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天休堂 李夢奎 行狀 - 상서공 후

야촌(1) 2006. 8. 18. 13:26

[인물요약]

 

● 천휴당 이몽규(天休堂 李夢奎)

     [생졸년] 1510년(중종 5년) 2월 초6일 ~ 1563년(명종 18) 6월

 

1510(중종 5)~1563(명종 18) 때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이인신(李仁臣)의 아들로, 종실이었던 이모부 흥녕부정(興寧副正) 이린(李磷)에게 출계[양자] 함. 사후에 명현(名賢)으로 평가받아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으며, 율곡 이이(李珥)가 지은 행장(行狀)과 잠곡 김육(金堉)이 지은 전기(傳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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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휴당 이공 행장(天休堂李公行狀)

 

선생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몽규(夢奎)이며, 자(字)는 모(某)이다.

경주(慶州) 사람으로 신라 시조 혁거세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다.

 

6대조는 인주지사(仁州知事)를 지낸 이원보(李元普)이다. 이 분이 판관(判官) 이승(李昇)을 낳았고, 판관이 공조참판(工曹參判) 이연손(李延孫)을 낳았고, 참판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숭수(李崇秀)를 낳았으니 곧 선생에게 증조가 된다.

 

조부 이성무(李成茂)는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으며 증직이 이조참판(吏曹參判)이다.

부친 이인신(李仁臣)은 주부(主簿)를 지냈는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았다.

모친은 광주 반 씨(光州潘氏)로 절도사(節度使) 반희(潘熙)의 딸이다. 정덕(正德) 경오년(庚午年, 1510년(중종 5년) 2월 초6일에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래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풍골이 맑고 상쾌하였다. 낳아서 몇 달 안 되어 이모부인 종실(宗室) 흥녕 부정(興寧副正)이 적자가 없어서 데려다 길렀다. 뒷일을 부탁하려 함이었다.

 

말을 익힐 무렵에 책을 읽을 줄 알아 겨우 열 살에 벌써 대의(大義)를 통하였다.

조정의 관리 중 선배들이 와서 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13세에 눌재(訥齋) 박 선생(朴先生/朴增榮)에게 입학하였다. 선생이 그때 학관(學官)으로 있었는데 크게 칭찬하고 탄복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나라를 다스릴 재목이 될 것이다.” 하였다.

 

김 상공(金相公) 아무개가 선생 옆집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한 번 보고 그 자품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때 나이 16세였다. 20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례는 한 결 같이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3년 동안 시묘 살 이를 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530년 중종 25년)에 양모(養母)가 하세하였다. 선생은 보호하여 길러 준 은혜를 생각하고 재최(齋齊) 3년 복을 입고 고향에서 시묘 살 이를 하면서 슬퍼하고 사모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김 상공(金相公)이 마침 벼슬을 그만두고 한 동리에서 가식(家食)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탄복하여 찾아가서 같이 이야기를 해 보고 더욱 공경하고 추중하였다.

그로부터 서로 오고 가고 상종하여 끊어지지 않았다.

 

매양 당대의 학자를 말하려면 반드시 선생을 일컬으면서 말하기를, “기상과 도량이 광대한 것과 선천적인 소질이 높은 것이 사람마다 다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복을 벗자 또 모친상을 당하였다. 연거푸 큰 초상을 당하여 기력이 쇠진하여 사람들이 혹 일어나지 못하지 않나 걱정하였으나 다행이 지탱할 수가 있어서 상을 마쳤다. 형제들과 분재(分財)할 때 자기는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것을 취하였다.

 

형 하나가 집도 절도 없었는데, 선생은 자기 몫으로 있는 밭을 나누어주면서, “형님이 여러 형제 중에 가장 가난하고 또 처자조차 없으니 이것으로 우선 급한 것이라도 면하시오.” 하였다. 무릇 완호물(玩好物)이 생겨서 형제 가운데 갖고 싶어 하는 눈치가 있으면 말이 나오기 전에 미리 주면서 조금도 아까운 기색이 없었다.

