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회암사(檜岩寺) 묘엄존자(妙嚴尊者) 무학대사(無學大師) 비조선국 왕사 대조계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 탑명 병서(並序)
가선대부(嘉善大夫) 예문관제학 동지경연 춘추관사 겸 판내선시사(藝文舘提學同知經筵春秋舘事兼判內膳寺事) 신 변계량(卞季良)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짓고,
가정대부(嘉靖大夫) 검교 한성판윤 보문각제학(檢校漢城判尹寶文閣提學臣) 신 공부(孔俯)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쓰다.
태조 원년(태조 1, 1392년) 겨울 10월에 대사께서 상감의 부름을 받아 송경(현 개성)에 이르셨다. 태조께서 그달 11일 탄신을 기하여, 법복과 그릇을 갖추어 왕사(王師) 대조계종사(曹溪宗師) 선교(禪敎) 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都大禪師) 묘엄존자로 봉하실 때에, 양종(兩宗) 오교(五敎)의 모든 선승들이 함께 하였다.
대사께서 법좌에 오르시어 향을 피우고 장수를 기원하신 뒤에 불자(拂子 : 먼지떨이)를 세우고 대중을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삼세의 부처님들도 말씀하시지 않았고, 역대의 조사들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대중은 알겠는가? 만일 마음 · 생각 · 입 · 혀가 서로 견주고 살펴서 말할 수 있다면, 어찌 우리 종파의 기풍이 있을 수 있으랴!” 하셨다.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유학은 인(仁)을 숭상하고 불교는 자비를 주장하나, 그 쓰임은 같습니다. 백성 보호하기를 갓난아이 보호하듯 하셔야 백성들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지극한 인(仁)과 큰 자비로 나라를 다스리셔야, 자연 만수무강하실 것이며, 자손과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를 여신지가 얼마 되지 않아 형법에 걸린 자가 많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너와 나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시고 모두를 용서하신다면, 신민들은 모두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또 나라의 영원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셨다.
태조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서울과 지방의 모든 죄수를 풀어주셨다. 당시 본관이 한산(韓山)인 목은(牧隱) 이문정공(文靖公 : 이색(李穡))이 대사에게 선물한 시 중에, “성군(聖君)은 하늘을 나는 용이요, 왕사(王師)는 세상에 태어난 부처라.”하는 구절이 있다. 태조께서 회암사(檜岩寺)는 나옹(懶翁)이 살던 큰 도량이라 하시며, 대사에게 들어갈 것을 명하셨다.
정축년(태조 6, 1397년) 가을, 절의 북쪽 벼랑에 탑을 세우라 하신 것은 대사의 스승이신 지공(指空)의 사리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무인년(태조 7, 1398년) 가을, 대사께서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용문사로 돌아가 기거하셨다. 임오년(태종 2, 1402년) 5월, 태종께서 또 회암사(檜岩寺)로 들어가라 명하셨다. 다음해 정월 또 사양하시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셨다.
을유년(태종 5, 1405년) 9월 11일에 세상을 떠나셨다.3년이 지난 정해년(태종 7, 1407년) 겨울 12월, 상감께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에게 대사의 뼈를 회암사 탑에 모시도록 하셨고, 또 4년이 지난 경인년(태종 10, 1410년) 7월, 시호를 내리셨다.
상왕께서 태조임금의 뜻으로 상감께 말씀하시니, 상감께서 신 계량(季良)에게 탑의 이름과 명(銘)을 짓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신 계량(季良)이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을 살피니, 대사의 이름은 자초(自超)요, 호는 무학(無學)이요, 계시던 처소는 계월헌(溪月軒)입니다. 속세의 나이는 79세시고, 불교에 귀의한 뒤의 나이(法臘)는 61세입니다.
