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기사 비 -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임
신문화망(新文化罔)-신문화보(新文化報) ㅣ 2013-01-15 05:50 편집 : 레이웨이[雷威]
[핵심 도움말]
얼마 전 집안시(集安市)에서 고구려시대의 중요한 문물이 발견되었다.
집안시 마선촌(麻線村) 5조(五組)의 촌민인 마샤오빈[馬紹彬]이 마선하(麻線河) 안에 있던 돌을 주웠는데, 오래된 다리 아래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강바닥에서 글자가 있는 큰 석판을 발견하였다.
집안 시문 물국(集安市文物局)은 즉시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석판에 대한 전문 감정을 실시하였고, 이 석판이 고구려시대에 세워진 기사비석[記事石碑]인 것으로 확인하였다.
↑작년 여름에 비석이 발견된 이후, 전문가 왕즈민[王志敏]이 이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기자 루홍(盧紅) 촬영>
신문화보 통화신(通化訊) - 기자 루홍
1월 4일, 《중국문물보(中國文物報)》에선 고고학계에서 중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게재하였다.
촌민이 돌을 들어올겨 발견한 문자가 새겨진 비석
마샤오빈에 따르면, 당시 그는 마선하의 오래된 다리에서 돌을 줍고 있었는데, 강변에 한 덩어리의 돌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즉시 삽[?鎬]을 이용해 파냈고, 그 결과 큰 돌덩어리가 나왔다. 출토된 것은 커다란 석판으로, 상면에는 어렴풋하게 글자가 남아 있었다.
그는 이게 보통 석판과는 다른 문물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게차를 써서 석판을 자신의 집 입구로 가져와 보호하였으며, 또 문물보호파출소(文物保護派出所)로 전화를 걸었다. 비석의 발견은 집안 시위(市委)와 시정부(市政府)의 높은 관심을 끌었고, 자금을 들여 비석에 대한 보호와 연구 작업을 실시하였다.
성문물감정위원회(省文物鑑定委員會) 상무위원(常務委員)이자 통화시문물보호연구소(通化市文物保護硏究所) 소장 왕즈민은 비석의 석재ㆍ형태와 비문을 근거하여, 이 비석이 고구려 광개토태왕시대 이전의 비석일 가능성이 높다는 초보적인 단정을 내렸다.
집안시정부는 집안 고구려비 보호와 연구 지도팀을 구성하였고, 국가와 성의 유관 부문의 요구를 받아, 국내의 저명한 학자인 린윈[林澐]ㆍ웨이춘청[魏存成]ㆍ장푸요[張福有]ㆍ쉬졘신[徐建新]ㆍ겅티에화[耿鐵華]ㆍ쑨런지에[孫仁杰]를 초청하여 비석에 대한 논증을 진행하였다.
최종적으로 이 비석이 고구려시대의 비석임을 확정지었고, 연대는 광개토태왕~장수왕시대에 이른다고 보았다. 집안박물관(集安博物館)은 고고학자들을 조직하여 비석에 대한 정교한 조사와 측량 작업을 실시하였다. 비문은 집안박물관 부연구관원(副硏究館員) 쑨런지에가 모사(摹寫)하였다.
●어쩌면 광개토태왕~장수왕 사이에 세워진 것일지도
비석이 출토된 마선하는 노령산맥(老?山脈) 남파(南坡)에서 발원하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마선구분지(麻線溝盆地)를 경유하여 압록강(鴨綠江)으로 흘러간다. 마선구분지에는 1,000기가 넘는 고구려 고분이 분포하며, 통구고분군 마선묘구(麻線墓區)에 속한다. 이 중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천추총(千秋塚)과 서대묘(西大墓) 등 6기의 고구려 왕릉이 있다.
이 비석이 출토된 곳은 천추총에서 456m 정도 동남쪽으로 떨어진 곳이며, 서쪽으로는 서대묘와 약 1,149m 정도 거리를 두었다. “비석의 석재는 장군총(將軍塚)의 석재와 거의 비슷합니다.”라고 왕즈민은 밝혔다.
후에 이뤄진 조사에서 이 비석의 석재는 마선 현지의 건강(建疆)ㆍ홍성(紅星) 채석장에서 채굴한 것임이 밝혀졌다. 비석의 비신[碑體]는 편장방형(扁長方形)으로 이뤄졌으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모습으로, 앞뒤면과 좌우면 양쪽에 가공하였으며, 규칙적으로 고르게 되어있다.
비수(碑首)는 규형(圭形)으로 오른쪽 위의 모서리가 약간 결손 되었으며, 저부 양쪽 모서리는 둥그스름하게 처리되었고, 중간에는 장부[?頭 : 사개]가 있다. 비석의 앞뒤면과 양쪽은 정교하게 가공되었으며, 표면은 평평하고 매끈하다. 앞면 위의 절반은 비문의 마모 상태가 심한 편이고, 아래의 절반은 비문의 마모 상태가 가벼운 편으로, 뒷면은 전체적으로 마모 상태가 심한 편이고 인위적으로 훼손한 자국이 있다.
