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고창오씨 죽유공파 세거비문(高敞吳氏竹牖公派世居碑文)

야촌(1) 2013. 9. 12. 22:37

고창오씨 죽유공파 세거비문

(高敞吳氏 竹牖公派 世居碑文)

 

高敞吳氏는 高敞縣의 土姓으로 高麗 靖宗朝에 出仕하여 翰林學士를 지낸 諱 學麟을 始祖로 한다. 이후 後孫들이 或 上京從仕하기도 하고 或 京鄕各地로 散居하기도 하다가 朝鮮 成宗代에 僉知中樞府事를 지낸 九世孫 智甫 諱 滎이 奉化縣의 在地士族 琴淮의 婿君이 되면서 高敞吳氏가 嶺南과 因緣을 맺게 되었다.

 

嶠南 伽倻山下 高靈公館에서 三十里許에 藏風抱水하여 君子可居의 福地가 있으니 바로 梅林이다. 尋訪하는 君子가 下馬하고 來往하는 過客이 斂襟하나니, 이는 竹牖先生의 廟宇가 있고 裔孫이 世居하고 있기 때문이다. 竹牖先生 諱 澐은 始祖公의 十三世孫으로 咸安에서 出生하여 宜寧 榮州 等地로 移住하면서 道慕退陶하고 學宗山海하였다.

 

先生은 明宗朝에 生員과 文科에 及第하여 內外要職을 두루 歷任하였고 特히 壬亂時에는 宜寧에서 倡義하여 赫赫한 功을 세웠으며 眞實한 心地와 刻苦의 工夫는 竹牖集과 東史簒要에 集積되어 있다. 竹牖先生의 膝下에는 洛厓 諱 汝檼 敬菴 諱 汝橃 奉列大夫 諱 汝楧 三兄弟가 있었는데 洛厓公이 榮州에서 星州와 高靈으로 移居하였고 奉列大夫의 子 子晦 諱 益烇이 榮州에서 高靈으로 移居하였으며, 그의 子 寒溪 諱 善基도 이곳에 移居하였다.

 

寒溪公은 일찍이 學德兼成하여 小學釋義 等을 남겼고, 死後三年에 士林公議로 梅林書院을 建立奉享하였으니, 이후로 高敞 吳門이 華姓으로 世居하게 되었다. 竹牖先生의 六代孫 榮甫 諱 后梫이 肅宗朝에 宜寧에서 高靈 梅湖로 移居하였고 竹牖先生의 高孫 命卿 諱 錫周와 五代孫 聖淵 諱 尙灝 等 兩代가 高靈 鵝谷으로 移居하였는데 至今도 吳門의 많은 一族이 鵝谷에 世居地를 이루고 있다.

 

高靈 梅湖에 世居하던 竹牖先生의 後孫들이 庚申年의 水害로 이곳 梅林에 卜居하게 되자 이곳이 큰 世居地가 되어 至今까지 내려오고 있다. 地靈人傑의 아름다운 福地 이곳 高靈에서 四百年을 綿綿히 이어온 高敞 吳門은 嶺南名門으로서 儒道指南의 孝悌忠信을 實踐躬行하고 時節의 明暗도 결코 傍觀하지 않은 채 一族이 和睦하게 世居해왔다.

 

特히 己未獨立萬歲運動이 全國的으로 擴散될 때 高靈의 儒林과 一族들이 竹牖先生의 倡義精神을 繼承하여 宗家大廳에 모여 救國意志를 糾合하여 萬歲運動을 主導하기도 하였다. 現在도 宗家 雲陽閣에는 吳門의 歷史를 斟酌할 수 있는 各樣의 典籍이 國家指定文化財로 所藏管理되고 있다. 

 

先祖들이 물려주신 山紫水明한 福地에 살고 있는 子孫들은 先祖의 嶠岳같이 빛나는 精神을 繼承하여 實踐함은 勿論이거니와 이 아름다운 傳統을 雲仍에게도 傳授해야 함을 必히 銘心해야 할 것이다. 竹牖先生 後孫들이 돌을 깍아 至誠으로 文字를 새겨 애오라지 標識하려 한다 하니 이보다 나은 追遠報本이 또 있으랴. 源遠水長하고 根固葉茂하듯이 先祖德業이 世上에 더욱 顯彰되고, 모든 一族이 長久한 歷史의 흐름에 더욱 繁盛하기를 祈願하는 바이다.

 

光復六十周乙酉年(2005) 仲秋節

 

東國大學校 敎授 文學博士 金海後人 金東協 謹撰

世居碑前面大字 星山後人 耳山 李憲洙 謹書

 

 

 

 

↑세거비소재지 :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96-2 죽유종택 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