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第1次 王子의 亂
1398년(太祖 7) 王位繼承權을 둘러싸고 일어난 王子 사이의 싸움. 芳遠의 亂, 鄭道傳의 亂, 戊寅靖社라고도 한다. 李成桂의 朝鮮 開國에 功이 컸고 그가 太祖가 된 뒤에도 信任이 두터웠던 創業功臣 鄭道傳 一派와, 그들에게 못지않은 공을 세운 太祖의 제5王子 芳遠 一派 사이의 權力다툼에서 일어났다.
太祖에게는 8王子가 있었는데, 6王子는 前妃 韓氏 所生이고, 2王子는 繼妃 康氏 所生이었다. 太祖 卽位 後 世子 冊封 問題가 일어나자, 太祖는 繼妃 康氏의 뜻에 따라 太祖의 제8王子인 芳碩을 世子로 삼았는데, 이 같은 措處를 鄭道傳 ·南誾 ·沈孝生 等이 支持하였다. 이렇게 되자 芳遠은 크게 憤慨하였다.
첫째는 前妣 韓氏의 所生이 世子 冊封에서 無視당하였다는 점도 있었으나, 創業功臣으로서의 自身의 功勞를 認定해 주지 않은 데 대한 不滿이 더 컸다. 芳遠 一派와 鄭道傳 一派 사이의 軋轢은 점차 深刻해져, 1398년 마침내 두 派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 동안 鄭道傳은 世子 芳遠의 輔導 責任까지를 지고 있어 勢力이 堂堂하였으며, 南誾 ·沈孝生 등도 强한 權力을 쥐고 있었다. 芳遠은 鄭道傳 등이 太祖의 病勢가 危篤하다고 속이고 여러 王子를 宮中으로 불러들인 뒤 一擧에 그들을 죽이려 했다고 트집잡아, 私兵을 動員하여 鄭道傳 등을 不意에 襲擊하여 모두 죽이고, 世子 芳碩을 廢黜하여 귀양보내는 途中에 죽이고, 芳碩과 同腹인 芳蕃까지도 殺害하였다.
이 變亂이 일어나자 역시 創業功臣의 한 사람인 趙浚은 鄭道傳 ·南誾 등을 論罪하였고, 政勢 判斷이 빠른 芳遠은 世子의 자리가 當然히 自己에게로 돌아올 것이었으나, 이를 굳이 辭讓하고 太祖의 第2王子인 芳果에게 讓步하였다.
太祖는 이 變亂에서 두 아들과 사위까지를 잃어 크게 傷心하고 마침내 1398년 9월에 王位를 世子인 芳果(正宗)에게 물려주었다. 朝鮮 建國 初期에는 王子들도 私兵을 거느리고 있어, 이것이 王子의 亂을 일으킨 遠因이 되기도 하였다.
2)第二次 王子의 亂
1400년(正宗 2) 王位를 탐하여 芳幹이 일으킨 變亂. 芳幹의 亂 또는 朴苞의 亂이라고도 한다. 芳幹은 朝鮮 太祖의 第4男으로 王位繼承에 대하여 野心을 품고 있었으나, 人格 ·功勳 ·威勢가 아우인 芳遠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王位에 대한 野心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芳遠에 대한 猜疑心을 품고 있던 중 제1차 王子의 亂에 큰 功을 세운 朴苞가 그 論功行賞에 不滿을 품고 있었으므로, 自然 芳幹과 朴苞는 서로 뜻이 맞아, 둘이 共謀하여 芳遠의 勢力을 꺾으려고 反亂을 일으켰다.
芳幹과 芳遠의 軍士는 開京에서 接戰하였는데, 結局 芳幹의 軍隊는 敗하여 芳幹이 流配되었으며, 朴苞는 處刑되었다. 이 亂이 平定되자 定宗은 芳遠을 世弟로 삼았고, 같은 해 11月에 드디어 芳遠에게 讓位하였다.
3)五敎兩宗
高麗에서 朝鮮 前期에 걸친 佛敎 敎派를 통틀어 이르는 말.
敎宗의 涅槃宗, 南山宗, 華嚴宗, 法相宗, 法性宗과 禪宗의 天台宗, 曹溪宗을 이른다.
4)貢法詳定所
1436년(世宗 18) 貢法(稅法)을 審議 ·硏究하기 위하여 設置한 官廳. 世宗은 從來의 稅法인 踏驗損實法의 弊端이 크므로 새로운 稅法인 貢法의 試案을 만들어 각 道의 守令 ·品官 ·村民 等에게 그 贊否를 물었으나 反對意見도 적지 않아 貢法上程所를 두고 硏究를 거듭한 結果 1444년에 田分六等法 ·年分九等法 ·結負法 등 稅制上의 原則이 確定되었는데, 이 基準에서 算出된 稅率이 稅法의 基本이 되었다.
❁踏驗損實法 : 高麗 末 ·朝鮮 前期의 稅率規定法. 1391년(恭讓王 3) 科田法 實施 以後 1444년(世宗 26) 貢法이 公表될 때까지 施行되었다. 高麗 末 趙浚 등 新興 士大夫層이 主動이 되어 公私田을 莫論하고 水田 1結에 糙米 30斗, 旱田 1결에 雜穀 30두씩의 租를 受取한 儒家善政의 象徵的인 稅率이다. 什日制를 標榜한 田制改革을 斷行하면서 別途로 踏驗損失法을 規定하였다.
그 內容은, ① 農事가 平年作 以下일 境遇 租稅를 減하여 주는, 損失은 農作狀況을 10分 즉 10等級으로 하여, 損(凶作) 1分에 租 1分을 減하고, 損 8分이면 租 全部를 減免, ② 農地의 實地調査[踏驗]는 公田의 境遇, 管轄 地方官인 守令이 調査하여 監司에게 報告하면 監司가 따로 官員을 派遣하여 再審하고, 다시 監司 ·守令官이 3次로 親審하였다.
私田의 境遇에는 田主가 各自 任意로 實檢한다는 것으로, 每年 豊 ·凶作을 調査하여 稅率을 定한다는 언뜻 보아 좋은 制度인 듯하나, 實際 運營에 있어 實務 擔當官吏의 弄奸 ·誅求와 田主의 橫暴 등 弊端이 많아, 世宗 때 이러한 弊端을 없애고자 貢法을 制定하여 이를 代身하였다.
5)田制詳定所
朝鮮 前期 1443년(世宗 25)에 田稅의 改革을 위해 設置한 臨時官廳. 이보다 앞서 1436년에 貢法詳定所를 두어 貢法의 制定 및 그 內容을 論議하도록 하였으나, 그 機能을 다하지 못하여 議政府와 戶曹에서 1443년 11월 土地의 等級에 相關없이 單位面積을 一定하게 하는 頃畝法, 土地의 等級을 다섯으로 나누는 五等田品制, 해마다 作況에 따라 9等級으로 나눠 田稅를 差等 徵收하는 年分九等制 등의 骨格을 갖춘 田稅 改革案을 마련하였다.
이 案이 마련된 直後에 具體的인 施行要目을 定하고 土地를 測量하여 土地 等級을 策定하는 일을 맡을 臨時機構로서 設置하여, 晋陽大君(首陽大君)을 都提調에, 議政府 左贊成 河演, 戶曹判書 朴從愚, 中樞院知事 鄭麟趾를 提調로 任命하였다. 이들은 文物法制에 밝고, 그 동안의 論議過程에서 積極的인 立場을 取하였던 重臣이었다.
앞서 마련된 稅制案을 몇몇 地域에 適用해 본 後 1444년 6월에 土地를 肥沃度에 따라 6等級으로 나누는 田分六等法과, 收穫量을 基準으로 各 等級의 面積을 定하는 結負制를 採擇한다는 原則을 마련하였다.
議政府·六曹의 論議를 거쳐, 여기에 앞서 마련된 年分九等法을 아울러 貢法으로 確定하였다. 淸安·庇仁(비인)·광양 등 6개 고을에 試驗 適用한 후, 1450년 全羅道부터 始作하여 全國에 걸쳐 施行하였다. 記錄上으로는 1462년(世祖 8) 3월 以後의 活動 與否가 確認되지 않는다.
●田分六等法: 朝鮮時代 田稅 徵收의 便宜를 위해 土地를 肥沃度 基準으로 여섯 等級으로 나눈 收聚制度. 高麗時代 以來의 三等田品制에서는 土地가 가장 肥沃한 慶尙道·全羅道 地域에 대해서도 大部分의 土地가 가장 瘠薄한 곳의 等級인 下等田으로 策定되어 그 동안 地域에 따라 不均等하게 發展되어온 農業 生産力을 제대로 反映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休閑法의 制約에서 벗어나 땅을 놀리지 않고 每年 農事 지을 수 있게 되면서 地域마다 農業 生産力의 差異가 큰 現實을 勘案하여 새로운 田稅收聚 基準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1444년(世宗 26) 田制詳定所가 主管하여 完成된 貢法에서는 土地의 肥沃度에 따라 收穫量에 差異가 많은 現實을 反映하여 全國의 논밭을 여섯 等級으로 나누었다. 周尺을 基準尺으로 하여 土地를 測量하되, 土地의 等級에 따라 길이가 다른 자를 使用하여 基本 收稅單位인 結의 實際面積을 土地 等級마다 다르게 하였다.
從來 絶對多數를 차지하였던 下等田은 1·2·3等田으로 上向 調整되었고, 山田은 相對的으로 縮小된 面積의 5·6等田으로 編入되었다. 全體的으로 1結의 面積은 縮小된 反面에 全國의 總 土地 結數는 크게 增大되었다. 土地가 기름진 三南地方은 大部分의 土地가 1·2等田으로 區分되었다.
6)年分九等法
朝鮮時代 農事의 豊凶을 아홉 等級으로 나눠 田稅를 賦課한 收聚制度. 世宗代에 貢法의 施行問題를 論議하는 過程에서, 休閑法의 制約에서 벗어나 해마다 땅을 놀리지 않고 農事지을 수 있게 農事技術이 發展하였지만 아직 氣候變動에 따라 農業生産力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現實 때문에 一律的으로 稅額을 固定하는 데 反對하는 意見이 많았으므로, 農事의 豊凶에 따라 稅額에 差等을 두는 年分法을 導入하는 問題에 대한 論議가 이루어졌다.
1443년(世宗 25) 아홉 等級으로 나누는 問題에 대한 論議가 始作되어, 이듬해 郡縣을 單位로 農事의 狀態를 上上年부터 下下年까지의 아홉 等級으로 나눠 稅를 거둔다는 原則을 세웠다. 豊作일 때를 上上年으로 하여 1結마다 20말씩 徵收하고, 이하 2말씩 遞減하여 農事狀態가 아주 좋지 않은 下下年에 대해서는 4말을 거두도록 하였다.
以前의 損實踏驗法에서 農耕地를 筆地마다 踏驗하는 過程에서 發生했던 弊端을 없애기 위하여 한 고을을 單位로 하였고, 守令이 農事狀態를 審査하여 觀察使에게 報告하면, 觀察使는 道內의 郡縣別 農事狀態를 中央政府에 報告하였고, 議政府 ·六曹의 協議過程을 거쳐 國王의 裁可를 받은 후 年分을 決定하였다.
境遇에 따라서는 政府에서 官吏를 派遣하여 다시 審査하였다. 1454년(端宗 2) 面을 單位로 하여 한 고을에 대해 邑內와 4面으로 나누어 年分等級을 策定하였다. 한 고을이라 하더라도 農事狀態가 均一하게 될 수가 없는 當時의 農業 生産力 水準으로 볼 때, 고을을 하나의 單位로 묶는 것은 無理인 現實을 勘案한 것이었다.
또한 鄕村社會에서 面里制가 定着됨에 따라 比較的 客觀的인 基準과 妥當性을 지닌 田稅 收聚制를 마련하려 한 것이었다. 그 뒤 山川 등으로 區劃되어 거의 同一한 自然的 條件을 가진 地域[庫員] 單位로 再調整하였다. 15世紀 末까지는 該當 守令 ·觀察使의 報告보다도 中央政府에서 等級을 더 높게 策定하는 것이 普通이었다.
16世紀에 가서는 地主佃戶制의 擴大, 貢物 ·徭役 ·軍役 등의 收聚關係의 變質과 함께 地方官의 報告보다도 等級을 낮추는 것이 慣行으로 되어 가다가, 16세기 後半에는 그 해의 豊凶에 關係없이 土地의 等級에 따라 대개 下中年 또는 下下年의 年分을 一律的으로 適用하여 1結當 6~4말로 固定되는 傾向이 있었다.
1634년(仁祖 12)에 量田을 實施한 후 이 法을 革罷하고, 地域別로 土地의 肥沃度를 標準으로 하여 固定된 稅率을 適用하는 永定法을 實施하였다.
7)徙民政策
朝鮮時代 初期, 咸吉道. 平安道 地方의 開拓을 위하여 推進한 移民政策. 事實上 北方移民은 高麗 때부터 施行되었는데, 그 한 例가 尹瓘이 9城을 쌓은 뒤 많은 사람들을 移住시켜 살게 한 일이었다. 德宗 때에도 靜州에 1,000戶를 移住시킨 일이 있다.
그러나 本格的인 徙民은 朝鮮 初 4郡 6鎭을 開拓하면서부터이다. 咸吉道 地域의 境遇, 1398년(太祖 7) 새로 編入된 地域의 中心地인 孔州에 慶源府를 두고 그 管內 地域에 사는 富裕한 百姓들을 移住시킨 것이 北方徙民政策의 始作이었다.
1410년(太宗 10) 女眞族이 慶源府에 쳐들어오자, 朝廷에서는 吉州 都安撫擦理使 趙涓으로 하여금 女眞族을 討伐하도록 하였고, 그는 賊將 巴兒孫(파아손)을 쳐 豆滿江 건너 敵의 本據地까지 占據하였으며, 慶源府를 鏡城으로, 다시 富居站(부거참)으로 옮기고 1,000餘 戶를 그곳에 移住시켰다.
1433년(世宗 15) 慶源府 자리에 寧北鎭을 設置하고 大規模의 移住를 斷行하였는데, 江原道는 勿論이고 忠淸·全羅·慶尙道에서까지 資源 및 抄定(초정)徙民을 募集하는 方法까지 動員한 大擧 徙民이었다. 抄定徙民은 주로 犯罪者를 强制로 入居시키는 制度였다.
이때 兩班이면 資品을 높여 주거나 土官職을 주고, 鄕吏나 賤人에게는 免役과 官職 進出의 길을 열어 주었으며 兩班으로 免賤을 해주는 등의 徙民 優待策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徙民의 公平한 選定과 移居 後의 安定된 定着을 위하여 여러 가지 統制와 罰則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平安道 一帶에서는 1437년부터 3년간 여덟 번에 걸쳐 1만 5000여 명(1,000여 호)이 國境 地帶 가까이 移住를 하였다.
그 까닭은 女眞族의 國境 侵入이 잦은데다가 國境의 警備에도 脆弱点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平安道 一帶에는 黃海道를 비롯하여 南道地方 一帶에서 徙民 3000여 호를 募集하여 移住시켰다. 이러한 徙民政策은 成宗 때까지 持續되었다.
8)癸亥條約
1443년(世宗 25) 朝廷을 代表하여 卞孝文 등이 쓰시마 섬에서 日本의 쓰시마 도주[對馬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와 歲遣船 등에 관하여 맺은 條約. 1419년 쓰시마섬을 根據地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倭人들을 征伐한 후, 한동안 朝鮮·日本 사이의 往來가 中斷되었으나 쓰시마 島主의 懇請으로 다시 三浦를 開港하여 貿易과 近海에서의 漁獲을 許諾하면서 後患을 念慮하여 從前에 비하여 相當한 制限을 가하는 具體的 條約을 締結하였다. 그 條件은 다음과 같다.
① 歲遣船은 1년에 50隻으로 한다.
② 船員數는 大船 40명, 中船 30명, 小船 20명으로 定하고 이들에게는 食糧을 支給한다.
③ 三浦에 머무르는 자의 날짜는 20일로 限하되, 上京한 자의 배를 지키는 看守人은 50일로 정하고 이들에게도
食糧을 支給한다.
④ 孤草島에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朝鮮의 知世浦萬戶의 許諾을 받은 뒤 고기를 잡고, 이어서 漁稅를 내야 한다.
⑤ 朝鮮에서 倭人에게 주는 歲賜米豆는 쌀과 콩을 合하여 200섬으로 制限한다는 等이다. 世宗은 倭人들의 性品
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威勢를 떨쳐 그들을 征伐한 다음, 다시 恩情을 베풀어 그들의 살 길을 열어 주었다.