 

양부(養父)를 섬김에 정성과 효심이 두루두루 이르러서 이목(耳目)에 좋은 물건과 심지(心志)에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꼭 준비하였으니, 사람들이 다들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있을 때 그 성가와 명예가 대단하였다. 또래 친구들이 모두 추중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 안의 의론이 반드시 선생의 주장을 듣고 난 뒤에 결정되었다.

 

한때의 명사들이 집에 모여들어서 수레와 말이 문안에 가득하여 비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의 즐거워하는 바는 아니었다. 인종(仁宗) 초에 성균관의 젊은 유생들이 서로 다투어 고담 준론(高談峻論)을 펴놓았다. 선생이 이것을 걱정하고 드디어 성균관을 물러 나갔다. 고담 준론을 하던 선비들이 얼마 뒤에 거의가 다 패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544년 인종 즉위년)에 흥녕정[興寧正=이모부인 종실인 이린(李磷)을 말함]이 하세하였다.

선생이 복(服) 입기를 생부(生父) 처럼 하였다. 사대부로 조상하는 사람이 거리를 메워서 가득하였다.

 

흥녕군은 서자(庶子)만 넷 있었는데, 다 미련하고 충실하지 못해 행실이 좋지 못하였다. 흥녕정이 자식같이 취급하지 않고 집에는 발걸음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선생이 조용히 천성의 친(親)으로 가르치도록 간하였다. 흥녕정의 마음이 좀 풀렸다.

 

상(喪)을 당하여 선생이 생각하기를, ‘양부모도 나에게는 그 은혜가 낳은 부모나 같으니 장례와 제사를 당연히 정성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단지 성이 다르기 때문에 가독 상속(家督相續)을 할 수 없고 마땅히 서자에게 가야한다’ 하고, 서자들을 불러서 권려하기를, “양부가 평일에 너희들을 없는 것같이 생각하고 나로 하여금 가독 상속을 잇게 하려 하였다.

 

그 뜻을 저버릴 수는 없으나 이미 성을 이을 자제가 있는데 이성(異姓)에게 제사를 받들도록 하는 것은 의리상 마땅하지 않다. 너희들은 마땅히 행실을 고치고 생각을 돌려서 공경하여 제사를 받들어 아버지로 하여금 지하에서 한이 맺히도록 하지 말라. 제사용 쌀이나 제기 등은 다 내가 마련하여 너희들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으리라.” 하였다.

 

서자들이 다 감동하여 울면서 함께 시묘 살 이를 하였다. 3년 뒤에 전답과 노비를 국법에 따라 나누지 않고 서자들에게 넉넉히 주었다. 재산은 죄다 마음대로 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터럭 하나도 취하지 않고, “너희들이 굶주리고 떨면 내가 누구와 함께 넉넉히 지내겠느냐?” 하였다. 다들 미칠 수 없는 일이라고 탄복하였다.

 

서자들이 처음에는 그 의리에 감동하였으나 욕심이 한이 없어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또 낭비하여 절약하지 않았다. 혹은 형벌을 받고 죽기도 하고 혹은 사방으로 흩어지니 선생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의 처가댁 별장이 보령(保寧)에 있었다. 선생은 본래 도시를 싫어했기 때문에 과거를 팽개치고 호연히 전원으로 돌아갔다. 때는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이었다. 사는 곳의 뒤편에 수풀과 수석이 절승(絶勝)한 데가 있어서 서실(書室)을 마련하고 매우 깨끗이 해 놓았다. 현판을 천휴(天休)라 걸고 인해서 자호(自號)로 하였다.

 

집 앞에는 조그만 못을 파고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끌어들였으며 화초를 많이 심었다.

그 사이에 모든 생각을 잊고 우두커니 앉아서 혹 밤늦도록 무엇인가 생각이 떠오르면 곧 노래를 부르거나 글을 읊었다. 또 도원도(桃源圖)를 모사하여 걸어 놓고 청송(聽松)이 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걸어 놓고 완상(翫賞)하면서 유유히 스스로 즐기기도 하였다.