속성(俗姓)은 박(朴)씨이고삼기군(三岐郡) 사람으로, 아버지 인일(仁一)은 숭정문하시랑(崇政門下侍郎)에 추증되셨고, 어머니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입니다. 어머니 채씨가 떠오르는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해, 태정(泰定) 정묘(충숙왕 14, 1327년) 9월 20일에 대사를 낳으셨다.
강보를 벗어났을 때부터 다니면서 청소를 하셨고, 학당에서는 아무도 대사를 앞서지 못했다. 18세에 기쁘게 부처에게 귀의할 뜻을 품으셨다. 혜감국사(慧鑑國師)의 뛰어난 제자 소지선사(小止禪師)께서 머리를 깎아주시고 구족계(具足戒)를 주셨다.
용문산(龍門山)에 가셔서 혜명국사(慧明國師) 법장(法藏)께 법(法)을 여쭈니, 국사께서 법을 보여주시고, 이어 “바른 길을 얻을 자, 너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시며 부도암(浮圖庵)에서 살게 하셨다. 어느 날 암자에 불이 났는데도, 대사께서는 나무 인형같이 조용히 앉아 계시니 대중이 이상히 여겼다.
병술년(충목왕 2, 1346년) 겨울, 『능엄경(楞嚴經)』을 보시고 깨달으신 바가 있어 스승에게 돌아가 고하니, 스승께서 더욱 칭찬하고 감탄하셨다. 이로부터 침식을 잊으시고 참선하며 진리를 연구하는데 전념하셨다.
기축년(충정왕 1, 1349년) 가을,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로 가셔서 거쳐하셨다. 임진년(공민왕 1, 1352년) 여름, 묘향산(妙香山) 금강굴(金剛窟)에 머무셨다. 공부가 더욱 진척되어, 졸기라도 하면 종과 경쇠를 쳐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 주는 이가 있는 듯하였다. 이때 미심스러웠던 것이 환히 풀림을 깨닫고, 급급히 자신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스승을 찾고자 하였다.
계사년(공민왕 2, 1353년) 가을, 앞장서서 연경(燕京)으로 가셔서 인도인 지공(指空)스님을 뵙고,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3,800리(1,520㎞)를 와서 화상(和尚)의 얼굴을 직접 뵙습니다.” 하셨다. 그러자 지공(指空)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인 모두가 죽겠구나!”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허락하신다는 말씀이어서 대중은 크게 놀랐다.
다음해 갑오년(공민왕 3, 1354년) 정월, 법천사(法泉寺)로 가셔서 나옹(懶翁)을 뵈었다. 나옹(懶翁)께서 한번 보시고도 훌륭한 인재임을 아셨다. 무령(霧嶺)을 구경하시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다시 나옹(懶翁)을 뵙고는 여러 해 머무셨다.
선정(禪定)을 닦고 계실 때엔 밥 때가 되어도 아시지 못하시니, 나옹(懶翁)께서 보시고, “너는 죽었느냐?” 하시면, 대사께서는 웃으시며 대답치 않으셨다. 나옹(懶翁)께서 하루는 대사와 계단에 앉으시며, “옛날에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함께 돌다리를 보다가, ‘누가 만들었을까?’ 하니, 수좌(首座)가,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조주(趙州)가 다시, ‘어디를 먼저 시작했을까?’ 하니, 수좌(首座)가 대답치 못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네게 이 일을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겠는가?” 하시니 대사께서 두 손으로 섬돌을 잡아 보이시니 나옹(懶翁)께서 그만두셨다.
그날 밤 대사께서 나옹(懶翁)의 방에 드시니, 나옹(懶翁)께서 “오늘에야 내가 너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시고, 나중에 “아는 이가 세상에 가득하다 해도, 마음까지 통하는 이야 몇이나 되겠는가? 너와 나는 한 집이니라.” 하셨다. 또 “도(道)가 있으면, 코끼리의 엄니처럼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 다른 때, 네가 어찌 남의 물건이야 되겠는가?” 하셨다.
