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6. 伽倻의 正見母主

야촌(1) 2006. 7. 15. 11:22

■ 伽倻의 正見母主

 

가야 연맹의 건국 설화에 나오는 여자 신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대가야와 금관가야 시조의 어머니로 불리어 진다.

 

원래 가야산(伽倻山)의 산 신이였는데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하여 대가야 왕 뇌질주일(惱窒朱日)와 금관가야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다 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李鍾恒>

 

가야의 건국설화로는 두 종류가 있으며, 이는 각기 김해와 고령지방에 전하고 있습니다.

김해에 전하는 수로왕신화는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천강신화(天降神話)의 요소를 나타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서기 42년(후한 건무 8년),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9간(九干 : 김해 지방의 변진구야국의 유민들이 9촌락을 이루어 각각 대표를 이루었는데 그것을 9간이라 함)등 촌장들이 구지봉에 올라보니 사람은 없고 공중에서 "천황이 나에게 본부하기를 여기에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하기에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

 

너희는 산마루에 흙을 모우고 그 주위를 돌면서 자라야 자라야 네 목을 내어 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潘灼而契也)라고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어라. 이것이 즐겁게 뛰면서 임금을 맞이하는 것이니라."하는 말이 들렸다.

 

이에 구간들이 시키는 대로 노래하며 춤을 추다 문득 바라보니 하늘에서 자색 밧줄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밧줄 끝에는 붉은 보자기에 황금상자가 싸여 있었다.

 

구간이 열어보니 해와 같은 둥근 황금알6개가 들어 있어 바라본 백성들은 두려워서 아도간의 집 탁자 위에 고이 모셔두고 다음날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때 황금알 6개 중 가장 먼저 동자로 화한 것이 수로이고, 그가 나라를 세워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칭하였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돌아가 오가야주(五伽倻主)가 되었다.

 

이는 김해 지역에서 구간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들이 보다 문화능력이 높은 수로집단에 의해 통합되어 가야국이 출현하는 것과 그 뒤의 어느 시기에 김해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형성되는 것을 복합적으로 반영한 설화로 보입니다.

 

고령(高靈)에 전하는 대가야시조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수록되어 있으며, 형제설화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대가야 시조신화는 오랫동안 구전되어오던 것을 최치원이 문자로 기록한 것이지만, 고령 지방의 토착집단이 대가야의 정통임을 표방하며 김해방면의 집단을 대신하여 가야연맹의 주도적 존재로 대두하는 것을 반영한 설화로 보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정견모주의 신화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옛 가야산에는 가야산의 모습과 같이 높고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다. 많은 산신들이 주인처럼 높이 받들 뿐 아니라 이 지역 내에 사는 백성들이 또한 가장 우러러 믿는 신이었다.

 

그 모습과 같이 곱고 착한 마음씨를 지닌 여신은 백성들의 갸륵한 소망을 들어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 큰 뜻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하여 가야산 큰 바위아래에 제단을 차려놓고 옥같이 맑은 물에 멱을 감아 몸을 깨끗이 한 후 하늘신인 "이비가지"(夷毗訶之)의 짝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렇게 빌기를 얼마나 하였는지 하늘신께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이비가지(이비하)는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가야산 상공에 나타났고, 여신은 이를 맞이하기 위하여 목욕재계하고 잠자리 날개 같은 옷깃을 아지랑이처럼 나부끼며 맞이하였다.

 

뭉게구름 속에 방을 꾸미고 실구름으로 얽어서 가야산 높은 봉우리 상공에서 만난 하늘신과와 가야산 처녀 산신은 이렇게 하여 부부가 되었고 꿈같은 세월이 흐른 후 옥동자를 둘 낳았다.

 

형은 얼굴이 '이비하'를 닮아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고 불그레하였다하여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 하고, 아우는 어머니인 여신을 많이 닮아 얼굴이 하늘과 같이 푸르다하여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불렀다.

 

내질주일은 자라나서 대가야국의 첫임금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아우 뇌질청예는 자라서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 또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인데, 신라에게 청혼하여 이찬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곧 뇌질주일의 8세손이 되는 셈이다.

