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일본사(日本史)

한국역사의 왜곡 주역인물 이마니시 류(今西龍)

야촌(1) 2016. 2. 17. 17:50

■ 한국역사의 왜곡핵심 주역인물 이마니시 류(今西龍)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인물인 이마니시 류(좌)와 그 조교 이병도(李丙燾, 1896~1989)

    본관 우봉(牛峰)으로 이어령(李御寧,1934~2022) 초대 문화부 장관의 재종숙(再從

   叔)이다.』

 

이병도의 스승인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1)은 1903년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 한 후 한국에 들어와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를 다스렸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조선반도사」를 왜곡, 변조한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었다.

 

190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조선사편찬위원의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되어, 신라천년의 왕도를 경주로 얽어 맞추기 위해 먼저 경주를 답사하여 각 유적 물을 변조 조작하기 시작했다.

 

1914년 동경제국대학 교수재직 중에 백제의도읍지는 한성(漢城:서울)으로 지정하고, 신라천년의 도읍지는 경주로 또한 가락국의 도읍지는 경남김해로 얽어 맞춘 장본인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도록 단군설화· 백제국도한산고, 신라사연구, 백제사연구, 가야의 임나일본부설, 조선고사의 연구 조선사의 간 등 가짜 위서를 가장 많이 발표했다.

 

한편 안정복이 주석을 단 중종 본의 삼국사기 원문을 조작 변조한 작업을 주도 했던 인물이며 황국신민화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인 이마니시 류는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1922년부터 1925년까지 3년간 중국에 출장 가서 중국 각처를 누비며 수많은 조선사료(史料)를 수거하고 심지어 광개토호태왕비문, 모두루비문, 점제현신사비의 비문을 훼손시킨 장본인이다.

 

특히 이마니시 류가 1913년 처음 하북성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고 그의 일당들이본래 중국 하북성의 산해관 좌측 갈석산에 세워졌던 점제현신사비를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옮겨 놓고 삼국사기 중요지명의 열대패 삼수고 논문을 발표하여,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한반도속의 평양에 존재했다는 학설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주장했었다.

 

 

↑평양으로 옮겨진 하북성의 가짜 점제현신사비

 

북한 국보급 제16호로 지정된 고대의 비석으로, 점선현신사비 또는 염제현신사비라고도 읽습니다.

윗부분은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은 높이 1.51m, 너비 1,09m, 두께 0.12m 입니다. 그러나

 

화강암 자연석을 장방형으로 다듬고 한 면을 평평하게 갈아낸 뒤 그 안을 세로로 7등분하여 그 획내에 예서로 글자를 새겨 넣었다. 글자 수는 모두 79자인데, 확실하게 판독되는 글자는 59자이며, 점제현의 장이 산신에게 백성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서기 85년경에 제작되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서 규모는 작으나 학술적인 가치는 매우 크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9월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를 통하여 발견되었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일본의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토성리(지금의 온천군 성현리)의 어을동고성의 동북쪽으로 약 485m지점에서 이 비석을 발견하였으며, 이곳이 한사군 가운데 낙랑군의 속현인 점제현의 현성이었음이 증명되었다고 발표하고 비석의 이름을 '점제평산군비'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로부터 이 비석은 이른바 '한사군 재 한반도설'을 뒷받침하는 유물로서 한반도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우리가 배우는 낙랑군의 위치

 

이에 대하여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른 곳에 있던 비석을 옮겨와 역사를 조작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 근거로 비석의 재질인 화강암을 분석한 결과, 그 생성연대가 현 소재지인 온천군과 용강군 일대의 화강암 생성연대보다 약 2800만~2200만 년을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이 비석이 다른 지방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며, 일부 학자들은 이 비석의 원래 위치를 중국 허베이성 롼허강 유역의 제스산으로 보고 있다.

 

 

↑낙랑군 예상 지역인 중국 허베이성 위치

 

 

물론 이것은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닌 설일 뿐이지만, 어느 정도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전혀 배재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러 문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쯤이면 일본은 독일이 과거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까요? 하루빨리 그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 글은 조선총독이었던 아베노부유키(阿部信行. 78세. 1875~1953)가 한반도를 떠나며 남긴 마지막 저주 글입니다.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다시 돌아온다.”

이 저주를 퍼부은 사람이 바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이다.

우리국민은 일본식민의 마지막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의 말을 항상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패전과 함꼐 중앙청에서 항복 조인식을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간 마지막 총독 ‘아베노부유키’ 이다.

 

아베 총독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와 군 중앙부 주요보직을 거쳐 1933년에 육군대장, 1939년엔 일본 내각총리가 됐다. 비록 5개월이었지만 일본총리를 지낸 그는 1944년 마지막 조선총독에 임명돼 조선인에 대한 식민지교육을 더 철저히 자행했다.

 

그리고 일본 주둔 미군의 맥아더사령부가 광복직후인 1945년 12월 11일 아베를 심문할 때, 그는 "일본 식민정책은 한국인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이었다며, 한국인은 아직도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된 정부형태가 되면 당파싸움으로 다시 붕괴할 것"이라며 남북공동정부 수립을 적극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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