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새롭게 조명해보는 장희빈(張禧嬪)

야촌(1) 2009. 8. 3. 12:25

■ 새롭게 조명해본 여인 장희빈(조선 제19대왕 숙종의 빈)

 

3백여년 전, 조선에 살다간 한 여인이 있었다.
궁녀 출신으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비 자리까지 올랐지만, 결국은 사약을 받고 만 여인 - 장희빈이다.

역사 속에서 악녀이자 요부의 상징이었던 장희빈!.
그러나 그녀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다른 모습들이 있었다.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 장옥정- 그녀를 가리켜 우리는 흔히 "장희빈"이라고 부릅니다.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그만큼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도 흔치 않죠.


때문에 그동안 여러차례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현재 방송 사상 다섯 번째로 KBS에서 드라마 '장희빈'을 방영중입니다. 빼어난 미모와 권모술수를 이용해 천한 궁녀의 신분에서 왕비 자리에 오른 요부!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를 죽음에 이르도록 저주한 악녀!

이 정도가 그동안 우리에게 비춰진 장희빈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장희빈의 진짜 모습이었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장희빈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사실 장희빈의 일생 가운데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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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장희빈은 대체 어떤 집안에서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는지, 그 출신 배경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조선 왕실의 여러 임금과 왕비들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살아서는 폐비가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던 숙종의 두번째 왕비, 인현왕후!
그러나 지금은, 숙종과 나란히 묻혀있습니다(명릉).

숙종의 마지막 왕비 인원왕후의 무덤도, 명릉 안에 있습니다.
명릉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익릉은, 숙종의 첫번째 비 인경왕후의 묘입니다.


그렇다면 장희빈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숙종의 릉에서 걸어서 이십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구석진 자리에 장희빈의 무덤이 있습니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던 장희빈의 묘!
1969년에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원형을 그대로 옮겨오게 됩니다.


그런데 무덤의 장식과 규모는,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왕비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이곳이 용의 머리라고 해서 이 동네 이름이 용두동입니다.


풍수적으로 굉장히 좋은 자리에 왕릉이 모셔져있는데, 구석진 곳에 있고 그늘진곳에 있고, 가장 빨리 해가 지는, 과히 좋지못한 그런 자리에 장희빈의 묘소가 자리하고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장을 할 때조차 홀대받아야 했던 장희빈!

그녀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을까?
장희빈의 집안으로 알려져있는 집안은 인동 장씨!

 

우선 족보를 통해, 장희빈의 집안 내력을 확인해 보자면, 그런데 1795년에 만들어졌다는 족보에서는, 어디서도 장희빈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1872년에 만들어진 족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권을 계속해서 뒤져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1998년에 나온 가장 최근의 족보에서야, 비로소 장희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숙종대왕빈- 1701년에 죽었고 경종의 어머니라고 적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전의 족보에는, 왜 장희빈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일까?

그 당시에는 조정에 나가지도 못하고 희빈의 친척이다 일가다 그러면, 모든 면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아마 화를 입을까 싶어서 족보에도 빠지고, 이제 와서는 보복이 없으니까..
우리가 자손으로서 단연 확보를 해야한다. 그래서 기록이 돼있는 겁니다.

이 족보에 의하면, 장희빈은 인동 장씨 22대손으로 2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할아버지의 이름은 응인. 그리고 아버지는 경이라는 외자 이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인동장씨 선산이 있는데, 장희빈의 아버지 장경의 묘도 이곳에 있습니다.

석물의 규모나 배치, 무덤의 양식 등은 양반의 묘제를 따르고 있는데, 그것도 정승 이상의 벼슬을 한 사대부 정도의, 지체높은 집안에서나 볼 수 있는 무덤 양식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장경은 죽은 뒤인 숙종 17년. 그러니까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된 이듬해에 영의정으로 추존됩니다.


그렇다면 살아 생전 그의 신분은 어땠을까?

