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무덤에서 나온 원이엄마의 사부곡(思夫曲)

야촌(1) 2011. 11. 30. 22:33

■ 무덤에서 나온 원이엄마의 412년 전의 편지

     (1586년 음력 6월 초하룻날 원이엄마)

 

역사는 유물, 유적과 기록에 의해서 후세에 전해진다. 이 세 가지가 없고서는 역사를 추론할 수 없게 된다. 지상에 존재하는 역사의 증거물들은 오랜 풍상과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해 장구한 세월을 견뎌내지 못한다. 다행이 매장과 함께 지하에서 발견되는 유물이나 기록물들이 온전하게 남아서 옛일을 전해주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주 천마총이나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엄청난 국보급 유물들이 발굴된 바 있고 이집트 왕릉에서도 세계적인 유물들이 많이 나왔으며, 중국에서는 진시황릉의 지하무덤에서 약 8천개의 병마용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998년 4월 14일 택지 개발이 한창이던 경북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 2기의 무연고 무덤 이장중에서 한곳에서 미라가 발굴되었다. 한국의 풍습으로는 시신이 썩지 않고 미라 상태로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도리어 잘 썩어서 흙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매장 할 때 미라 처리를 전연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은 부패하지 않고 미라 상태로 시신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배수가 잘되고, 관 주위를 두껍게 회칠해서 습기가 침투하지 않게 되는 경우 시신이 썩지 않고 매장 당시 그대로 발견된다. 발견된 미라 중에 하나가 고성이씨 이응태(李應台, 1556~1586)였는데, 무덤 속에서 부인의 한글 편지와 미투리가 발견되었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애틋하게 그리는 정이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절절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이 편지는 수백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내는 지아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하고픈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종이가 다하자 모서리를 돌려 써 내려갔다.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자 아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거꾸로 적어 나갔다. 아무리 넓은 종이라 한들 할 말을 어찌 다 적을 수 있겠는가!

 

죽은 지아비의 가슴 위에 곱게 접어서 놓여 있던 한지를 들쳐 내자 편지가 나왔다. 당시 원이라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고 뱃속에는 다시 임신을 한 상태였다. 태어날 아이가 이제 누구를 보고 아빠라고 할 것이냐고 복통하면서 떠나는 지아비를 향해 급히 편지를 썼을 것이다.

 

한글로 쓰여 진 이 편지는 '글은 꾸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솔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편지를 몇 번이고 읽다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미려한 문장과 화려한 어휘로 꾸미려는 글 솜씨를 전연 뽐내지 않고도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었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이다.

 

오랜 태평성대로 민심이 순화되고 문화가 융성하던 때이다. 7년 왜란을 거치면서 민심은 거칠어지고 이처럼 순백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 편지는 우리 가슴의 밑바닥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깊은 율려의 울림을 느끼게 한다. 남남이 서로 만나 부부가 되어 이다지 깊은 정을 나누게 되니 정녕 아름답기만 하다. 만나고 헤어지는 인간의 애틋함이 시간을 초월해서 공감을 낳는 것은 무엇일까.

 

이 편지의 원문은 한글 고어체로 되어 있는 것을 안동대 사학과 임세권 교수가 현대문으로 옮긴 것이다. 원문에는 '당신'을 '자내'라고 쓰고 있다. 오늘날과는 달리 남편을 자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절한 남편에게 쓴 원이엄마의 편지/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가로 58㎝, 세로 34㎝의 한지에 붓으로 빼곡히 써내려간 한글 편지엔, 서럽고 쓸쓸하고 황망하고 안타까운 한 아내의 심정이 강물처럼 굽이친다. 함께 누워 속삭이던 일에서부터 뱃속 아이를 생각하며 느끼는 서러운 심정, 꿈속에서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애절한 간청까지 절절하게 녹아 흐른다.

 

“함께 누워서 당신에게 물었죠. 여보,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도 우리 같은가 하여 물었죠. 당신은 그러한 일을 생각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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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23개 언어로 28개국에서 동시 발행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7년 11월호에 소개된 '원이 엄마'의 편지와 미투리는 전 세계인들에게 놀람과 함께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연은, 일찍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애절한 편지와 더불어 삼과 머리카락을 섞어 짠 미투리로 대변된다.

