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양서공 이광윤 묘갈명 병서(瀼西公李光胤墓碣銘 幷序)

야촌(1) 2013. 6. 20. 01:13

 증 도승지 행 홍문관 교리 양서 이공 묘갈명 병서 

(贈 都承旨 行 弘文館 校理 瀼西 李公 墓碣銘 幷序)

 

◇26世 괴산군수 왕자사부 서계공 이득윤 선생의 아우임.

◇생졸년 : 1564년(명종 19) ~ 1637년(인조15)

 

 豊山 金應祖 撰

(1587(선조 20)∼1667(현종 8).

 

공의 성(性)은 이씨이고 이름은 광윤(光胤).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瀼西), 경주(慶州) 사람이다.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알평(謁平)과 고려(高麗)의 익재선생(益齋先生) 제현(齊賢)의 후손이 된다.

 

본조(本朝=조선)에 들어와서 관찰사(觀察使) 윤인(尹仁). 창평현령(昌平縣令) 공린(公鱗).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곤(鯤). 성균진사증좌승지(成均進士贈左承旨) 잠(潛)이 차례료 공에게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부(祖父). 부친(父親)이 된다.

 

비(妣=돌아가신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강씨(姜氏)는 진산군(晉山君)  희맹(希孟)의 五代손이고 종사랑(從仕郞) 응청(應淸)의 따님이다. 가정(嘉靖=명나라 세종의 연호) 갑자(甲子, 1564) 五월에 청주(淸州) 석화리(石花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태어나서 겨우 三세때 이미 글자를 알았으며, 팔. 구세 때에는 초서(草書)도 잘쓰고 글도 잘지어 이름이 났었다.

 

먼데나 가까운데 사람들이 다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九歲때 감사(監司=관찰사) 유공(柳公) 전(土+典)에 젖먹이 제비를 두고 글을 지어 보라고 하였다. 그에 응하여 글을 지었으니「언제나 서쪽에 부는 바람 만나 가지고 가을 하늘 만리에 다다르려나(有何時剩値西風起。飛上秋天萬里高)」라고 하였다. 류(柳) 감사(監司)가 크게 칭찬하였다.

 

15세에 향시(鄕試)에 응하여 두번 다  급제하였다. 17세때 도회[都會=계회(契會)]. 종회(宗會). 유림 등의 모임 총회에서 장원 하였다. 18세에 또 향시에서 장원(壯元) 하였디. 을유년(乙酉年, 1585년(선조 18)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재주와 명성이 자자(藉藉) 하였다. 갑오[甲午, 1594(선조 27)]년에 소촌찰방[召村察訪-진주의 소촌역(召村道)을 관장하던 從六品의 外官職 文官벼슬로 관할 범위는 진주를 중심으로 곤양-남해, 진해, 사천-고성-거제 등지로 이어지는 16개 도로를 관장하였다. 찰방은 오늘날 역장과 우체국장을 겸한직이다]을 제수 받았다.

 

얼마 안되여 특진하여 비안현감(比安縣監-從六品/오늘날 의성군 비안면장)을 제수 받았다. 

그해 겨울에 갑오(甲午, 1594)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2위(6등/19명) 급제하였다.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다.

 

내직으로는 성균관전적(成均館)의 전적(典籍-正六品). 직강(直講-正五品). 사예(司藝-正四品). 익위사(翊衛司=왕세자의 경호를 맡아보던 관아)의 익찬(翊贊-正五品).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등 오조(五曹)의 좌랑(佐郞-正六品)과 호조. 예조. 공조등 삼조(三曹)의 정랑(正郞-正五品)이 되었다.

 

또 양사(兩司: 司憲府와 司諫院의 총칭)에 들어가서 정언(正言-司諫院의 正六品 관직)과 장령(司憲府의 正四品 관직)이 되었고, 옥당(玉堂=弘文館의 다른 이름)에 들어가서 수찬(修撰-弘文館의 正六品 관직)과 교리(校理-弘文館의 正五品 관직)를 두번 하였고, 부교리(副校理-弘文館의 從五品 관직)를 세번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첨정(僉正=從四品). 사옹원정(司饔院正-수라상과 궁내 공궤를 맡아 보던 관아의 正三品 벼슬)과 사섬시정[司贍寺正-저화(楮貨=지폐) 제조를 맡아 보던 관아의 正三品 벼슬]을 거쳐서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예의를 맡아 보던 관아의 正三品 벼슬)에 이르렀다.

 

겸직한 것은 지제교(知製敎=국왕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겸 문학(文學-世子侍講院의 正五品 관직). 문사랑청 문사(問事郞廳 問事=죄인을 심문할때 필기와 질문을 맡아 보던 임시관아 벼슬). 교정낭청(校正郎廳-서적을 교정하여 발간하던 임시관아) 등이다.