9)歲遣船
朝鮮時代에 쓰시마섬[對馬島] 島主에게 來往을 許諾한 貿易船. 朝鮮 前期에 倭寇의 侵掠이 잦아지자 世宗 初에 쓰시마섬을 征伐하여 交通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食糧에 缺乏을 느낀 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는 朝鮮에 謝罪하고 通商의 길을 열어줄 것을 懇請하니 朝廷에서는 平和 懷柔策으로 三浦, 즉 薺浦·釜山浦·鹽浦를 열어 貿易을 다시 許可하고 거기에 倭館을 두어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 후 倭人의 來往이 잦아지게 되자 常住者 以外에는 모두 내쫓았으며, 1443년(世宗 25) 日本에 갔던 通信士 卞孝文으로 하여금 歲遣船을 60隻으로 制限하고, 坐船人數는 大船 40名, 中船 30名, 小船 20名으로 정하여 食糧을 支給하고, 三浦에 머무르는 자의 滯留期間을 20일로 限하되 上京한 배를 지키는 자는 50日로 한하여 食糧을 配給한다는 것과, 不可避한 境遇에 限하여 2,3隻의 特送船을 許諾하도록 한 癸亥條約을 締結하게 하였다.
이때의 大·中·小 3種의 배는 이후 日本과의 말썽이 있을 때마다 數가 增減되기도 하였다. 1510년(中宗 5)에 三浦의 倭亂이 일어난 後 1512년(中宗 7)에는 倭人의 三浦 居住를 禁하고, 三浦 중 薺浦만 開港하며, 종전의 歲遣船도 半으로 줄여 30隻으로 하는 等의 壬申條約을 締結하였으나 그 後 薺浦도 形勢가 不利해지자 1544년(中宗 39)에 倭館을 釜山浦로 옮겼다.
10)東國兵鑑
朝鮮 文宗의 命으로 編纂되고 宣祖 때 刊行된 朝鮮의 戰史. 木版本. 2권 2冊. 23.5×37.2cm. 1608년(宣祖 41) 刊行. 奎章閣圖書. 漢武帝가 古朝鮮을 侵犯하여 漢四郡을 設置하였을 때부터 高麗 末 李成桂가 女眞族 胡拔都(호발도)를 물리칠 때까지, 韓國과 中國 사이에 일어난 30여 回에 걸친 戰史를 記錄한 책이다.
上 ·下 2冊으로 되어 있고 內容은 37項目으로 되어 있는데, 제1項은 漢武帝의 侵攻으로 인한 古朝鮮의 滅亡과 漢四郡의 設置, 2∼17항은 三國時代 및 統一新羅時代, 18∼31項은 高麗時代, 32∼37項은 高麗 末 李成桂의 武功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陣法》과 함께 朝鮮時代의 國防을 위한 基本的 兵書라 할 수 있으며, 韓國과 異民族과 戰爭에 있어서의 戰術 ·戰略을 硏究하는 데 貴重한 史料이다. 이 戰史는 1911년 上 ·下 合本하여 菊版으로 刊行된 바 있고, 1972년에는 原文을 붙여 刊行되었으며, 最近에는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에 의해 飜譯本이 刊行된 바 있다. 여기에는 《漢書》 《隋書》 《史記》 《唐書》 《三國史記》와 高麗時代의 여러 文獻 등이 參考資料로 使用되어 있다.
11)高麗史
朝鮮 初期 金宗瑞 (1390~1453) ·鄭麟趾(1396~1478) 등이 世宗의 敎旨를 받아 만든 高麗時代의 歷史冊. 世家 46券, 志 39券, 年表 2券, 列傳 50券, 目錄 2券 總 139券으로 되어 있다. 1392년(太祖 1) 10월 太祖로부터 以前 王朝의 歷史冊을 만들라는 命을 받은 趙浚 ·鄭道傳 등은 1396년 37券의 《高麗國史》를 만들어 바쳤다.
鄭道傳과 鄭摠이 責任을 지고 藝文春秋館의 臣下들이 實務를 擔當하였다. 이들은 우선 通史인 李齊賢의 《史略》, 李仁復 ·李穡의 《金鏡錄》, 閔漬(민지)의 《本朝編年綱目》 등의 體裁를 參考하면서, 歷代 高麗實錄과 高麗 末의 史草를 基本資料로 삼았다.
이것은 그 內容과 敍述에 問題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河崙 ·南在 ·李叔蕃 ·卞季良에게 恭愍王 以後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太祖에 관한 內容을 充實히 하도록 命하였다. 그러나 1416년 代表者인 河崙이 죽자 中斷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論議는 世宗의 卽位 후 王 自身에 의해서 提起되고, 마침내 1419년(世宗 1) 9월 柳觀과 卞季良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1421년 正月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本來의 史草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國際關係가 考慮된 部分에서는 儒敎的이고 事大的인 觀點이 오히려 强化되어 制勅 ·太子 등을 敎 ·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冊도 頒布되지 못하다가 1423년 12월에 다시 柳寬과 尹淮로 하여금 이 部分을 實錄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14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卞季良의 反對로 發刊되지 못하였다. 世宗은 1431년에 《太宗實錄》이 編纂된 것을 契機로 《高麗史》를 다시 쓰는 作業을 推進하기 始作하여, 1442년 8월에 申槩(신개) ·權踶(권제)가 《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
이 冊은 1448년에 梁誠之의 校勘을 거쳐 일단 印刷되었으나 編纂者 個人과 關聯된 곳이나 請託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配布가 곧 中止되었다. 世宗은 다시 1449년에 金宗瑞 ·鄭麟趾 ·李先齊 ·鄭昌孫에게 命令을 내려 內容을 더 充實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金宗瑞는 드디어 1451년(文宗 1) 8월에 이 책을 完成하였다.
이번의 作業에서는 늘어난 內容을 效果的으로 담기 위하여 體制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崔恒 등이 列傳, 盧叔仝(노숙동) 等이 紀 ·志 ·年表, 金宗瑞 ·鄭麟趾 등이 校勘을 맡았다. 列傳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評價가 내려져 있어서 批判이 거셀 것을 憂慮하여, 1452년(端宗 卽位)에 조금만 印刷하여 內部에 保管하다가, 14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印刷, 頒布되었다.
《高麗史》에 실려 있는 進高麗史箋에는, 本紀라 하지 않고 世家라 함으로써 名分이 重要함을 보이고, 거짓 王인 申禑 父子를 列傳에 내림으로써 分數 넘치는 것을 嚴하게 處罰하고 忠直하고 奸邪함을 明確히 區分한다 하였으며, 制度를 나누고 文物을 헤아려서 비슷한 것끼리 모음으로써 系統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年代를 헤아릴 수 있게 하며, 史蹟을 詳細하게 하는 데 힘을 다하고,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고 바르게 하려 하였다는 編纂의 方針이 提示되고 있다.
이 方針은 다시 凡例에서 各 項目別로 體系的으로 整理되고 있다. 먼저 世家에 관한 것을 보면, 王紀는 世家라 하여 名分을 바르게 하고, 分數를 넘는 稱號도 그대로 써서 事實을 保存하며, 日常的인 일은 처음과 王이 直接 參與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省略하며, 高麗世系는 實錄에 있는 三代追贈(3대추증) 事實을 基本으로 삼는다 하였다.
또한 禑王 ·昌王을 거짓 王朝로 規定하여 列傳에 降等시켰으며, 以前부터 내려오던 李齊賢 등의 評論을 그대로 실을 뿐, 따로 作成하지 않도록 하였다. 世家에서는 32왕의 王紀가 46권에 收錄되어 全體 分量의 약 3분의 1에 該當된다. 敍述의 方式은 《原史》를 模倣하여 첫머리에 王의 出生, 卽位에 관한 것을 쓰고 끝부분에 死亡, 葬禮 및 性品에 관한 것을 썼다.
王의 年代는 實際로는 卽位한 해를 元年으로 삼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卽位한 다음해를 元年으로 삼고 있다. 世家 다음에는 志를 두었는데, 天文 · 曆· 五行 ·地理 ·禮 ·樂 ·輿服 ·選擧 ·百官 ·殖貨 ·兵 ·刑法 등 총 12志 39券으로 되어 있다.
이 志도 《原史》에 準하여 分類하였으며, 實錄 등이 없어져서 빠진 곳은 《古今詳定禮》 《式目編修錄》 및 여러 사람의 文集 등으로 補充하였다 한다. 그런데 實際 高麗의 制度는 唐나라 것을 基本으로 삼고 宋나라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固有의 傳統이 깔려 있었다.
例를 들면, 圜丘 ·社稷 등 中國의 制度를 받아들였지만 土俗的인 燃燈會 ·八關會 儀式이 重要視되었고, 中國의 雅樂과 唐樂을 使用하면서도 예로부터의 俗樂이 盛行하였으며, 中國의 官制와 散官階를 利用하였으나 또한 都兵馬使 ·式目都監 및 鄕職 等 獨自的인 制度를 아울러 썼고, 當律을 採用하면서도 實際 固有의 慣習法이 適用되고 있었다.
志의 맨 첫머리에는 編纂者의 序文이 놓여 있는데, 대개 一般論과 實際 事實에 대한 槪說的인 說明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說明의 큰 줄기는 太祖 以後 文宗 때까지의 高麗 前期를 制度가 整備되고 國勢가 繁昌한 時期로 보고, 武臣亂 以後 몽골 干涉期에 들어서는 制度가 紊亂하여 나라가 衰亡한 것으로 設定하고 있다.
이어 本文에서는 먼저 年月日이 없는 一般 記事를 쓰고 그 뒤에 年代가 있는 具體的 事實을 列擧하였다. 世家 ·志 다음으로 表가 들어 있는데, 實際 本文에서는 年表라 하여 하나의 表로 되어 있다. 이것은 《三國史記》를 따랐다.
第一 위에 干支를 쓰고 그 아래 中國과 高麗의 年號를 썼으며, 高麗 난에는 왕의 死亡과 卽位 및 中國과의 關係 등 重要한 일이 簡略하게 記錄되어 있다. 表에 이어 마지막으로 列傳을 두었는데, 后妃傳 ·宗室傳 ·諸臣傳 ·良吏傳 ·忠義傳 ·孝友傳 ·烈女傳 ·方技傳 ·宦者傳 ·酷吏傳 ·嬖幸傳(폐행전) ·奸臣傳 ·叛逆傳 등 총 50권, 1,009명으로 되어 있다.
列傳의 構成은 亦是 《原史》를 模倣하였지만, 그 序文은 李齊賢이 쓴 諸妃傳이나 宗室傳의 序文처럼 이미 있던 資料를 利用하였다. 그 內容 中 反逆傳에 禑王 父子를 넣어 朝鮮 建國을 正當化하고 있고, 文臣 爲主, 科擧 爲主로 人物을 選定하여 朝鮮 儒學者의 立場이 나타나고 있으며, 興亡史觀에 立脚하여 開國功臣의 立場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個別人物에 대한 評價는 以前부터 있던 資料를 積極的으로 利用하여 比較的 公正하게 쓰려고 한 痕迹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次例의 改撰過政을 거치는 동안에 從來의 編年體의 歷史敍述에서 紀傳體로 編纂된 《高麗史》는 첫째, 東洋의 傳統的인 王朝史 編纂方式과 같이 基本的으로 以前부터 있던 史料를 選定 採錄하여 그 나름으로 再構成하였으므로 歷史性이 嚴格하게 지켜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사실을 있는 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客觀性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主體性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러면서도 한편 編纂者인 儒學者의 事大的인 名分論이 反映되면서 調和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歷史觀을 큰 原則으로 하여 高麗時代를 理解하고 있는데 첫째, 興亡史觀에 의해 高麗 前期를 肯定的으로 보고 後期를 否定的으로 理解함으로써 朝鮮 建國을 肯定的으로 把握하려 하였다.
둘째, 武人을 賤하게 보는 觀念과 王室의 權利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正統論의 立場에서 武臣政權을 否定的으로 쓰고 있다. 셋째, 元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對明關係가 確立된 時期에 該當하는 高麗史 編纂者는 否定的으로 쓰고 있고, 그 以前 時期에 記錄된 高麗史 속 史臣의 見解에서는 肯定的으로 쓰여 있다. 넷째, 高麗 末 改革論者의 見解를 批判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部分에서 高麗 當時의 事實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
12)高麗史節要
朝鮮 前期에 編纂된 高麗時代의 編年體 歷史冊. 活字本. 35권 35책. 金宗瑞 등이 王命을 받고 纂修하여 1452년(文宗 2) 春秋館의 이름으로 刊行하였다. 現在 湮滅된 《讎校高麗史》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것인데, 《高麗史》만큼 內容이 豊富하지 못하나 거기에 없는 史實들이 많이 收錄되어 있고, 또 《高麗史》에 漏落된 年代가 밝혀져 있는 것이 많다. 紀傳體인 《高麗史》와 함께 高麗에 관한 基本史料로 雙璧을 이룬다.
初版本의 完帙은 日本 나고야[名古屋]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있으며, 서울大學校의 奎章閣圖書는 11책이 落帙된 것이다. 1932년 朝鮮史編修會에서 奎章閣本을 影印하였는데, 이어 日本에 完帙이 있음을 알자 1차 影印에 빠진 권1 ·권6 ·권18과 箋 ·凡例 ·修史官 ·目錄 ·跋 등을 따로 影印하여 《高麗史節要補刊》이라는 이름으로 1938년에 刊行하였다. 또한, 1959년 東國文化社에서 奎章閣本을 爲主로 影印 刊行하였고, 1968년 民族文化推進委員會에서 國譯 出版하였다.
13)端宗復位運動
朝鮮 前期 端宗의 復位를 위해 일으켰던 擧事를 이르는 말. 1453년(端宗 1) 10월 端宗의 叔父인 首陽大君이 癸酉靖難을 일으켜 領議政 皇甫仁, 左議政 金宗瑞 등을 除去하고 스스로 領議政이 되어 朝廷의 實權을 잡았다. 1455년 潤6月에는 自身의 追從勢力인 鄭麟趾·申叔舟 等에 의해 國王으로 推戴되었으며, 端宗은 上王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癸酉靖難 直後에는 金宗瑞의 黨與로서 咸吉道都節制使로 있던 李澄玉이 亂을 일으켰다가 失敗하였으나 民心을 크게 刺戟하였다. 한편, 世祖의 王位簒奪은 과거 世宗·文宗의 寵愛를 받았던 集賢殿의 一部 學士 出身으로부터 深刻한 抵抗을 받았다.
成三問·朴彭年·河緯地·李塏·柳誠源·金文起 등의 儒臣들은 武官인 兪應孚·成勝 등과 함께 世祖를 除去하고 上王을 復位시킬 것을 謀議하고 機會를 노리고 있었다.
1455년 10월(世祖 1) 明나라의 册命使가 朝鮮에 오겠다는 通報를 契機로 56년 6월 1일 昌德宮에서 明나라 使臣을 招待하여 宴會를 베풀 때 擧事할 것을 計劃하였는데, 마침 이날 世祖 除去의 行動責을 맡은 別雲劍이 갑자기 廢해져서 擧事는 實行되지 못하였다.
이에 擧事計劃이 綻露된 것을 두려워한 金礩이 丈人 鄭昌孫에게 擧事計劃을 漏泄하고, 鄭昌孫과 함께 世祖에게 告變함으로써 擧事 主動者인 死六臣과 그 외 連累者 70여 명이 모두 處刑되면서 端宗復位運動은 失敗로 돌아갔다. 世祖는 이 事件 直後 儒臣들의 中心機關인 集賢殿을 廢止하고 經筵을 中止하였으며 새로운 儒臣들을 拔擢하여 이들을 中心으로 王權을 强化시켜 나갔다.
14)死六臣
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李塏, 兪應孚, 柳誠源\
15)生六臣
金時習, 元昊, 李孟專, 趙旅, 成聃壽, 南孝溫
16)李施愛의 亂
1467년(世祖 13) 咸鏡道의 豪族 李施愛가 일으킨 反亂. 世祖는 卽位하면서 中央集權의 强化를 위해 北道 出身 守令의 任命을 制限하고 京官으로 代替하였으며, 守令들에게 地方有志들의 自治機構인 留鄕所의 監督을 强化하게 하여 出身인 守令들과 留鄕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會寧府使를 지내다가 喪을 당하여 官職을 仕退한 李施愛는 留鄕所의 不滿·不評과 百姓의 地域感情에 便乘해서 아우 施合, 妹夫 李明孝와 叛逆을 陰謀하고 1467년(世祖 13) 5월 叛亂을 일으켰다. 그는 '咸吉道의 節度使가 鎭將들과 함께 反逆을 陰謀하고 있다'고 煽動하여 節度使 康孝文, 吉州牧使 薛澄新 등을 죽이고 '방금 南道의 軍隊가 바다와 陸地로 쳐올라와서 咸吉道 軍民을 다 죽이려 한다'고 煽動하자 興奮한 咸吉道의 軍人과 民間人들이 留鄕所를 中心으로 일어나 他道 出身 守令들을 殺害하는 등 咸吉道는 大混亂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한 그는 中央에서도 '兵馬節度使 康孝文 등이 서울의 韓明澮·申叔舟 등과 結託하여 咸吉道 軍隊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謀反하려 하여 民心이 흉흉하니 咸吉道 사람을 고을의 守令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 謀略戰術을 폈다. 世祖는 이에 속아 申叔舟 등을 投獄하였다가 곧 龜城君(구성군)浚을 兵馬都摠使로 삼아 討伐軍을 出動시켰다.