대사께선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미심쩍은 부분을 거의 풀었으나, 산천을 돌아다니고 스승과 벗들을 찾아다니고자 하는 뜻은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강절(江浙行中書省 : 원(元)의 행정구역 이름) 지역으로 떠나고자 할 때쯤, 남쪽 지역에 발생한 변란으로 길이 막혀 못가셨다.
병신년(공민왕 5, 1356년) 여름, 귀국하기 위해 인사를 드리니, 나옹(懶翁)께서 편지 한 통을 써주시고 전송하시기를, “날마다 움직이는 전체적인 기틀과 세상살이는 다르다.
그러니 착함과 악함, 성스러움과 간사함을 생각지 말고, 인정이나 의리도 따르지 마라. 말하고 기를 뱉는 것을 마치 화살의 끝이 마주 버티고 있는 것 같이 하고, 구절과 뜻이 기틀에 맞는 것은 물이 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라. 한 입으로 손님과 주인의 구절을 삼켜버리고, 몸으로 부처와 조사(祖師)를 꿰뚫어 흡수시켜라. 갑자기 떠난다 하니, 게송(偈頌)으로 전송하겠다.” 하셨다.
게송(偈頌)에, 주머니 속에 다른 세계 있음을 믿는다면, 동서에 삼현(三玄)을 쓰도록 맡겨라.누가 너에게 선(禪)이 뭐냐고 묻거든면전을 쳐서 거꾸러뜨리고 다시 말하지 마라.대사께서 돌아오신 뒤에, 나옹(懶翁)께서도 지공(指空)에게 ‘삼산양수(三山兩水)’라는 수기(授記)를 받고 돌아오셔서 천성산(千聖山) 원효암(元曉庵)에 머무셨다.
기해년(공민왕 8, 1359년) 여름에 대사께서 찾아뵈니, 나옹(懶翁)께서 불자(拂子 : 먼지떨이)를 주셨다.나옹(懶翁)께서 신광사(神光寺)에 계시므로 대사께서도 가셨다. 나옹(懶翁)의 제자 중에 대사를 시기하자, 대사께서 아시고는 떠나셨다.
이때 나옹(懶翁)께서 대사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는 말이나 글만 못하다.” 하시고 시를 주시며, “일없는 중들이 너와 나를 구별하는 마음을 일으켜 시비를 함부로 말하니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산승(山僧)은 이 네 구절의 게송(偈頌)으로 훗날의 의심을 영원히 끊으라.”하셨다.
헤어진 뒤 따로 헤아릴 곳 있으니누가 그 속의 뜻이 다시 현묘함을 알까.멋대로 사람들은 안 된다 하겠지만내 말은 공겁(空劫) 앞을 지났노라.대사께서 고달산(高達山) 탁암(卓庵)에 들어가 도를 닦으셨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년) 겨울, 고려조의 공민왕이 나옹(懶翁)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송광사(松廣寺)에 거주하시던 나옹(懶翁)께서 가사와 바리때를 대사에게 보내시니, 대사께서 게문(偈文)으로 감사 인사를 하셨다.갑진년(공민왕 13, 1364년) 여름, 나옹(懶翁)께서 회암사(檜巖寺)로 옮기시고 낙성회(落成會)를 크게 베푸심에, 급히 서찰로 대사를 불러 수좌(首座 : 염불승)를 맡기려 하였다.
대사께서 굳이 사양하시니, 나옹(懶翁)께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훌쩍 물러남만 못하지. 임제(臨濟)나 덕산(德山)도 수좌를 맡지 않았다.” 하시고는 별실에 있게 하셨다. 나옹(懶翁)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대사께서 여러 산을 돌아다니셨다. 그 뜻은 자신의 학식이나 재주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고려조 말기에 명예와 이익을 가지고 불러 왕사(王師)로 봉하려고까지 하였으나, 대사께서 매번 가시지 않으셨는데, 마침내 임신년, 태조임금과 만난 대사의 거취가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계유년(태조 2, 1393년)에 태조께서 지세를 살펴 수도(首都)를 세우고자 대사에게 행차를 따르도록 명하셨으나 대사께서 사양하셨다.
