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용암사당 부(龍巖祠堂賦)

야촌(1) 2008. 6. 4. 18:58

■ 용암사당 부(龍巖祠堂賦)

 

소량공 천재후에 익재공의 홍업이 크다.

우리에게 주신 영정역사가 언제인 듯 삼산에 전한 진본을 영호에서 모사하여 자손이 보장하고 후학이 경모한다.

 

슬프다!

오종성의 선생부터 경영 터니 성사의 모든 일이 누구를 기다린 지 백년간 쌓인 정성 오늘에야 이뤄졌다.

근사에 여러 의논 이구동성 가결되어, 제종의 합한 심력 내일같이 서두르니 날을 듯한 저 사당이 불감성지 착공 됬다. 구슬같이 맑은 물은 뜰 앞에 둘러있고 연꽃같이 솟은 봉은 문 앞에 병풍 쳤다.

 

집터인들 범상할리 있으며 산수만이 명려할 뿐이랴.

급업한 저 낙산과 험 희한 이 중봉은 이제 목은 두 선생의 유풍을 가히 상상케 한다.

삼가 명막 중에 추모하니 깊이 그때 일이 감탄된다.

 

찬연했던 한 사우의 향사는 삼가 뒷사람의 공의에 기다린다.

길일을 가려 유상을 봉안하니 엄연하신 그 의대가 생시같이 사모되며 원근의 자손들이 모두와서 추정한다.

한계는 평번을 올리고 석천은 명수를 받친다.

 

종족의 서립절차 항열 보다 치덕이다 어찌 긍지에만 내세우랴, 길이 념 조에 힘쓰리라

옛날 염수제에 올라 재액 하던 일을 생각하고 문청공의 귀훈을 봉승하여 문효로 제서하여 스스로 힘쓰고 서로 권하여 후래의 미손을 경려하자.

 

다시한번 곡을 읊나니, 울울한 능산은 구슬처럼 솟아있고 연연한 용추는 하늘같이 빛이 난다.

천장지비 별곤곤에 사당을 세원 2 3자와 함께 상하를 살펴보며 청풍명월에 취하고 도 노래하노라.

 

후손 예환 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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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예환(李禮煥)

 

1772년(영조 48)∼1837년(헌종 3) 때의 조선후기 학자로. 자(字)는 치화(致和), 호(號)는 난국재(蘭菊齋), 또는 수안(洙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익재 재현(益齋 齊賢)의 후손으로. 중조 21世 석성현감(石城縣監) 마곡(麻谷) 숙지(俶祉)의 13대 손이다.

 

송치규(宋穉奎)의 문인이고, 학행(學行)으로 관찰사(觀察使)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으며. 문명(文名)이 높았고 저서로 난국재집((蘭菊齋集)이 있다. 오늘날 보령시 주산면에서 세거했다.

 

↑용암영당(龍岩影堂) /오늘날의 삼사당(三思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