李施愛는 女眞族까지 끌어들여 對抗하였으나 許琮·康純·魚有沼·南怡 등이 이끄는 3만 軍隊는 洪原·北靑을 突破하고 利原의 蔓嶺에서 叛亂軍 主力部隊를 粉碎하였다. 李施愛는 吉州를 거쳐 鏡城으로 退却하여 女眞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 당시 司饔別坐(사옹별좌)의 벼슬에 있던 李施愛의 妻조카 許惟禮는 자기 父親이 억지로 李施愛의 一派에게 끌려갔다는 消息을 듣고 李施愛의 부하인 李珠·黃生 등을 說得하여 이들과 함께 李施愛 兄弟를 묶어 討伐軍에게 引繼하였다.
8월 李施愛 等이 討伐軍의 陣地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에 걸쳐 咸鏡道를 휩쓴 李施愛의 亂은 平定되었다. 이 亂으로 吉州는 吉城縣으로 降等되고 咸吉道는 南·北 2道로 分離되었으며, 留鄕所도 廢止되었다. 龜城君 浚과 曺錫文·許琮·魚有沼·許惟禮 등 41명은 朝鮮의 제6차 功臣인 精忠敵愾功臣으로 錄勳되었다.
17)留鄕所
高麗 末~朝鮮時代 地方 郡 ·縣의 守令을 補佐한 諮問機關. 守令의 衙門에 다음가는 重要한 官衙라 하여 貳衙라고 불렀으며, 鄕所 ·鄕所廳이라고도 하였다. 이 制度는 高麗의 事審官에서 由來된 것으로, 初期에는 德望이 높고 門閥이 좋은 사람을 事審官으로 삼다가 末期에는 前銜(前職) 品官들을 事審官에 任命하면서 留鄕品官 ·閑良官이라 하였다.
朝鮮時代에 들어와서는 이들 留鄕品官 ·閑良官들이 自意的으로 留鄕所를 만들어 地方自治의 機能을 맡았다. 留鄕所는 벼슬에서 隱退한 이들 地方 品官을 우두머리로 뽑아 地方의 風氣를 團束하고 鄕吏의 惡弊를 막는 등 民間自治의 指導者的인 役割을 맡았는데 太宗 初에 와서 차차 地方 守令과 對立하여 中央集權을 沮害하는 性向을 띠게 되어 1406년(太宗 6)에 廢止되었다.
그러나 좀처럼 없어지지 않아 그 廢止가 不可能해지자 1428년(世宗 10)에는 留鄕所의 設置를 다시 命하여 各 留鄕所의 品官 定員을 定하고 이를 監督하는 京在所 制度를 强化하였으며, 守令의 非行 與否를 論할 수 없다는 法이 마련됨에 따라 留鄕所의 自治的 性格은 크게 줄어들어 品官들은 萎縮된 地位의 保存을 위해 守令들과 妥協 結託하기도 하였다.
留鄕所는 1467년(世祖 13) 咸鏡道에서 일어난 李施愛의 亂에 그들의 一部가 이에 加擔함에 따라 다시 廢止되었는데, 이때 廢止된 理由 중의 하나는 留鄕所가 守令의 편에 서서 百姓을 侵虐함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뿌리를 내린 留鄕所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꾸준한 復設(복설)運動의 結果 1488년(成宗 19)에 다시 復活되어 鄕任, 혹은 監官 ·鄕正의 任員을 두게 되었는데, 이들 任員은 州 ·府에 4,5명, 郡에 3명, 縣에 2명의 定員을 두었으나 後代에는 倉監 ·庫監 등의 職責이 생겨 10명이 넘는 境遇도 있었다.
18)屯田制
中國에서 漢나라 以後 淸나라 때까지 施行된 土地制度. 軍糧의 確保나 또는 直接的인 財源의 確保를 目的으로 하여 國家主導下에 耕作者를 集團的으로 投入하여 官有地나 새로 確保한 邊方의 領土 등을 耕作하는 土地制度. 中國에서는 크게 軍屯과 民屯으로 나누었다(明나라 때에는 이 外에도 商屯이 있었다).
軍屯은 兵士가 耕作에 從事하는 것으로, 가장 代表的인 例로는 漢代(BC 202∼AD 220)의 屯田制를 들 수 있다. 邊境地帶의 兵士가 軍糧을 自給하기 위하여 耕作하였는데, 이것은 스스로 耕作하면서 스스로 國防에 臨하는 方式이었다. 그러나 王朝에 따라 內容上의 差異는 있었다, 明代(1368∼1644)에는 軍制인 衛所制度와 密接히 結付되어 衛所屯田制가 實施되었다.
이 方式에서는 戰鬪에 從事하는 兵士와 農耕에 從事하는 兵士가 明確히 區分되어 있었다. 또 遼(916∼1125) ·金(1115∼1234) ·元(1271∼1368) 등의 所謂 征服王朝의 遊牧民은 純粹屯兵으로서, 耕作에는 從事하지 않고 漢人들에게 小作을 시켰다.
軍屯은 性質上 邊境에 主로 分布되어 있으나 三國時代나 征服王朝의 中國 侵入時代와 같이 여러 王朝가 對立하고 있을 때에는 各其 自己 나라 戰線地帶에 設置하고 있었다. 民屯은 徵募된 一般住民이 耕作에 從事하는 것을 말하며, 內地에 주로 設置된다. 그 代表的인 것으로는 196년에 魏나라의 曹操가 허난성[河南省]의 쉬[許]地方에서 始作하여 그 後 各 州에 擴大시킨 制度이다.
이것은 各 州 ·郡에 典農中郞將 ·典農校尉 등의 田官을 두고 그 管理下에 徵發된 農民으로 하여금 荒蕪地를 開墾 耕作하게 한 뒤, 收穫物의 50%(自己 所有의 農牛를 使用할 境遇) 또는 60%(官牛를 使用할 境遇)를 徵收하는 制度였다.
위의 屯田은 中國의 屯田史上 가장 重要視되는데, 晉나라의 占田法 ·課田法, 나아가서는 北魏에서 始作한 均田法과 連結된다는 점에서 重要視되며, 또 秦 ·漢 時代의 土地制度로부터 隋 ·唐 時代 土地制度로의 過渡期的 位置에 있는 것으로 評價되지만, 이에 反對하는 意見도 있다. 唐 ·宋代의 民屯은 營田이라고도 하며, 營田은 軍屯을 意味하는 境遇도 있다.
한편 特殊한 屯田으로서 明나라 때 開中法(鹽法의 하나)下에서 商人들이 實施한 商屯을 들 수 있는데, 이것도 民屯의 一種으로 看做된다. 韓國에서 屯田制度가 本格的으로 施行된 것은 高麗時代부터이다. 國屯田은 高麗 初期부터 國境地帶인 兩界를 中心으로 設置되었고, 나중에는 남쪽지방에도 設置되었다. 兩界의 屯田은 隊로 編成된 屯田軍이 集團으로 土地를 耕作하였다.
屯田軍은 一種의 農耕部隊의 役割을 하였다. 兩界地域의 屯田 設置過程은 주로 領土 擴張과 그에 따른 防戍軍의 進駐와 竝行하여 이루어졌다. 駐屯軍이 軍糧을 確保할 目的으로 設置된 屯田은 繼續된 領土擴張 過程에서 徙民들의 移住가 實施되었고, 이 過程에서 一部의 屯田은 軍人에 의한 耕作이 徙民으로 構成된 屯田軍에 의한 耕作으로 바뀌어졌다.
南方地域의 屯田 耕作에는 軍人과 함께 奴婢가 動員되기도 하였다. 屯田은 國有地 위에 設定되었으므로 土地 所有主인 國家와 耕作民인 屯田軍 사이에서 形成되는 佃戶制的 方法으로 耕作되었다. 國家는 所有權에 根據하여 屯田軍을 佃戶로서 耕作시키고 公田租率인 4分의 1租의 規定에 따라 正額地代를 收取하는 方式으로 經營하였다.
高麗時代에는 또 內地의 一般 州縣에 設置되어 地方 官廳의 經費를 補充한 官屯田이 따로 있었다. 官屯田에 該當하는 이러한 屯田은 1099년(肅宗 4)에 처음 設置되었으며, 國有地 위에 設定하여 놓고 地方官廳이 直接 經營하였다. 이런 屯田의 規模는 官廳의 크기에 관계없이 5結이었으며, 軍需 또는 州縣의 經費를 위한 것이나 모두 2科 公田의 範疇에 包含되었다. 高麗 後期에는 元나라가 設置한 屯田이 한때 運營되었다.
元은 1271년(元宗 12) 日本征伐을 위한 財政을 確保하기 위해 屯田經略使를 두고 黃州, 鳳州에 屯田을 設置하였다. 이때 設置한 屯田은 그 被害가 컸으므로, 高麗의 繼續된 要求에 따라 1278년(忠烈王 4) 廢止되었다. 忠宣王 때는 家戶屯田을 實施하였다. 이는 土地는 支給하지 않고 各戶에 種子만 나누어주고 屯租를 거둬들인 制度였으므로 百姓에게 負擔이 매우 컸다. 이 때문에 1375년에 廢止되었으나 完全히 없어지지 않았다.
高麗時代의 屯田制度는 後期로 오면서 제대로 施行되지 못했고, 그에 따른 弊害도 많았다. 屯田을 耕作하는 屯田軍은 過重한 負擔으로 逃亡치기도 하고, 一般 農民도 屯田 耕作에 動員되는 境遇도 있었다. 특히, 高麗 後期 權門勢家에 의해 土地 兼倂이 擴大되고 農場이 發達하면서, 이들이 屯田을 차지하는 境遇가 많았다. 恭愍王 때는 屯田官을 派遣하여 이를 施政하고자 하였으나 별다른 效果를 보지 못하였다.
朝鮮時代에 들어와 紊亂해진 土地制度를 整備하는 次元에서 여러 차례 廢止와 復舊를 거듭하면서 地方 官廳과 함께 中央機關의 財政基盤으로 더욱 擴大되었다. 1426년(世宗 8)에는 各道의 國屯田과 官屯田이 모두 廢止되기도 하나, 다음해 官屯田이 다시 設置되었다. 다만 支給 田結數를 制限하여 留守와 牧官, 大都護府는 10結, 都護府 知官은 8結, 懸令, 監은 6結로 定하였다.
이리하여 屯田制度는 世祖 때에 國屯田과 官屯田이라는 二元的인 體制로 整備되었다. 國屯田은 軍資 ·軍糧을 確保할 目的으로 設置된 國家所有地로서 地域에 따라 數十 結에서 千餘 結에 이르는 廣大한 面積이었고, 各 地方의 觀察使가 管理하였다. 官屯田은 州 ·府 ·郡 ·縣과 같은 地方 行政機關과 營 ·鎭 ·浦와 같은 軍事機關에 設置되어 該當機關이 管理하면서 自體 財政을 補充하는 土地로 使用되었다.
이들 屯田은 주로 荒蕪地나 無主地의 開墾 또는 屬公田의 賜與 등을 통해 設置되었는데, 이러한 過程에서 屯田은 增設 擴大되었다. 그러나 16世紀 中葉 明宗 以後에는 兩班 官僚 ·地方 土豪들의 私田으로 變質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屯田으로 經費를 補充한 各 官廳과 機關은 財政 壓迫으로 困難을 받았고, 軍糧 確保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狀況에서 壬辰倭亂 以後에는 旣存의 屯田制度로는 軍糧 確保와 國家機關의 經費를 補充하기 더욱 힘들어졌다.
壬辰 ·丙子 兩亂을 거치면서 國土는 荒廢化되고 量案도 未備하여 國家財政은 劣惡한 實情이었다. 또 各種 國家機關도 增設되었다. 訓練都監을 비롯한 5軍營과 各種 營 ·衙門이 宣祖~肅宗代에 設置되었다. 그러나 當時 國家는 國庫不足으로 이들 機關의 財政을 제대로 調達해줄 수 없었다.
旣存의 屯田制度로는 이를 解決할 수 없어, 從來와는 다른 屯田을 設置하기 始作하였다. 곧 政府는 旣存의 國家機關과 함께 新設된 各種 機構의 經濟的 基盤을 保障해주고 不足한 財政을 解決할 目的으로 各 機關으로 하여금 土地를 自體 所有 經營하도록 하였다.
營門屯田 ·衙門屯田으로 代表되는 이들 屯田은 屯田 本來의 性格도 사라지고, 官廳 經費를 充當하는 官屯田의 役割을 하게 되었다. 또 屯田의 設置도 營 ·衙門 所有地와 함께 個人所有地인 民田으로 擴大되고 多樣化되었다.
經營形態도 賦役勞動에 의한 耕作은 사라지고 多樣한 形態로 運營되었다. 營 ·衙門 所有地에서는 竝作制, 民田에서는 1/10 程度를 收聚하는 形態로 經營되었다. 結局 屯田制度의 變遷은 土地를 基盤으로 하는 國家의 財政 收聚制度가 變化하는 過程이었다.
19)科田法
高麗의 紊亂한 土地制度를 바로잡기 위하여 1391년(恭讓王 3) 私田改革을 斷行하여 새로운 田制의 基準으로 삼은 土地制度. 高麗의 土地制度는 景宗 ·穆宗 ·文宗 때 改革을 斷行하였으나, 文宗 때 功蔭田柴科 ·更定田柴科의 制定 實施 後 私田의 擴大와 過占의 矛盾을 자아냈다.
더욱이 武臣의 亂 以後 權門勢族들의 農場擴大와 寺院田의 膨脹으로 國家經濟의 破綻과 農民들의 生活苦는 極甚하였고, 官僚들에게 分給할 田地마저 不足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矛盾을 是正하기 위하여 高宗 때 給田都監, 忠宣王 때 田民推刷都監, 恭愍王 때 田民辨正都監을 設置하여 權門勢族들의 土地兼倂을 抑制하고 農場 沒收를 試圖하였으나 失敗하였다. 이런 根據下에서 1388년 威化島回軍 이후 政權을 掌握한 李成桂는 私田改革을 主張하였고, 趙浚 ·鄭道傳 등은 田制改革을 展開하였다.
그러나 穩健한 改革派 曺敏修 ·李穡 등의 反對가 있자 이들을 逐出하고, 禑王의 아들 昌王마저 逐出하고 恭讓王을 卽位시킨 뒤, 1390년(恭讓王 2)에 從來의 公私田籍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1391년 새로운 田制의 基準이 되는 科田法을 公布하였다.
이와 같은 田制改革은 貴族의 經濟的 破壞이며 新興 士大夫에 의한 새 王朝인 朝鮮朝 開創의 經濟的 基盤이 된 것이다.
當時의 土地結數를 보면, 京畿道의 實田 13萬 1755結, 荒遠田 8,387結, 科田 ·功臣田 ·別賜田 ·陵寢田과 京畿 內의 官衙에 屬하는 公廨田으로 하고, 地方의 實田 49만 1342結, 荒遠田 16만 6643結은 公田으로 하여 軍田으로 삼았다.
科田法의 特色을 보면 改革의 原來 趣旨는 田柴科의 基本原則에 還元함으로써 官僚 支配體制를 確立하려는 것이었다.
科田法은 國有가 原則이며, 收租權의 歸屬 如何에 따라 私田과 公田으로 區分하며, 私田은 京畿道에 限하여 職散者의 高下에 따라(18等級) 제1科 150結에서 제18科 10結까지의 땅을 支給하되, 1代에 限하였다.
公田은 京畿道를 除外한 全國의 土地로서 收租權이 國家에 所屬되었고, 私田인 境遇는 收租權이 個人이나 官衙에 屬해 있었다. 그러나 高麗의 田柴科와는 달리 柴地를 支給하지 않았으며, 科田法의 成立으로 佃戶가 田主에게 50%의 租를 바치던 竝作半收制가 禁止되고, 收穫의 1/10(1結當 30두)을 徵收하였다.
科田法에 依한 土地改革은 耕者有田에 의한 均等分配가 아니고, 收租權의 再分給에 不過하였으므로 土地所有의 不均等과 貧富의 差에서 發生하는 矛盾뿐만 아니라 土地의 世襲化가 될 餘地가 있었다.
다만, 佃戶의 負擔을 적게 한 점과 田主는 佃戶의 耕作地를 함부로 빼앗지 못하며, 佃戶도 耕作權의 讓渡나 賣買를 禁止하여 모든 農民을 한층 土地에 固着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科田 ·守信田 ·恤養田 등이 점차 世襲되었고, 功臣 ·官吏의 增加로 私田의 不足을 招來하였다. 1417년(太宗 17)에는 科田으로 支給될 땅 1/3을 下三道(忠淸 ·全羅 ·慶尙道)로 移給하였다.