태조께서 대사에게, “예나 지금이나 만남엔 반드시 인연이 있소이다. 일반인이 고른 것이 어찌 대사께서 고른 것에 미치겠소이까?” 하심에, 계룡산(鷄龍山)과 신도(新都)의 순행(巡幸) 길을 대사께서 모두 따르셨다.
그해 9월, 대사께서 선사(先師)이신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분을 모신 탑(塔)의 이름과 나옹(懶翁)의 영정(影幀)을 거는 불사(佛事)로 왕지(王旨)를 받들었다. 회암사(檜巖寺)에선 탑에 이름을 새기시고, 광명사(廣明寺)에선 영정(影幀)을 거는 불사(佛事)를 크게 여셨다.
스스로 영정(影幀)에 대한 찬을 지으심에, “지공(指空)의 천개의 검과 평산(平山)의 갈(喝)을 받고, 임금 앞에선 승려들의 공부선(功夫選)을 시험했네. 마지막까지 신비로운 광채, 사리를 남기시니, 삼한(三韓)의 조실(祖室)로, 영원히 전해지리.” 하셨다.
10월에 나라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옮기는 불사(佛事)를 연복사(演福寺)에서 베풀고, 대사께서 주관토록 하셨다. 대사께서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사퇴하신 뒤로는 대중 대하시는 것이 시들해지셔서, 비록 임금의 명에 따라 다시 회암사(檜巖寺)에 계셨으나 곧 금강산(金剛山)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가셨다.
을유년(태종 5, 1405년) 봄에 가벼운 병환이 있으셨다. 모시는 사람이 탕약을 올리고자 하니, 대사께서 물리치시면서, “팔십에 든 병에, 어떤 약을 쓰겠느냐?”하시고, 4월에 금장암(金藏庵)으로 옮기시니, 돌아가신 곳이다.
8월, 의안대군의 편지에 대사께서, “먼 산 중에 있느라 만나 뵐 기약이 없습니다. 다른 날 부처님의 회상(會上 : 집회)에서나 뵙겠습니다.”라고 답서하셨다. 그리고 대중에게 “머지않아 나는 떠나리라.”하신지,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 대사의 병환이 깊어지자, 어떤 스님이 “몸은 흩어져 어디로 가는 걸까요?” 여쭈었다.
대사께서 “모른다.”하시니, 또 여쭈었다. 대사께서 성을 내시며 “모른다.”하셨다. 스님이 “화상(和尙)께선 병이 드셨는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쭈니, 대사께서 곁의 스님을 가리키셨다.
스님이 또 “몸은 흙 · 물 · 불 · 바람이니 결국은 사라집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일까요?” 하니, 대사께서 두 팔로 버티시면서 “이것이 하나다.”하시고는, 조용히 떠나시니, 한밤중이었다.그때 화엄종의 찬기(賛奇) 스님께선 송경(松京 : 현 개성)의 법왕사(法王寺)에 계셨다. 꿈에, 대사께서 부처님 정수리 연꽃 위 공중에 서 계시는데, 부처님과 연꽃이 하늘에 가득 하였다.
깬 뒤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절 안의 대중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듣는 이들도 이상한 일이라 하였다. 얼마 뒤에 부고가 오니, 대사께서 돌아가셨을 때가 바로 그 꿈을 꾼 시각이었다. 대사께서 저술하신 『인공음(印空唫)』에 문정공(文靖公 : 이색)께서 서문(序文)을 쓰시고, 대장경으로 간행하여 용문사(龍門寺)에 봉안하니, 문정공(文靖公 : 이색)께서 그 끝에다 발문(跋文)을 쓰셨다.
