장의 경우도 그렇고, 이번에는 저를 미시니까 그러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이기택 대표에게는 내 뜻을 전하죠.”

 

DJ는 그 자리에서 강창성 의원을 불러 이기택 대표를 설득하라고 했다. 

강창성 의원과 이기택 대표는 서울 아현동에서 윗집 아랫집 사이여서 무척 친했다. 

하지만 강창성 의원의 설득도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DJ는 장경우 의원을 직접 불러 “당신에게는 지금 국회의원이 더 맞는다. 

내가 앞으로 전폭적으로 밀어줄 테니 경기지사 후보는 양보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장 의원은 그 자리에서는 “이기택 대표와 의논해 보겠다”고 해놓고서는 출마를 강행했다.

 

DJ는 나를 불러서 장경우 의원과 경기지사 후보 자리를 놓고 경선을 벌이라고 주문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장경우 의원은 제가 아우처럼 데리고 있었고, 나 때문에 민자당을 탈당하고, 나와 함께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온 후배입니다. 그런 후배와 경선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저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 DJ, 5·27지방선거 계기로 창당 서둘러

 

결국 DJ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권노갑씨는 동교동계의 안동선(安東善)씨를 당내 경기지사 경선에 내보내 장경우 의원을 꺾게 한 후, 안 후보가 내게 후보직을 양보한다는 구상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실천 가능성이 없는 얘기였다. 

 

설상가상으로 권노갑씨가 안동선씨를 돕기 위해 투입한 유준상 의원이 그 뜻을 무시하고 고려대 선배인 장경우 의원을 지원했다. 이 일로 유준상 의원은 DJ의 눈 밖에 났다. 우여곡절 끝에 장경우 의원이 경기지사 후보가 됐다.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시작됐다.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지방자치제가 중단된 이래 34년 만에 실시되는 자치단체장 선거였다. 

 

이기택 대표는 노골적으로 조순 서울시장 후보를 외면하고 장경우 경기지사 후보만 지원했다. 

조순 후보에게는 필요한 선거자금조차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5·27 선거에서 민주당은 서울에서 조순 시장 한 사람만 당선시켰을 뿐, 경기지사와 인천시장은 신한국당에 내주고 말았다. DJ는 “조순~이종찬이라는 황금카드를 이기택이 놓쳤다”고 탄식했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는 참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5·27선거는 내연(內燃)해 오던 DJ와 이기택 민주당 대표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를 계기로 DJ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서두르게 된다.

 

 - 배진영 (2012년 6월호)

출처> 사선암(四仙岩) ㅣ 풍월(風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