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상설 한국 근대수학교육의 아버지
[주간동아 2004-08-13 16:0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바로 그 일송정(一松亭) 정자에서 우리 답사반 일행은 ‘선구자’를 합창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외국어대 사학과는 창과 20주년을 맞아 7월 중순 고구려 및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사학과 교수와 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33명의 답사반 일행은 고구려사 전공인 여호규 교수의 인솔 아래 고구려 유적답사를 마치고, 청산리 전장을 가로질러 용정(龍井) 초입 해란강(海蘭江)이 감싸 도는 일송정에 올랐다.
사방이 탁 트인 일송정 정자에서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용정 땅은, 바로 간도에서 우리 선조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성지인 셈이다. 그 성지에 위치한 몇몇 학교를 찾아간 우리 일행은 해란강 근처에서 나라 잃은 조선 민족의 미래를 위해 교육사업을 펼친 선구자들의 기념 유적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1907)에 파견됐던 고종의 밀사 이상설(李相卨ㆍ1870~1917)의 유적이 과학에 관심이 높은 필자의 눈에 특히 띄었다. 이상설은 간도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란 학교를 세워 조선 민족의 교육을 일으킨 인물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이상설 기념비가, 옆으로는 그의 이름을 붙인 정자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언뜻 살펴본 이들 기념물에 이상설이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로만 널리 알려진 이상설은 1900년에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수학 책을 썼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 있던 우에노 기요시(上野淸ㆍ1854~1924)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하여 편집한 책이다.
당시에 발간된 송상도(宋相燾ㆍ1871~1946)의 ‘기로수필(騎驢隨筆)’에는 이상설이 이 책으로 당대 최고의 수학자라는 평가를 얻었다고 기록돼 있다. 여하튼 이상설은 이 책을 서전서숙에서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기로수필’에 따르면 이상설은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는데 특히 수학 분야를 깊게 공부했으며, 영어 프랑스어 심지어 러시아어까지 해독했고, 법률에도 일가견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스승 없이 독학으로 이룬 성과였다. 1894년에는 문과(대과)에도 급제했으니, 그야말로 동서 학문에 통달한 당대의 인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는 그의 일생을 독립운동가로만 기록한다. 구한말 몇 가지 관직에 오른 이상설은 간도로 망명한 뒤 학교를 세운 이후에는 독립운동에 매진하여 1914년 광복군 정부의 정통령(正統領)을 지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가시밭길을 걸었던 이상설은 1916년 토혈증(吐血症)으로 사경을 헤맸고, 이듬해 3월2일 러시아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상설은 죽기 전에 자신의 글을 모아서 태워버렸고, 육신도 화장해 없애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뒤 고향 충북 진천에는 그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이름은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상설을 한국 독립운동의 큰 재목으로 꼽는 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한국 역사에서 그의 진정한 ‘선구자’ 구실은 근대 수학의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닐까. 과학계의 선구자를 잊고 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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