대사의 성품은 순박함을 좋아하시고 꾸미는 것을 즐기지 않으셨다. 먹는 음식은 매우 소박하게 하시고 남는 것이 있으면 그때 그때 남에게 주셨다. 대사께서 일찍이 “팔만가지 수행 중에서 영아행(嬰兒行)이 으뜸이라.” 하셨는데, 모든 베푸심을 말씀하신 대로 하셨다. 그리고 사람을 공손히 대하시고 물(物)을 지극히 사랑하신 것은, 모두가 지극하신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억지로 힘쓰신 바가 아니니, 대체로 천성이 그러하셨던 것이다.
신 계량(季良)은 삼가 절을 올리고 머리를 숙여 탑의 이름 ‘자지홍융(慈智洪融)’이라 하고, 이어 명(銘)을 올립니다. 대사의 도(道) 드높아, 쉽사리 생각할 바 아니니,선각(禪覺 : 나옹의 시호)의 적자이며 성조(聖祖 : 태조)의 스승이셨네! 대사의 평상시는 어린아이 같으시나, 안목 갖춘 자와의 만나면 화살촉을 서로 겨누는 것 같았다. 바리때 하나, 옷 한 벌, 겸손하고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셔도, 더할 나위 없는 존숭을 받으시니, 본래 지니신 성품 같았다.
가거나 나아가시되, 선견(先見)에 구애되지 않으시고 하늘이 내리신 수명이 칠십을 지나 아홉을 더하셨네. 오신 곳은 어디인가? 햇살이 품을 비추었고 가신 곳은 어디인가? 연화의 위로다. 곳곳에 제자들이 대사의 행적을 드러내려 하는데, 천지 사이에 돌보다 굳은 것 없기에 명을 새겨 영원히 후세에 보이노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무학왕사비 음기(無學王師碑 陰記) 우리나라의 세 분의 조사(祖師) 지공(指空) · 나옹(懶翁) · 무학(無學)의 사리를 안치한 탑과 사적비(事蹟碑)가 양주(楊州)의 천보산(天寶山) 북쪽 벼랑에 있으니,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의 두 비는,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이 글을 짓고, 한수(韓修)와 권중화(權仲和)가 써서 고려 말에 세운 것이다.
무학(無學)의 비는 태종께서 즉위하신지 10년(태종 10, 1410년)되던 해인 경인년에, 왕명을 받들어 문신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가 써서 두 분 왕사(王師)의 탑 아래에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절은 폐허가 되었고 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금상 21년(순조 21, 1821년) 신사년에 이응준(李膺埈)이란 자가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과 함께 사리탑을 헐은 뒤 자기 아버지를 묻고, 지공(指空) · 무학(無學)의 두 비를 두들겨 부쉈다. 관찰사가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임금께서 깜짝 놀라시어, 이응준(李膺埈)과 조대진(趙大鎭)은 섬으로 유배하고, 이응준(李膺埈) 아비를 묻은 무덤을 파버리라 명하셨다.
이어 “부서진 비는, 개국 초에 선조의 분부에 따라 세운 것인데, 오늘날 보존치 못함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말씀하시며, 경기(京畿) 감영(監營)에 명하시어 일을 주관토록 하였다. 지공(指空)의 비는 문정공(文靖公)의 후손인 목사(牧使) 의현(義玄)에게 다시 쓰게 하고, 무학(無學)의 비는 많이 훼손되지 않았으므로 예전에 새긴 공부(孔俯)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무자년(순조 28, 1828년) 가을에 공사가 비로소 끝나 옛터에 세웠다.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은 중국으로부터 와서 고려 말에 부처의 가르침을 폈다. 무학(無學)은, 그들의 도(道)를 이어받아 개국 초기 수도(首都)를 정할 때에 공로가 많았으니, 기록으로 남길만한 분이다. 회암사(檜巖寺)에 세 분의 비를 함께 세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에 갑자기 비가 훼손당한 것은, 이 또한 불교의 한 수난이리라.상감께서 지난날의 감회를 서글퍼하시며, 담당 관리에게 그윽이 명하시어 한 번에 거듭 새롭게 하도록 하셨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던 옛 자취가 이 때문에 다시 훤해지고 더욱 멀리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 어찌 훌륭한 성인의 옛 자취를 쫓고 공로를 기념하는 성대한 의식이 아니겠는가?