 

이 신화에서 대가야의 시조는 이진아시왕이며, 그의 다른 이름이 뇌질주일 또는 내진주지였으며, 또한 시조의 어머니는 가야산신인 정견모주이고, 아버지는 천신인 이비가지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는 대가야 시조신화를 인용하면서도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이뇌왕이 신라에 청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과 혼인한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9년조 기사에도 나오고 있고, 그 결혼이 깨어지게 된 사연이 <일본서기> 계체기 23년 3월조에 나오고 있으므로 전혀 사실 무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야 산신을 정견모주라고 하고 있는데, 정견(正見)이란 말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 중의 한 덕목이며, 모주(母主)라는 말은 성모에서 유래된 말로, 불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보입니다. 영남지방에는 지리산 성모, 선도산 성모 등의 신화가 많으며, 특히 선도성모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탄생과 관련한 선도산의 성모로도 유명합니다.

 

이와 같이 가야산신도 본래는 성모로 불렸다가 5세기 이후 대가야에 불교가 들어오먄서 그 영향을 받아 정견모주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훗날 해인사의 설립자인 順應과 利貞은 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이 설화를 이용하여 옛 가야지역에서 불교를 진흥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이 신화에서 뇌질의 뜻은 노리들(노리도리), 누리들(누리도리)란 말이며, 노리와 누리는 세간(世間), 세상(世上)의 뜻이고, 들이나 도리는 평원(平原)의 뜻이며, 내진도 음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진은 물론 말은 다르나 그 의미는 비슷하다고 보입니다.

이진(伊珍)에서의 이는 위(상), 진은 들, 도리의 뜻이 되어 귀인(貴人) 존장(尊長)의 의미로 결국 세상을 다스리는 귀한 사람이란 뜻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예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청예에 대해서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인 소호금천씨와 연결시키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중국의 태고적 전설에 청양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헌원(軒轅)의 맏아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라고도 했으며, 청예란 말은 이 청양의 후예란 의미인 "청양예"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래 가야족은 흉노족에 속해있던 소호금천씨의 후예인 휴도왕이 전한이 흉노를 격퇴할때 그들에게 투항하였는데 그 아들인 김일제의 후손인 왕망(王莽)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이라는 국가를 건국하였으나 후한의 유수에게 멸망당하여 그 일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가야지역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 증거로는 문무대왕비문에 "枝載生○○○侯祭天胤之傳七葉以○"이라하여 김일제와 그 자손들 7대 129년간 영화를 누렸으며 문무왕이 그들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도 신라사람들이 자칭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유신이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종손이라 했습니다.

 

최치원이 지은 석리정전(釋利貞傳)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 9년 마한(馬韓)의 마지막왕인 영왕(寧王)이 백제에게 멸망당하여 낙동강가로 피신하여 구지봉(龜旨峰) 아래에 거하여 가라를 세우고 가야왕(伽倻王)이라 칭하고 아비가지(夷毗訶之)로 세자를 삼았으며, 서기 10년에 아비가지가 가야산의 정견모주(正見母主)와 결혼하여 서기 11년에 뇌실주일(惱室朱日)과 서기 14년에 뇌실청예(惱室靑裔)를 낳았고 서기 16년에 가야왕이 구한(九干)을 토벌하였는데 이들의 백성은 총 7만5천인 이였다.

 

서기 42년에 아비하지가 죽자 큰아들인 뇌실주일은 어미의 본향인 고령에 대가야(大伽倻), 동생인 뇌실청예는 김해에 가락(駕洛)을 세웠다.

 

이처럼 가야의 건국 신화는 지역과 시기를 달리하는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는 면에서, 가야사의 전개과정이 중간에 어떤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청예라고 하고, 동시에 대가야의 뇌질주일과 상대시킨 것은 전래되어 오던 신화가 중국적으로 윤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시조신화를 더욱 신성화하기 위하여 중국문화 수입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윤색은 가해졌을 것으로 보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