장경의 일생이 기록돼 있는 신도비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장경의 벼슬이 사역원 부봉사였다고 적혀있는데, 사역원이라면 조선시대 통역관을 양성하던 외국어 학교입니다. 그러니까 장경은, 사역원의 역관이었던 것입니다.

인동장씨 집안은, 조선 중기와 후기 사이에 주목할만한 중인 가문으로 꼽히고 있는데,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16세기 후반부터 역관이 나오기 시작- 특히 활약이 컸던 사람이 바로 장희빈의 할아버지 장응인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외교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통문관지에는, 역관으로서 크게 활약한 사람들이 소개돼 있는데, 장응인의 이름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장응인은 풍류와 호협심을 아는 역관이었고 청나라 사신들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으며, 탐욕스러운 사신이 오더라도 감히 뇌물을 요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그의 능력과 됨됨이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장응인 이후로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20여명의 역관이 나왔는데, 그중 역과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이 7명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장현이라든가 장응인이든가 청나라 사신들이나 상대편 정부의 고위관리들을 주무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잘처리해서 좋은 평판을 얻고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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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

그녀는 비록 양반은 아니었지만, 조선시대 손꼽히는 명문 역관 집안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관이었던 장옥정의 아버지 장경은, 장옥정이 어렸을 때 죽었습니다.


그후 장옥정 일가를 거둬준 사람은, 5촌 당숙인 장현이었습니다. 장현 역시 역관이었는데요.
1617년 역과에 수석 합격한 그는.....효종때부터 숙종때까지 40여년간 역관으로 활동하면서 꽤 이름을 날렸습니다.


실록에는 이런 장현에 관해 여러 가지 내용들이 적혀 있는데요. 몇 가지 살펴볼까요?
이것은 숙종 20년의 기록입니다. 역관 장현은 청나라 사람이 내각에 비장했던 문서를 얻어왔으니 마땅히 품계를 올려줘야 한다-

 

다시 말해 장현이 청나라에서 귀한 문서를 빼내왔는데, 그 공이 벼슬을 올려줘야할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중국어 역관이었던 장현은 청나라를 오가면서, 꽤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좀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역관장현 국중거부"
역관 장현은 나라 안에서 큰 부자다라는 것인데요. 뭔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조선시대 역관이라고 하면, 그저 외국어 통역관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전문 직종이라고는 하지만 큰 돈을 만질만한 직업 같지는 않은데요.
이런 역관으로서, 장현은 어떻게 국중 거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요?

숙종 때, 정재륜이 지은 '공사견문록'에는 한 역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숙종 22년, 한 일본어 역관이 부인의 장례를 치르면서 관에 옻칠을 했다.

 

당시 옻관은 왕가에서만 쓸수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문제가 됐다.
그러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정 대신들에게 십만금을 뿌렸다."


이것은 당시, 역관들이 얼마나 부유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숙종 때 가장 유명한 거부인 변승업은 죽을때 재산이 서울의 이자율을 좌우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양반들도 이 시대쯤 가면 소수의 세력있는 집안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중인들의 재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이같은 재산을 모을수 있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역관의 지위라는 것이 어떠했는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외국어를 하지못했기 때문에, 통역을 담당할 역관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역관들은 사신 행렬에 빠짐없이 선발됐고, 외교상 이뤄지는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은 일년에 서너 차례 사신단을 교환하고 있었고, 사행의 모든일들을 역관이 담당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중에 당상역관은 사행의 사실상 총책임자였다고보면 되겠습니다.
사행에 필요한 물건, 화폐, 쌀도 역관이 담당했었습니다.

당시 조정은 사신단에게 쌀, 포, 종이 등을 지급했는데, 이것으로 무역을 해서 사행 경비를 충당하게 했는데, 그 무역의 권한이 역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관들에게는 출장비 대신, 개인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졌습니다.

한 사람에게 허용된 무역량은 인삼 팔포, 즉 80여근이었으며.....이것은 은으로 치면 약 2천냥, 요즘 돈으로 3억4천만원에 이르는 매우 큰 돈이됩니다. 이렇게 많은 자금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조선사신단이 도착하는 곳곳에서 무역이 이뤄지게 됩니다.


