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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金宗直) 종택

야촌(1) 2013. 9. 13. 12:39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종택(宗宅)  

   [생몰년] 金宗直, 1431년(세종 13) 6월∼1492년(성종 23), 8월 19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조선초기의 문신(文臣)이자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그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서 후진양성에 힘을 쓴 학자 겸 문장가였다. 본관은 선산(善山 = 一善),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正四品)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 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正三品) 홍신(弘信)의 딸이다.

 

1431년(세종 13년) 6월에 밀양에서 태어났다. 1457년(세조 3년)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簒奪)을 비난한 유명한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1459년(세조 5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의 승승장구의 길을 밟았다. 1470년(성종 원년)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문하에(門下)에 학도가 운집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이 수학하였다.

 

1489년(성종 20년)밀양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다가 1492년(성종 23년) 8월 19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로(戊午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가 1507년(중종 2년) 중종 반정으로 벼슬과 시호등이 복권되었다.

 

1689년(숙종 15년) 영의정에 증직(贈職)되고, 1708년(숙종 34년) 시호가 <문간(文簡)>에서 <문충(文忠)>으로 고쳐졌다. <밀양의 예림(禮林)> 서원을 비롯하여 <김천의 경렴(景濂)>, 선산의 <자양(紫陽)>, <함양의 백연(柏淵)>, <개령의 덕림(德林)> 서원등에 제향되었다.

 

김종직이 무오사화로(戊午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 될 때, 아들 숭년(崇年)이 화를 면해 잠시 합천 야로에 머물러 살다가 5대손 남계(南溪) 김수휘(金受徽) 공이 고령군 쌍림면의 양천 최 씨와 혼인을 하게 되면서 1650년경 고령군 쌍림면 합가(合佳)리 개실마을(佳谷)로 옮겨 정착하게 되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종택은 민속자료 62호로 일선김씨(一善金氏)의 문충공파(文忠公派)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문화해설사의 해설에 의하면 개실마을의 입지를 풍수지리학적 측면에서

“산을 뒤로하고 물을 앞에 둔다는”배산임수(背山臨水),

“앞부분은 낮고 뒷 쪽은 높아야 한다는”전저후고(前低後高),

“출입구가 좁고 안은 넓어야 한다는” 전착후관(前窄後寬),

의 조건을 충족하는 양 택 입지라고 한다.

 

개실마을 앞산봉우리가 나비가 훨훨 춤을 추는 형상의 접무봉(蝶舞峰), 뒷산 봉우리가 마치 꽃이 활짝 피어있는 형상을 한 화개봉(花開峰)의 양 봉우리 사이에 개실마을이 있고 그 중에서도 화심(花心-꽃의 술)에 해당하는 자리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종택(宗宅)이 위치하고 있어 그 후손들이 대과 24명, 소과 36명의 인재를 배출했다고 한다.

 

종 택 건물은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터에 남동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중 사랑채, 고방, 대문간, 사당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유물전시관인 서림각(棲林閣)에는 점필재의 문적(文籍), 유품(遺品), 및 종가 문서가 보관 되어 있다.

 

 

↑나지막한 산을 뒤로하고 남쪽을 향하여 자리 잡은 종택은 조선시대 반가의 특징과 한옥의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규모가 크고 관리도 잘 되어 있다.

 

↑좌우로 행랑채를 거느린 솟을대문의 위용이 당당하다. 대문의 안쪽으로  사랑채가 보인다.

   솟을대문 >>>>대문을 주위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만든 대문을 솟을대문이라 한다.

 

 ↑전필재 김종직의 종택 안채

 

↑도연재 대문 >>>사진> ⓒ열린누리(eyoone)

 

↑도연재(道淵齋) >>>사진>ⓒ열린누리(eyoone)

 

●도연재(道淵齋)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소재지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112

 

이 건물은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학자들이 조선 고종(高宗) 원년(1886)에 건립하여 유생을 가르치고 제사를 모시는 재실이다. 김종직은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로부터 학문을 익히면서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조선 성종(成宗)대에 관직에 올라 도승지(都承旨),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큰 화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풀어지게 되었다. 종택(宗宅)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거리를 두고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 형 맞배지붕 집이다.

 

 

↑사진>ⓒ열린누리(eyoone)

 

↑전필재 김종직의 영의증 추증 교지/康熙二十八年은 1689년(숙종 15)이다. 

 

 ↑김종직 선생 초배부인 조씨에께 정경부인으로 내려진 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