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이준열사 사망진단서

야촌(1) 2013. 10. 23. 10:36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병사설’은 가짜다.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민족21]79호]2007년 10월 01일 (월) ㅣ 이양재 이준열사순국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추 webmaster@minjo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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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여간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먼저 묻는 것이 이준 열사의 사인이다. 병사냐 자결이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결이다.

그러나 그런 물음 뒤에는 정설에 대한 의심이 들어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그 만큼 이준 열사가 역사 속에서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을 보내면서 이준 열사에 대하여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 1948년에 찍은 이준 열사의 외아들 이용 삼부자의 사진.

이 사진은 이용이 월북 직전 조카 조모에게 건넨 사진이다.ⓒ민족21

 

이준 열사가 병사하였다면 사망진단서에 당연히 병명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장을 위한 그의 사망진단서에는 사인(死因)이 없다. 이상스러운 일이다.

 

1907년 7월 17일, 헤이그에 가 있던 일본 외교관은 “한인 이준의 얼굴 부스럼을 열어본 결과 단독(연쇄구균에 의한 피부 질환)에 걸려 엊그제 사망했다는 것인 바 오늘 아침 매장을 하였다. 장례식에 나온 자는 호텔 소사와 동행한 한인 뿐, 자살이란 풍설을 말하는 이도 있으나 앞에 쓴 사실은 점차 세상에 판명되리라 믿어진다”는 전문을 일본 외무성에 보낸다.


식민사학자들은 이 전문을 병사설의 근거로 제시하지만, 나는 이 전문을 자결의 근거로 제시한다. 현지 외교관이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자살이란 풍설이 퍼지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 역설적으로 이준 열사의 자결설을 뒷받침한다. 단독은 쉽사리 죽을 수 있는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1907년 이준 열사의 사망 직후 헤이그 현지 병원에서 발급한 사망진단서.

  사인은 기록돼 있지 않다.ⓒ민족21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갔던 이상설 주도 권업회기관지 《권업신문》 이준 자결 언급

이상설은 이준 열사의 자결에 대해 자주 회상한 것 같다. 이상설이 조직하고 회장으로 있던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은 1914년 7월 19일자 논설 〈리쥰공이 피흘린 날〉의 서두에 “세월이 뜻업도다.

 

지난 14일은 츙렬사 리쥰공이 하란 해아부에서 뜨거운 피를 흘린지 뎨8년째 되는 날이로다 아깝다. 충렬사의 뜨거운 피가 워째식고 마랏는가 거룩한 그의 피가 우리 마음엡(중략)”라고 언급하며, “이 날(7월 14일)을 맞는 이상설과 이위종의 소감이 어떠할까”를 독자들에게 심정적으로 되묻고 있다.


즉, 이준 열사의 자결을 권업회의 공식 입장으로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이상설은 한번도 이준 열사의 병사를 말한 적이 없다. 그는 늘 이준 열사의 자결을 말했다. 그런데, 1980년대에 편찬된 《장지연전서》에 이위종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장지연이 베꼈다는 《이상설일기초》가 들어가 있다.

 

이 《이상설일기초》는 이준 열사의 순국의 의미를 훼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위서(僞書)이다. 《이상설일기초》가 가짜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이 문서는 장지연이 베낀 것이라고 하나, 필체는 장지연의 글씨가 아니다.

 

또한, 이준 열사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도왔던 헐버트 박사는 7월 10일 헤이그에 왔다가 10일 런던으로 갔는데, 《이상설일기초》에서는 7월 17일에 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7월 17일은 헐버트 박사가 뉴욕으로 가는 배 안에 있었던 기간이었다. 시일이 안 맞는다. 또한, 장지연은 자신의 문집에 《이준전》을 쓰면서 할복 자결을 언급하였다.

 

즉, 《이상설일기초》는 이상설이나 이위종, 심지어는 장지연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상설이 자신의 모든 기록을 태워 없앨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해방 전 일제는 결사적으로 이준 열사의 사인을 왜곡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남쪽에서 이준 열사의 사인을 병사로 몰고 간 세력이 분명히 있다. 그 세력을 알게 하는 단서는 역사학자인 윤모 교수의 저서 《이상설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보면 이준 열사의 순국을 시기하였던 세력은 아니러니하게도 이상설의 방계 후손으로 확인된다.