이에 전말을 갖추어 비의 뒤에 기록하노라.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용양위 상호군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원임 규장각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우빈객(行龍驤衛兼上護軍弘文舘大提學藝文舘大提學知成均舘事原任奎章閣提學都捴府都摠管世子右賓客) 김이교(金履喬)가 덧붙여 쓰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순찰사(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水原留守開城留守廣州留守巡察使) 김겸(金鎌)이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주사도감동 인봉당 덕준 봉은사 수선종판사 회선스님 성암당 영철
부간역 기암당 의관 전판사 환허당 등환
물력차지 가선 희행 봉선사 수교종판사 평송당 보채
남한도총섭 취봉당 관활 공원 가선 최인스님
중군 가의 의찰스님 도암당 성기
북한도총섭 가의 성묵스님 영장당 옥인
중군 가의 도문스님 추담당 삼학
용주사 도총섭 제방대법사 긍준 인성당 의현
중군 가선 정우스님 산인 신경
각수 박지춘석수 박종석 문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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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檜岩寺妙嚴尊者無學大師碑」
朝鮮國」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塔銘幷序」
嘉善大夫藝文舘提學同知經筵春秋舘事兼判內膳寺事臣卞季良奉 敎撰」
嘉靖大夫檢校漢城判尹寶文閣提學臣孔俯奉 敎書」
我太祖之元年冬十月師以召至松京太祖以是月十一日誕辰具法服若器封爲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兩宗五敎諸山衲子皆在焉師」陞坐拈香祝釐已竪起拂子示大衆曰這箇是三世諸佛說不到歷代祖師傳不得底大衆還會麼若以」心思口舌計較說話者何有吾宗復於上曰儒曰仁釋曰慈其用一也保民如赤子乃可爲民父母以至」仁大慈莅邦國自然聖壽無疆金枝永茂社稷康寧矣今當開國之初陷於刑法者非一願殿下一視同」仁悉皆宥之俾諸臣民共臻仁壽之域此我邦家無疆之福也上聞而嘉之即宥中外罪囚時韓山牧隱」李文靖公以詩贈師有聖主龍飛天王師佛出世之句上以檜巖寺懶翁所居大道塲命師入焉丁丑秋」命造塔于寺之北崖師師指空浮屠所在也戊寅秋師以老辭歸居于龍門壬午五月今我主上殿下又」命入檜巖明年正月又辭入金剛山以乙酉九月十一日示寂越三年丁亥冬十有二月上命義安大君」和厝師骨于檜巖之塔又四年庚寅秋七月謚以云云上王以太祖之志言於上上命臣季良名其塔且」爲銘臣季良謹按其弟子祖琳所撰行狀師諱自超號無學所居曰溪月軒壽七十九法臘六十一俗姓」朴氏三岐郡人也考諱仁一贈崇政門下侍郎母固城蔡氏蔡夢見初日射懷中遂有娠以泰定丁卯後」九月二十日生始免褓襁便行掃除及就學人莫敢先年十八脫然有出世之志依慧鑑國師上足弟子」小止禪師薙髮具戒至龍門山咨法于慧明國師法藏國師示法己乃曰得正路者非汝而誰遂令居浮」圖庵一日庵中失火師獨靜坐如木偶人衆異之丙戌冬因看楞嚴經有悟歸以告