稅源의 減少와 食糧不足으로 1431년(世宗 13)에는 下三道 私田을 다시 京畿로 移還하게 되었고, 1434년에는 公廨田을 縮小 整理하여 科田을 補充하였으며, 1443년에는 田制詳定所를 設置하여 田稅를 改革하여 稅率을 낮추고, 20년마다
量田事業을 실시하여 量案(土地臺帳)을 作成하고, 戶籍을 3年마다 再作成하였다.
이와 같은 措置는 곧 科田法의 弊端을 反映한 것이다. 이로써 1466년(世祖 12) 科田法을 廢止하고 職田法을 實施하여 現職官僚에 限하여 最高 110結~10結까지 科田을 支給하였다. 이 制度는 官僚의 退職 後 또는 死後에 대하여는 아무 保障이 없는 制度였기 때문에 在職 중의 收奪이 甚하였다.
20)職田法
朝鮮 前期 現職 官吏에게만 收租地를 分給한 土地制度. 科田은 京畿道 내의 土地에 限하여 支給하였기 때문에 官吏 數의 增加와 科田의 世襲, 土地의 限定 等으로 인하여 兩班官僚層 內部에서 漸次 對立이 激化되고 있었다. 또한 土地 所有權者인 佃客의 收租權者 田主에 대한 抗爭이 持續的으로 일어났다.
이에 1466년(世祖 12) 現職·前職 官僚를 莫論하고 支給하던 私田을 廢止하고 職田이라는 名目으로 現職에 있는 官吏에게만 收租地를 分給하였다. 이때 前職官僚만 土地支給 對象에서 除外된 것이 아니라, 官僚의 未亡人이나 子女 등 遺家族에게 支給하던 守信田·恤養田의 名目도 廢止하였다. 그 支給額도 科田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것은 官吏들의 經濟力을 弱化시키고 國家財政을 强化하려는 目的에서 實施된 것일 뿐만 아니라, 世祖의 執權을 是認하고 그 아래에서 官吏로서 奉仕하는 사람에게만 生活의 基盤을 保障해주는 政治的인 意味도 가진 것이었다.
또한 農業技術의 發展으로 인한 農業生産力의 成長, 農民經濟의 發達에 따라 土地의 所有者인 佃客의 權利와 私的 所有權이 安定되어 가는 趨勢를 反映하여, 田主의 直接的인 佃客 支配를 遮斷하고 國家가 農民을 直接 支配하는 方向으로 政策을 推進해 간 것이었다.
이는 곧 統一新羅時代 이래 持續된 封建的 經濟制度였던 收租權에 基礎한 土地 占有關係가 廢棄되고 土地 所有權에 基礎한 農業生産關係가 漸次 浮上하는 새로운 發展方向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 制度의 實施로 退職 혹은 死亡한 뒤의 經濟的 保障이 없어진 官僚들이 在職 중에 佃客에게서 田租 및 볏짚을 規定 以上으로 徵收하는 등 苛酷한 收奪을 恣行하였다.
國家에서는 收租率과 볏짚의 徵收量을 定하고, 田主인 官吏들의 直接的인 踏驗損實을 禁止하였다. 그러나 官吏들의 收奪은 繼續되어 佃客農民의 抗拒도 그만큼 深刻해져, 1470년(成宗 1) 職田稅로 轉換하고, 國家가 耕作者에게서 直接 收租하여 官僚나 功臣에게 該當額을 支給하는 官收官給制를 實施하였다.
이로써 官僚의 直接的인 收租權限이 廢止되어 國家에서 土地 및 農民을 直接 支配하는 方向으로 나아갔다. 한편 15世紀 末 以後 職田의 不足과 財政의 枯渴이 慢性化되면서 職田稅의 一部 혹은 全部를 國家財政으로 轉用하는 政策이 자주 實施되었다.
16世紀에 이르러 職田稅의 支給이 一時的으로 中斷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分給額도 줄어들고 年分도 거의 下下年으로 固定되어 職田의 經濟的 意味는 微微해졌다. 反面에 私的 土地 所有權은 더욱 成長하여 官吏들은 많은 土地를 所有하여 점차 그들의 주된 經濟基盤으로 삼았다.
16세기 中葉 거듭되는 凶年과 戰亂으로 財政이 더욱 惡化된 것을 契機로 1556년(明宗 11)에 職田 分給의 中斷을 公布한 후 이것이 長期間 繼續됨으로써 職田은 有名無實해져 壬辰倭亂을 겪으면서 완전히 廢止되었다.
職田의 消滅은 收租權에 立脚한 土地支配 關係의 解體와 同時에 私的 所有權에 바탕을 둔 土地支配 關係, 地主佃戶制의 本格的인 展開를 意味하는 것이었다.
21)經國大典
朝鮮時代의 基本法典. 朝鮮은 開創과 더불어 法典의 編纂에 着手하여 高麗 末 以來의 各種 法令 및 判例法과 慣習法을 收集하여 1397년(太祖 6) 《經濟六典》을 制定, 施行하였다.
그 전에 王朝 樹立과 制度 整備에 크게 寄與한 鄭道傳이 《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個人의 見解에 그친 것이었다. 《經濟六典》은 바로 修正되기 시작하여 太宗 때에 《續六典》이 만들어지고, 世宗 때에도 法典의 補完作業이 繼續되지만 未備하거나 現實과 矛盾된 것들이 많았다. 國家體制가 더욱 整備되어 감에 따라 組織的이고 統一된 法典을 만들 必要가 커졌다.
世祖는 卽位하자마자 當時까지의 모든 法을 全體的으로 調和시켜 後代에 길이 전할 法典을 만들기 위해 六典詳定所를 設置하고, 崔恒·金國光·韓繼禧·盧思愼·姜希孟·任元濬·洪應·成任·徐居正 등에게 命하여 編纂作業을 始作하게 하였다.
1460년(世祖 6) 먼저 〈戶典〉이 完成되고, 1466年에는 編纂이 一段落되었으나 補完을 繼續하느라 全體的인 施行은 미루어졌다. 睿宗 때에 2차 作業이 끝났으나 睿宗의 죽음으로 施行되지 못하다가, 成宗 때 들어와서 修正이 繼續되어 1471년(成宗 2) 施行하기로 한 3차, 1474년 施行하기로 한 4차 《經國大典》이 만들어졌다.
1481년에는 다시 勘校廳을 設置하고 많은 內容을 修正하여 5次 《經國大典》을 完成하였고 다시는 改修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施行하였다. 그 뒤로 具體的이고 個別的인 法令이 繼續 마련되어 1492년의 《大典輯錄》, 1555년(明宗 10)의 《經國大典註解》, 1698년(肅宗 24)의 《受敎輯錄》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1706년(肅宗 32)의 《典錄通考》는 위의 法令集을 《經國大典》의 條文과 함께 묶은 것이다. 또한 頒布 때에 이미 〈禮典〉의 儀式節次는 《國朝五禮儀》를 따르고, 〈戶典〉의 稅入과 稅出은 그 臺帳인 貢案과 橫看에 依據하도록 規定되었다.
또 刑罰法으로서 《大明律》과 같은 中國法이 〈刑典〉에 矛盾되지 않는 範圍 안에서 適用되었다. 時期가 많이 지남에 따라 後續 法典도 마련되었다. 1746년(英祖 22)에는 各種 法令 중 永久히 施行할 必要가 있는 法令만을 골라 《續大典》을 編纂하여 施行함으로써 또 하나의 法典이 나타났고, 1785년(正祖 9)에는 《經國大典》과 《續大典》 및 《續大典》 이후의 法令을 합하여 하나의 法典으로 만든 《大典通編》이 施行되었으며, 그 以後의 法令을 追加한 《大典會通》이 朝鮮王朝 最後의 法典으로서 1865년(高宗 2)에 이루어졌다.
《經國大典》은 朝鮮王朝 開倉 때부터의 政府體制인 六典體制를 따라 6典으로 構成되었으며, 各其 14~61個의 項目으로 이루어졌다. 〈吏典〉은 宮中을 비롯하여 中央과 地方의 職制 및 官吏의 任免과 辭令, 〈戶典〉은 財政을 비롯하여 戶籍·租稅·祿俸·通貨와 商去來 등, 〈禮典〉은 여러 종류의 科擧와 官吏의 儀裝, 外交, 儀禮, 公文書, 家族 등, 〈兵典〉은 軍制와 軍事, 〈刑典〉은 刑罰·裁判·奴婢·相續 등, 〈工典〉은 道路·橋梁·度量衡·産業 등에 대한 規定을 실었다.
짧게는 世祖 때 編纂을 始作한 지 30년 만에, 길게는 高麗 末부터 약 100년 간의 法律制定事業을 바탕으로 完成된 이 法典의 頒布는 國王을 頂点으로 하는 中央集權的 官僚制를 밑받침하는 統治規範의 確立을 意味하였다. 또한 새로운 法의 一方的인 創造라기보다 당시 現存한 固有法을 成文化하여 中國法의 無制限的인 浸透를 막고 朝鮮 社會 나름의 秩序를 後代로 이어주었다는 意味를 지닌다.
例를 들어 〈刑典〉의 子女均分相續法, 〈戶典〉의 賣買 및 私有權의 絶對的 保護에 대한 規定, 〈刑典〉의 民事的 訴訟節次에 대한 規定 等은 中國法의 影響을 받지 않은 固有法이다. 한편, 당시 社會의 限界도 그대로 反映되었다. 國王에 대한 規定이 없는 것이 한 例이다.
實際 政治運營에서는 점점 細密한 規定들이 樹立되어 國王의 權限에 많은 制約을 가하였지만, 朝鮮 社會의 基本 政治理念에서 國王은 法律의 對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官吏의 資格에 대해 賤民이 아닐 것 以上의 身分的 制約을 정해놓지 않아 中世 身分制의 克復過程에서 한층 發展된 水準을 보여주지만, 奴婢에 대한 規定을 〈刑典〉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支配層이 奴婢制의 基盤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罪人으로 認識했음을 보여준다. 《經國大典》은 朝鮮時代가 繼續되는 동안 最高法典으로서의 地位를 維持하였다.
法律의 改廢가 끊임없이 繼續되고 그것을 反映한 法典이 出現하였지만, 이 法典의 基本體制와 理念은 큰 變化없이 이어졌다. 《大典會通》에는 비록 廢止된 것이라 하더라도 《經國大典》의 條項이 그 事實과 함께 모두 收錄되었다. 社會運營의 秩序는 實質的으로 많은 變化를 겪었고 따라서 法典의 施行 內容 또한 매우 큰 幅으로 달라져 갔다.
그것은 單純한 法秩序의 混亂이 아니라 社會의 變動과 發展에 대한 體制의 適應 努力이었다.
例를 들어 最高位 官署로 議政府가 있고 그곳의 3政丞이 官僚의 頂上을 이룬다는 基本構造는 19世紀 末까지 變化가 없었지만, 朝鮮 前期 3政丞과 議政府가 比較的 强力하게 百官을 統率하고 國政을 總括한 反面, 朝鮮 中期 以後로는 備邊司가 國政을 總括하는 官署가 되었고 3政丞이 그곳의 代表者로서 權限을 行使하였다.
이때의 備邊司는 高位官吏의 會議를 通해 運營되는 合坐機構로서 當時 支配層의 擴散에 調應하여 좀더 많은 사람의 意見을 끌어 모으고, 더욱 複雜해진 國家行政을 專門的으로 이끌어간다는 意味를 지녔다. 물론 後期 法典인 《續大典》부터는 備邊司에 대한 規定을 담고 있다. 매우 여러 차례 刊行되었으며 現代에 들어와서는 法制處가 1962년에 飜譯本을, 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서 1985년에 飜譯本과 註釋書를 함께 刊行하였다.
22)賜暇讀書
朝鮮時代에 人材를 養成하기 위하여 젊은 文臣들에게 休暇를 주어 學問에 專念하게 한 制度. 世宗代에 學者를 養成하고 儒敎를 統治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한 政策을 推進하여, 1424년(世宗 6) 集賢殿 學士 중에서 젊고 재주가 있는 자를 골라 官廳의 公務에 從事하는 대신 집에서 學問硏究에 專念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世宗 末葉에 申叔舟·成三問 등 6人에게 休暇를 주어 절에서 글을 읽게 하는 등 여러 차례 施行되다가, 1456년(世祖 2) 集賢殿의 革罷와 함께 廢止되었다. 1476년(成宗 7) 蔡壽 등 6人에게 다시 讀書를 위한 休暇를 주었고, 1483년에는 龍山의 빈 寺刹을 修理하여 國王이 讀書堂이라는 扁額을 내려 賜暇讀書하는 場所로 쓰도록 하였다. 이곳을 南湖堂 또는 龍湖堂이라고 하였다.
1504년 甲子士禍 이후 이 制度와 함께 讀書堂도 廢止되었다. 中宗이 卽位한 뒤 賜暇讀書에 관한 節目을 마련하도록 指示하면서 다시 施行되었다. 1517년(中宗 12) 豆毛浦(玉水洞)에 다시 讀書堂을 지었는데, 이곳을 東湖堂이라 하였다. 選拔된 學者는 集賢殿이나 弘文館 館員 못지않게 國王의 寵愛를 받아, 國王이 直接 술잔을 내려주며 술 마시는 것을 警戒하기도 하였다.
壬辰倭亂 以後 命脈만 이어오다가 1709년(肅宗 35) 이후 閉鎖되었다. 東湖堂이 있던 지금의 玉水洞 一圓을 얼마 전까지도 讀書堂 마을이란 뜻으로 '한림말'이라 불렀고, 藥水洞에서 玉水洞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讀書堂고개', 그 길을 지금도 '讀書堂길'이라 부른다. 이 제도는 오늘의 碩座制度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3)戊午士禍
1498년(燕山君 4) 金馹孫 등 新進士類가 柳子光 中心의 勳舊派에게 禍를 입은 事件. 士林派의 中央進出을 보면, 世祖 때 中央集權 ·富國强兵을 지나치게 追求하고, 勳舊 大臣들이 權力 ·財産을 모으자, 成宗 때 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士林派는 새로운 政治勢力으로 登場, 政界로 進出하였다.
三司(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의 言論職 및 史官職을 차지하면서 勳舊 大臣의 非行을 暴露 ·糾彈하고, 燕山君의 享樂을 批判하면서 王權의 專制化를 反對하였다. 한편 勳舊派는 士林派를 野生貴族으로 보고, 士林이 朋黨을 만들어 政治를 어지럽힌다고 非難하여 燕山君 以後 그 對立이 表面化되었다.
이러한 狀況에서 金宗直과 柳子光은 일찍이 個人感情이 있었고, 金宗直의 弟子 金馹孫이 成宗 때 春秋館의 史官으로 있으면서 勳舊派 李克墩의 非行과 世祖의 簒奪을 史草에 記錄한 일로 金馹孫과 李克墩 사이에도 反目이 생기게 되었다. 柳子光 ·李克墩은 金宗直 一派를 憎惡하여 報復에 着手하였다.
1498년 《成宗實錄》을 編纂하자, 實錄廳 堂上官이 된 李克墩은, 金馹孫이 史草에 揷入한 金宗直의 弔義帝文이 世祖가 端宗으로부터 王位를 빼앗은 일을 誹謗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燕山君에게 告하였다. 燕山君은 金馹孫 등을 審問하고 이와 같은 罪惡은 金宗直이 煽動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金宗直의 棺을 파헤쳐 그 屍體의 목을 베었다.
士林派 金馹孫 ·權五福 ·李穆 ·許盤 ·權景裕 등은 先王을 誣錄한 罪를 씌워 죽이고, 鄭汝昌 ·姜謙 ·李守恭 ·鄭承祖 ·洪澣 ·鄭希良 등은 亂을 告하지 않은 罪로, 金宏弼 ·李宗準 ·李胄(이주) ·朴漢柱 ·林熙載 ·姜伯珍 등은 金宗直의 弟子로서 朋黨을 이루어 弔義帝文의 揷入을 傍助한 罪로 귀양보냈다.
한편 李克墩 ·柳洵 ·尹孝孫 ·魚世謙 등은 修史官으로서 문제의 史草를 報告하지 않은 罪로 罷免하였다. 이로써 士禍 發端에 端緖가 된 李克墩이 罷免된 뒤 柳子光은 그 威勢가 더해진 반면, 많은 士林派 인사들이 犧牲되었다.
●弔義帝文: 朝鮮 前期의 學者 金宗直이 世祖의 纂奪을 非難한 글. 金宗直은 項羽에게 죽은 楚나라 懷王, 즉 義帝를 弔喪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世祖에게 죽음을 당한 端宗을 義帝에 比喩한 것으로 世祖의 簒奪을 慇懃히 非難한 글이다.