역관들은 우리나라에서 인삼이나 종이, 면포 등의 특산물을 가져가 팔고, 중국에서 비단류와 문방구류, 약재류, 가죽제품들을 구입해왔습니다. 이렇게 들여온 물건들은 일부 국내 상인에게도 넘어갔지만, 대부분은 일본과의 무역 창구인 왜관으로 넘겨지게 됩니다.


당시 청나라는 일본과 모든 교류를 단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청나라와 직교역을 하지 못하고 조선의 왜관을 통해 중국 문물을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같은 당시의 외교 상황속에서, 역관들은 중계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던 것입니다.
중국에서 비단 등을 들여와 왜관으로 넘기면, 최소한 두세배의 차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죠.

통상무역에서 역관은 초기에 상당한 이익을 얻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인삼 1근의 공식적인 가격은 은백냥이었습니다.

3배에서 7배 정도의 이익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무역을 통해서 역관들은 18세기 이후부터 상당히 부를 많이 축적했고, 몇몇가문에서는 상당한 재력가로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장희빈의 5촌 당숙인 장현 역시 이같은 중계무역을 통해 재산을 모았던 것입니다.


실록에는 장현의 무역 활동이 어느정도 규모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효종 4년, 역관들이 무려 50수레가 넘는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그 임자로 지목된 사람이 바로 장현이었던 것입니다.

 

인삼 50수레면 허용된 무역량을 훨씬 넘는 규모였지만, 장현은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게 됩니다.
특권무역이라고 봐야겠죠. 그러니까 조정에서는 이런 역관들에게 무역을 보장해주고, 역관들은 나라에 외교나 정보수집에 헌신함으로써 서로 보장된 그런 특별한 체제가 적용된 것입니다.

장현이 이같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외교적인 능력에 힘입은 바 컸다는 점입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를 수행해 중국에 가서 6년 동안이나 머문 덕분에, 장현은 청나라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할수 있었고, 때문에 40여년간 30여차례나 사신으로 중국을 오가게 됐고, 이 과정에서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대에 손꼽히는 부자였던 역관, 장현- 외교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도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릅니다.
이런 장현의 조카딸이었던 장옥정은, 아버지 장경이 죽으면서 장현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됩니다.
비록 중인 신분이었지만 나라 제일의 재산가였던 장현의 집에서, 풍족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처럼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장옥정이 왜, 궁녀가 된 걸까요?


조선 시대 궁녀라고 하면,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생계를 위해 어쩔수 없이 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라 제일로 꼽히는 부자를 숙부로 둔 장옥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런 장옥정이 대체 어떤 이유로, 궁녀의 길을 택하게된 것일까요?

숙종 6년인 1680년에 경신환국이 일어나게 됩니다.
환국의 시작이 된 것은, 이른바 3복의 변- 그러니까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과 그 아들 허견이 왕실의 종친이던 복선군 3형제와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사건입니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남인 세력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고, 숙종이 즉위한지 6년만에, 서인들이 조정을 장악하게되는 직접적 사건이 됩니다.


그때 정권은, 원래 그전 단계에서는 남인과 서인들이 60대 40 정도로 정권을 분담하는 분당정치 체제였습니다.
이것이 일당 전제 정치로 바뀝니다. 하루아침에 1당 전제가 되는 이런 정치를 환국 정치라고 부릅니다.