이상설은 이준 열사의 가장 절친한 동지였다. 이준 열사가 이상설보다 10년 전 태어났고, 이상설은 이준이 순국한지 10년 후에 순국했지만 두 사람은 하나로 연결되는 삶을 살았다. 더군다나, 이준 열사의 아들 이종승은 1910년부터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 주변에 있었고, 이상설이 조직한 권업회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는 이상설의 아들과도 매우 절친했다. 이상설의 직계자손은 1948년도에 이용이 월북한 이후 그를 찾아서 월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설의 방계(傍系) 자손들은 “이준이 죽어야 이상설이 산다”는 오판으로 이준 열사의 순국과 헤이그 특사의 사실적 면모를 왜곡하는데 앞장섰고, 그 증거가 《이상설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이러한 불순한 기도가 이준 열사의 첫 번째 전기인 역사학자 유자후의 《이준선생전》을 깡그리 부정하는 독소를 남쪽 역사학계에 퍼뜨리게 된다.

 

▲ 서울 수유리에 모셔진 이준 열사의 묘.ⓒ민족21

 

철저한 로비와 보도 통제로 사인을 왜곡한 일본

나는 이준 열사가 자결하였다는 근거를 아홉 가지나 제시한 바 있다. 우선 이준 열사는 자결할 각오를 다지며 헤이그로 갔다.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는 이준이 자결하였다는 이상설의 전보를 7월 15일 오후 2시경에 받았다. 당시 이상설이 보내 온 전보에 놀란 이일정 여사는 심장병에 걸려 남은 평생을 고생하다가 1935년에 사망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준 열사가 돌아가신 후 일제의 외무성 산하 몇몇 영사관에서 본국에 보내는 기밀문서나 일제의 첩자들이 작성한 기밀문서 여러 점에서 이준 열사의 죽음을 ‘자살’ ‘할복분사’등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러한 문서를 여러 점 찾아내 공개한 바 있다.


특히,‘재광동일본총영사관’에서 1926년 4월 30일자로 이준 열사의 아들 이종승의 동향을 외무대신 앞으로 보고한 내부 기밀문서에서 이준 열사가 ‘할복분사’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할 때 헤이그에서 자살(자결)한 이준이라고 언급한 사실은 당시 일제도 이준 열사의 사인을 할복분사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의 철저한 로비와 보도 통제로 이준 열사의 사인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원래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1906년에 열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본의 로비에 의하여 1907년으로 연기 개최됐다.

 

아울러 일본은 1906년에 이미 고종황제가 러시아 측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고종황제를 철저히 감시하였고,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나라들을 대상으로 미리 적극적인 로비를 했다. 때문에 한 나라도 대한제국의 편을 들어준 나라가 없었다.


일본은 현지 언론과 각국의 대표들을 철저히 매수했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세계 언론이 대한제국의 외침에 대해 보도하지 않기에 이등박문을 격살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이준 열사는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복은 조선식 할복과 일본식 할복이 다르다. 조선식 할복은, 엄밀히 말하자면 할복이라기보다 자복(刺腹)이라 말할 수 있다. 칼을 배에 깊이 찔러 넣는 방식이다. 반면에 일본식 할복은 배를 가로로 길게 그으면 옆에 있던 무사가 목을 내리쳐 자른다.


구한말 인물들 중에 민영환 선생도 할복 자결했다. 또한, 최익현은 단식 자결했고, 황현은 음독 자결했으며, 박승환과 이범진은 권총 자결했다. 자결 방법은 다르나 우리는 이분들 모두가 자결했다고 말한다. 이분들의 자결은 당시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며 항일투쟁을 독려하였다.


자결한 분들 가운데 유독 이준 열사만 기독교인이라 하여 자결이 부정되고 있다. 자살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관점 때문인가? 그러나 격살과 살인이 다르듯이 자결과 자살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격살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조선 의병대장으로서의 전투 행위이다.