이 글을 金宗直의 弟子인 金馹孫이 史官으로 있을 때 史草에 적어 넣었다. 燕山君이 卽位한 뒤 《成宗實錄》을 編纂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編纂責任者는 李克墩으로 이른바 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金馹孫의 史草 중에 李克墩의 非行이 記錄되어 있어 金馹孫에 대한 怏心을 품고 있던 중, 金宗直의 ‘弔義帝文’을 史草 중에서 發見한 李克墩은 金馹孫이 金宗直의 弟子임을 奇貨로 하여 金宗直과 그 弟子들이 主流를 이루고 있는 士林派를 肅淸할 目的으로, ‘弔義帝文’을 쓴 金宗直 一派를 世祖에 대한 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燕山君을 움직여, 큰 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戊午史禍인데, 그 結果로 金宗直은 剖棺斬屍를 당하였고, 金馹孫·權五福·權景裕·李穆·許盤 등이 斬首되었다.
24)中宗反正
1506년(燕山君 12) 成希顔 ·朴元宗 등이 燕山君을 廢하고 晉城大君(中宗)을 王으로 推戴한 사건. 吏曹參判을 지낸 成希顔과 中樞府知事 朴元宗은 在位 12년간 禍獄과 荒慾 등 暴政으로 國家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燕山君을 廢하기로 密約하고 當時에 人望이 높던 吏曹判書 柳順汀, 燕山君의 寵愛를 받고 있던 軍資副正 申允武 등의 呼應을 얻어 王이 長湍(장단) 石壁에 遊覽하는 날을 기하여 擧事하기로 計劃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朴元宗·成希顔 ·申允武를 비롯해서 前水原府使 張珽(장정), 軍器寺僉正(군기시첨정) 朴永文, 司僕寺僉正(사복시첨정) 洪景舟 등이 武士를 糾合하여 訓練院에 모았다. 그들은 먼저 權臣 任士洪 ·愼守勤과 그 아우 愼守英 및 任士英 등 燕山君의 側近을 죽인 다음 宮闕을 에워싸고 獄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從軍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朴元宗 등은 軍士를 몰아 텅 빈 景福宮에 들어가서 大妃(成宗의 繼妃)의 允許를 받아 燕山君을 廢하고, 晉城大君을 맞아 王으로 擁立하니 그가 朝鮮王朝 第11代 王인 中宗이다.
25)己卯士禍
1519년(中宗 14) 南袞 ·洪景舟 등의 勳舊派에 의해 趙光祖 등의 新進士類가 逐出된 事件. 中宗反正으로 王位에 오른 中宗은 燕山君의 弊政을 改革하고 成均館을 重修하였으며, 두 차례의 士禍로 犧牲된 사람들을 伸寃하고, 名望있는 新進 士林派를 登用하였다.
中宗의 知遇를 얻은 新進 士類는, 性理學에 依據한 理想政治 實現을 目的으로 먼저 中宗에게 哲人君主主義 理論을 가르치면서, 君子를 重用하고 小人을 멀리할 것을 力說하였다. 나라의 美風良俗을 기르기 위하여 迷信打破와 鄕約實施를 强行하고, 有益한 書籍을 國家에서 刊行 ·頒布하게 하였으며, 賢良科를 設置하여 有能한 人材를 登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文人의 詞章을 無價値한 것으로 보고 오직 道學思想만을 强調하여, 勳舊派를 小人으로 指目하여 徹底히 排斥하며, 現實을 無視하고 急進 政策을 施行하는 등 지나친 理想主義를 펼쳤다.
또 中宗反正 功臣들을 重用함으로써, 그들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功勞 없이 功勳을 濫授하였으니 削除해야 한다는, 僞勳削除 事件을 惹起시켰다. 新進 士類와의 軋轢과 反目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正面 挑戰을 받은 勳舊派는, 洪景舟의 딸이 中宗의 後宮인 것을 利用하여, 宮中 東山의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의 4字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模樣이 나타나자, 그 잎을 王에게 보여 王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 ·肖’ 2字를 합치면 趙자가 되기 때문에, 走肖爲王은 곧 “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南袞 ·洪景舟 ·沈貞 등 勳舊派의 使嗾도 있었지만, 新進士類의 急進的 ·排他的인 態度에 厭症을 느낀 中宗은 결국 新進士類를 몰아내었다.
趙光祖는 綾州로 귀양가서 死賜되고, 金淨 ·奇遵 ·韓忠 ·金湜(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死刑 또는 自決하였다. 金絿(김구) 等 數十名도 亦是 流配되고, 이들을 斗頓(두둔) 한 金安國 ·金正國 등은 罷職되었다. 이때 犧牲된 사람들을 己卯名賢이라 한다.
26)辛巳誣獄
1521년(中宗 16)에 일어난 安處謙 一黨의 獄事. 安瑭의 아들 安處謙은 李正淑 ·權磌(권전) 等과 함께 己卯士禍로 得勢한 南袞 ·沈貞 等이 士林을 해치고 王의 聰明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除去하기로 謀議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宋祀連은 妻兄뻘이 되는 鄭鏛과 이러한 事實을 告變할 것을 謀議한 후, 安處謙의 母喪 때의 弔客錄을 證據로 삼아 告變하였다. 이로써 事件은 벌어져 安處謙 ·安瑭 ·安處謹 ·權磌 ·李忠楗 ·趙光佐 ·李若水 ·金珌 등 10여 명이 關聯되어 處刑되었고, 宋祀連은 그 功으로 堂上官이 되어 以後 30餘 年間 得勢하였다.
27)灼鼠(작서)의 變
1533년(中宗 28) 中宗의 後宮인 敬嬪 朴氏와 福城君을 죽인 事件. 福城君의 獄事라고도 한다. 中宗의 제1繼妃인 章敬王后 尹氏가 世子를 낳고 産後病으로 죽자, 왕의 寵愛를 받은 敬嬪 朴氏는 자기 所生인 福城君을 世子로 冊封할 野望을 품고 있었다.
때마침 1527년 2월 世子(뒤의 仁宗) 生日에 쥐를 잡아 四肢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서 東宮의 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世子를 詛呪한 事件이 일어나자, 金安老 등은 이것을 福城君을 世子로 冊封하려는 敬嬪의 짓이라 하여, 敬嬪과 福城君의 爵號를 빼앗아 庶人이 되게 하였다.
1533년에는 母子를 모두 賜死하였다. 1541년에 이 事件을 造作한 者가 金安老의 아들 金禧라는 것이 밝혀져, 敬嬪과 福城君은 伸寃되었다.
28)三浦倭亂
1510년(中宗 5) 三浦에서 일어난 日本人 居留民의 暴動事件. 庚午의 亂이라고도 한다. 三浦(釜山浦·乃而浦·鹽浦)를 開港한 以來 日本人들의 貿易·去留가 許可되고, 해마다 그 數가 늘어났다. 朝廷에서는 이곳에 倭館을 두어 그들의 交易·接待 場所로 하는 한편, 여러 차례 그들의 歸還을 要求하고 統制에 腐心하였다.
癸亥條約 締結 當時 60名에 限하여 許可한 居留民의 數가 世宗 末年에는 約 2,000名으로 增加하였다. 점차 驕慢해지기 始作한 그들은 朝廷의 命을 어기고, 官吏들도 이들을 壓迫하는 일이 생겨 相互間에 자주 衝突하였다. 中宗이 卽位하자 諸政改革의 一環으로, 日本人들에 대한 統制가 더욱 심해졌다.
1510년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사다모리[宗貞盛]에게 通告하여 그들의 撤去를 要求하고, 또 일본 船舶에 대한 監視를 嚴重히 하자 그들의 不平이 늘어갔다. 그러자 三浦의 日本人들은 쓰시마 日本人의 援助를 얻어 4,000∼5,000명으로 暴動을 일으켰다. 한때 乃而浦·釜山浦를 陷落시키고 熊川 防備를 擊破하였으나, 朝廷에서는 이에 즉각 對應하였다.
黃衡·柳聃年(유담연)을 慶尙左右道防禦使로 任命하여 이를 反擊하여, 大破하고 곧 三浦의 日本人 居留民도 追放하였다. 이 亂으로 朝鮮과 日本間의 交通이 中斷되었는데, 日本의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는 다시 修交할 것을 懇請해 왔다. 이에 따라 癸亥條約을 改定하여 새로 壬申條約을 締結, 乃而浦만을 開港하였다.
29)昭格署(소격서)
朝鮮時代 國家的인 道敎의 祭祀를 主管하던 官廳. 道敎의 祭天行事로 三淸星辰(삼청성진:上淸·太淸·玉淸으로 神仙들이 살고 있다는 곳)에게 지내는 醮祭(초제)를 擔當했다. 이와 함께 道學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道學生徒의 定員은 10餘 名이었다.
官員으로 提調 1名, 別提 2名, 從5品 令 1名, 從9品 參奉 2名을 두었으며, 令과 別提는 모두 文官으로 任命했다. 儒敎를 基本理念으로 하는 朝鮮은 開國하면서 高麗時代부터 있었던 道敎의 여러 宮觀과 殿堂을 없애고 昭格殿과 大淸殿만 남겼다.
1396년(太祖 5) 漢陽으로 遷都하면서 지금의 서울특별시 鐘路區 三淸洞에 昭格殿과 三淸殿을 새로 設置했다. 1466년(世祖 12) 官制改定 때 이름을 昭格署로 바꾸었고 以後 〈經國大典〉에 收錄되었다. 그런데 儒學에 대한 理解가 깊어지고 그 德目에 의한 實踐運動이 活潑해지면서 昭格署 革罷論議가 擡頭했다. 最初의 革罷論議는 1479년(成宗 15)에 提起되었다.
그러나 祭天儀式과 祈雨祭 等은 國家的인 큰일이고 由來가 오래되었으므로 革罷할 수는 없다 하여 費用을 줄이거나 淸潔하게 祭祀하는 線에서 論議가 마무리되었다. 1496년(燕山君 2)에 다시 革罷論議가 發生했는데, 昭格署가 費用만 많이 들고 國家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理由였다. 이에 昭格署를 安陽君 行(항)의 집으로 옮겨 公式的으로는 革罷된 셈이 되었다.
中宗反正으로 中宗이 卽位하자 昭格署는 다시 復元되었다. 그러나 이후 趙光祖를 비롯한 士林派 人士들이 大擧 登場하면서 革罷論議가 强하게 擡頭했다. 이들은 昭格署가 老子를 崇尙하는 異端이며, 諸侯의 나라인 朝鮮에서 直接 하늘에 祭祀하는 것은 不可하다는 것을 理由로 내세웠다.
結局 1518년(中宗 13) 儒臣들과 成均館 儒生들의 執拗(집요)한 要請으로 昭格署를 革罷했으나 1522년 大王大妃의 病患을 구실로 다시 回復시켰다. 이와 같은 昭格署의 革罷와 復設(복설)은 儒敎主義 政治의 定着過程에서 傳統的인 慣習·制度와의 葛藤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昭格署는 壬辰倭亂 以後에 完全히 廢止되었다
30)乙巳士禍
1545년(明宗 卽位年) 尹元衡 一派 小尹이 尹任 一派 大尹을 몰아내어 士林이 크게 禍를 입은 事件. 金安老에 의해 政界에서 쫓겨난 文定王后側의 勢力인 尹元老·尹元衡 兄弟는, 金安老가 失脚한 뒤 다시 登用되어 漸次 政權을 掌握하게 됨으로써, 政局은 尹汝弼의 딸인 中宗의 제1繼妃 章敬王后와 尹之任의 딸인 제2繼妃 文定王后의 外戚間의 權力鬪爭으로 樣相이 바뀌었다.
章敬王后에게 元子 호(岵)가, 文定王后에게는 慶源大君 환(峘)이 각각 誕生하자, 金安老의 失脚 이후 政界에 復歸하여 得勢한 尹元老·尹元衡(小尹)은 慶源大君으로 王位를 繼承하고자 하여, 世子의 外戚인 尹任 一派(大尹)와의 사이에 對立과 軋轢을 빚게 되었다.
仁宗 卽位 뒤 政界는 大尹이 得勢하였으나 小尹側은 大尹側에 의해 큰 政治的 迫害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仁宗의 卽位와 함께 柳灌·李彦迪(이언적) 등 士林의 名士들이 仁宗의 信任을 받아 重用되었고, 吏曹判書 柳仁淑에 의해 그 派의 士類가 많이 登用되어, 己卯士禍 이후 隱退한 士林들이 다시 政權에 參與하였다.
또한 政權에 參與하지 못한 일부 士林들은 小尹인 尹元衡 一派에 加擔함으로써, 士林들도 大尹·小尹의 兩 勢力으로 갈라졌다. 이 동안 小尹의 工曹參判 尹元衡이 大尹의 大司憲 宋麟壽 등으로부터 彈劾을 받아, 階資를 剝奪당하고 尹元老 亦是 罷職된 事件이 생겨, 文定大妃·小尹측의 大尹측에 대한 不滿과 함께 文定大妃의 仁宗에 대한 不滿으로 發展되었다.
仁宗이 在位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異腹 동생인 어린 慶源大君이 明宗이 되자, 文定大妃가 垂簾聽政을 하였다. 이에 政局의 形勢는 逆轉되어, 朝廷의 實權은 大尹으로부터 明宗의 外戚인 小尹으로 넘어갔다.
明宗 卽位 直後 軍器寺僉正(군기시첨정)으로 再登用된 尹元老는, 尹任 一派의 勢力을 肅淸하기 위해 그들이 慶源大君을 해치려 하였다고 誣告하였으나, 領議政 尹仁鏡과 左議政 柳灌이, 妄言을 하고 天親을 離間한다고 彈劾함으로써 오히려 罷職, 海南에 流配되었다. 그러나 文定大妃의 勢力을 背景으로 한 小尹측의 뒤이은 陰謀는 끈질기게 進行되었다.
즉 禮曹參議로 再登用된 尹元衡은 兄인 尹元老의 策動이 失敗하자, 이들 大尹 一派와 個人的인 感情이 있던 中樞府知事 鄭順朋, 兵曹判書 李芑(이기), 戶曹判書 林百齡, 工曹判書 許磁(허자) 등을 心腹으로 하여, 尹任이 그의 조카인 鳳城君(中宗의 8男 岏)에게 王位를 옮기도록 劃策하고 있다고 誣告하였다.
한편 宮闕 밖으로는 仁宗이 昇遐할 當時 尹任이 慶源大君의 推戴를 원치 않아서 桂林君(瑠, 成宗의 3男)을 擁立하려 하였는데, 柳灌. 柳仁淑 등이 이에 同調하였다는 所聞을 퍼뜨렸다.
이로써 尹任· 柳灌. 柳仁淑 等은 反逆陰謀罪로 流配되었다가 死賜되고, 桂林君도 陰謀에 關聯되었다는 京畿監司 金明胤의 密告로 誅殺되었다. 그 外 尹任의 사위인 李德應의 誣告로 李煇(이휘)·羅淑·羅湜(나식)·鄭希登·朴光佑·郭珣·李中悅·李文健 等 10餘 名이 禍를 입어 死刑 또는 流配되었으며, 誣告한 李德應도 死刑되었다.
乙巳士禍가 끝난 뒤에도 餘波는 한동안 繼續되어, 1547년 9월 文定大妃의 垂簾聽政과 李芑 등의 弄權을 誹謗하는 뜻의 壁書가 發見되어, 鳳城君 宋麟壽 等이 死刑, 李彦迪 等 20餘 名이 流配당하는 丁未士禍와, 이듬해 弘文館博士 安明世가 乙巳士禍 前後의 時政記에 尹任을 讚揚하였다 하여 死刑되는 등, 乙巳士禍 以來 數年間 尹元衡 一派의 陰謀로 禍를 입은 反對派 名士들은 100餘 名에 達하였다.
1498년(燕山君 4) 以後 約 50年間 官僚 間의 對立이 表面化되어 나타난 大獄事는 乙巳士禍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中央政界에 大擧 進出한 士林勢力에 의해 朋黨이 形成되었다.
31)乙卯倭變
朝鮮 明宗 때 倭寇가 全羅南道 靈岩·康津·珍島 一帶에 侵入한 事件. 朝鮮政府는 三浦倭亂(1510)·蛇梁鎭倭變(1544) 등 倭寇들의 行悖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制裁措置로 그들의 歲遣船을 嚴格히 制限하여 朝鮮으로부터 物資의 補給을 받아야 하였던 倭人들은 이의 緩和措置를 要求하여 왔으나 朝鮮政府는 이에 應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朝鮮政府의 統制에 대해 不滿을 품은 倭寇는 1555년(明宗 10) 배 70여 隻으로 全羅南道 沿岸地方을 襲擊, 먼저 靈岩의 達梁城·於蘭浦, 珍島의 金甲(금갑)·南桃 등의 堡壘를 불태우고 蠻行을 恣行하였고 長興·康津에도 侵入하였다. 이를 막던 全羅兵使(兵馬節度使) 元積과 長興府使 韓蘊 등은 戰死하고, 靈岩郡守 李德堅은 사로잡혔다.