환국의 파장은, 장희빈 일가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장현이 함경도로 유배를 가게된 것입니다.
숙종실록에는, 역관 장현이 환국과 연루된 사정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가 역모의 주동으로 죽음을 당한 복선군 형제의 심복으로, 남인 세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종 말년서부터 숙종 6년까지 남인들이 집권을 하는데, 그런 남인정권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밤새 다니면서 정사를 논하고 군수품 같은 것을 밀무역하고 그랬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같은 정치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옥정은 궁녀가 돼 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장옥정은, 집안이 몰락하면서 어쩔수없이 궁녀가 된 것일까?
바로 남인 세력과의 결탁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실제 남인들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면에서 감지가 되는데, 숙종이 문안하러왔을 때 자의대비가 의도적으로 숙종과 장옥정을 주선하게되고 숙종의 총애를 손쉽게 차지하게되는데, 이런 점으로 볼 때 남인들이 정권을 탈환하기위한 일환으로 장옥정은 궁녀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옥정의 입궁 시기나 절차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숙종실록에는 장옥정을 가리켜 "얼굴이 자못 아름다웠다"고 묘사한 기록이있는데, 조선 왕조 실록에서 이처럼 여인의 미색을 언급한 경우는 장옥정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신분상승을 이루고자 했던 장희빈과 왕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되찾으려는 남인 세력- 이들이 서로 결탁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장옥정은, 입궁한지 몇 달만에 숙종의 승은을 입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있던 서인들도 발빠르게 움직입니다.
이 무렵 숙종의 첫번째 비 인경왕후가 죽었는데, 서인들은 자신들의 가문에서 새 왕비를 내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고, 국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시열과 김수항 등 서인파의 핵심세력들이 모였고, 이 자리에서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이 왕비로 결정됩니다.

원칙적으로 왕비 간택의 권한은 왕실에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당시 대비였던 명성왕후가, 서인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서인 세력들과 명성왕후의 뒷받침으로, 민유중의 딸은 손쉽게 왕비 자리에 오릅니다.

1681년, 숙종과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이 가례를 올립니다.
서인의 상징으로 왕비에 간택된 인현왕후와 남인들을 뒤에 두고 있던 장희빈 서로 다른 당파의 대리자로서, 왕비자리와 숙종의 사랑을 놓고 끝없이 대립해야했던 두 여인이 모진 인연의 서막을 올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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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이 숙종의 승은을 입은 뒤 승승장구 왕비자리까지 올라갔다고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다음에도 꽤 오랫동안 여러 차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숙종 12년 7월, 부교리 이징명이 올린 상소를 보자면.
"요즘 총애를 받고있는 궁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친척이라고 합니다.
주상께서는 부디 장녀-, 그러니까 장옥정을 쫓아내시어 깨끗하고 밝은 정치를 펴십시오."

이번에는 장옥정이 숙원으로 봉해진 이듬해, 서포 김만중이 숙종에게 간언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당시 남인쪽 사람이었던 조사석이 우의정으로 조정에 진출하게된 것을 두고, 장옥정의 어머니가 평소 조사석의 집안과 가까웠기 때문이라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조정 대신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숙종에게 장옥정을 비방하는데요.
무슨 뚜렷한 문제가 드러난 것도 아닌데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이처럼 공격하는데는 뭔가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일개 궁녀가 국왕의 총애를 받는데 논란이 되는 경우는 장옥정 외에는 없습니다.
국왕의 승은을 받은 여인을 궐밖으로 내쫓으라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상당히 몰상식한 얘기죠.


서인들이 계속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장옥정이 남인의 간자로, 미인계로 궐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장옥정이 남인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는 해도 당시에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집권당은 어디까지나 서인 세력이었습니다.


서인 세력을 배경으로 둔 인현왕후에 비한다면, 장옥정의 입장이 극히 불리했던 셈인데요.
그렇다면 이같은 상황에서, 장옥정은 어떻게 왕비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1688년 10월. 궐 안에 산실청이 마련됩니다. 숙종의 후궁 장옥정이 출산을 앞두게 된 것입니다.
벽에는 순산을 기원하는 부적이 붙고, 바닥에는 짚자리가 깔리고 그 위로는 백문석과 기름종이가 덮이고, 여기에 다시 고운 짚자리와 말의 가죽이 차례로 깔렸다.


내의원 전의가 순산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말고삐를 거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0월 27일. 마침내 왕자가 태어나게 되는데, 왕위에 오른지 14년만에, 마침내 숙종이 첫 아들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서인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습니다.
장옥정의 왕자 출산은, 그 배경이 되는 남인의 입지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숙종실록에는, 당시 서인들의 심사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장옥정의 어머니가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옥교를 타고 궐에 들어오다가 큰 수모를 당한 사건으로 이를 주도한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서인이었습니다.


