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중국의 황염배(黃炎培)가 쓴 朝鮮에 대한 논박(論駁)

야촌(1) 2005. 6. 19. 12:46

중국의 황염배(黃炎培)가 쓴 조선(朝鮮)에 대한 논박(論駁)

 

*韓日合倂 後 中國 亡命時 日帝에 依하여 더렵혀진 歷史와 帝國主義 侵略으로 얼룩진 中國大陸의 黃炎培가 쓴 朝鮮에 대한 논박(論駁)

 

蝦夷(하이)라는 族屬은 본디 人類의 正義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르지 떠돌아다니며 掠奪(약탈)을 하는 것을 生業으로 삼고 사는 族屬인데 그 來歷은 오래 前부터이다. 그런데 저들은 不幸하게도 韓族과 隣接해 살게 되었다.

 

이네들의 侵寇(침구)⋅窃奸(절간)은 멀리 三國時代로부터 高麗⋅朝鮮에 이르는 2,000年間에 걸쳐 大寇에서 小寇에 이르기까지 모두 史書에 記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壬辰倭亂의 큰 戰爭을 除外하면 저들의 侵掠(침략) 도둑질은 좀도둑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끔 바닷가에 侵入하여 勝負를 내는 騷擾事件(소요사건)이 있는 程道였다.

 

그러나 신라시대에 땅을 빼앗기고 降伏(항복)을 했다든가하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도 없으며 野史나 口傳을 두루 살펴보아도 이러한 이야기는 없다. 萬若 이와 彷佛(방불)하고 近似(근사)한 記錄이 있다면 저들이 반듯이 成文으로 擧證하였더라도 이는 부질없이 誇張(과장)해 적은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韓族(한족)이 日本을 討伐(토벌)하였다는 말은 뚜렷하게 記錄으로 남아있다. 廣開土王이 日本을 南征하였다든가 新羅가 數次 日本을 征伐하였다든가와 같은 것이다.

 

金世濂(김세렴 1593~1646 朝鮮朝仁祖 때 名臣)의 『海槎錄(해차록)』에는 다음과 같은 記錄이 있다.

『日本年代記』라는 冊에 日本의 應神王(응신왕) 22年 新羅가 日本의 明石浦를 征伐했는데 이 明石浦는 大阪으로부터 100里 되는 곳에 있다.

 

赤關(적관)의 東쪽에 한 언덕이 있는바 日本사람이 이를 가르켜 馬塚(마총)이라 했다.

卽 新羅의 軍士들이 깊숙이 日本을 쳐 들어오니 日本이 降伏하고 武裝解除(무장해제)를 했는바 이 때 白馬를 降伏의 表示로 죽여 이 언덕에 묻었다. 고 하였다.

 

新羅의 太宗(603~661 29代 武烈王)이 日本을 征伐하여 大勝했으며, 眞平王 4년(382年) 卽 日本의 敏達王(민달왕) 12年에 日本의 西쪽 地方을 征伐했다는 記錄이 있다. 또 安順菴(安鼎福 1712~1791)의 記錄에 依하면 絶影島(절영도)라는 섬에 오래된 要塞地(요새지)가 있는데 新羅의 太宗武烈王이 倭國을 征伐할 때 築造(축조)한 것이며, 俗稱(속칭) 「太宗壇」이라 불린다고 했다.

 

또 고려 원종15년(1173년)에는 金方慶(김방경)⋅朴之亮(박지량)⋅金忻(김흔) 等에게 命하여 元나라 兵士와 함께 聯合하여 日本을 攻擊(공격)하였는데 對馬島의 壹岐(일기)를 侵攻하여 三郞浦에 進擊 3,000餘名을 베고 尸如麻(시여마)에 埋伏(매복)했다가 때마침 大風을 만나 回軍하였다.

 

또 高麗 忠烈王(1274~1308) 7年 元帥 金方慶에게 命하여 戰船 900雙으로써 水陸兩軍 40,000名을 이끌고 元나라 元帥 忻都(흔도)와 洪茶印(홍다인) 等과 함께 日本을 征伐하여 大明浦와 壹岐島(일기도)를 大破하여 敵을 斬(참)하고 노획함이 많았는데 그때 元나라는 다시 范文虎(범문호)로 하여금 江南의 兵力 100,000을 이끌고 戰船 3,000으로써 江蘇省(강소성)으로부터 日本의 國境을 侵攻하였는데 때마침 颱風(태풍)을 만나 全軍이 물에 빠져 沒殺 當하여 回軍하고 말았다. 이 戰役에서도 高麗軍은 늘 이겼으며 決코 敗하지 않았다.