 

항상 소보(巢父)와 허유(許由)의 귀 씻은 사적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고사리 캐던 일과 원량(元亮, 도연명(陶淵明))의 삼경(三逕)을 사모하여 먼 세대에 서로 감통하는 점이 있었다. 가사(歌詞)를 지으매 격조가 높고 의미가 깊었다. 당시에 그 곡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안에 혹 일용(日用)이 궁하여도 염연히 개의하지 않았다. 부인 김 씨는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고 그 뜻을 잘 따랐으므로 선생이 공경하고 중히 여기니 집안이 매우 화목하고 질서가 있었다.

 

혹 재산을 늘려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우도록 권하면 선생이 이르기를, “명성이 높고 현달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한가하게 임천(林泉)에 누운 것은 오직 욕심을 덜고 정신을 길러서 일생을 편하게 지내자는 것뿐이요.

 

옛날의 군자들이 평생 간고하게 살아서 굶주리고 추운 것을 면하지 못했어도 오히려 자연을 즐기고 운명을 아는 사람이 있었소. 나와 같은 사람은 넉넉지는 못하지만 흉년만 안 들면 조석 걱정은 없으니 무얼 또 재산 문제로 마음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소? 내 자손이 만약 불초하지 않다면 나같이 지내는 것으로 족할 것이고 만약 불초하다면 전답이 많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 봄에 선생의 백씨(伯氏)가 서울에서 하세하였다.

선생은 마침 병이 있었으나 분상(奔喪)하여 극도로 슬퍼한 나머지 기력이 갑자기 쇠해졌다.

장사를 치른 뒤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여름에 이르러 병세가 더 심해졌다. 6월 모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54세였다.

 

귀천(貴賤)과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고을 사람들은 달려와서 상에 임하였으며 기공(期功)의 복을 입는 사람처럼 며칠씩 가지 않았다. 소먹이는 아이나 심부름하는 사람들조차도 차마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어진 분이 돌아가셨다.” 하였다. 확에 절구질을 하지 않았으며 들에서도 노래를 부르지 않은 것이 달포를 넘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평탄하고 광활하였으며 풍골과 정신이 고상하고 꿋꿋하였다.

 

부귀와 영달에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소싯적에 장인 김공(金公)이 벼슬을 하라 하였으나 선생이 거절하여 받지 않고 그의 형에게 주도록 부탁하였더니 김 공이 의롭게 생각하고 허락하였다.

 

그 뒤에 이조에서 그의 현철함을 추천하려 하였다. 마침 뜻을 잘 아는 친구가 낭관(郎官)으로 있었는데 동료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무개의 마음을 잘 아는데 반드시 굴하여 이름을 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름은 그가 싫어하는 바니 무엇 때문에 싫어하는 것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 사람들이 선생의 지조를 높이 평가하였고 또 그 친구가 친구의 마음을 잘 아는 데 탄복 하였다.

 

선생의 자녀가 장성하자 권세 있고 존귀한 집에서 청혼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선생이 잘 말하여 끝내 승낙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대가와 혼인하는 것은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운명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부형(父兄)이 일찍 사망하고 그 과부가 가난하게 살았다. 선생이 그 자녀를 자기 소생처럼 사랑하였다.

1남 1녀를 데려다가 혼수를 마련하여 제때에 가취(嫁娶)시켜 각각 그 생업을 얻도록 하였다.

 

빈객을 대접할 때에는 혹 술과 음악과 여색으로써 즐겁게 하여 홍에 놓인 뜻이 있는 듯 하였으나 혼자 있을 때는 술도 끊고 색도 근신하여 종일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보령으로 내려갈 때 부인 김씨가 그 모부인이 늙고 병들어 있으므로 차마 띄어 놓고 갈 수가 없다고 하여 선생보다 12년 뒤에 갔다. 선생은 그동안 소실도 두지 않았다.

 

친구 상사(上舍) 이파남(李巴男)이 서녀가 하나 있어 무척 사랑하였다. 그래서 선생에게 부탁하려 하여 울다시피 하였으나 선생이 굳이 사양하였다. 누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만약 착하면 더 말할 것 없이 좋지만 만약 착하지 못하다면 버리게 될 터인데 버리면 친구를 배반하는 것이 되고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집 가도를 문란하게 할 터이니 착한지 착하지 않은지 모르므로 감히 허락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선생은 가슴속 분별이 매우 밝아서 사람에게 인정하는 점이 적되 언사와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귀하고 천한 것과 어질고 어리석은 것을 가리지 않고 응답함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말과 웃음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빈객이 항상 자리에 가득하였다. 모두 다 환심을 샀다.