장희빈의 모친이 비록 천인이지만 유일한 외아들인 왕자의 외할머니인데도 불구하고 옥교에서 끌어내려지고 노비들은 매를 맞고 옥교는 불태워집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사직의 대를 이을 왕자가 아니라 남인가의 한 인물로 봤기 때문에 그렇게 강하게 대응을 한 것이죠.


그러나 이 일로 숙종은 크게 노했고, 상황은 오히려 장옥정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합니다.
왕자 균이 태어난지 두달만에 숙종은 원자 정호, 즉 왕위 계승자를 정하는 문제를 거론하게 됩니다.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이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 한다.
만약 선뜻 결단하지않고 머뭇거리며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

그러나 서인 일색이었던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섭니다.
"중전께서 아직 나이가 한창이시고 앞으로의 일을 알수 없으니 갑자기 이런 일을 의논하는 것은 너무 급하지 않겠습니까? 장차 중전께서 아들을 낳지 못하신다면, 국본은 자연히 정해질 것입니다. 몇년을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하소서."

양자를 들이게되면 그 뒤에 적자가 태어나도 차자가 됩니다.
원자 정호를 하면 장희빈 아들서부터 인현왕후의 맏아들이 됩니다.
가문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들, 서인들 가문에서 왕이 나와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마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숙종의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처음 얘기를 꺼낸지 닷새만에, 숙종은 왕자 균을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해버립니다.
그리고 장옥정은,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책봉되죠.

 

그런데 원자 정호 문제가 이렇게 마무리되어가던 무렵,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상소를 올립니다.
열 살이 지나서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된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어 원자 정호의 성급함을 지적한 상소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숙종의 분노를 불러왔고, 10년 동안 유지돼온 서인 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삭탈관직을 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됐고, 얼마 뒤 결국 사사 명령을 받게 된죠.
이어서 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입니다.


송시열을 비롯해 김수항과 홍치상 등 18명이 죽고, 59명이 유배를 당했으며, 이외에도 26명이 파직과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 100명 이상의 서인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물러난 자리는, 자연히 남인들의 차지가 됐으며, 경신환국 이후 9년만에 일어난 기사환국. 이로써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된 것입니다.


환국의 마지막 절차는, 인현왕후의 폐출이었습니다.
서인파의 상징으로서 왕비 자리에 올랐던 인현왕후- 정권의 몰락과 함께 궐밖으로 쫓겨납니다.

숙종 또한 원자와 관련해서 서인과 연관된 인현왕후를 왕비로 둘 경우 원자의 미래가 불확실해질수 있다는 점이 하나고, 인현왕후를 폐출시킴으로써 왕비 선택권이 국왕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의도도 갖고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된지 열흘만에, 숙종은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게 됩니다.
중인 신분으로 태어난 궁녀 장옥정- 그녀가 마침내, 숙종의 세번째 왕비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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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비의 침전이었던 대조전-
조선 왕조 500년 동안에 수 많은 왕비들이 이곳을 거쳐갔죠.
하지만 이 가운데, 궁녀 출신으로 이곳 대조전의 주인이 된 사람은 장희빈이 유일합니다.

장희빈의 왕비 책봉-
그것은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던 조선에서 그야말로 파격적인 사건이었던 셈인데요.
이것이 과연, 숙종의 총애와 남인이라는 정치 세력의 뒷받침만으로 가능했을까요?


중인출신인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실 더 큰 세력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사회의 또다른 축으로 등장한 중인 계층이, 바로 그들입니다.

숙종 대- 종로 어물전과 서소문밖 어물전 사이에서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서소문밖 어물전의 상인들이 북어 유통권을 독점하면서 일어난 싸움인데, 언뜻 보기엔 그저 상인들끼리의 사소한 분쟁같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정치권의 세력 다툼이 깊숙하게 연관돼 있었습니다.

