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시대 생활상

사진으로 본 대한제국시절의 생활풍속

야촌(1) 2019. 8. 15. 18:40

■ 구한말 대한제국 생활풍습

 

불과 100년전 우리 조상들의 생활 풍습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정체성(正體性)이 기도 합니다.

세월의 변함이 격세지감(隔世之感) 입니다.

 

 

↑마방집(馬房)

 

마방집이란 말을 두고 삯짐을 싣는 것을 업으로 하는 곳이다.

말이 더 이상 운반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면서, 마방집도 사라진

풍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행차림

 

탕건을 쓰고 괴나리봇짐을 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오랜 풍상의 자국과 인자함이 깃든 얼굴이다.

 

↑소를 탄 농부

 

"말 탄 양반 끄떡, 소 탄 양반 끄덕" 있듯이 소가 교통수단에 탈것으로 쓰이

었다. 대개는 농부가 이용했다.

 

↑서당의 훈장과 학도들.

 

훈장의 위엄서린 얼굴과 어린이들의 표정이 재밌다.

 

↑서당풍경

 

↑서당(書堂) 풍경

 

삭발한 아이들과 편발한 아이들이 뒤섞여 있다. 배우는 책이 각기 다르므로

글 읽는 소리가 매우 시끄럽다.

그러나 아기 우는 소리, 다듬이질 소리와 함께 삼호성(三好聲)이라 하여 이

웃으로 부터 "소음공해"라고 반발을 사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필방(紙房)

 

아이들은 글 읽는 외에 붓글씨를 배웠다. 따라서 지필묵(紙筆墨)의 수요가

대단해 동네마다 이런 필방이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양반의 조복(朝服)

 

문관을 동반(東班), 무관을 서반(西班)이라고도 하여

양반(兩班)이라고 했다. 요컨대 조선조의 귀족계급을

일컫는 말이다.

 

조복(朝服)은 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 붉은빛의 비단으로 만들며, 소매가 넓고 깃이 곧다.

 

↑무관의 정장. 환도(環刀)를 차고 있는 젊은 무관의 모습.

 

↑사또의 나들이

 

남여(藍輿)를 두 사람의 교군에 메고, 양옆에 구실아치 둘이 따른다.

뒤에 있는 종자는 서류궤를 짊어지고 있다. 藍輿는 의자와 비슷하고 뚜껑

없는 작은 가마인데 승지(承旨)나 참의(參議) 이상의 벼슬아치가 탔다.

 

↑ 사인교(四人轎),

     앞뒤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게 돼 있다. 민간에서 혼인할 때 주로 사용했다.

 

↑큰 벼슬아치의 가마.

   네 사람이 메게끔 되어 있어 사인교라고 한다.

 

↑고관의 등청.

 

고관이 호피를 깐 사인교를 타고 등청을 하고 있다.

4인의 교군외에 단도를 찬 네 명의 호위병에 몇 사람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있다(1900년대).

 

↑초헌(軺軒)

 

조선시대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외바퀴 수레로, 명거(命車), 목마(木馬), 초거

(軺車), 헌초(軒軺)라고도 불렀다.

 

이 초헌은 앞뒤로 길게 난 들채와 들채 윗부분의 의자와 발판, 들채 아랫 부분의 외바

퀴와 외바퀴를 고정시키는 두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들채와 의자, 발판은 나무로 만들어 흑칠(黑漆)로 마감 하였으며, 바퀴기둥은 나

로 만들어 쇠판을 덧씌웠다.

 

의자 등받이와 발판에는 해, 구름, 당초(唐草) 등의 문양을 부조(浮彫) 또는 투각

(透刻)하였으며, 들채의 앞부분과 중간 부분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나들이.

 

나귀를 타고 나선 나들이. 고삐 잡은 하인의 표정과 행색엔 고달픔이

깃들어 있다.

 

↑나루터.

    농우를 건네주는 나룻배 멀리 강 건너에는 숲에 둘러싸인 그림 같은 강촌이 보인다.

 

↑유생(儒生).

    몸과 마음을 한치도 흐트리지 않을 것 같은 유학자의 정정한 모습.

 

↑술상.