其師師加稱嘆自是」廢寢忘飱專於叅究己丑秋抵鎭州吉祥寺居焉壬辰夏住妙香山金剛窟功益進或睡則若有擊鍾磬」以警焉者是時釋然了悟汲汲有求師就質之意癸巳秋挺身走燕都叅西天指空禮拜起云三千八百」里親見和尚面目空云高麗人都殺了也盖許之也衆乃大驚次年甲午正月到法泉寺叅懶翁懶翁一」見而深器之遊霧嶺歷五臺再見懶翁於西山靈巖寺留數載其在定也至有當食而不知者翁見之曰」汝却死了耶師笑而不答翁一日與師坐階上問曰昔趙州與首座看石橋問是甚麼人造首座答云李」膺造州云向甚麼處先下手首座無對今有人問爾如何祗對師即以兩手握階石以示之翁便休去其」日夜分師入翁室翁云今日乃知吾不汝欺也後謂師曰相識滿天下知心能幾人爾與我一家矣又曰」道之在人如象之牙雖欲藏之不可得也他時爾豈爲人前物乎師之質其所得殆無可疑然而遊歷山」川叅訪師友之志盖未己也將游江浙時適南方有變路梗乃止丙申夏欲東還告辭翁手書一紙送行」曰觀其日用全機與世有異不思善惡聖邪不順人情義理出言吐氣如箭鋒相拄句意合機似水歸水」一口呑却賓主句將身透過佛祖關俄然告行予以偈送云己信囊中別有天東西一任用三玄有人問」爾叅尋意打倒面門更莫言師旣還懶翁亦以指空三山兩水授記還國住千聖山元曉庵己亥夏師徃」見翁以佛子與之翁在神光寺師亦徃焉翁之徒有忌師者師知而去之翁謂師曰衣鉢不如言句以詩」遺師云閒僧輩起人我心妄說是非甚不然也山僧以此四句之頌永斷後疑分襟別有商量處誰識其」中意更玄任爾諸人皆不可我言透過刼空前師入高達山卓庵自守辛亥冬前朝恭愍王封懶翁爲王」師翁住松廣以衣鉢付師師以偈謝甲辰夏翁移錫檜巖大設落成會馳書召師以充首座師力辭翁曰」多管不如多退臨濟德山不做首座來俾居便室翁逝矣師遊諸山志在晦藏不欲人知前朝之季召以」名利至欲封爲師師皆不至卒有壬申之遇師之去就豈偶然哉歲癸酉太祖欲相土建都命師隨駕師」辭太祖謂師曰古今相遇必有因緣世人所卜豈若道眼巡幸鷄龍山及新都師皆扈從其年九月師以」先師指空懶翁二塔名及掛懶翁眞事奉旨刻塔名於檜巖大設掛眞佛事於廣明寺自製眞讃云指空」千歛平山喝選擇功夫對御前最後神光遺舍利三韓祖室萬年傳十月國設轉藏佛事於演福寺命師」主席師自戊寅辭退之後倦於侍衆雖以上命復住檜巖旋入金剛山眞佛庵乙酉春有微疾侍者欲進」醫藥師却之曰八十有疾何用藥爲夏四月移于金藏庵卽其示寂處也八月義安大君致書師答書有」山居邈爾會謁無期他時異日佛會相逢之語謂大衆曰不久吾逝矣而己果然始師疾革僧問四大各」離向甚處去師云不知又問師厲聲云不知又僧問和尙病中還有不病者也無師以手指傍僧又問色」身是地水火風摠歸磨滅那個是眞法身師以兩臂相拄云這個是一個答己寂然而逝夜半也時華嚴」釋賛奇在松京法王寺夢見師立空中佛頂蓮花之上佛與蓮花其大彌天覺而心異之與寺衆說其夢」聞者疑其非常未幾訃至即其夢時也師所著曰印空唫文靖公序其端印成大藏安于龍門文成公跋」其尾師性尙質不喜文飾自奉甚菲餘輒施捨甞自言曰八萬行中嬰兒行爲第一凡所施爲無不相若」者且接人之恭愛物之誠出於至心非有所勉盖其天性然也臣季良謹拜手稽首而名其塔曰慈智洪」融且系以銘銘曰師道之卓匪夷所思禪覺之嫡聖祖之師師在平居嬰兒之如具眼之遇箭鋒相拄一」鉢一衣謙謙自卑尊崇無對若固有之或去或就先見不苟天錫佛壽七旬有九來也何從日射懷中去」也何向蓮花之上虔虔其徒圖表厥跡兩間之堅無久惟石刻此銘章垂示罔極」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附無學王師碑陰記」東國三祖師指空懶翁無學浮圖及事蹟碑在楊州天寶山檜巖寺之北崖指空懶翁兩碑牧穩李文靖撰韓 脩權仲和書麗季所竪也無學碑卽」我」太宗踐祚之十年庚寅奉 上王命命詞臣卞季良製孔俯書幷竪于兩師碑塔之下寺近廢而碑獨存今 上二十一年辛巳有李膺峻者與術」人趙大鎭毀浮圖而瘞其親指空無學二碑俱被撞碎道臣聞于朝 上震駭李與趙幷 命島配掘其瘞仍 