 

청의 낭관(郎官=조선 시대, 각 관아의 당하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겸한것은 두번이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사(都事- 관리의 감찰, 규탄 등을 맡아보던 從五品의 벼슬)와 접번종사(接伴從事-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관아의 부책임자)와 초계(草溪)와 영천군수(永川郡守-從四品)를 거쳐서 성주목사(星州牧使-正三品)에 이르렀다.

 

무릇 四十四회나 관(官)을 옮겼다. 그러나 공경(公卿=고위. 고관)의 위치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신미[辛未, 1631(인조 9)]년에 감기가 더쳐서 정축[丁丑, 1637(인조 15)]년 12월에 예천(醴泉) 금당곡(金唐谷-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이곳은 옛부터 천재나 전쟁에도 마음 놓고 살수 있다는 땅을 일컫는 십승지지의 한군데로 알려져 있다 )의 사제(私齊)에서 하세 하였다. 무인(戊寅, 1638(인조 16)년 二월에 군의 북쪽 제동산(堤洞山) 을향(乙向)에 안장하였다.

 

공이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여되었다. 증직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正三品)다. 

아! 공의 금도(襟度=남을 포용할 만한 너그러운 마음과 생각)가 넓고 상쾌하였으며, 재주가 무리를 압도하였다. 또 비유적으로 말하면 먼 길을 말이 달려서 고삐를 놓고 그냥 뛰도록 하는것 같고 문학(文學)과 문사랑청(問事郞廳)의 문사(問事)를 겸하였으니 당시에 있어서 극히 영선(榮選=선발된 것이 영광스럽다)이었다.

 

이미 시(詩)를 잘하는 열명중에 뽑혔으며 또 문장을 잘하는 三十六명에도 선발되었으니 명성이 조정을 기우렸다. 그러나 일에 임하여 구차스럽게 남과 같이 아니하며, 속임수에 따르지 안했다. 윤상국(尹相國-상국은 재상을 말함) 승훈(承勳)을 지지하다가 소인들의 무고와 훼방을 받았다. 윤상국을 구하려다 해를 당한 사류士類=선비들)를 상소하여 구해주었다.

 

이이첨(李爾瞻). 이위경(李偉卿)등이 인륜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그르치므로 비분강개(悲憤慷慨=슬프고 분하여 의분이 북받침)하여 차(箚=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치기를 청하다가 도로 엄중한 견책을 받았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만년에 누차 봉계(封啓=문서를 밀봉하여 임금에게 올림)를 올려 정성을 다하였다.

 

빨리 덕있는 사람을 공경하고 무력한 백성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을 것이며, 학문을 숭상하고 일어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어찌 꼭 스스로 땔나무를 질머져 가면서 단련하며, 몸소 불을 때어 밥을 지어 가면서 까지 학문을 논해야 하겠을까마는 지금 사람들이 바야흐로 공리(功利=공적과 이익)에만 급급하니 이 말이 귀한 줄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라하였다.

 

지방의 군(郡)과 주(州)의 책임자로 머뭇거리면서 유연히 누어 있어 아무 꺼리끼는 것이 없었지만 학문을 일어키는데, 뜻을 두었다. 초계(草溪)에 있을때, 관찰사(觀察使-從二品/오늘날의 도지사)가 장계를 올려서 포양하였다. 그 고을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덕을 기렸다.

 

공이 집에 있을 때는 효도와 우애의 행실을 돈독히 하였다. 12세(丙子 1576, 선조 9)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하는 것이 어른 같았다. 정유(丁酉 1597 선조 30)년에는 또 부친상을 당하였다.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지 없었다. 동기(同氣=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제사를 받드는 것은 모두 지성으로 하였다.

 

평생 살림살이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며칠씩 머물러 술잔을 주고 받고 詩를 지어 화답하며, 바람과 달에다 품은 뜻을 부치니 그 높은 풍도와 아담한 운치는 먼데 사람이나 가까운데 사람이나 다 사모하는 바가 되었다. 그가 재주와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모두 아깝게 생각하였다.

 

초취(初娶)는 합천이씨(陜川 李氏)니 참봉(參奉-從九品) 종무(種茂)의 따님이고, 후취(後娶)는 함양박씨(咸陽朴氏)니 좌랑(佐郞-正六品)을 추증 받은 순(荀)의 따님이다. 두분다 숙부인(淑夫人-정삼품 당상관의 아내)에 봉하였다.

 

묘소는 공의 묘앞 좌측과 우측에 있다.

