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지평 이홍업 묘표 음기(持平李弘業墓表陰記)

야촌(1) 2013. 12. 31. 22:53

■ 이 지평 음기(李持平陰記)

     생졸년 : 1540년(중종 35)~1597년(선조 30) / 경주이씨익재공파세보(1860년간) 제3권 첫페이지에 의거)

 

     지은이 : 허목(許穆, 1595 ~ 1682).

 

공의 휘는 홍업(弘業), 자는 시립(時立), 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慶州)로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증조부 원(黿)은 이름이 드러났으나 연산조 갑자사화 때 죽었는데, 중종 1년(1506)에 승정원 도승지로 관작이 추증되었다.

 

조부는 수(洙)로 진산 군수(珍山郡守)를 지냈다. 아버지는 개윤(愷胤)으로 의영고 영(義盈庫令)을 지냈고, 어머니는 영덕 정씨(盈德鄭氏)로 부사직(副司直) 장윤의(鄭允義)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7년(1579, 선조12)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 뽑혀서 박사(博士)에 올랐으며, 병술년(1586, 선조19)에 병조 좌랑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고창현감(高敞縣監)이 되었다.

 

신묘년(1591, 선조 24)에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당시의 여론을 어겨, 함경도(咸鏡道) 경성도호부 판관(鏡城都護府判官)으로 폄직되었다. 그해에 왜구가 침입하여 국가가 크게 혼란해졌고, 함경도까지 함락되어 두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가 모두 적에게 잡히니 군현(郡縣)에서는 앞다투어 수령을 포박하여 적에게 투항하였는데, 공도 적에게 사로잡혀 캄캄한 방에 갇혔다. (이 일로 부인 이씨와 며느리 윤씨는 자살하였다.)

 

그해 10월, 북쪽 지방에 추위가 일찍 찾아들자 남쪽 지방에 살았던 왜구가 찬바람과 눈을 견디지 못하는데다가 요동군이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몹시 두려워하여 강화 문서를 작성하여, 왕자들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서명을 하게 하고는 공이 근신(近臣)이었다 하여 행재소(行在所)에 보내 강화를 약속받게 하였다.

 

공이 거절하며

“이 문서를 가지고 갈 수 없다.

하자, 적이 노하여 왕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대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적에게 겉으로 허락하며 말하기를

“가는 것이 좋겠다. 가서 잘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고, 공과 은밀하게 얘기를 나누고 보냈다.

 

공이 마침내 그곳을 떠나 성천(成川)에서 세자를 알현하려 하였는데, 대신들에게 제지당하였다. 대신들은 “적의 강화 문서를 가지고 와서 나라를 욕되게 하였으니 행재소에 보내 사형으로 논죄해야 한다.” 하였다.

 

공은 옥중에서 세 차례 상소하여 왕자들의 곤핍한 상황을 말하기를

“왕자들께서 분하지만 자결하지 않고 참고 계시는데, 신이 떠나올 적에 왕자들과 여러 신하들이 은밀히 신에게 말하기를 ‘적의 편지는 사실 말할 가치도 없지만 다행히 행재소에 이르게 되면 임금께서 필시 공을 친견하실 것이니, 적의 정황을 자세히 아뢰고 왕자들의 구출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기회는 다시 얻기 어렵다.’ 하며 은밀히 권면하였습니다. 신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공을 애처롭게 여기고 정승 유성룡(柳成龍)도 의당 용서하여야 한다 하여 사형을 감하여 길주(吉州)로 유배 보냈다. 공은 탄식하고 근심에 싸인 채 날마다 시를 읊조리며 혼자 마음을 달래면서, 호를 포세옹(逋世翁)이라 하였다.

 

4년뒤에 은전(恩典)으로 죄수 문서에서 면제되어 거산역[居山驛-함경도 북청부(北靑府)의 치소(治所) 동쪽 60리에 있던 역이다.]에 임시로 살다가 1년 만에 거산에서 객사하였는데, 공의 나이 58세였다. 3년 뒤에 분석산(分石山 경기도 연천 부근) 아래에 장사 지냈다.

 

아들은 이건(以健)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딸이 둘인데, 사위는 봉화현감(奉化縣監) 조정순(趙廷純)과 사인(士人) 채승길(蔡承吉)이며, 손자는 언무(彦茂)로 선행(善行)이 임금에게 알려져 송라찰방(松羅察訪)이 되었다.

 

손서(孫壻)는 셋으로, 홍직(洪溭)ㆍ정호제(丁好悌)ㆍ윤상(尹相)인데, 정호제는 진사(進士)이다. 외손 채씨는 아들 하나인데 채응선(蔡應先)이고, 또 서출손(庶出孫)이 둘이다. 언무의 아들은 셋으로, 태래(泰來)ㆍ태양(泰陽)ㆍ태만(泰萬)이다. 태래 역시 훌륭한 선비였으나 불행하게도 요절하였다.

 

공이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옥에 갇혔을 적에 일생을 낱낱이 서술하는 형식으로 술회부(述懷賦)를 지어 스스로 서글퍼하였다. 공은 사부(詞賦)를 잘하여 여러 번 벼슬에 올랐다가 여러번 쫓겨났고 마침내는 궁핍과 억압을 받으며 그 생을 마쳤으니 운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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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持平陰記(弘業) - 허목(許穆) 

 

公諱弘業。字時立。姓李氏。本慶州人。高麗門下侍中齊賢之後也。三世祖黿。旣名顯矣。死於燕山甲子史禍。中宗元年。追爵承政院都承旨。大父洙。珍山郡守。父愷胤(개윤)。義盈庫令。母盈德鄭氏。副司直允義之女也。公萬曆七年。丙科及第。初選承文院。陞博士。丙戌。由兵曹佐郞。出爲高敞縣監。辛卯。入爲司憲府持平。忤時議。貶鏡城都護判官。其年有倭寇。國大亂。北路旣陷。二王子皆被執。列郡爭縛長吏以降賊。公亦爲賊所得。閉之幽室。而妻李氏。子婦尹氏。皆自殺。其十月。北方早寒。南寇不耐風雪。又聞遼左兵來救。乃大懼。爲媾書。逼令王子大臣皆署。以公嘗爲近臣。令遣公行在所約和。公拒之曰。不可以此書往。賊怒。待王子益急。諸從官皆面諾曰。可行矣。善爲之。陰私語以送之。公乃行。謁世子於成川。爲大臣所拘持。以爲齎賊書辱國。送行在所。當論死。公從獄中。三上疏。言王子困迫狀。搤腕忍不自決。臣來時。王子諸臣。私謂臣曰。賊書固不足說。幸而得達行在所。則上必引見。具陳賊勢。圖出王子。機會難得。私相勉之。臣罪萬死。上意哀之。柳相國成龍。亦曰。當恕。減死流吉州。公感歎思愁。日吟哦自遣。號逋世翁。四年。以恩除囚籍。因寓居居山驛一年。客死居山。年五十八。一[註01]年歸葬分石山下。男以健。爲司憲府監察。女二人。二壻奉化縣監趙廷純,士人蔡承吉。孫彥茂。以善行聞。爲松羅察訪。孫子壻三人。洪溭,丁好悌,尹相。好悌。進士。外孫蔡氏有一子。應先。又庶出孫二人。彥茂之子三人。泰來,泰陽,泰萬。泰來亦善士。不幸早殀。公在龍灣獄。歷敍平生作述懷賦以自悼。公長於詞賦。累官累斥。卒遭窮抑。以沒其身。命也。

 

[註-01]一 : 三

 

記言卷之十九 中篇 >구묘(丘墓) / 허목(許穆)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