 

고을 사람들 중에 다투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알아듣도록 타이르되 간절히 하기를 마지않았다.

그 성의에 감동하여 교화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비록 사리에 어둡고 미련한 사람이라도 감히 악한 짓을 방자하게 하지 못했다. 혹 풍속을 해치거나 무너뜨리는 행동을 하게 될 때에는 선생을 생각하면 두려운 생각이 나서 “이 생원이 내가 하는 짓을 혹 알지나 않나?” 하였다.

 

백성이 혹 죄 망에 걸리거나 환난에 빠지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해 주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착한 사람은 좋아하였고 착하지 않은 사람도 미워하지 않았다.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맛있는 음식 한 가지라도 있으면 먼저 와서 다투어 바쳤다. 또 주식(酒食)을 갖추어 놓고 꼭 왕림해 달라고 청하였다.

 

남의 공경과 사랑을 받았음이 이와 같았으나 이단(異端)의 서적에 관하여는 반드시 심각하게 배척하였다.

항상 풍수(風水)의 설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정신이 흩어지고 맥박이 정지하고 남은 형해(形骸)는 고목과 같고 식은 재와 같을 따름이다.

 

어찌 산천의 길흉으로써 자손에게 화복을 줄 리 있겠는가? 부모가 돌아간 뒤에 지성을 다할 것은 오직 제사뿐이다. 장지는 자기 집 뒤에 자리 잡아 쓰면 된다.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어서 여기에 묻히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식자들이 틀림없는 이야기라고 하였다.

 

불교와 무당을 가장 미워하였다. 마을에 음란한 사당이나 요망한 중이나 해괴한 무당은 그 자취를 접하지 못하였다. 자제가 하나 있는데 엄하게 가르친 적은 없었으나 우러러 보는 즈음에 스스로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자제가 일찍이 말하기를, “평생 곁에서 모시고 있었으나 높은 음성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위의는 감히 우러러 볼 수도 없었다.” 하였다. 인종(仁宗)이 승하하자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며 비통하기를 몇 달이나 계속하였다. 시를 지어 슬퍼하였으니 시에 이르기를, “우리나라 1천년 동안에 하늘이 순우(舜禹) 같은 임금을 내시었네.

 

조정이나 야인들이 다 같이 기뻤으니 좋은 정치가 곧 오나 하였거늘 크나큰 부음 일석에 퍼졌으니 그 병환이 슬프고 사모함에 있으리.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못 되어서 하늘 뜻을 마침내 알기 어렵네. 기쁜 마음 슬픈 마음 되었네. 백성들의 슬픔은 아비 잃음 같도다.

 

선비가 살아서 무엇을 하려 하나? 성사(盛事)볼 길 없어졌네.” 하였다.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모좌 모향(某坐某向)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선생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희삼(李希參)으로 현감(縣監) 신(申)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어 모모(某某)를 낳았고, 딸은 사인(士人) 조람(趙擥)에게 출가하여 모(某)를 낳았다.

 

아! 선생의 천품(天品)이 높고 일찍부터 먼 데까지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고 기운과 풍도는 세속에 뛰어 나서 대인을 보기를 가볍게 하였네. 죽음에 임하여 소리와 기운도 움직이지 않았네. 사려는 남의 생각하지 못하는 데를 넘어섰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일찍이 모를 낸 적은 없었고, 세상을 경멸하고 풍속을 상심하는 뜻은 있었으나 일찍이 한 번도 시사 문제에 언급한 적은 없었네.

 

깨끗한 행실이 세상에 알려지지는 안 했지만 탁한 이름이 몸에 씌어진 적은 없었네.

생존하여서는 한 고을 사람들이 다 존경하였고, 세상을 떠나매 한 고을 사람들이 슬퍼하였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밖을 보면 그 속의 것을 상상할 수가 있겠네.

 

선생의 자제 이희삼(李希參)이 나와 더불어 교유(交遊)하였기 때문에 삼가 그 들은 바를 이와 같이 적는다.