 

高麗 末期에 이르러 日本의 침구(侵寇)가 더욱 甚하였는데 朝鮮王朝의 太祖 李旦(이단)은 여러 차례 大勝을 거두었는바 저 智異山(지리산) 山麓(산록)에서 數千의 倭寇(왜구)를 斬(참)하고 다음에는 倭寇의 勢力도 潛潛(잠잠)하여 숨을 죽이게끔 되었다.

 

李成桂(李旦)가 凱旋(개선)하여 돌아오는 날 崔瑩(최영) 大將軍(대장군)은 『三尺의 칼끝으로 社稷(사직)을 平安케 하였도다.』라는 詩句로써 李將軍의 戰功을 讚美(찬미)하였다.

 

朝鮮朝 定宗(1398~1400)이 對馬島를 征伐하였고 世宗大王(1455~1468)은 李從茂⋅柳廷顯을 命하여 兵船 277雙과 水陸軍 17,000名을 動員하여 對馬島를 征伐하여 2,939戶의 집을 불태우고 300級의 머리를 斬하고 日船 149雙을 노획하니 對馬島主 宗貞盛이 降伏하여 마침내 兵士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三浦를 열어 倭國과의 貿易을 許容하게 하였다.

 

예로부터 日本의 侵寇가 줄을 이어 해상침구(海上侵寇)는 때를 가리지 않고 끊이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이를 擊退(격퇴)하였음으로 別로 大端치 않는 걸로 여겨왔다. 더욱이 왜구(倭寇)의 침범(侵犯)을 역사적(歷史的)으로 관찰(觀察)하건대 韓國海岸에 對한 침구(侵寇)에 그치지 아니하고 中國의 江蘇省(강소성) 浙江省(절강성) 等地와 皖閩(환민)(安徽省의 古號)의 沿邊은 被害가 甚했다.

 

저 朱元璋(주원장)이 明나라(1386~1644) 300年間 倭寇를 防禦(방어)하는 일에 從事(종사)하느라 海洋(해양)과 內陸地方(내륙지방)은 永遠(영원)히 便安(편안)한 날이 없었으며 要塞地(요새지)마다 피 흘린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을 정도였으니 바닷가의 一部 區域은 倭寇가 모여들고 흩어지는 場所로 되었으나 明史를 훑어보면 海寇 때문에 땅을 빼앗겼다고는 記述하지 않았다. 그 것이 바로 事實을 쓰는 書法인 것이다.

 

우리나라와 倭寇의 關係는 亦是 同一한 例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黃炎培(황염배)는 오직 日本側의 記事만을 홀딱 믿고 글을 쓴 폼이 日本으로 하여금 거짓 증거(證據)를 들도록 許容하게 하였으니 그의 意圖가 可히 아리송한 바 있다. 신공황후(神功皇后)의 거짓 歷史大目은 日本人의 虛僞와 侮蔑(모멸)이 特(특)히 甚(심)한 歷史토막이다.

 

처음에는 和를 乞해서 割地 했다고 거짓말을 해두고 또다시 歷史地圖에 色칠을 바꾸어 해놓고서 거짓말을 하는 따위의 誣妄(무망)의 허설(虛說)을 事實인양 꾸며놓았다. 黃君이 이 大目에 가서 한때나마 疑心(의심)을 두지 않고 盲信(맹신)하고서 그러한 事實이 典據(전거)가 있는 듯이 적어 놓았으니 이는 理解(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다.