이에 朝鮮政府는 戶曹判書 李浚慶을 都巡察使, 金慶錫·南致勳을 防禦司로 삼아 倭寇를 討伐, 靈岩에서 이를 크게 무찔렀다. 倭寇가 물러간 후 쓰시마[對馬] 島主는 乙卯倭變에 加擔한 倭寇들의 목을 베어 보내 謝罪하고 歲遣船의 復活을 거듭 要請하였으므로 政府에서는 이를 承諾, 歲遣船 5隻을 許諾하였고, 壬辰倭亂 發生 前까지 繼續되었다.
32)備邊司
朝鮮時代 軍國機務를 管掌한 文武合議機構. 備局·籌司(주사)라고도 한다. 朝鮮의 軍事行政은 國防部格인 兵曹에서 管掌하였는데, 外賊의 侵入 등 邊方에 國家的 非常事態가 發生하면 兵曹 單獨으로 軍事 問題를 處決할 수 없어, 議政府와 六曹의 大臣, 그리고 邊方의 일을 잘 아는 知邊司宰相(知邊司宰相:慶尙道·全羅道·平安道·咸鏡道의 觀察使와 兵使·水使를 지낸 從2品 以上의 官員)으로 構成한 會議에서 協議, 決定하였다.
그러나 이 會議는 대개 敵의 侵入이 있다는 報告를 받은 然後에 召集되어 卽刻 對處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남쪽 海岸과 북쪽 國境地帶에 대한 國防對策을 事前에 마련하기 위해, 1517년(中宗 12) 6월 備邊司를 設置하였다.
그러나 初期에는 1524년의 閭延(여연)·茂昌에 侵入한 野人을 擊退할 때, 1544년 蛇梁倭變이 일어났을 때, 1555년(明宗 10) 乙卯倭變이 일어났을 때와, 其他 邊防에 重大한 事件이 일어났을 때만 活動하였다. 또, 廳舍가 設置되고 官員이 任命된 것도 1555년이었다.
이때에는 邊方의 軍務 外에도 全國의 軍務를 모두 處理하였기 때문에, 主務大臣인 兵曹判書와 國家 最高行政機關인 議政大臣도 軍事機密·軍務를 알지 못하는 弊端이 생겨, 行政體系가 무너진다는 批判이 일어 廢止論이 擡頭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92년(宣祖 25) 壬辰倭亂이 일어나 國家의 모든 行政이 戰爭 遂行에 直結되자, 備邊司의 機構가 强化되고 權限도 크게 擴大되었다. 따라서 議政·判書·五軍門의 長, 四都留守 等 國家 主要機關의 長이 모두 都提調 ·提調가 되어 이에 參與하였으며, 國防問題뿐만 아니라 外交·産業·交通·通信 등 主要 國政 全般을 備邊司會議에서 討議·決定하였다.
이렇게 되자 國家 最高行政機關인 議政府와 六曹는 實權이 없어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官員으로는 都提調·提調·副提調·郞廳을 두었는데, 都提調는 時任(現任) 三議政과 過去에 議政을 지낸 사람이 自動的으로 兼任하게 하였다. 提調는 처음엔 知邊司 宰相, 吏·戶·禮·兵의 4判書, 江華留守가 兼任하였으며, 副提調는 正3品 堂上官의 文官 中에서 兵事에 能한 사람을 뽑아 任命하였다.
이들 都提調 ·提調 ·副提調를 備邊司 堂上이라 하였다. 또한 이 中에서 兵務에 通達한 사람 3名을 뽑아 有司堂上(常任委員)으로 任命하여, 每日 備邊司에 나가 軍務를 處理하게 하였다. 그 뒤 訓練都監·大提學·刑曹判書·開城留守·御營大將·守禦使·摠戎使·禁衛大將·水原留守·廣州留守 等도 提調를 兼職하게 하여, 備邊司 堂上의 數는 數十 名에 이르렀다.
1713년(肅宗 39)에는 八道勾管堂上制(팔도구관당상제)를 두어 各 道에 1명의 勾管堂上官이 軍務를 分擔하여 그 道의 狀啓와 文簿를 處理하고, 다시 4명의 읍사당을 두어 各其 2道의 軍務를 擔當하게 하였다. 또한, 郎廳은 從6品으로 12名을 두었는데, 1명은 兵曹의 武備司 郎廳이 兼職하고, 3명은 文官, 8名은 武官 중에서 任命하였다.
이 밖에도 雜務를 맡아본 書吏 16명, 書寫 1명을 두었고, 雜役을 맡아본 庫直 2명, 使令 16명, 廳直 1명, 文書直, 守直軍士 3명, 撥軍 3명 등을 두었다. 여기에서 討議 ·決定된 重要事項을 記錄하여 1년에 1券씩(事件이 많을 때는 2∼3권) 備邊司謄錄을 엮어냈다.
現存하는 것으로는 壬辰倭亂 以前의 것은 없고, 1617년(光海君 9)부터 1892년(高宗 29)까지 謄錄 273권이 있다. 行政上의 秩序, 機能上의 重複, 그리고 權限의 限界性 等 때문에 廢止論이 여러 차례 提起되었으나 後期까지 存續하다가, 1865년 大院君이 執政하면서 議政府와 備邊司의 限界를 規定, 國政 議決權을 議政府에 移關하면서 그 機能이 弱化되었다. 이후 三軍府 制度를 復活시켜 軍務를 處理하게 함으로써 廢止되었다.
33)壬辰倭亂
1592년(宣祖 25)부터 1598년까지 2次에 걸친 倭軍의 侵掠으로 일어난 戰爭. 1597년 第2次 侵略戰爭을 따로 丁酉再亂이라고도 하며, 日本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役, 中國에서는 萬曆의 役이라고 한다.
朝鮮 朝廷에서는 南海岸 地方에 倭寇들이 자주 侵掠하자 軍國機務를 掌握하는 備邊司라는 合坐機關을 設置하여 이에 對備하였으나, 宣祖 때에 支配階級은 黨派를 中心으로 分裂하여 서로 反目嫉視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派爭으로 中央에서는 國防政策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東洋의 國際情勢를 明나라와의 親善關係만으로 解決하려 하였다.
또 安逸 속에서 姑息的인 對策에만 滿足해하던 支配層은 隣接國家인 日本이나 大陸의 女眞族의 政治的 變動이나 事項을 具體的으로 探知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世紀 末에 日本에 派遣한 通信使도 黨派的인 엇갈림에 치우쳐 相反된 內容을 報告하였다.
한편 李珥는 10萬 養兵說을 主張하기도 했으나 朝鮮社會는 이미 오랜 平和 속에서 支配階層인 士大夫의 偏黨政治, 紀綱의 解弛, 田稅制의 紊亂 等 여러 弊端으로 人心이 動搖되었다. 朝廷에서는 各 道에 倭軍의 侵攻에 對備하여 城郭을 修築하고 軍備를 整備하라는 命令을 내려도 몇 곳을 除外하고는 民弊를 惹起시킨다는 怨聲만 높았으며 이에 同調한 일부 守令들도 戰備를 中止하라는 狀啓(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日本을 統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大陸侵攻의 意圖를 具體的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國內 統一의 마지막 段階에 이르러 규슈[九州]征伐을 끝마치고 對馬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朝鮮 侵攻의 뜻을 表明하였다.
그러나 朝鮮 事情에 精通한 쓰시마島主는 이 計劃이 無謀한 것임을 알고 朝鮮이 通信士를 派遣할 것을 建議하였다. 따라서 쓰시마島主는 家臣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日本國王使로 하여 1587년 朝鮮으로 派遣, 일본 國內事情의 變化를 說明하고 通信士의 派遣을 要請하였다.
이 첫번째 日本 使臣이 釜山에 到着하였을 때 그들의 迎接에 대한 可否와 書契의 書辭가 從來와 달리 傲慢하다 해서 問題가 되어 朝廷에서는 여러 論議가 있었다. 特히 公州敎授(敎授는 從6品 官職) 趙憲은 萬言疏를 올려 時弊와 國防을 論하는 등 日本 征伐의 强硬論을 主張하자 結局 朝廷에서는 水路迷昧를 理由로 通信士의 派遣을 拒絶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外交가 失敗하자 다시 쓰시마島主의 斡旋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朝貢과 함께 通信士의 派遣을 懇請하고 앞서 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朝鮮人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朝鮮 政府는 1590년 3월 黃允吉을 正使, 金誠一을 副使, 許筬(허성)을 從事官으로 한 通信士 一行을 派遣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正月 일본의 答書를 가지고 歸國하였다.
日本의 答書에는 從來의 外交慣例에 따르지 않는 無禮한 句節과 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侵略의 意圖가 分明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使臣이 復命하는 자리에서 政使 黃允吉(西人)은 倭가 반드시 侵掠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副使 金誠一(東人)은 倭가 侵犯할 動靜이 없다는 相反된 報告로 黨派的인 엇갈림과 함께 朝廷의 意見도 統一되지 못하였다.
東人勢力은 西人들이 戰爭을 빌미로 政治的 危機를 넘기려한다고 疑心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第3次 日本 使臣 一行이 朝鮮 通信士보다 한달 늦게 入京하여 日本이 假道入明하리라는 通告에 朝廷은 놀라 그 해 5월에 日本의 書契 內容과 함께 倭情을 明에 알리는 한편 日本의 侵攻에 對備하여 金晬(김수) ·李洸(이광) ·尹先覺 등으로 하여금 慶尙 ·全羅 沿岸의 여러 城을 修築하게 하고 各 陣營의 武器를 整備하게 하였다.
申砬(신립) ·李鎰(이일)에게는 邊備를 巡視하게 하는 등 要衝地인 嶺南地方의 防備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時機가 늦었다. 이 동안 日本의 侵略計劃은 더욱 成熟하여 內戰을 通해 硏磨한 兵法·武藝·築城術·海運術 等을 整備하고 鳥銃의 大量生産도 進行되었다.
1592년 4월 13일 慶尙道 東萊府 多大浦 鷹峰烽燧臺(응봉봉수대)에서는 倭軍의 700餘 兵船이 쓰시마를 出港하여 釜山浦에 이르고 있다는 狀況報告가 곧 慶尙·全羅道의 各 監營과 中央에 傳達되었다.
그러나 慶尙左水營軍은 抵抗도 하지 못한 채 潰滅되었고 14일에는 倭軍 先發隊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約 1萬 8000 兵力이 釜山城을 攻擊하여 十數時間의 血戰 끝에 釜山城을 死守하던 釜山鎭僉使(부산진첨사) 鄭撥(정발) 등의 戰死로 城을 빼앗겼다.
이튿날 東萊에 進擊한 倭軍들과 맞선 東萊府使 宋象賢 以下 軍民은 끝까지 抗戰하다 殉國하였다.
釜山과 東萊를 陷落시킨 倭軍의 後續部隊는 繼續 上陸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第2軍 2萬 2000餘 兵力이 釜山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第3軍 1萬 1000餘 兵力이 多大浦를 거쳐 金海에 上陸, 侵攻을 開始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餘 水軍이 編成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應援하였다. 日本 國內의 殘留兵力과 쓰시마 等地의 駐屯軍 等 日本 侵略軍의 總兵力은 約 20萬이었는데 이 中 釜山과 東萊를 陷落시킨 第1軍은 中路로 東萊-梁山-淸道-大邱-仁同-善山-尙州-鳥嶺-忠州-驪州-楊根-龍津나루-京城東路, 第2軍 左路는 東萊-彦陽-慶州-永川-新寧-軍威-龍宮-鳥嶺-忠州-竹山-龍仁-漢江, 第3軍 右路는 金海-星州-茂溪-知禮-登山-秋風嶺-永同-淸州-京畿道의 3路로 나뉘어 서울을 向하여 北上하였다.
4월 17일 慶尙左水使(水師는 水軍節度使) 朴泓으로부터 倭軍 侵攻의 急報가 傳해지자 朝廷에서는 申砬을 都巡邊使, 李鎰(이일)을 巡邊使, 金汝岉(김여물)을 從事官으로 任命하여 倭軍 侵攻에 對備하는 한편, 金誠一을 慶尙右道招諭使, 金玏(김근)을 左道安集使로 삼아 民心收拾과 抗戰을 督勵하도록 하였다.
北上하는 倭軍을 막기 위해 李鎰에게는 中路인 鳥嶺 方面을, 劉克良과 邊器 等에게는 各其 竹嶺과 秋風嶺을 防備하게 하였고 都巡邊使 申砬과 都體察使 柳成龍으로 하여금 李鎰을 應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李鎰이 4월 24일 尙州에서 가토에게 敗하여 忠州로 물러나자 倭軍은 鳥嶺과 竹嶺 等地에서 抵抗도 받지 않은 채 忠州까지 進擊하였다.
李鎰의 뒤를 이은 申砬은 忠州 彈琴臺에서 防禦作戰을 폈으나 敗하였다. 李鎰 등이 竹嶺·鳥嶺·秋風嶺 등의 要塞를 防禦하기 위해 出發한 후 朝廷은 敵軍의 首都 攻擊에 對備하여 右議政 李陽元을 守城大將으로 삼아 都城의 城郭을 築城하게 하는 한편 前 北兵使였던 金命元을 都元帥를 삼아 漢江을 守備하게 하였다.
申砬의 敗戰報告가 있자 4월 30일 宣祖는 都城을 버리고 開城을 向하여 避亂길에 올랐다. 서울이 陷落되자 宣祖는 다시 平壤으로 달아났다. 播遷에 대한 民心이 거제지자 播遷을 主動한 사람은 領議政 李山海로 내몰고, 柳成龍은 播遷을 積極的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罪目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臨海君은 咸鏡道로, 順和君은 江原道로 보내어 勤王兵(근왕병)을 募集하였지만 百姓들은 오히려 두 王子를 붙잡아 倭軍에게 引渡하였다. 한편 明나라에 援兵을 請하여 收復을 꾀하고자 하였다. 王이 달아나자 百姓들의 士氣는 더욱 떨어졌고 特히 下三道는 無政府的 混亂狀態가 더했다.
왕이 避難해 있는 사이 民亂이 일어나 公私奴婢의 文籍이 있는 掌隷院(장례원)과 刑曹의 建物을 불태우고 景福宮·昌德宮 等 宮闕과 官廳에 들어가 掠奪을 하였다.
上陸 20일만에 서울은 倭軍에게 占領되었으며 서울에 入城한 倭軍은 隊伍를 整備하여 고니시의 部隊는 平安道, 가토의 部隊는 咸鏡道, 구로다의 部隊는 黃海道로 進路를 定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部隊를 두고 慶尙·江原·全羅道 方面으로 進出하여 後方地域을 擔當하였다.
江原道·黃海道 方面으로 募兵하러 간 두 王子도 倭兵의 捕虜가 되고 破竹之勢로 밀려드는 倭軍에 의해 開城·平壤은 釜山 上陸 以後 60일도 못 되어 陷落, 거의 無防備狀態인 全國土는 咸鏡道까지 進出한 倭軍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陷落되고 咸鏡道 地域까지 倭軍의 侵略을 당하고 있을 때 海上의 싸움은 全羅道 海岸으로 進出하는 倭兵을 막아내고 있었다.
朝鮮 水軍의 編制와 戰術은 高麗 以來로 倭寇 防禦 爲主였으므로 잘 整備되어 있었다. 따라서 各道에는 水營이 있어 이를 水軍의 根幹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釜山으로 侵入한 倭船團에 慶尙左水營과 右水營은 海上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大敗하였다.
全羅左水營의 水軍節度使로 있던 李舜臣은 慶尙右水營으로부터 倭軍의 侵入報告를 받자 出動하여, 玉浦의 첫 海戰에서 勝利를 거둔 후 唐浦·唐項浦·閑山島·釜山 等地에서 繼續 戰果를 거두었다. 특히 閑山島 앞바다에서 벌어진 戰鬪에서 勝利함으로써 逆轉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晉州城싸움·幸州山城싸움과 더불어 壬辰倭亂 3大捷으로 꼽는다.
李舜臣의 活躍으로 海上權을 掌握한 朝鮮軍으로 인해, 全羅道 海岸으로 進出하려던 倭軍의 作戰은 粉碎되었다. 海上에서의 勝利와 함께 陸地에서는 釜山鎭·東萊의 守城戰과 金海城의 抵抗, 慶尙右防禦使 趙儆(조경) 麾下의 突擊隊長 鄭起龍의 秋風嶺戰鬪, 密陽 鵲院에서의 密陽府使 朴晉의 善戰, 留都大將 李陽元의 蟹踰嶺(해유령) 勝戰 등 熾烈한 接戰이 있었다.