    자작하는 노인네가 두 장정을 초대한 모양. 개다리 소반 위에 간단한 식사도 준비 했는

   가 보다.

 

↑양반댁 아씨의 나들이.

 

귀하게 자랐음직한 양반댁 아씨가 가마를 타고 나들이에 나섰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마 옆을 따르던 몸종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역참(驛站).

 

역말을 타고 여행하다가 역말을 갈아 타는 역참에 이르면 지친 말을 기운 나게 새 말로

바꾼다. 대개 25리마다 1참을 두고 50리마다 1원을 두었는데 역참과의 거리는 팔십 리

정도가 보통이었다.

 

↑마을 공동우물,

 

이런 공동우물에서 마을 아낙들은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맞대며, 서로의 소식을 묻고

소문을 교환하는 등 얘기꽃을 피웠다.

 

↑조랑말과 나그네.

 

여름의 산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나그네. 먼산들의 능선을 보니 산마루 턱을 거의

다 오른 모양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 갈모는 기름종이로 만든 것으로 양산과 우산의 역

할을 두루 했다.

 

↑조선조의 무관들,

 

무관으로 등용되려면 과거의 일종인 무과를 거쳐야 했다.

천인은 응시자격이 없었고, 학술보다는 실기 위주의 시험 이었다.

 

↑날품팔이 노동자.

 

늘 입에서 떼지 않는 담뱃대는 그들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는 십상이다.

 

↑ 제주 여인들의 물 깃는 모습

 

↑송사(訟事).

    동헌의 고을 원 앞에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다.

 

↑죄인 : 큰칼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죄인인 모양이다.

 

↑ 태형.

 

5형(笞刑, 杖刑, 徒刑, 流刑, 死刑) 중 하나로 죄수의 바지를 벗기고 매로 볼기를 치는

형벌. 10~60대까지를 태라 하고 70~100대까지를 장이라 였다.

 

장의 경우는 도형(옥살이)도 병과가 되었고 태형은 비교적 경한 범죄에 적용되었으며

1대에 1냥 4돈으로 속전되었었다.

 

↑칼을 쓴 죄수들.

 

죄수들이 칼을 쓰고 감방 밖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칼은 중죄인에게 씌우것으로

"큰칼"과 "작은칼"이 있어 큰칼은 길이가 1m 35cm 정도, 작은 1m 정도였다.

 

↑무릎을 치는 태형

 

5가지 태형중 하나로 죄인을 때린 매가 흩어져 있고 치는 형리도 더운 웃옷을 벗고 있다.

 

↑ 주리(周牢)

 

조선시대 죄인의 두 다리를 묶고, 2개의 주릿대에 다리를 끼워서 엇비슷이 조여 비트는

형벌. 본디 말은 주뢰(周牢)이며, 전도주뢰(剪刀周牢)라고도 한다.

 

↑주리 틀기.

 

비가 내리는데도 형리들은 갓을 쓰고 주리를 틀고 있고 공개 형인지 많은 사람들이 구경

을 하고 있다.

 

↑ 태형(笞刑)

 

바지를 벗기고 형틀에 묶은 채 볼기를 치고 있다. 죄인의 볼기를 작은 형장으로 치던 태

형은 1920년까지 존속했던 형벌이다. 보통 곤장친다.

 

고 하는 것은 태형보다 중죄인에게 가하는 형벌로 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 치도곤(治盜棍) 등 다섯 가지가 있다.

 

곤장은 버드나무로 만들며 치도곤이가 제일 큰 것으로 길이 5자 7치, 너비 5치 3푼, 두께

8푼이고 소곤은 길이 5자 1치, 너비 4치, 두께 4푼으로 되어 있다.

 

↑형구.

 

죄수에게 태형이나 곤장을 칠 때 몸을 묶어놓기 위한 기구로 발목과 허리, 그리고 팔을

묶는 가죽 띠가 보인다.

 

↑조선시대 형구들,

 

큰칼이 세워지기도 하고 놓여 있기도 한데, 몽둥이,사슬에 참형을 하는 칼도 보인다.

 

↑호랑이 덫 : 범이 잘 지나다니는 곳에 만든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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