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沈默)의 효용(效用)
말을 하는것은 어(語)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묵(黙)이라 합니다.
사람이 꼭 말을 해야만이 다른사람과 소통하는 것은 아니고, 말없이 웃는 것만으로도, 수백 마디의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뜻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고로 말을 하는 것만이 말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는 묵((黙)도 또한 말인 것입니다.
[원문]
當黙而黙,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黙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黙.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자료 : 김유근(金逌根, 1785~1840),「묵소거사자찬(黙笑居士自讚)」,『황산유고(黃山遺稿)』-
[역문]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니, ‘때에 맞게 함[時]’에 가깝고, 웃어야 할 때 웃으니, ‘딱 들어맞게 함[中]’에 가깝다. 그렇게 하면 옳고 그름을 따져 판단하는 즈음과 변화하는 세상에서 처신하는 즈음에, 움직여도 천리(天理)에 어긋나지 않으며, 가만히 있어도 인정(人情)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러니 침묵하거나 웃는 뜻이 아주 큰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뜻을 전할 수 있으니, 침묵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웃어도 될 만한 때에 웃으니, 웃는다고 해서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힘쓸지어다. 나 자신을 돌아보건대, 이렇게 하면 이 세상에서 화를 면할 수 있음을 알겠도다.
↑추사 김정희가 쓴 <묵소거사자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해설]
정조(正祖) 때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났던 김유근의 글이다. 김유근이 자신의 호를 ‘묵소거사(黙笑居士)’라고 짓고서, 그렇게 호를 지은 뜻을 쓴 것이다. 이 글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단정하면서도 묵중한 '묵소거사자찬'이라는 글씨로 인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추사의 이 글씨로 인하여 한동안은 이 글이 김정희의 글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근자에 이 글이 김유근의 문집 속에 들어있는 것이 확인되어 김유근의 글로 확정되었다.
김유근은 이 글에서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웃어야 할 때 웃으면, 그것이 바로 ‘시중(時中)’의 도(道)에 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말을 함에 있어서 이 시중의 도에 합하게 되면, 모든 일에 있어서 천리에 어긋나지 않고 인정을 거스르지 않아, 험난한 세상에서도 화를 면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시중(時中)’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그때그때 알맞게 대처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일, 동정(動靜)과 어묵(語默)과 출처(出處)와 진퇴(進退) 등에 있어서 제때에 미쳐서 딱 들어맞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중이다.
말에 있어서 시중은 무엇일까?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말하지 않아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말에 있어서의 시중이다. 말을 함에 있어서 이 시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군자가 되지 못하고 소인이 되며, ‘푼수’가 된다.
공자(孔子)는 “더불어 말할 만한데도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게 되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한데도 말을 하면 말을 잃게 된다.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고 하였다.
자사(子思)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그 말이 족히 자신을 흥기하게 할 수가 있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그 침묵이 족히 자신을 용납되게 할 수가 있다. [邦有道其言足以興 邦無道其默足以容]’라고 하였다. 공자와 자사의 이 말은 모두 말에 있어서의 시중을 중요시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세상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화합하는 가운데서도 또한 끊임없이 경쟁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사는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데에만 익숙해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설프다.
그러므로 서로 간에 소통하고 화합하기 위하여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그 때문에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거친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자극하게 되어, 끝내는 서로 불화하고 단절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요즈음 각종 언론 매체들을 접하다 보면, 토론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토론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상대방의 말은 차분히 듣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다가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끝내고 만다.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논쟁만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경우는 이보다도 더 심하다. 그야말로 애들의 말싸움만도 못한 말장난만 하는 경우도 있다. 심한 경우에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상대방을 헐뜯기도 한다. 그 결과 정치는 사라지고 정쟁만 남게 되었다.
각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생활에서 말을 함에 있어서 깊은 사려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친 말을 함부로 하고 있다. 그 때문에 끝내는 상대방과 심각하게 다투어, 서로의 관계를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에는 특히 인터넷에서 함부로 내지르는 악성댓글로 인한 폐해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말은 아주 소중한 것이다. 그런 만큼 아껴서 써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소중함을 모르고 함부로 남발하면서 마구 쓰고 있다. 속담에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고 하였다.
말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함부로 쓸 경우, 말을 하면 할수록 더 거칠어져, 끝내는 시비를 일으키고 만다. 오늘날처럼 말의 순기능은 제 역할을 못하고 말의 역기능만 불어나고 있는 때에 꼭 유념해야 할 속담이다.
말을 함에 있어서는 적당한 때에 말하고 적당한 때에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데 익숙한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지 않아서 잘못되는 경우보다 말을 많이 하여서 잘못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침묵하는 법을 익혀서, 자신의 허물을 줄이고 상대방과 부딪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침묵은 다른 사람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볼 수 있게도 한다. 말을 하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차분하게 성찰하기가 어렵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는 가운데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지만, 자신에 대해 올바르게 성찰할 수가 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성찰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게 된다.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덕이 닦여지게 된다.
도는 침묵을 통하여 성취되고/道以默而凝)
덕은 침묵을 통하여 길러지네./德以默而蓄
정신은 침묵을 통해 안정되고/ 神以默而定
기운은 침묵을 통해 축적되네./氣以默而積
언어는 침묵을 통해 깊어지고,/言以默而深
사려는 침묵을 통해 얻어지네./慮以默而得
형식은 침묵을 통해 줄어들고,/名以默而損
내용은 침묵을 통해 더해지네./實以默而益
깨어선 침묵을 통해 태평하고,/寤以默而泰
자면선 침묵을 통해 편안하네./寐以默而適
재앙은 침묵을 통해 멀어지고,/禍以默而遠
복록은 침묵을 통해 모여드네./福以默而集
말 많으면 이것과 반대로 되니,/語者悉反是
그 득실을 분명하게 알겠도다./得失明可燭
조선 시대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이름 높은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가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묵소(墨所)’라고 짓고서, 그렇게 이름 지은 이유를 쓴 「묵소명(黙所銘)」이란 글이다.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침묵의 효용가치가 무엇이며, 말을 많이 할 경우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오늘날처럼 말을 많이 함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야기되는 때에는 가끔은 침묵하여서 자신의 허물을 줄일 필요가 있다. 또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여 자신의 덕을 높이고자 하는 삶의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글쓴이 : 정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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