한편 混亂과 民心의 離散 속에서도 勤王을 부르짖는 義兵이 全國 各地에서 蜂起하였다. 嶺南에서는 儒林 郭再祐·金沔(김면)·鄭仁弘 等이, 湖南地方에서는 高敬命·金千鎰, 湖西에서는 趙憲 等이, 咸鏡道에서는 鄭文孚(정문부)가 擧兵하였다. 또한 朝鮮 士大夫들에게 賤待만 받았던 僧侶들이 蜂起하여 加勢하였다.
趙憲은 忠淸道 沃川에서 일어나 淸州의 倭兵을 逐出하고 錦山의 倭兵을 攻擊하다 戰死하였고 郭再祐는 慶尙道 宜寧에서 擧兵하여 宜寧·昌寧 等地에서 敵을 물리치고 晋州에서 金時敏과 함께 敵兵을 擊退하였다. 高敬命은 全羅道 長興에서 擧兵하여 錦山을 攻擊하다가 戰死하였으며 金千鎰은 水原에서 擧兵하여 第2次 晋州싸움에 參加하였다.
鄭文孚는 咸鏡道에서 活躍하여 鏡城·吉州 等을 回復하고 關東地方의 敵을 逐出하였다. 이 外에도 大小의 許多한 義兵이 蜂起했으며 休靜·惟政 같은 僧侶들이 僧兵을 거느리고 싸움에 參加하기도 하여 이러한 義兵의 活動은 倭軍의 軍事行動에 甚한 打擊을 주었다.
王이 播遷하는 途中 使臣을 明에 보내어 救援을 要請하자 明에서는 朝鮮 땅에서 倭軍을 擊退해야 한다는 判斷 아래 派兵을 決定하여, 先鋒長으로 駱尙志(낙상지)와 査大受(사대수) 等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宋應昌·李如松이 4만 5000의 東征軍을 이끌고 朝鮮의 金應瑞 등과 함께 平壤城을 攻擊, 이를 奪還하였다.
繼續 서울을 向하여 進擊하던 明軍은 碧蹄館에서 倭軍과 一大 接戰이 벌어져 開城으로 退却하고 倭軍은 서울에 集結하여 咸鏡道에서 撤收하는 가토의 軍隊와 聯合, 幸州山城을 攻擊하였다. 幸州山城에는 前 全羅道巡察使 權慄이 梨峙(이치)싸움에서 勝利한 후 明의 援軍과 呼應하여 서울을 奪還하기 위해 雄據하였으나 碧蹄館싸움에서 明軍이 敗退하자 孤立되었다.
權慄은 助防將 趙儆(조경), 僧將 處英과 함께 約 2,300의 精兵으로 幸州山城에서 背水陣을 치고 몇 차례의 激戰 끝에 倭軍을 물리치자 倭軍은 다시 서울 以北에 出兵하지 않고 서울 撤收를 서두르게 되었다.
臨津江을 끼고 朝鮮·明의 聯合軍과 倭軍이 對峙하고 있을 때, 日本側 고니시의 講和會談 提議로 李德馨(이덕형)과 日本의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겐소[玄蘇] 사이에 講和會談이 始作되어 講和는 交涉段階에 들어갔다. 그 즈음 倭軍은 앞서 金時敏에게 敗退한 晉州城을 再次 攻擊해 왔는데 金千鎰·黃進·崔慶會 等이 力戰했으나 陷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晉州싸움은 幸州싸움에 못지않은 激戰이었고 特히 제1차 晉州城싸움은 壬辰倭亂 3大捷에 든다. 朝鮮側의 講和反對에도 不拘하고 明의 積極的인 介入으로 會談은 進陟되어 沈惟敬 等이 日本에 派遣되었고 우리측에서도 黃進을 通信士로 보내게 되었다. 講和會談이 繼續되는 동안 戰爭은 小康狀態로 들어갔고 明은 倭軍의 再攻擊이 없을 것이라 判斷하여 主力部隊를 撤收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明·日間의 講和會議는 1596년 9월 日本 오사카성[大阪城] 會談에서 決裂되었다. 會談이 決裂된 理由는 明에서는 도요토미를 日本의 王으로 삼고 그 入貢을 許諾한다는 封貢案으로써 局面을 解決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明의 皇女로써 日本의 后妃로 삼게 할 것,
② 朝鮮의 8道 중 4道를 割讓할 것,
③ 勘合印(감합인:貿易證印)을 復舊할 것,
④ 朝鮮의 王子 및 大臣 12名을 人質로 삼을 것 等을 要求하였다.
沈惟敬은 이 要求를 明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本國에 報告하여 明은 封貢案에 依해 1596년 도요토미를 日本 國王에 封한다는 勅書와 金印을 보냈는데, 和議는 決裂되고 이듬해 倭軍은 再次 侵入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朝鮮도 倭軍의 再侵에 對備하여 慶尙道의 金烏·公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各道의 山城을 修築하는 등 軍備를 갖추었고 楊鎬(양호)를 經理, 麻貴(마귀)를 提督으로 한 明의 援軍 5만 5000도 卽時 出動했기 때문에 日本軍은 慶尙道를 中心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軍이 釜山에 上陸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軍이 多大浦에 上陸하여 梁山을 陷落하고 西生浦에 陣을 쳤다. 丁酉再亂 때의 倭軍 總兵力은 14만 1500으로, 水軍도 强化되었다.
倭軍은 壬辰年 當時와는 달리 慶尙·忠淸·全羅道의 完全 占領을 戰略으로 하여 全州를 占領한 後 北進할 計劃을 세워, 7月 末부터 左軍은 南海·泗川·固城·河東 方面에서, 右軍은 光陽·順天·金海·昌原 方面에서, 가토는 密陽·草溪·居昌 等을 거쳐 各其 全州로 向하였다.
倭軍은 黃石山城의 싸움에서 苦戰 끝에 勝利를 거두었으나 高靈에서 尙州牧使 鄭起龍軍에 敗한 데 이어 稷山 싸움에서도 敗하여 더 이상 北進하지 못하고 南下하여 順天·蔚山 等地의 沿海岸에 進駐하게 되었다.
海戰에서는 1597년 1월 三道水軍統制使 李舜臣이 倭軍의 本據地를 攻擊하지 않고 消極的이라는 罪名으로 下獄되고 元均이 그 後任이 되었으나 7월의 漆川梁(칠천량) 海戰에서 倭軍의 奇襲을 받아 元均과 全羅水使 李億祺, 忠淸水使 崔湖의 水軍이 全滅하였다.
이에 다시 李舜臣이 水軍統制使에 任命되어 남은 12隻의 兵船으로 戰線을 收拾하고 戰列을 再整備하여 鳴梁大捷에서 敵艦 133隻을 맞아 激戰 끝에 大勝을 거두고 다시 制海權을 回復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契機로 倭軍은 總退却하였다.
倭軍의 가토가 蔚山의 島山城에서 退却하고 順天의 고니시도 退却하려 했으나 李舜臣의 水軍이 이를 遮斷하자 倭의 水軍 300餘 隻이 이를 後援하려 露梁에 이르러 最後의 海戰이 벌어졌다. 李舜臣은 明의 水師提督 陳璘과 合勢하여 倭船 200餘 隻을 擊破하여 壬辰倭亂 最後의 이 海戰에서 勝利하고 壯烈한 最後를 마쳤다.
이로써 前後 7年間에 걸쳤던 倭亂은 朝鮮·明·日本 3國에 커다란 影響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朝鮮은 國土가 荒廢化되고 百姓은 塗炭에 빠졌으며 政治·經濟·文化·社會·思想 等 各 方面에 걸쳐 深刻한 打擊을 받았다. 따라서 爲政者들의 急先務는 戰亂으로 因한 文物의 破壞, 財力의 蕩盡을 復舊하는 것이었다.
政治·軍事的인 面에 있어서는 備邊司의 强化와 訓練都監을 비롯한 軍事機構의 改編이 始作되었다. 또한 亂中에는 各種 武器가 製作되어 李長孫은 飛擊震天雷를, 邊以中은 火車를 各其 發明하였고 倭의 鳥銃과 明軍이 使用한 西洋式 大砲인 佛郞機砲(불랑기포)도 模造하여 使用하였다.
戰禍로 인한 農村의 荒廢, 隱結의 增加, 國家秩序의 紊亂 等으로 大同法의 實施, 免稅田 擴大의 防止, 均役法의 施行, 饑民을 爲한 還穀·耗穀의 回收策 등이 制度化되었다.
한편 混亂한 社會와 民心의 洶洶함을 틈타 李夢學의 亂 等 四方에서 일어나는 民亂과 함께 施行된 束伍軍制度, 空名帖의 發行 등은 朝鮮의 身分制度 崩壞에 커다란 影響을 미치게 하였다. 文化的 損失로는 倭兵의 放火로 佛國寺·景福宮 等의 建物과 史庫에 保管 중이던 歷代 王朝의 實錄·書籍 等이 燒失되고 많은 文化財를 掠奪당하였다.
한편 戰爭으로 인한 疾病의 蔓延으로 疾病退治를 위한 醫學書인 《東醫寶鑑》이 編纂되었고 思想的인 側面으로는 義兵·僧兵을 通한 愛國心의 發露와 自我反省과 함께 明의 來援에 대한 事大思想이 高調되는 反面에 倭에 대한 再認識과 敵愾思想이 더욱 强해졌다.
戰亂 中에 擡頭하기 始作한 女眞의 淸나라에 의해 明나라가 亡하고 日本에서도 도요토미 代身 도쿠가와[德川]의 幕府 政權이 들어서게 되었다. 日本은 朝鮮侵掠의 結果로 朝鮮으로부터 金屬活字에 의한 印刷術을 처음으로 導入하게 되었고 捕虜로 잡아간 陶瓷器 技術者에 依해 劃期的으로 窯業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掠奪하여 간 많은 書籍은 性理學 等 그들의 學問에 크게 寄與하였다.
34)丁卯胡亂
1627년(仁祖 5) 滿洲에 本據를 둔 後金(淸)의 侵入으로 일어난 朝鮮과 後金 사이의 싸움. 1616년 滿洲에서 建國한 後金은 光海君의 適切한 外交政策으로 큰 摩擦이 없이 지냈으나 光海君의 뒤를 이은 仁祖가 ‘向明排金’政策을 標榜하고, 랴오둥[遼東]을 收復하려는 毛文龍 麾下의 明나라 軍隊를 平北 鐵山의 椵島에 駐留시켜 이를 隱然히 援助하므로, 明나라를 치기 위해 中國 本土로 進入하려던 後金은 背後를 威脅하는 朝鮮을 征服하여 後患을 없앨 必要가 있었다.
또한 後金은 明나라와의 싸움으로 經濟交流의 길이 끊겨 심한 物資不足에 허덕여 이를 朝鮮과의 通交로써 打開해야 할 處地에 있었고, 때마침 反亂을 일으켰다가 後金으로 달아난 李适의 殘黨들이 光海君은 不當하게 廢位되었다고 呼訴하고, 朝鮮의 軍勢가 약하니 속히 朝鮮을 칠 것을 慫慂하여 後金 太宗은 더욱 決戰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1627년 l월 阿敏이 이끄는 3萬의 後金軍은 앞서 降伏한 姜弘立 등 朝鮮人을 길잡이로 삼아 鴨綠江을 건너 義州를 攻掠하고 이어 龍川 ·宣川을 거쳐 淸川江을 넘었다. 그들은 ‘前王 光海君을 위하여 怨讐를 갚는다’는 名分을 걸고 進軍하여 安州 ·平山 ·平壤을 占領하고 黃州를 掌握하였다.
朝鮮에서는 張晩을 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平山에서부터 後退를 거듭, 그 本陣이 開城으로 後退하였고 仁祖 以下 朝臣들은 江華島로 避하고 昭顯世子는 全州로 避亂하였다. 黃州에 이른 後金軍은 2월 9일 部將 劉海를 江華島에 보내 ① 明나라의 年號 ‘天啓’를 쓰지 말 것, ② 王子를 人質로 할 것 등의 條件으로 和議를 交涉하게 하였다. 이에 兩側은
① 和約 후 後金軍은 卽時 撤兵할 것,
② 後金軍은 撤兵 후 다시 鴨綠江을 넘지 말 것,
③ 兩國은 兄弟國으로 定할 것,
④ 朝鮮은 後金과 和約을 맺되 明나라와 敵對하지 않을 것 등을 條件으로 丁卯條約을 맺고 3월 3일 그 儀式을 行
하였다. 이에 따라 朝鮮側은 王子 대신 宗室인 原昌君을 人質로 보내고 後金軍도 撤收하였다.
35)丙子胡亂
1636年(仁祖 14) 12月∼1637年 1月에 淸나라의 第2次 侵寇로 일어난 朝鮮·淸나라의 싸움. 1627年 後金의 朝鮮에 對한 제1차 侵入(丁卯胡亂) 때, 朝鮮과 後金은 兄弟之國의 盟約을 하고 兩國關係는 一段落되었다. 그러나 1632年 後金은 滿洲 全域을 席捲하고 明나라 北京을 攻擊하면서, 兩國關係를 兄弟之國에서 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黃金·白金 1萬 냥, 戰馬 3,000匹 等 歲幣와 精兵 3萬을 要求하였다.
또한 1636年 2月 龍骨大·馬夫太 等을 보내어 朝鮮의 臣事를 强要하였으나, 仁祖는 後金使臣의 接見마저 拒絶하고 8道에 宣戰諭文을 내려, 後金과 決戰할 意思를 굳혔다.
1636년 4월 後金의 太宗은 皇帝를 稱하고 國號를 淸이라고 고쳤으며, 朝鮮이 强硬한 姿勢를 보이자 王子·大臣·斥和論者를 人質로 보내 謝罪하지 않으면 攻擊하겠다고 威脅하였다. 그러나 朝鮮은 主和論者보다는 斥和論者가 强하여 淸나라의 要求를 繼續 黙殺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挑戰的 態度에 憤慨한 淸나라 太宗은, 淸·몽골·漢人으로 編成한 10萬 大軍을 스스로 거느리고 首都 선양[瀋陽]을 떠나, 9일 鴨綠江을 건너 쳐들어왔다. 義州府尹 林慶業은 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淸軍의 侵入에 對備하였으나, 先鋒長 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進擊하였다.
13일에서야 朝廷에서는 淸나라 軍의 侵入事實을 알았고, 14일 敵은 開城을 通過하였다. 朝廷에서는 急히 判尹 金慶徵을 檢察使로, 江華留守 張紳을 舟師大將으로, 沈器遠을 留都大將으로 삼아 江華·서울을 守備하게 하였다. 또 原任大臣 尹昉과 金尙容으로 하여금 宗廟社稷의 神主와, 世子妃·元孫·鳳林大君·麟坪大君을 비롯한 宗室 等을 江華로 避難하게 하였다.
14일 밤 仁祖도 江華로 避難하려 하였으나 이미 淸나라 軍에 의해 길이 막혀, 昭顯世子와 百官을 거느리고 南漢山城으로 避하였다. 仁祖는 訓練隊長 申景禛 等에게 城을 굳게 지킬 것을 命하고, 8道에 勤王兵을 募集하도록 檄文을 發하였으며, 明나라에 急使를 보내어 支援을 請하였다.
그러나 16일 淸나라 先鋒軍이 南漢山城을 包圍하였고, 1637년 1월 1일 太宗이 到着하여 南漢山城 아래 炭川에 20萬 淸나라 軍을 集結시켜, 城은 完全히 孤立되었다.
城內에는 軍士 1만 3000명이 節約해야 겨우 50日 程度 支撑할 수 있는 食糧이 있었고, 義兵과 明나라 援兵은 期待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軍과의 決戰은 不可能하였다. 또한 城 밖에는 淸나라 軍이 無辜한 百姓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特히 丙子年은 酷毒한 추위가 오래 繼續되어, 露宿한 將帥·軍士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氣盡하여 病들고 얼어죽는 者가 늘어났다. 이러한 狀況에서 城內에서는 崔鳴吉 등 主和派와 金相憲 등 主戰派 사이에 論爭이 거듭되다가, 講和論이 優勢하여 마침내 城門을 열고 降伏하기로 하였다.
淸나라 太宗은 朝鮮의 降伏을 받아들이는 條件으로, 우선 仁祖가 親히 城 밖으로 나와 降伏하되, 兩國關係를 惡化시킨 主謀者 2, 3名을 잡아 引渡할 것을 要求하였다. 때마침 江華島가 敵에게 陷落된 消息을 들어, 어쩔 수 없이 崔鳴吉 等을 敵陣에 보내어 降伏條件을 交涉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淸軍은 龍骨大·馬夫太를 보내 다음과 같은 講和條約 條項을 提示하였다.