 

격살이나 자결은 목적성이 있는 의거이다. 따라서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이라고 비하하는 것이나, 이준 열사의 자결을 자살로 비하하는 행위는 일본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준 열사의 자결 방법이 할복이냐 하는 것은 검토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자결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 가지 역사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준 열사가 헤이그로 가져간 위임장은 민간에서 위조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헤이그특사 위임장에 찍힌 ‘황제어새’와 고종황제가 여러 나라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찍힌 ‘황제어새’를 비교해 보면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임장의 ‘황제어새’는 붓으로 그린 것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외에도 위임장은 한 줄에 35∼38자로서 글씨가 상당히 작고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한데 비하여, 고종황제의 다른 친서는 대개가 1행 17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서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만 위임장에 그려진 고종의 어압은 본래 고종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는 이준 열사가 고종황제의 의도를 담은 신임장을 이회영과 함께 만들어 이를 가지고 헤이그로 출발한 것으로 본다. 때문에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위임장을 한 번도 꺼내서 보여준 적이 없었다. 지금 전하고 있는 위임장의 사진은 이준 열사가 순국한 이후인 그해 9월, 미국에서 이상설이 공개하여 《더 인디펜덴스》지에 실린 것이다.


나는 고종이 1907년 3월 24일 밤, 이준 열사를 접견하였다는 역사학자 유자후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본다.
당시 고종은 이준에게 헤이그 특사로 가도록 구두로 위임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가 출현한 이후 이완용과 이등박문의 추궁에 특사를 보냈다고 시인하거나 언급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고종황제는 이준 열사가 한양을 떠나가는 시점까지 제대로 된 신임장을 내려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셔진 이준 열사의 묘. /사진ⓒ드림세이비

 

1907년 7월 14일 이준 열사가 순국하자 이상설은 7월 17일에 이준의 유해를 헤이그 교외에 자리한 니우 에이컨다위넌 공동묘지에 임시 매장하고 그해 9월 6일에 이위종과 함께 102길다 95센트의 돈을 지불하고서 영구임대의 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963년에 이준 열사의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져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지만, 옛 무덤 자리에는 흉상과 함께 ‘일성이준열사의 묘적’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건립되었다. 현재는 이준 열사의 활동과 순국에 관한 안내문도 함께 부착되어 있다.

 

이준 열사를 친일파로 본 박노자의 역사왜곡

이준 열사는 젊어서 유학(유교)을 공부하여 북청에 경학원을 설립하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불교와 동학(천도교),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준 열사는 기독교 선교사를 통하여 서구사상을 받아 들였고, 1895년을 전후한 시기에 기독교(감리교)로 개종한다.


이준 열사는 매우 자유로운 사고와 사상을 가진 활동가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종교인이기에 앞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자주적인 개혁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기독교 정신을 통하여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한 때문이다.


이준 열사는 1895년 4월 16일 당시 정동에 있던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근대 법률을 공부하였고 11월 20일 1회 졸업생이 된다. 그후 1896년 2월에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취임했으나,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죄로 1개월 만에 면관되고 만다.

 

이후 1896년 3월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전문학교 법률학과(후에 와세대 대학 법학부)에서 유학한다. 당시 이준 열사는 국제법에 관심이 깊었다. 이준 열사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 다시 평리원 검사로 활동한다. 이준이 검사로서 근무했을 당시의 여러 일화를 보면, 그는 국가 정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법률가였다.


그러나 한국학자 박노자는 《한겨레21》에 기고한 글 〈이준 열사는 친일파였다?〉에서 이준 열사를 심하게 왜곡한 바 있다. 나는 그의 저의를 매우 의심스럽게 본다. 친일파라니, 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망발이다. 을사조약 꼭 10년 전인 갑오경장 당시 친일내각이란 의미는, 10년 후 을사늑약 때 망국적 행동을 한 이완용, 송병준 등을 일컫는 친일파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19세기 말 갑오경장 때의 친일내각은 일본을 통하여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려는 시행착오를 한 내각이고, 20세기 초의 친일파는 나라를 일본에 병합시키고 자신들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한 반민족· 반역사적 내각이다. 한국학자라는 박노자가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심중과 배후에 이준 열사를 왜곡하여야 하는 어떠한 임무가 있는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김일성 주석, 이준 열사 소재로 혁명연극 창작

이준 열사는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에 외세를 이용하려다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의 언행을 살펴보면 그는 의외로 자주성이 높은, 당시 보기 드문 반일적 인물이었다. 김구의 회고록 《백범일지》를 보면 1905년 11월 27일, 이준 열사와 백범 등은 을사늑약에 강렬히 저항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 시도한 것은 이준 열사의 자결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격살한 것은 이준 열사 자결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상설의 권업회나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공식적인 의식이 있을 때마다 이준 열사의 자결을 언급하며 항일의지를 독려하였다.