 

이것은 서소문밖 어물전이 겪은 과정을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1679년, 종로어물전 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서소문밖 어물전은 문을 닫게됩니다. 당시는 남인집권기입니다.
하지만 바로 일년 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서소문 밖 어물전도 다시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종로에 시전상인들은 정치권과 강하게 밀착돼있었습니다.
여기 반발해서 서소문이라든가 칠타라든가, 싸움의 뒤에는 각자 유력한 벼슬아치들이 있었습니다.
정치권과 상업세력의 결탁- 이것은 당시 조선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전인 상평통보가 다시 주조되고, 청나라 일본과 안정된 외교를 통해 상업이 번성하던 17세기 말 상인과 역관 등의 중인계층은 상업과 무역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인들은 사회적인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움직임에서 가장 두드러진 세력은, 바로 역관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어 역관의 경우, 청나라를 자주 오가며 정부 관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외교는 물론 국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셈입니다. 때문에 당시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역관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역관들은 나라 안팎의 정보를 관장하고 외교를 관장함으로써, 그 왕위 계승이라든가 모든일에 관계가 됐습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치자금 이런거를 관리했기 때문에 자연히 정치인과 가깝게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군수물품을 조달한다든가 하는데 자연히 역관들이 일을 자의든 타의든 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장희빈의 왕비 책봉도, 이같은 사회 변화와 연관돼 있다고 보여지는데, 당시에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고있던 조선이 정권을 유지하기위해서는 청나라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고, 역관은 이같은 지지를 확보해줄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숙종은, 이같은 역관들을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역관들은 막강한 세도를 누릴 수 있었고, 장희빈의 5촌 당숙 장현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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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대 여러 차례 환국이 일어난 것은 이처럼 중인계층과 정치권이 서로의 잇권과 목적에 따라 결탁해있었던 상황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요. 1694년, 다시 한번 정권이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장희빈의 왕비 책봉 이후, 세력을 잡고 있었던 남인들이 밀려나고,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는 갑술환국이 바로 그것인데요. 정권의 교체와 함께 폐출됐던 인현왕후는 다시 복위되고, 장옥정은 다시 빈으로 강등돼 취선당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장희빈은 숙종에게나 역사속에서 잊혀진 존재나 다름 없었죠.
그런데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으면서 장희빈은 또다른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숙종의 총애를 받고있던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숙종에게 밀고했던 것인데요. 당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현장이, 바로 취선당 뒤편의 사당입니다.

인현왕후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바늘을 꽂거나 화살을 쏘았다,
또 귀신에게 새옷을 지어주면서 인현왕후를 죽여달라고 빌었다-
이런 정도가 당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죄로 인해, 장희빈은 마침내 사약을 받게 되는데요.
물론 나라의 국모인 왕비를 저주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 그냥 넘길 수 없는 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을 놓고, 또 세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던 궁중에서 상대편을 저주했던 여성이 비단 장희빈뿐이었을까요?


더구나 장희빈은 한때 중전 자리에 있었고, 장차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렇다면 선처를 베풀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장희빈이 끝내 사약을 받아야했던 이유- 지금부터 그 속사정을 한번 들여다 보겠습니다.

조선 시대- 저주죄로 처벌을 받았던 후궁이 있을까?
세명의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인조의 후궁 조귀인.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신을 미워한다며 중전을 저주했다고 하는데, 이 일로 조정 대신들은 조귀인의 작호를 삭탈하려 했지만, 효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성종의 후궁으로, 연산군의 어머니기도 했던 윤씨 투기가 유난히 심했던 그녀는 비상으로 다른 후궁들을 독살하려던 것이 발각됐고, 방에서는 저주의 방법이 적힌 책과 인형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처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종의 후궁 경빈 박씨!