저작한 시문(詩文)이 약간권 집에 보관되어 있다. 명에 가로되

 

바른 붓은 간흉을 쫓을 수 있고 / 直筆足以去奸

맑은 글은 나라를 빛낼 수 있고 / 淸文足以華國

인을 미루어 백성을 건질수 있네 / 推仁足以濟民

 

풍속을 바꾸어서 학교를 일어켰으니 / 興學足以化俗

누구만 못하여 / 誰之不如

공경이 못되었나 / 而不公卿

 

죽지 않고 길이 남을손 / 不死長存

만고에 꽃다운 그의 이름이로다 / 萬古芳名

 

옮긴이 : 野村 李在薰

 

[자료문헌]

◇학사집(鶴沙集)> 鶴沙先生文集卷之七 > 墓碣銘

◇양서집(瀼西集) > 瀼西先生文集卷之六 > 附錄

--------------------------------------------------------------------------------------------------------------------------------------

 

[原文]

 

贈都承旨行弘文館校理瀼西李公墓碣銘 幷序 

 

豊山 金應祖 撰

  

公姓李。諱光胤。字克休。號瀼西。月城人。新羅佐命功臣諱謁平。高麗益齋先生諱齊賢之後。入我朝。觀察使諱尹仁。昌平縣令諱公鱗。司僕寺判官諱鯤。成均進士贈左承旨諱潛。於公爲高曾祖考。妣淑夫人姜氏。晉山君希孟五世孫。從仕郞應淸之女。以嘉靖甲子五月。生公于淸州石花里第。纔三歲。已學字。八九歲。以善草書善屬文。鳴遠近稱神童。十一歲。監司柳公 土+典。令賦乳燕詩。有何時剩値西風起。飛上秋天萬里高之句。柳大加稱賞。十五。赴鄕解兩場俱捷。十七。魁都會。十八。又魁鄕解。乙酉。中進士。才名藉甚。癸巳。除召村察訪。俄超授比安縣監。冬。登文科。歷敭中外。在內爲成均典籍直講司藝翊衛司翊贊,戶禮兵刑工五曹佐郞,戶禮工三曹正郞。入兩司爲正言掌令。在玉堂再爲修撰校理。三爲副校理。歷掌樂僉正,司饔,司贍正。至左通禮。其兼職則知製敎兼文學,問事,校正郞廳。校正廳則再授焉。出外。爲江原,咸鏡都事。接伴從事官則再授焉。赴京書狀官,宣犒統營將士御史,接待華使。製述官則再授焉。歷舒川,草溪郡守。至星州牧使。凡四十四遷官。終未升諸公。命矣。辛未。感疾沈緜。丁丑十二月。卒于醴泉金堂谷之私第。戊寅二月。葬于郡北堤洞山乙向原。公參宣武原從勳。贈通政承政院都承旨。嗚呼。公襟韻曠爽。才調超越。脩途遠駕。縱靶騰蹋。兼文學問事郞廳。一時榮選。旣被能詩十人之選。又與能文三十六人之選。令望傾朝。而臨事又不肯苟同而詭隨。尹相承勳。被群小誣毀則伸救。救尹之士類李爾瞻,李偉卿等斁倫誤國。則慷慨上箚而請討。至被嚴譴不悔也。晩年屢進封事。眷眷以疾敬德諴小民爲本。右文興學。扶植儒宮爲先。有曰豈可躬親負薪而鍊業。手自炊爨而論學。噫。時方急功利。孰知斯言之爲貴哉。棲遲郡州。臥閤翛然。而致意興學。其在草溪。觀察使馳啓以褒之。邑民立石以頌德焉。居家敦行孝友。十二。丁內艱。執喪如成人。丁酉。丁外艱。哀慕備至。愛同氣奉祭祀。出於至誠。平生不經意生產。留連觴詠。放懷風月。其高風雅韻。爲遠近所想慕。咸惜其用之不究云。前配陜川李氏。參奉種茂之女。後配咸陽朴氏。贈佐郞荀之女。俱封淑夫人。墓在公墓前左右。李夫人有一男弘經。生員。生一男萬兼。二女。長適朴昌先生員。生二男。應衡,恒。次適金鋻生員。生二男。宗準,宗衍。三女。適申畿,李長春,權䡥。朴夫人有一女。適金鎣。生一男宗洛。三女。適李長發,權國樞進士,李重茂。內外曾玄孫。又若干人。而多俊英。積善之家。豈無餘慶。所著詩文若干卷藏于家。銘曰。

直筆足以去奸。淸文足以華國。推仁足以濟民。興學足以化俗。誰之不如。而不公卿。不死長存。萬古芳名。<끝>

 

출처 : 鶴沙先生文集卷之七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