 

광복군의 군가 〈용진가> 가사에는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군 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공과 안중근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라는 가사가 포함돼 있다.

 

 

▲이준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북에서 유화로 제작한 <이준 열사 자결도>. 민족21

 

북의 김일성 주석은 항일무장투쟁 초기에 이준 열사를 소재로 하여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를 공연한 바 있다. 김일성 주석이 이준 열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손정도 목사의 영향이다.


손정도 목사는 1910년에 협성신학당(현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에 목회자가 되었는데, 당시 그는 서울지역의 감리교회에서 전덕기, 이승만, 이동령, 이시영, 장지영, 노백린, 이준, 조승한, 이갑, 최남선, 이필주 등과 어울려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정동제일교회의 4대 담임목사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파송된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조직될 시에 손정도 목사는 이광수와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을 제의하여 임시 의정원 의장을 지내게 된다. 그후 그는 근 3년간 임시정부 최고지도자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민족 대동단결과 독립운동 집결지 등을 형성키 위한 계획으로 1921년 만주 길림으로 간다.


길림에서 손정도 목사는 당시 그곳에서 활동하던 청년 김성주를 만나게 되는데, 청년 김성주가 바로 항일혁명가 김일성으로 거듭나면서 김일성은 항일혁명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1928년을 전후한 시기에 〈혈분만국회〉라는 혁명연극을 창작한다.

 

즉, 청년 김일성이 〈혈분만국회〉를 만든 것은 손정도 목사로부터 이준 열사의 활동과 자결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이다. 후일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를 진실한 애국자이며 자신의 스승이라고 언급한다.


북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하여 1980년대 초 혁명연극 〈혈분만국회〉가 다시금 확대 창작되고, 사극 〈돌아오지 않는 밀사〉라는 영화가 만들어 진 것, 이준 열사의 생가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만남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북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

이준 열사의 외아들 이용(이종승, 1888∼1954)은 처절한 항일전쟁을 했다. 그는 북청에서 태어나 서울의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부친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퇴하여, 1910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다.

 

그는 1911년 8월 중국 동북지방으로 가서 간민회 총무를 보다가, 중국 절강성 절강체육학교를 거쳐 1918년 절강성 육군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절강성 육군 제8연대 소위로 복무한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성립되자, 그는 이듬해(1920년) 5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동로군사령관에 임명돼 북간도 명월구에 사관학교를 설립, 사관 양성에 힘쓰다가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1920년 말에 러시아령으로 넘어간다.

 

1921년 그곳에서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의 와중에 러시아 적군에게 붙잡혀 그해 7월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어가는 도중에 탈출한다. 다시 연해주로 돌아온 그는 군대를 규합해 조선의용군사회를 조직한 후 사령관이 되어 맹활약을 한다.


그 후, 그는 1925년 경에 다시 중국 남방으로 내려와 민생호 군감의 포병대장, 중국혁명군 참모장 등을 역임한다. 1931년 다시 동만으로 올라갔다가 연길에서 일본 헌병에게 고려공산당의 수괴 혐의로 피검된 후 서울로 압송되어 복역했고, 석방 이후에는 고향인 북청에 거주 제한을 당한다.


북측 자료에 의하면, 그는 1936년 11월에 북청에서 조국광복회에 들어가 지하활동을 시작했고, 김일성 주석의 부인인 김정숙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한다. 그는 해방 후, 1946년까지 북청군 초대인민위원장을 지내다가, 그해 3월에 월남하여 만 2년 여간 서울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이용은 1946년 6월에 이극로와 함께 남조선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했고, 1947년에는 신진당(新進黨) 부당수를 지내다가, 1948년에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자진 월북한다. 북측 자료에 의하면 그는 월북 후 9월 9일자로 수립된 첫 내각의 도시경영상이 된다.

 

그 후 1951년 12월에는 사법상으로, 다시 1953년에는 무임소상이 된다. 이용은 1954년 8월 18일 사망하는데, 사후인 1990년에 조국통일상을 수여 받고, 현재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이양재(53)  위원장은 현재 고려미술연구소 소장, 이준열사순국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총무이사, 사단법인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상임부회장을 맡고 있다.

 

회화사학자와 서지학자로도 활동중인 그는 회화사와 서지학 분야에서 2종의 저서와 1종의 공저, 1종의 편저가 있으며,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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