敎曰所碎之碑國初所命至今日」而不能保存者亦甚怵然分付畿營更爲竪建如是處分豈爲釋敎而然一則爲國初所重也一則爲國綱也於是自度支劃錢三千兩出付僧德」俊等使之重建而畿營主其事指空碑屬文靖後孫牧使義玄改書無學碑碎不甚模舊刻孔俯書刻之戊子秋工始就竪于舊址盖指空懶翁自」中國來演釋敎於麗季無學師其道在我國初定鼎時其功多有可紀者檜巖寺之同竪三碑良以此也于今四百餘年之後忽遭破毀抑亦佛家」之一刧而乃我聖上惕然憾懷爰命有司一擧而重新之使湮晦之古蹟賴而復顯其傳益遠豈不有光於 大聖人追舊紀功之盛典歟茲具」顚末記之石右」崇祿大夫行龍驤衛上護軍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原任 奎章閣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右賓客金履喬追記」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水原府留守開城府留守江華府留守廣州府留」守巡察使金鐮書」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主事都監董仁峯堂德俊 奉恩寺首禪宗判事釋會善 城庵堂永哲」副看役奇庵堂義寬 前判事喚虛堂等還」物力次知嘉善熙行 奉先寺首敎宗判事平松堂普蔡」南漢都摠攝翠峯堂寬活 公員嘉善釋最仁」中軍嘉義釋義察 道庵堂聖麒」北漢都摠攝嘉義釋性黙 影漳堂玉印」中軍嘉義釋道聞 秋潭堂三學」龍珠寺都摠攝諸方大法師肯俊 印城堂宜賢」中軍嘉善釋正愚 山人信瓊」刻手朴枝春」石手朴宗錫 文守兆」 <끝>
↑양주회암사의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이 비는 무학대사(1327∼1405)의 묘비로서 조선(朝鮮) 태종(太宗) 10년(1410)에 건립되었다. 대사는 고려말(高麗末) 조선초(朝鮮初)의 명승으로 속성은 박(朴), 이름은 자초(自超), 호는 무학(無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고, 용문산(龍門山)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佛法)을 배운 후 묘향산(妙香山)에 수도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연경(燕京)에 가서 지공대사(指空大師)를 찾아 법을 구하고, 이어 법천사(法天寺)에 가 있는 나옹(懶翁) 선사를 찾았으며, 여러 곳을 순례한 후 공민왕 5년(1356)에 귀국하였다.
조선 태조(太祖) 원년(1392)에 태조에게 불려 왕사(王師)가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였다. 그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金剛山) 금장암(金藏庵)에서 입적하였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그러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는 4각 하대석(下臺石) 위에 비신을 놓고 장방형의 비개석(碑蓋石)을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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