 

이이(李珥) 찬(撰)[이 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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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天休堂李公行狀

 

先生姓李。諱夢奎。字某。慶州人。新羅始祖赫居世佐命功臣李謁平之後也。六代祖知仁州事諱元普。生判官諱昇。判官生工曹參判諱延孫。參判生僉知中樞府事諱嵩壽。卽先生之曾祖考也。祖諱成茂。官至判官。後贈吏曹參判。考諱仁臣。官至主簿。後贈吏曹判書。妣光州潘氏。節度使諱熙之女也。以正德庚午二月初六日。生先生于京都白岳山下。生而異凡。風骨秀爽。生未數歲。母之私姊妹之夫宗室興寧副正無嫡子。取以撫養。將託後事。習語之時。卽知讀書。年甫十歲。已通大義。搢紳先進來見者。皆奇之。十三歲。入學。訥齋朴先生時爲學官。深加嘆賞曰。他日必爲國器。金相公某。寓于先生比舍。一見而異其爲。以其子妻之。時年十六。弱冠。丁外憂。喪制一遵朱文公家禮。廬墓三年。庚寅歲。養母卒。先生念保育之恩義。服齊衰三年。守墓于高陽。哀慕以誠。思齋金相公適家食于同里。聞而嘆服。就與之語。尤加敬重。因與往來不絶。每論當代學者。必稱先生曰。氣宇之宏。天分之高。非人人所及云。服闋。又丁內憂。連遭大喪。氣力柴盡。人恐其不能起。幸得支持。以至免喪。與兄弟分財時。必辭多取少。有一兄未有室家。先生分與以所占之田曰。兄於昆弟中最窮。且無室家故。以此周急爾。凡得玩好。昆弟有欲者。則不待發言而先與之。無一毫吝惜之意。其事養父。誠孝備至。耳目之娛。心志之樂。必爲之致。人以爲難焉。庚子歲。中生員試。其在泮宮。聲譽甚盛。爲儕輩所推重。館中之議。必待先生主張乃定。一時名士。輻輳于家。車馬盈門。無虛日。非其所樂也。仁廟初。館中年少。爭相高論。先生憂之。遂不居泮。高論之士。未幾皆敗。甲辰歲。興寧正卒。先生執喪如親子。士大夫弔者。塡溢街巷。初。興寧有庶子四人。皆頑嚚無狀。興寧不子之。使之足不及門。先生常從容規諫。諭以天性之親。興寧意稍解。至是。先生以爲養父母於吾。恩同所生。喪葬祭祀。固當盡誠。以報萬一。但以異姓不合承重。當屬庶子。乃招庶子而勖之曰。養父平日。不有汝輩。使我承重。今雖不可相負。但旣有繼姓之子。而使異姓奉祀。於義未安。汝宜改行易慮。敬主其祀。毋使先人含恨於地下。若其粢盛器皿。則我當辦具。不煩於汝。庶子皆感泣。同廬墓側。三年之後。田庄臧獲。不依國典分數。而優給庶子。至於財產。則任其自用。一毫不取曰。汝等飢寒則吾誰與足。一門咸嘆其不可及。庶子輩始則感其義。旣而溪壑無厭。紛爭不已。糜費無節。或死於桎梏。或至於流離。先生亦無如之何。先生聘家之業在保寧。先生素厭城市。遂棄科業。浩然歸田。時丁未年也。所居有園林水石之勝。闢一書室。極其蕭灑。扁曰天休。因以自號。堂前開小池。受山泉。多栽花草。嗒然獨坐。或至夜深。每有意會。輒發於歌詠。摸寫桃源圖及以聽松所書歸去來辭。掛之左右。翫賞之餘。悠然自怡。常慕巢, 許之洗耳。夷, 齊之採薇。元亮之三逕。有曠世相感之意。其作歌詞。格高意遠。時人多傳其曲。居家日用或窘。而恬不介意。妻金氏亦治內有法。克順其志。先生敬重焉。