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일본사(日本史)

대마도(對馬島)의 시초

야촌(1) 2013. 8. 22. 08:01

작성일 : 2013. 08. 22

 

대마도(對馬島)의 시초

 

대마도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남자의 말씨나 부녀자의 복장이 우리나라를 닮은 점이 많다.

그들이 왜(倭)를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일본(日本)이라고 하며 일본 사람들 또한 이들을 대하는 것이 자국(自國)의 내지민(內地民)들 과는 다른 점이 있고, 이 땅에 사는 백성들도 일찍이 한 번도 자신들을 왜인이라고 자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호공(瓠公)이 이 섬의 사람으로서 신라에 와서 벼슬한 것을 보면 이곳이 우리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실성왕(實聖王) 무신년(408) 조를 보면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軍營)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약 이곳이 본래 왜인에게 소속된 땅이었다고 한다면 군영을 두었다는 말이 굳이 신라의 역사 기록에 오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조(我朝)의 태조 5년(1396)에 김사형(金士衡)과 남재(南在)를 보내어 이들을 정벌하였으며, 세종(世宗) 때에는 이종무(李從茂)를 보내어 이들을 정벌하였다.

 

그리고 세조(世祖) 때에는 교지를 선포하여 이들을 깨우치기를, “도도웅와(都都熊瓦)의 아비 정무모의(貞茂慕義)가 정성을 바쳐 왔기 때문에 매양 그 신사(信使)를 접대하고 이를 두터이 위로해 주었고 상선(商船)의 왕래 또한 허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 따른 경상도(慶尙道) 지방의 미곡(米穀) 소모가 해마다 대략 수만 석가량이나 되는바, 이만하면 너희들에 대한 나의 마음씀이 참으로 할 만큼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만약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응당 크게 병선(兵船)을 갖추어 섬을 포위하고 공격하겠다.” 하였다.

 

그 뒤 중종(中宗) 5년(1510)에 황형(黃衡)이 삼포왜란(三浦倭亂)의 승첩(勝捷)으로 인하여 이 섬이 본래 우리나라의 옛 땅이었다는 사실을 들어서 계속 진격하여 이를 점령해 버리려고 하였으나 조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비국(備局)의 등록(謄錄)에 이르기를, “대마도는 머리가 부산(釜山)에 접해 있고 꼬리가 거제(巨濟) 등지를 마주 대하고 있기 때문에 바람의 정도에 따라서 영남에 배를 대기도 하고 호남에 배를 대기도 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고정된 장소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임진년에 그들이 비로소 부산으로 배를 대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때부터 우리가 전적으로 부산을 왜적을 맞이하는 고정 장소로 삼게 되었다. 그러니 을묘년의 왜변 때에 녹도(鹿島)와 영암(靈巖)이 어떻게 남구(南寇)들의 돛을 내리는 장소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출전 : 임하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