비석 감별 논증에 참여한 통화사범학원(通化師範學院) 고구려연구원(高句麗硏究院) 원장 겅티에화교수에 따르면, 광개토태왕릉비 제 4면의 기록에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떄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라고 되어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광개토태왕 이전에 고구려왕릉에는 비석이 없었고, 각 왕릉 수묘연호(守墓烟戶)의 수량ㆍ기원이 비석에 새겨지지 않았는데, 광개토태왕 대에 선왕(先王) 비석을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겼으며 착오가 없게 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비석 비문 내용 분석에 따르면, 비석은 주로 고구려왕릉 수묘연호 매매(賣買)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으며, 수묘연호의 매매를 금지하고, 또한 20명의 연호두(烟戶頭)를 새김으로서 후인(後人)들에게 보인다고 한다.
이로서 비석은 고구려가 수묘연호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추측에 따르면, 이 비석은 광개토태왕 이전 왕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고 겅티에화는 밝혔다.
린윈[林澐]ㆍ웨이춘청[魏存成]ㆍ쉬졘신[徐建新] 등 전문가들은 집안 고구려가 마선 고구려묘구에서 출토되었고, 비석이 강변에서 중장기적으로 마모되었지만, 자연 상태로 명확히 남아 다행히 비문 내용이 밝혀져 광개토태왕릉비 비문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서풍(書風)도 서로 비슷하여 그 진실성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한다.
길림성문사관(吉林省文史館) 관원ㆍ성고구려연구중심(省高句麗硏究中心) 전가위원회(專家委員會) 주임 장푸요연구원은 비문내용 분석을 통해, 비문 중에 “元王始祖鄒牟王”ㆍ“太王”ㆍ“先聖”의 글자모양을 보아 광개토태왕 자신의 말투가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더욱이 “追述先聖功勛?高悠烈, 繼古人之慷慨”에서 이 “선성”은 장수왕대 그 부친인 광개토태왕을 칭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이는 광개토태왕의 거공지위(居功至偉)의 지위(地位)와 서로 부합[相合]된다. 장수왕이 천도하기 전 광개토태왕의 “존시교언(存時敎言)”에 따라 연호두에 대한 수묘의 “정률(定律)”비를 세웠을 가능성 또한 있다.
●광개토태왕릉비와 상호 관련성이 있는 걸로 밝혀짐
겅티에화의 소개에 따르면 이 비석의 앞면에 음각된 한자는 모두 예서(隸書)로, 전체적으로 규칙적으로 쓰였으며,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였다. 전문은 모두 218자이며, 오른쪽 윗부분이 파손되어 약 10여자가 결실되었고, 비석이 장기간 강변에 있었기에 강물에 씻겨나가고 모래에 마모되어 비석이 글씨들이 모호하게 되었기에, 초보적인 고증으로는 예정문자(隸定文字) 140자로 보인다.
“비석의 내용과 광개토태왕릉비는 서로 비슷하기에, 광개토태왕릉비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이는 고구려연구에 역사문자 고증과 새로운 문자자료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겅티에화가 밝혔다. 이 비석 비문은 한자 예서이며, 나아가 고구려가 한자 예서를 그 관방서체(官方書體)로 썼다고 설명 할 수 있다.
규형의 비석은 동한(東漢) 이래로 널리 쓰인 형태이며, 고구려와 중원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반영한다.
비문의 서체는 유창하고 수려하며, 후인들이 탁본 뜨고 모사하기에 알맞은, 고구려 문자 서법 연구에 대한 새롭고 진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는 광개토태왕 릉 비가 발견된 135년 이래로 첫 번째로 발견된 고구려비석이며, 고고학계의 중대 발견이라 할 만하다.”라고 겅티에화 교수가 밝혔다. 현재 발견된 고구려 문자자료가 매우 희소한 상황에서, 이 집안고구려비의 출토는 더욱이 진귀한 것으로, 고구려의 정치ㆍ경제ㆍ문화ㆍ예술 등 방면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현재 이 비석은 집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비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문물부문에서 책으로 정리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출판 발행 될 것이다.
●비석이 발견된 위치
집안 시 마선구분지에 위치하며, 세계문화유산 천추총과 약 456m, 세계문화유산 서대묘와 약 1149m 정도 떨어져있
다.
●비석 재질
장군총의 석재와 비슷하다.
●비석 잔존 규격
잔존 높이 173㎝, 너비 60.6~66.5㎝, 두께 12.5~21㎝, 하부의 장부 높이 15~19.5㎝, 너비 42㎝, 두께 21㎝, 중량
464.5㎏.
http://news.xwh.cn/news/system/2013/01/14/010319191.shtml
[번역 참고사항]
◇金+秋, 鎬는 삽이나 곡괭이로 보이며, 정확히는 야전삽인 듯 합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어 편의상 삽이라 써놓았습
니다.
◇본문 중 광개토태왕릉비 해석은 노태돈교수의 해석을 따랐습니다.
◇주지하듯이 이번 비석은 고구려 광개토태왕릉비 비석 이후 첫 번째 비석 발견이 아닌 두 번째 비석발견입니다.
겅티에화교수가 중원고구려비를 까먹은 듯 하지만, 일단 기사 원문대로 번역했습니다. 이 외의 내용 또한 개인적으로
불만 있는 내용이 있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했으니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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