 

명문가의 종택과 성리학 등, 딱딱한 유교문화로 대변되는 안동 지방에서 모든 이에게 훈훈하고도 애닯은 감동을 주는 원이 엄마의 편지는, 이제 안동 지역 답사나 관광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원이 엄마의 편지와 미투리를 소재로 한 소설, 국악가요, 뮤지컬, 기념물 및 조각상, DVD, 영화 등 여러가지 콘텐츠로 개발되거나 진행 중에 있다.

 

↑원이엄마공원이 조성된 원이엄마상

↑31살에 요절한 남편에게 쓴 원이엄마의 애절한 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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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원문)

 

■ 원이 아버님께

 

자내 샹해 날드려 닐오되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

날하고 자식하며 뉘긔 걸하야

엇디하야 살라하야

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는고

 

자내 날 향해 마음을 엇디 가지며

나는 자내 향해 마음을 엇디 가지런고

매양 자내드려 내 닐오되

한데 누어 새기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엿비 녀겨 사랑호리

남도 우리 같은가 하야

자내드러 닐렀더니

엇디 그런 일을 생각지 아녀

나를 버리고 몬져 가시난고

 

자내 여히고 아무려

내 살 셰 업스니

수이 자내한테 가고져 하니

날 데려가소

자내 향해 마음을 차승(此乘)니

찾즐리 업스니

아마래 션운 뜻이 가이 업스니

이 내 안밖은 어데다가 두고

자식 데리고 자내를 그려 살려뇨 하노

 

이따 이 내 유무(遺墨) 보시고

내 꿈에 자셰 와 니르소

내 꿈에 이 보신 말 자세 듣고져 하야

이리 써녔네

자셰 보시고 날드려 니르소

 

자내 내 밴 자식 나거든

보고 사뢸 일하고 그리 가시지

밴 자식 놓거든 누를

아바 하라 하시논고

 

아무리 한들 내 안 같을까

이런 텬디(天地)같은 한(恨)이라

하늘아래 또 이실가

 

자내는 한갓 그리 가 겨실 뿐이거니와

아무려 한들 내 안 같이 셜울가

그지 그지 끝이 업서

다 못 써 대강만 적네

이 유무(遺墨) 자셰 보시고

내 꿈에 자셰히 뵈고

자셰 니르소

 

나는 다만 자내 보려 믿고있뇌

이따 몰래 뵈쇼셔

 

아!

그지 그지 업서

이만 적소이다.

 

병슐(1586) 뉴월 초하룻날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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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의 현대글 정리]

 

◙ 원이 아버님께

 

당신이 항상 내게 다짐하길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이 나에게 마음을 어찌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나요.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함께 누워 새겨보곤 했지요.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떻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래도 나는 살수 없으니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으니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으니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리니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는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건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을까요.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요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니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러울까요.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자세히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서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슐(1586) 뉴월 초하룻날 집에서

 

<원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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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엄마는 남편의 무덤에 아들 원이가 입던 옷도 함께 넣었다.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으로 엮은 미투리/국립안동대학교 박물관 영상자료 발췌.

 

이 미투리는 안동시 정상동 이응태(李應台, 1556~1586)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응태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로 보아 평소에 병치레가 잦았다. 미투리는 “… 이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 …”라는 글씨가 있는 한지에 싸여 있었다.

 

이로 보아 이 미투리는 이응태의 부인이 남편의 쾌유를 기원하며 대마(大麻)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섞어서 만들었는데, 끝내 숨지자 애절한 마음을 담아 남편의 무덤에 편지와 함께 묻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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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이 남편에게 「자네」란 호칭사용.

 

원문에는 편지 바로 '자네'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자내다려 내 닐오되...'

즉 당신에게 내가 말하기를,

또 여기, 손으로 가리키며

'자내 몬저 가시난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남편을 가리켜 '자내'라는 말을 모두 열네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부부라 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을 자네라고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응태의 처는 남편에게 '자내'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편지에서 자내라는 말은, 분명히 이응태의 아내가 남편을 직접 호명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장의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이응태 부부의 삶!

