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열헌공사단비 역문(評理悅軒公祀壇碑譯文)
안동 권순명 찬(安東 權純命 撰)
전라북도 정읍시 출생
[생졸년] 1891(고종 28)∼1974
우봉 도리촌(牛峰 桃李村)의 묘단(墓壇)은 곧 경주이씨 평리이공(評理李公) 휘 핵(諱 翮)과 배위 정부인 김해김씨(金海金氏)와 차자 검교정승(檢校 政丞) 동암 진(東庵 瑱), 대제학 송암 세기(松巖 世基) 및 그 자제 상서 과(尙書 過)등 삼대(三(삼代)에 걸친 네 어른의 묘소를 실전하여 대신 단을 세웠으니 옛날의 산소를 바라보는 지점에다 묘단을 세웠던 고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받들고 공경하는 정성을 펴는 장소다.
불행히도 세대가 오래 되고 또 남북이 갈리어서 이역(異域)이 되었으니 자손들 중에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참배하여 그 성의를 베풀 수가 없다. 그리하여 후손 상기(相祺)가 슬퍼하는 마음으로 그의 족형(族兄) 상준(相俊)에게 상의하여 말하기를「따로 이남에다 단을 설치하여 천고에 맺힌 한을 푸는 것이 좋을 것이니 열헌공(悅憲公)의 장자 평리공 인정(評理公 仁挺)과 그 후손 진사 송탄(松灘 원)의 묘단 위에다 단을 설립합시다.
그렇게 하면 조손(祖孫)간에 서로 기맥이 통하고 응할 것입니다」고하였다. 생각컨데 우봉은 서해에 임해 있는 현재의 금천군(金川郡)이니 거리가 천(千)여리 된다. 바람도 통하지 못할 정도이니 자손들이 그 지성을 풀 수 없다.
상기(相祺)의 말이 또한 천륜으로 보던지 인정상으로 보아 반드시 나올 만한 말이다. 누가 이것을 억지로 막을 수 있겠는가? 지금 세상이 예의와 의리와 삼강 오상 보기를 흙이나 풀같이하여 부모도 존중할줄 모르고 친한 줄을 모르니 장차 세대가 아득한 선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상기(相祺)의 말은 근본을 생각하는 뜻에서 선조를 추모하여 제사를 받든다는 양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기록하여 하늘의 이치를 밝히며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는 표준을 세운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여 살펴보니 평리공(評理公)이 깊은 인(仁)과 큰 덕이 있고 관작도 높았다.
충렬왕(忠烈王)이 친히 시험을 보이매 동암(東菴)과 송암(松菴) 양 공이 다 선발되었다.
왕이 황패(黃牌, 왕이 내리는 상장. 옛날에는 왕은 황색의 종이를 썼다. 소과의 敎旨〈교지〉는 백색을
사용하기 때문에 白牌〈백패〉라 하고,대과의 교지는 붉은 색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紅牌〈홍패〉라고
하였다)를 내려 주어 총애하였다.
그때 그 시험에 합격한 것을 천장합격(天場合格=왕이 직접 보는 과거장)」이라고 불렀다.
민 묵헌(閔 默軒) 지(漬)가 시(詩)를 지어 찬양하였으니 한 집안 셋 댁에서 다섯 장원하였으니 모두들 말하도다.
이 태백의 제주라고, 또한 자손들이 선조를 생각하고 덕을 닦는 재료가 될 것이다.아울러 기록하여 둔다.
단은 고부(古阜/전라북도 정읍 지역의 옛 지명) 서쪽 연화봉 묘좌(蓮花峰 卯坐)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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