그녀는 후일 명종이 되는 세자와 그 어머니 문정왕후를 저주해 불에 그을린 쥐를 동궁전과 대비전에 묻었는데, 이 일로 조정에서는 9차례나 경빈 박씨에게 사약을 내리라 청했지만, 중종은 폐서인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궁중에서 저주 행위는 이렇게 종종 일어나는 사건이었지만, 사약까지 받기는 어려웠던 셈입니다.
그런데 유독, 장희빈만은 달랐습니다.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로, 끝내 사약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인현왕후가 죽은지 두달만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민비 국상이 끝난뒤에 하던가..
아니면 경종을 생각해서 폐인으로 쫓아내더라도 그냥 목숨을 부지시키는게 정상인데..
증거를 가지고 장희빈을 죽였거든요. 그거는 정상적인 진행방식이 아닙니다.

 

더구나 당시에 조정 대신들은, 장희빈이 한때 국모 자리에 있었고, 세자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사사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장희빈의 용서를 청하는 대신들에게, 숙종은 단호한 의지를 밝힙니다.

"내가 살아있는데도 이럴진대, 이 사람을 살려둔다면 후일 안팎으로 그 당파를 심어 국가의 근심이 이루말할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절박하게 여기고 통탄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때 자신이 그토록 총애했던 장희빈에게, 끝내 사약을 내리고 말았던 숙종 그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숙종이 생각할 때 자기자신이 사망을 하고 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경우 장희빈이 살아있으면, 남인들과 결탁해서 또다시 서인정권을 갈아치우고 남인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13살의 어린 나이로 신하들의 힘이 극히 강했던 시기에 즉위했던 숙종은 왕권 강화에 대해 남다른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장희빈을 내쫓으라는 상소에 대해 "주약신강"을 거론하며 한탄하는 모습이나 원자 정호와 관련해 송시열이 상소를 올렸을 때 왕을 능멸 하는 처사라며 격분했던 것 모두가 그같은 상황에서 비롯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신권이 왕권을 넘보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 숙종의 이같은 의지는 장희빈의 사사를 명하면서 내린 비망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장희빈을 죽이는 것이, 국가와 세자를 위한 조치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왕권 강화에 대한 숙종의 강력한 의지는, 세번의 환국으로도 나타나게 되는데, 한 세력에서 다른 세력으로 정권이 완전히 교체되고 대대적인 숙청이 잇따르는 환국!

이를 통해 숙종은 신하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던 것입니다.

정상적인 왕조국가에서는 당이 필요없는 건데 숙종대쯤 들어오면 물론 뿌리가 인조반정부터 있지만 이때쯤이면 왕의 말보다 당의 말을 더 잘듣는단 말이죠. 사실상 이무렵에 가면은 왕보다 당의 영수가 더 권한이 강했다 볼 수 있고, 적절한 왕비교체나 환국을 통해가지고 왕권을 극대화한 그런 측면이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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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집안의 딸로 태어나 궁녀가 됐고, 왕비라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던 여인!
장희빈은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숙종의 의지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결국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숙종은, 이같은 희생을 대가로 얻어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적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나가던 시기- 시대의 흐름 속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희빈 장씨.
그녀의 신위는 지금 이곳 칠궁에 모셔져 있습니다.
칠궁은, 후궁 출신으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 모셔져 있는 일종의 사당이죠.

장희빈 역시, 아들 균이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으로 즉위하면서 이곳 칠궁에 모셔지고.
"대빈"이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궁녀에서 왕비로, 다시 사약을 받는 죄인이 되기까지-
장희빈이 겪었던 영욕의 세월이, 이렇게 마무리된 것이죠.

사실 그동안 장희빈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모습들만이 부각돼 왔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장희빈은 중인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 적극적인 여성이었고, 또 조선 후기라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 정쟁의 희생물이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 속에서 악녀로만 치부돼왔던 장희빈!
그러나 단순한 선악의 잣대로만 볼게 아니라 그녀가 처해있던 사회와 정치적인 상황을 이해한다면..
장희빈에 대한 그간의 평가도 달라지게될 것입니다.

 

출처 : 黃牛渡江의穴(穴在鼻問) | 글쓴이 : 바람돌이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