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일본사(日本史)

톈진조약(天津條約)

야촌(1) 2013. 9. 22. 13:40

■ 톈진조약[Sino-British Treaty of 1842, 天津條約

    중국 톈진에서 청나라와 여러 외국들 간에 맺은 17개의 조약(1842)을 통칭하는 용어

 

각 조약 사이에 내용상의 공통점은 없다.

아편전쟁 이후인 1840년대에 서양 열강들과 맺은 조약은 난징[南京]·광저우[廣州]·마카오 등지에서 조인되었다.

그뒤 애로호 전쟁 때인 1858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무력에 의한 위협에 굴복하여 처음으로 톈진에서 4개 조약을 맺었다.

 

이것은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의 4개국과 맺은 일방적 최혜국 조약으로서 이후에 계속된 불평등조약의 근간이 되었다.

그후 1864년까지 독일·포르투갈·덴마크·네덜란드·스페인과 5개 통상조약을 맺었다.

 

1870년에는 이홍장(李鴻章)이 직례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되어 외정(外政) 운영에 있어 사실상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면서 자신의 임지인 톈진에서 8개의 조약을 맺었다. 이중 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톈진 조약은 1884년 조선의 갑신정변이 청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2개 대대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그리고 양국간의 무력충돌의 위험이 커졌다는 명분으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전권대사로 톈진에 보내 이홍장과 담판을 지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하려고 했다. 그결과 1885년 4월 전문 3개조의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내용을 보면

 

① 청일 양군은 4개월 이내에 조선에서 철병할 것,

②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양당사국 이외의 나라에서 초빙하도록

     할것,

③ 조선에서 이후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

     하고, 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갑신정변 실패 후의 열세상황을 만회하

    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역사[1842] 브리테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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