그것은 우리에게 그들이 살았던 조선중기, 사대부 가문의 평범한 부부들의 생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평등한 남녀 관계를 바탕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또 존중할 수 있었던 시대, 이것이 이응태 부부가 살았던 조선중기의 모습입니다.

 

400년 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 비록 육신은 떨어져 있을 지언정, 그들의 영혼만은 지난 세월동안에도 줄곧 함께하였을 것입니다.

 

죽음도 갈 라 놓을 수 없었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

긴 어둠의 세월속에서 이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가슴에 고이 품어 주었던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한국방송공사 kbs 역사 스페살에서 발췌하고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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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황]

 

망자의 가슴을 덮고 있던 편지1장이 발견됬는데 400년전에 쓰여진것이었다.

내용엔 죽은 남편을 꿈속에서라도 보고싶다는 내용으로 아내의 서러운 마음이 녹아있다.

관에선 편지 말고도 여러유물이 발견됬다.

 

그 중 머리카락으로 만든 신발이 발견됬다. 신발을 감싸고 있던 한지에서 병석에 있는 남편이 건강해지길 바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내용이 발견됬다. 편지에 내용을 통해 아내는 임신중이고 자식이 1명있는것을 알수있다. 이장 과정에서 발견된 서체들을 통해 남편은 고성 이씨 가문이고 31살에 죽은것으로 유추할수있다. 이름은 이응태이다.

 

 

고성 이씨 가문에서 이응태를 찾았다. 이응태는 1556년(명종11)에 태어났다.

그의 아들과, 그의 할머니의 묘는 발견했으나 이응태의 처에 정체는 파악할수없었고 그녀의 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덤에서 나온 옷을 분석하여 키가 160cm 정도의 여성임을 알아냈다.

 

 

↑안동 귀래정(歸來亭) - 소재지>경북 안동시 정상동 777(1동)

 

안동 정상동에는 이응태가 살았던 집인 귀래정이 있는데 서신을 통해 부모와 떨어져 살았다는걸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처가살이는 일반화된 관습이었다.

 

또 편지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자네라고 2인칭으로 일컬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남녀가 동등했음을 알수있다. 또 당시의 분재기들을 분석해보면 남녀가 균등하게 재산을 평분했음을 알 수 있다.

 

제사 역시 남녀 구분없이 자식들이 번갈아가며 지냈고 아들이 없더라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다. 412년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한 이응태 부부는 육신은 비록 떨어질 지언정 그들의 영혼만은 서로 사랑했을 것이다.

이 1장의 편지를 통해 조선중기 사대부 가문의 부부생활을 엿볼 수 있었고, 이 시기 여성들은 법적, 경제적으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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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장지 유물에는 함께 발견된

 

형(이몽태)이 동생(이응태, 李應台)에게 보낸 만시(輓詩)

 

●泣訣舍弟 : 울면서 아우를 보낸다.

 

共汝奉旨甘(아우와 함께 어버이를 모신 지가)

于今三十一(이제 삽십 일 년이 되었네)

奄然隔重泉(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니)

영原何太疾(어찌 이렇게 급하단 말인가)

拍地之茫茫(땅을 친들 그저 망망하기만 하고)

呼天之默默(하늘에 호소한들 대답이 없구나)

孤然我獨留(외로이 나만 내버려 두고)

汝歸誰與匹(죽어서 뉘와 더불어 함께 할런지)

汝留遺後兒(자네가 남기고 간 어린 자식)

我在猶可護(내 살았으니 그래도 보실 필수 있구려)

所望好上仙(바라는 바는 어서 하늘에 오르는 것)

三生何不遠(삼생은 어찌 빠르지 않을쏜가)

亦望勸有助(또 바라는 건 부지런히 도움을 내려주어)

親庭壽萬億(부모님이 만세토록 장수하시는 거라네)

舍兄神亂哭草(형이 정신없이 곡하며 쓴다)

 

編輯者 :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