閨門之內。甚和且整。或勸殖貨爲子孫計。先生曰。不求聞達。閒臥林泉者。只爲省慾頤神。安過一生而已。古之君子。終身貧窶。不免飢寒。尙有樂天知命者。如我則雖不優足。苟非凶年。不憂朝夕。豈可更以殖貨。煩吾慮耶。吾子孫。若非不肖。則如我足矣。如其不肖。多田何益。癸亥春。伯兄卒于京城。先生適抱疾奔喪。傷慟之餘。氣力頓憊。葬後還鄕。至夏疾作。六月某日卒。享年五十四。一鄕之人。無尊卑無少長。匍匐臨喪。如服期功。累日不去。只난001如牛童走卒。亦不忍食肉。皆曰。賢者逝矣。舂不相杵。野無農歌者踰月。先生天資夷曠。風神高亢。富貴榮達。不動其心。其少也。外舅金公欲官之。先生拒不受。請官其兄。金公義而許之。其後。銓曹欲薦其賢。有執友爲郞者。言于同僚曰。我知某之心。必不肯屈。而徒益其名。名者。彼之所惡也。何必益其所惡哉。議遂沮。時人高先生之志操。而服其友之知心也。先生之子女旣長。權貴多有求婚者。先生善爲之辭。終不應諾。常曰。連姻巨室。非安分知命者也。父난002兄早逝。孀婦食貧。先生撫其子女。無異己出。取一女一子。辦其裝資。及時婚嫁。使得其所。其待客也。或以麴糵聲色爲娛。若託興放意者。而至於獨處時。則止酒簡色。終日湛然。其歸保寧也。妻金氏以其母夫人老病。不忍別。故後先生歸。先生獨處十二年。不畜姬妾。有故舊李上舍巴난003男。愛其庶女。欲託于先生。垂泣請之。先生固辭。或問其故。答曰。如其善則固好。如其不善。棄之則爲負故人。不棄則傷我家道。吾不知賢否。故不敢許也。先生胸中。涇渭甚明。少所許可。而不形於辭色。其接人。不擇貴賤賢愚。應酬不倦。言笑可親。賓客常滿座。各得其歡心。鄕人有爭鬪者。必開陳善誘。懇懇不已。人感其誠。多有化者。雖冥頑者。亦不敢肆其惡。或作傷風敗俗之行者。若念先生。則必惕然曰。李生員無乃知吾所爲耶。小民或陷於罪罟。或濱於患難。必盡力營救。使之得所。以故善者好之。不善者不惡之。上自士夫。下至編氓。得一美食。必先來獻。爭具酒食。冀其一臨。其得人愛敬如此。其於異端之書。必深排之。常議風水之說曰。人之死也。精神已散。血脈已渴。所遺形骸。若枯木死灰耳。安得以山川之吉凶。爲禍福於子孫哉。親死之後。所可致誠者。惟祭祀耳。若葬地則但卜其家後山。可也。生於是乎居。死於是乎葬。不亦宜乎。識者以爲確論。最惡佛氏及巫覡事。里中亦絶淫祠。妖僧怪巫。不得接迹於其閭。只有一子。未嘗嚴誨。而觀瞻之際。自不得放心。其子嘗曰。生平侍側。不聞厲聲。而其威儀不敢仰視云。仁廟之昇遐也。杜門謝客。仰天搥胸。悲痛者累月。作詩傷之。詩中有曰。東方一千載。皇天生舜禹。朝野共傾歡。至化期朝暮。大訃一夕播。厥疾由哀慕。御極未踰年。天意終難曉난004。歡心變惻慟。臣民如喪父。士生欲何爲。盛事無由覩。以某月日。葬于某坐某向之原。先生有一男一女。男曰希參。娶縣監申某女。生某某。女適士人趙擥。生某。嗚呼。先生天品旣高。早有遠識。氣度超俗。藐視大人。臨死從容。不動聲氣。而思慮出人意表。有好善嫉惡之心。而未嘗露其圭角。有輕世傷俗之意。而未嘗言及時事。不爲皎皎之行見知於世。而濁名自不加焉。其生也一鄕尊之。其死也一鄕哀之。因其外。亦可想其中矣。先生之子希參與珥遊。故謹志其所聞如此。

 

栗谷先生全書卷之十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