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處士 李榮門 墓碣銘 幷序. 行狀 - 세촌공파

야촌(1) 2013. 6. 19. 23:58

이영문(李榮門):1548(명종 3)∼1618(광해군 10).

평리성암공후 세촌공파

 


이영문(李榮門)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인백(仁伯). 호(號)는 동거(東渠). 아버지 창효(昌孝)의 맏아들이다. 조부(祖父)의 휘(諱)는 절(節)이고. 예천(醴泉) 하금곡(下金谷)에서 살았다. 글은 조부에게 배워 향시(鄕試)에서 장원급제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번이나 창의(倡義=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한 사실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용사응모(龍蛇應募錄)」에 기록 되어 있다. 공(公)은 풍채가 학처럼 우뚝하고 용모가 수려(秀麗) 하였다.

 

또한 효행과 우애가 두터웠고 특히 조부께서 공(公)을 사랑하여 토지를 더 많이 분배하려 하자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굳이 사양 하였다. 그는 평소 남을 헐뜯거나 구차하게 타인과 야합(野合) 하지도 않았는데, 당시 공적인 일로 예천군수 이춘영(李春英, 1600-1601)을 자주 만난 일은 있었지만 사적인 일로는 한 번도 군청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늙어서는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서, 더욱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는데, 예천(醴泉) 용문(龍門)의 하금곡(下金谷) 버들밭[柳田]에 살면서, 이개립(李介立).이광윤(李光胤). 정윤목(鄭允穆) 등과 더불어 사로회(四老會)를 조직하여 성리학을 함께 연구하며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명절 때는 서로 만나 돈독하게 즐겼다.

 

그리고 늘 정성과 존경을 신조로 생활하였기에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정승 정언신(鄭彦信)이 공의 어짐을 알고 벼슬하도록 권유하여 참봉에 천거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오직 도덕을 실천하는 참된 선비로 세상의 영예를 탐하지 않고, 향리에서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타계(他界)하니 효행으로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되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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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處士 月城李公 墓碣銘 幷序 - 풍산 김응조(豊山 金應祖)

 

余少時讀衡山謁張魏公墓詩。愛其藻彩。詢知其爲月城李公所撰而魁鄕解者。稍長。拜公於門下。望其儀度。昂然鸞鶴姿也。後十四年戊午。公卒。距其生年嘉靖戊申。七十有一歲。葬于醴泉郡東門巖乙坐之原。孺人金氏祔焉。後又四十三年而公之孫張英。以狀來索銘。俯仰悲感。旣辭不獲。謹按。公諱榮門字仁伯。新羅佐命功臣諱謁平。其鼻祖也。冠冕赫世。入我朝。有諱文佐。擢壯元科。名動一時。忤權貴。監安峽縣以卒。由是得免戊午禍。於公爲曾祖也。祖諱節。進士。考諱昌。孝陵參奉。妣平山申氏。政丞槩五代孫。考諱世容。公少能文。擅名場屋。旣而。累擧不中。卽廢擧高蹈。有以自樂。而士林惜其屈。平生篤於孝友。王考進士公鍾愛之。分與土田臧獲。特優公。至涕泣固辭。進士公賢而從之。口未嘗訾毀人。道不同。亦不苟合。足跡不入官府。郡守李公春英歎曰。非公事。未嘗至也。居醴泉金堂谷。日與省吾先生諸丈老相遊善。每於佳辰令節。作四老會以自娛。遠近聳慕。鄭相彥信知其賢。勸之仕。不應。卒不售於世。命也。配金氏。籍禮安。文節公淡五代孫。生員允諴女。一女。適士人朴瑛。有五。子曰廷莢。生員。曰廷蓍。文科郡守。曰廷蔡。曰廷華。曰廷薜。文科縣監。三男。長亨坤。男一。奎英。孼女適佐郞宋光弼。次發坤進士。男四。斗英,璧英,箕英,畢英。女四。適金爾哲,金以載縣監。高世光,王廷益。次碩坤生員。女二。適太士弼,韓瑮。男三。張英,參英,井英。內外曾玄孫。多至百餘人而多俊英。豈天將復興李氏也歟。張英以才望見重於士友間。其胤爾蕃。今年登司馬。銘曰。

詩書舊業。孝友所性。以御于家。是亦爲政。而不祿位。奈何命。

 

鶴沙先生文集卷之七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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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渠李公行狀 - 양서 이광윤(瀼西 李光胤)


公諱榮門。字仁伯。月城人。高麗尙書僕射悅軒諱翮之後。入我朝。有細村諱文佐。文章典雅。筆法超倫。遊佔畢齋門。得性理學。與金濯纓,權睡軒。爲道義交。成化庚子。生員。癸卯。文魁。直授校檢。翌年甲辰。以書狀朝天。時副使沿路貪鄙。公駁罷之。東還。爲所嚌。左遷安峽。竟卒于官。享年才三十歲。由是。得免戊午禍。於公爲曾祖也。祖諱節。進士。有文學志操。考諱昌孝。參奉。妣平山申氏。左議政槩五世孫。忠順衛世容之女。嘉靖戊申。生公于下金谷私第。公生而秀異。天姿穎?。學究義理。篤於孝友。王考進士公鍾愛之。分與土田臧獲特優。公至涕泣固辭。進士公賢而從之。授心經近思錄等書。公硏思篤志。以誠敬二字。爲檢行之主。口未甞訾毁人。道不同亦不苟合。喜怒不形於色。壬辰。遭倭亂。聞大駕播遷。不粒食數日。倡義鄕曲。爲討賊之計。癸巳。丁外艱。哀毁踰節。素食三年。服闋後。每遇忌辰。哭如袒括。人穪之以忠孝兼全。其後丙申。被賢良薦。品題詩禮淸範。道德眞儒是也。光海朝己酉。特召齋郞。不赴。鄭相彦信知其賢。勸之仕。亦不起。廢擧高蹈。樂居琴塘山水間。自號東渠逸士。日與省吾公諸長老。相遊善。每於佳辰令節。作四老會以自娛。遠近士林。聞其聲望。如淸風鄭允穆,峴南曺友仁,水西朴善長諸賢輩。皆聳慕之。平生愼言。有仲尼天縱欲無言之句。無意仕進。著窮達分明在彼天之詩。棲息林泉。養拙田園。足跡不及官門。郡守李公春英。歎曰。非公事未甞至也。其自守之堅礭如是焉。萬曆戊午。以疾。卒于東渠弊廬。享年七十有一。葬于郡東門巖山乙坐原。配宣城金氏。文節公淡之玄孫。生員允諴之女。性行閑貞。不失齊媚之道。壬辰卒。祔于公之墓右。有三子一女。女適都事朴瑛。男亨坤。甲子遭适亂。倡義。官正郞。次發坤。進士。次碩坤。生員。亨坤。有一男曰奎英。有文名。戊午後。公之子亨坤。追念其先公平日之蹟。搜輯畧干詩稿。以藏于家。噫。余少公十六歲。而公不拘年。許以相長。接屋而居。趨向講磨者有年矣。畧因平日所見聞。謹叙其萬一焉。


[주01] ? : 悟

 

鶴沙先生文集卷之七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