 

或者(혹자)는 말하기를 지금 半島(반도)의 山河는 이미 地圖의 색깔이 바뀐지 몇 해가 지냈는데 구구하게 過去의 흘러간 史跡이 있고 없고를 따져서 밝혀본들 무슨 所用이 있겠는가라고 하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나라도 滅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으나 歷史는 眞實을 드러내야 하며, 거짓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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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三)日本神功后一段

 

蝦夷一族. 不事人類正務. 標掠謀生. 其來久矣. 不幸韓族與彼爲隣. 侵寇竊奸. 遠自三國. 降及高麗李朝. 上下二千年. 大寇小竊. 史不勝書. 然除壬辰一役外. 不過是鼠竊狗偸. 時或有海陬羸之擾. 而曾未聞新羅時代. 割地屈盟之事. 遍攷野史舊傳. 幷無是說. 如有彷彿近似之記. 彼必擧證成文. 鷪然侈張. 在意中事也. 古來韓族討伐日本. 有赫赫可紀. 如廣開土大王之南征日本. 新羅之屢伐日本. (金世濂海槎錄曰. 日本年代記云. 應神皇二十二年. 新羅伐明石浦. 距大阪百里赤關東,有一邱. 日本人指證馬塚. 新羅兵深入日本. 日本請和解兵. 刑白馬以盟. 埋馬於此) 新羅太宗閥日本大獲. 眞平王四年. (日本敏達皇十二年)伐日本西鄙. (安順菴記云. 絶影島有古壘. 新羅太宗伐倭時所築. 俗稱太宗壇) 高麗元宗十五年. 命金方慶朴之亮金忻等與元兵. 聯攻日本. 破對馬島壹歧. 進攻三郞浦. 斬三十餘級. 伐尸如麻. 遇大風引還. 又忠烈王七年. 命元帥金方慶以戰船九百. 水陸軍四萬. 與元國元帥忻都洪茶邱等合伐日本. 大破大明浦壹歧島. 斬獲極多. 時元復以范文虎領江南兵十萬. 戰船三千. 由江蘇入日本界. 遇颶風. 全軍覆沒. 忻弘軍隨而回程. 此役高麗軍勝而無忻. 高麗之季 日寇頻肆. 朝鮮太祖. 屢征大撻. 斬殺數千於智異山下. 賊勢寢息. 凱旋之日. 大將軍崔瑩以三尺劍頭安社稷之句. 讚美戰功. 定宗討對馬島. 世宗命李從茂柳廷顯以兵船二百七十七艘. 水陸軍萬七千. 征討對馬島. 焚燒二千九百三十九戶. 斬首三百級. 獲日船百四十九. 島主宗貞盛乞和罷兵. 許開三浦貿易. 古來日寇慣犯. 海氛時肆. 隨發遂斥. 視作尋常. 歷觀日寇之犯. 不止於韓海沿岸. 其在中國. 江浙皖閩沿邊. 受禍特甚. 朱明三百年間. 從事防禦. 海疆永年不靖. 堡壘血痕. 宛然無改. 沿岸一部區域. 或爲日寇聚亂之所. 然明史書以海寇. 而不日割與者. 記實也. 書法也. 韓於日寇. 亦同此例 今黃君傾倒偏信. 惜辭之間. 爲日本而許與誣證. 其意可惑也. 神功后贋史一段. 日人之誣衊甚矣. 先誣以割地乞和. 再誣以改染歷史地圖. 徵實誣妄之說. 黃君關於此節. 非止於一時之坦信無疑. 故證其實有史據. 此可難解也. 或曰半島山河. 改染己過稔年. 區區過去之有無史跡. 何足斤斤也. 曰不然. 國可滅而人可殺. 史之徵實. 不可誣也.  <끝>

 

[글쓴이 소개]

 

黃炎培(1879~1965), 中國江蘇星沙川縣出身. 日本에 留學 敎育學 專攻 江蘇省敎育司長 을 지내고 그 後 實利⋅實用의 民主主義敎育의 必要를 痛感하여 1917年 中華職業敎 育社를 創設 社長이 되었다.

 

1921年 北京의 軍閥官僚政府로부터 敎育總長으로 任命되었으나 就任을 拒絶하고 中 華戰爭 中애는 國民參政會 常任委員 民主同盟의 重鎭으로서 民主主義의 擁護에 盡力 하였다.

 

1945年 國共提携를 爲해 延安을 訪問하였으며 1948年 政治協商會議에 努力, 1949年의 中央政權樹立 後 政務院 副總理 兼 輕工業部長으로 任命되고 그 後 民主建國會 主 任委員, 全國人民代表大會 副委員長으로 活躍하였음. 著書에 『延安歸來』와 『朝鮮』이 있고 本書에 痛駁하는 바는 『朝鮮』著書의 內容에 關해서이다.

 

出典 : 感時漫語(初代副統領 省齋 李始榮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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