① 淸나라에게 君臣의 禮를 지킬 것,
② 明나라의 年號를 廢하고 關係를 끊으며, 明나라에서 받은 誥命·册印을 내놓을 것,
③ 朝鮮 王의 長子·第2子 및 여러 大臣의 子弟를 선양(瀋陽)에 人質로 보낼 것,
④ 聖節(中國皇帝의 生日)·正朝·冬至·千秋(中國 皇后·皇太子의 生日)·慶弔 등의 使節은 明나라 禮에 따를
것,
⑤ 明나라를 칠 때 出兵을 要求하면 어기지 말 것,
⑥ 淸나라 軍이 돌아갈 때 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內外 諸臣과 婚緣을 맺어 和好를 굳게 할 것,
⑧ 城을 新築하거나 城壁을 修築하지 말 것,
⑨ 己卯年(1639)부터 一定한 歲幣를 보낼 것 等이다.
1월 30일 仁祖는 世子 等 扈行(호행) 500名을 거느리고 城門을 나와, 三田渡에 設置된 受降壇에서 太宗에게 屈辱的인 降禮를 한 뒤, 漢江을 건너 還都하였다. 淸나라는 盟約에 따라 昭顯世子·嬪宮·鳳林大君 등을 人質로 하고, 斥和의 主謀者 洪翼漢·尹集·吳達濟 등 三學士를 잡아, 2월 15일 撤軍하기 始作하였다. 이로써 朝鮮은 完全히 明나라와는 關係를 끊고 淸나라에 服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關係는 1895년 淸·日戰爭에서 淸나라가 日本에 敗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戰後에는 많은 孤兒들의 收養問題와, 數萬에 이르는(어느 記錄에는 50萬) 拉致당한 이들의 贖還問題가 擡頭되었다.
特히 淸나라 軍은 拉致한 良民을 戰利品으로 보고, 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宗室·兩班의 婦女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大部分 잡혀간 이들은 贖價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贖價는 싼 경우 1人當 25∼30냥이고 大槪 150∼250냥이었고, 身分에 따라서 비싼 境遇 1,500냥에 이르렀다. 贖還은 個人·國家 모두 그 財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殉節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祖上에 대해 罪가 된다 하여, 贖還 士女의 離婚問題가 社會·政治問題로 擡頭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世子와 鳳林大君은 還國하였으나, 世子는 2個月 만에 죽었다. 仁祖의 뒤를 이은 孝宗(鳳林大君)은 볼모生活의 屈辱을 되새기며, 北伐計劃을 推進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36)功西
朝鮮時代 西人에서 갈린 黨派. 勳西(훈서)라고도 한다. 1623년 仁祖反正으로 政權이 東人에게서 西人에게로 넘어갔다. 이때 같은 西人 중에서도, 仁祖反正에 加擔한 金瑬(김류) ·沈器遠(심기원) ·李貴 ·金自點 ·申景禛(신경진) 등을 攻西라 하고, 加擔하지 않은 金尙憲 등은 淸西라 하였다.
37)大同法
朝鮮時代 宣祖 以後 貢物(特産物)을 쌀로 統一하여 바치게 한 納稅制度. 朝鮮時代 貢物制度는 各 地方의 特産物을 바치게 하였는데, 負擔이 不公平하고 輸送과 貯藏에 不便이 많았다. 또 防納(代納), 生産되지 않는 貢物의 配定, 貢案의 增加 등 官吏들의 모리 行爲 등의 弊端은 農民負擔을 加重시켰고 國家收入을 減少시켰다.
이에 대한 矛盾을 是正하기 위하여 趙光祖·李珥·柳成龍 등은 貢物의 稅目을 쌀로 統一하여 納付하도록 主張하였다. 특히 李珥는 1569년(宣祖 2) 著書 《東湖問答》에서 貸貢收米法을 建議하였으나 實施하지 못하였다.
그 뒤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으로 全國의 土地가 荒廢해지고 國家收入이 減少되자 1608년(宣祖 41) 領議政 李元翼과 韓百謙의 建議에 따라 防納의 弊端이 가장 甚한 京畿道부터 實施되었다. 中央에 宣惠廳과 地方에 大同廳을 두고 이를 管掌하였는데, 京畿道에서는 稅率을 春秋 2期로 나누어 土地 1結에 8말씩, 都合 16말을 徵收하여 그 중 10말은 宣惠廳으로 보내고 6말은 京畿道의 需要에 充當하였다.
1624년(仁祖 2) 趙翼의 建議로 江原道에서도 實施되었는데, 沿海地方은 京畿道의 例에 따랐고, 山郡에서는 쌀 5말을 베[麻布] 1필로 換算하여 바치게 하였다. 1651년(孝宗 2) 金堉의 建議로 忠淸道에서 實施, 春秋 2기로 나누어 土地 1결에 5말씩 都合 10말을 徵收하다가 뒤에 2말을 追加 徵收하여 12말을 바치게 하였다.
山郡地帶에서는 쌀 5말을 무명[木綿] 1필로 換算하여 바치게 하였다. 全羅道에서는 1658년(孝宗 9) 鄭太和의 建議로 節目을 만들어 土地 1결에 13말을 徵收, 沿海地方에서부터 實施하였다.
山郡 26邑에서는 1662년(顯宗 3)부터 實施하였는데, 富豪들의 弄奸이 적지 않아 顯宗 6년에 廢止되었다가 다음해에 復舊되었고, 뒤에 13말에서 1말을 감하여 12말을 徵收하였다.
慶尙道는 1677년(肅宗 3)부터 實施하여 1결에 13말을 徵收하였는데, 다른 地方과 같이 1말을 감하여 12말을 徵收하였다. 변두리 22읍은 쌀을, 山郡 54읍은 돈[錢]·무명을 반반씩, 그 외 4읍은 돈과 베로 반반씩 바치게 하였다.
1708년(肅宗 34) 黃海道에 大同法을 模倣한 詳定法을 實施하였는데, 1결당 쌀 12말을 徵收하는 외에 別收米라 하여 3말을 더 받았다. 大同法이 全國的으로(咸鏡道와 平安道는 除外) 實施된 뒤 稅額도 12말로 統一하였다. 山間地方이나 不可避한 境遇에는 쌀 대신 베·무명·돈[大同錢]으로 代納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大同法 實施 後에도 別貢과 進上은 그대로 存續하였다. 따라서 百姓에게 二重 負擔을 지우는 境遇가 생겼으며, 戶당 徵收가 結당 徵收로 되었기 때문에 富豪의 負擔은 늘고 가난한 農民의 負擔은 줄었으며, 國家는 田稅收入의 不足을 메웠다.
大同法 실시 뒤 登場한 貢人은 貢納 請負業者인 御用商人으로서 産業資本家로 成長하여 手工業과 商業發達을 促進시켰다. 大同米는 1894년(高宗 31) 모든 稅納을 倂合하여 結價를 決定했을 때 地稅에 倂合되었다.
38)禮訟
朝鮮 顯宗 때 宮中儀禮의 適用問題, 특히 服喪期間을 둘러싸고 西人과 南人 사이에 크게 論難이 벌어진 두 次例의 事件. 宮中儀禮를 둘러싼 論難은 朝鮮時代에 들어와서도 여러 차례 있었다. 顯宗代 두 차례의 禮訟의 背景은, 各 學派 乃至 政派 사이에 있던 禮學的 基盤의 差異였는데, 이후 政局의 變動에 重要한 變數로 作用한 事件이다. 이는 17世紀의 朝鮮 社會에서 理念的 規定性이 政治的 ·思想的으로 큰 變數로 作用하였음을 뜻한다.
1차 禮訟(己亥禮訟)은 孝宗이 죽은 뒤 그의 繼母인 慈懿大妃(趙大妃)가 孝宗의 喪에 어떤 服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論難이었다. 朝鮮 社會의 支配理念인 性理學에 根據한 禮論에서는 子息이 父母에 앞서 죽었을 때 그 父母는 그 子息이 嫡長子인 境遇는 3年喪을, 그 以下 次子일 境遇에는 1年喪을 입도록 規定하였다.
仁祖는 첫째아들인 昭顯世子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次子인 鳳林大君을 世子로 冊封하여 王統을 繼承하게 하였다. 따라서 孝宗이 王位에 오름으로써 王統은 仁祖-孝宗으로 이어졌지만 嫡長子(嫡長子가 有故時 嫡長孫)가 잇는 觀念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여기에 1차 禮訟의 禮論的 背景이 있다.
즉, 王家라는 特殊層의 儀禮가 宗法에 優先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觀點의 差異가 反映되어 있었다. 孝宗의 卽位와 같은 王位繼承에 나타나는 宗統의 不一致를 聖庶奪嫡이라고 表現하였는데, 旣往의 嫡統이 끊어지고 새로운 嫡統에 의해 王位가 이어지게 되었음을 意味하는 말이다.
이는 王位繼承이 宗法의 原理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宗法 體系 내에서 理解하고자 하는 것으로, 王家의 儀禮라 할지라도 原則인 宗法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觀念의 表現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規定에 依據할 경우, 孝宗은 王統上으로는 仁祖의 嫡統을 이었지만 宗法上으로는 仁祖의 둘째아들이므로 孝宗의 繼母인 慈懿大妃는 당연히 宗法에 따라 1年喪을 입어야 할 일이었다.
宋時烈을 中心으로 한 西人 系列에서 1年喪을 主張한 데 반하여 南人 系列에서는 尹稶(윤휴) ·許穆 ·尹善道 등이 그러한 主張을 反駁하고 나옴으로써 1次 禮訟이 本格化되었다. 南人측의 主張은 次子로 出生하였더라도 王位에 오르면 長子가 될 수 있다는 許穆의 次長子說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論理는 天理인 宗法이 王家의 儀禮에서는 變則的으로 適用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南人측의 主張은 “王者禮不同士庶”라는 말로 表現된다. 이러한 論理에 따르면 孝宗은 當然히 長子가 되는 것이며, 慈懿大妃는 孝宗을 위하여 3年의 服을 입어야 할 것이었다. 西人과 南人의 王室前例에 대한 이러한 立場의 差異는 單純한 禮論上의 論難이 아니라, 그들이 宇宙萬物의 原理로 認定한 宗法의 適用에 대한 解釋의 差異였으며, 이는 現實的으로는 權力構造와 連繫된 見解 差異였으므로 敏感한 反應으로 對立한 것이다.
1차 禮訟은 禮論上으로는 宗統問題를 辨別하는 것이 核心을 이루었으나, 結局 《經國大典》에 長子와 次子의 區分 없이 1年服을 입게 한 規定(國制朞年服)에 依據하는 것으로 結末지어졌다.
結果的으로는 西人의 禮論이 勝利를 거두었으므로 西人政權은 顯宗 年間에 繼續 維持될 수 있었다. 그러나 宗法秩序에 있어서 孝宗의 位相에 대한 論難은 結論을 보지 못하였으며, 이 問題는 結局 2차 禮訟의 빌미가 되었다.
2차 禮訟(甲寅禮訟)은 孝宗의 妃인 仁宣王后가 죽자 趙大妃(慈懿大妃)가 어떤 喪服을 입을 것인가 하는 問題를 놓고 벌어졌다. 1차 禮訟에서는 國制朞年服이 採擇됨으로써 孝宗의 長子 ·次子 問題가 曖昧하게 處理되었으나, 仁宣大妃가 죽으면서 이 問題가 다시 表面으로 떠올랐다.
즉 孝宗을 長子로 認定한다면 仁宣大妃는 長子婦이므로 大王大妃는 朞年服(1年)을 입어야 하지만, 孝宗을 次子로 볼 경우 服制는 大功服(9個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禮曹에서는 처음에 朞年服으로 정하였다가, 다시 꼬리표를 붙여서 大功服으로 服制를 바꾸어 올렸다.
顯宗은 禮曹에서 大功服制를 採擇한 것은 결국 孝宗을 次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適用된 例題로 判定하였다. 以後 宋時烈系의 西人勢力이 大大的으로 政界에서 逐出되면서 結局에는 南人政權이 들어서는 契機를 이루었다. 禮訟은 思想的으로 西人과 南人 사이의 禮學的 傳統의 差異가 內在되었으며, 政治的으로는 政局의 變動을 가져오는 등, 禮 自體의 問題를 넘어서는 重要한 事件이다.
2차 禮訟의 境遇 現實的으로는 西人 宋時烈 系列과 非宋時烈 系列, 南人勢力, 王室의 立場 등 多樣한 變數가 揭載되는 등 보다 複雜한 樣相을 띠었지만, 여전히 1次 禮訟에서의 禮學上의 問題가 論爭의 本質을 이룬다.
이것은 곧 17世紀의 境遇 西人과 南人 內에서 있어온 禮學的 ·學問的 特性이 現實的인 權力上의 複雜한 여러 變數에도 不拘하고 禮訟의 展開過程에서 底流를 形成하고 있었음을 意味한다.
西人은 金長生으로부터 이어지는 禮學的 傳統 속에서 朱子學을 絶對 信奉하는 反面, 近畿南人은 原始儒學인 六經을 重視하면서 古學으로 回歸하고자 하는 傾向性을 가졌으며, 이러한 傾向性은 權力構造의 側面에서도 각각 神權 中心, 王權 中心의 두 傾向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理解된다.
39)庚申換局
1680년(肅宗 6) 南人이 大擧 失脚하여 政權에서 물러난 事件. 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며, 이 事件으로 西人이 得勢하였다. 1674년(顯宗 15) 禮訟에서의 勝利로 政權을 掌握한 南人은 顯宗에 이어 王位에 오른 肅宗으로부터는 信任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南人끼리 淸南 ·濁南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權力을 掌握한 南人 勢力에 대한 厭症 때문이었다. 庚申年인 1680년 3월 當時 南人의 領袖이며 領議政인 許積의 집에 그의 祖父 許潛을 위한 延諡宴(연시연:諡號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이 때 이번 宴會에 兵判 金錫胄(김석주), 肅宗의 丈人인 光城府院君 金萬基를 毒酒로 죽일 것이요, 許積의 庶子 堅은 武士를 埋伏시킨다는 流言蜚語가 퍼졌다. 金錫冑는 핑계를 대고 不參하고 金萬基만 參席하였다.
그 날 비가 오자 肅宗은 宮中에서 쓰는 龍鳳遮日(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天幕)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許積이 가져간 뒤였다. 肅宗은 怒하여 許積의 집을 廉探하게 하였는데 南人은 다 모였으나 西人은 金萬基 ·申汝哲 등 몇 사람뿐이었다.
이에 노한 肅宗은 鐵原에 귀양갔던 金壽恒을 불러 領議政을 삼고, 朝廷의 要職을 모두 西人으로 바꾸는 한편, 吏曹判書 李元禎의 官爵을 削奪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다음달인 4월 鄭元老의 告變으로 許堅의 逆謀가 摘發되었다.
이른바 ‘三福之變’으로, 仁祖의 孫子이며 肅宗의 5촌인 福昌君 ·福善君 ·福平君 3兄弟가 許堅과 結託하여 逆謀하였다는 것이다. 그 內容은 許堅이 福善君을 보고 “奏上께서 몸이 약하고, 兄弟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不幸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大監이 王位를 이을 後繼者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西人들이 臨城君을 推戴한다면 大監을 위해서 兵力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福善君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拷問 끝에 處刑되었고 許堅 ·福昌君 ·福善君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고, 許堅의 아버지 許積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免하였으나, 뒤에 惡子를 掩護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南人은 完全히 沒落하고 西人들이 得勢하기 시작하였다.
40)己巳換局
1680년(肅宗 6)의 庚申黜陟으로 失勢하였던 南人이 1689년 元子定號 問題로 肅宗의 歡心을 사서 西人을 몰아내고 再執權한 일. 肅宗의 繼妃 閔氏가 王妃로 冊立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後嗣를 낳지 못하자, 肅宗은 後宮인 淑媛 張氏를 寵愛하게 되었다.
그러자 張氏의 오라비 張希載를 中心으로 여러 가지 弊端이 생겼는데, 朝廷에서는 이 일을 重要視하여 宮中의 內事까지 論諫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張氏가 王子 昀(윤)을 낳았다. 肅宗은 昀을 元子로 冊封하고 張氏를 禧嬪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當時의 執權勢力이던 西人은 正妃 閔氏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後嗣가 나기를 기다려 嫡子로써 王位를 繼承함이 옳다 하여 元子冊封을 反對하였다. 그러나 南人들은 肅宗의 主張을 支持하였고, 肅宗은 肅宗대로 西人의 專橫을 누르기 위하여 南人을 登用하는 한편, 元子의 名號를 자기 뜻대로 定하고 淑媛을 禧嬪으로 冊封하였다.
이때 西人의 領袖인 宋時烈은 上疏를 올려 肅宗의 處事를 잘못이라고 諫하였다. 肅宗은 元子定號와 禧嬪 冊封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元老 政治人이 上疏질을 하여 政局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憤慨하던 차에 南人 李玄紀 등이 宋時烈의 主張을 反駁하는 上疏를 올렸으므로, 이를 奇貨(기화)로 宋時烈을 削奪官職하고 濟州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賜藥을 내렸다.
宋時烈의 賜死로 된서리를 맞은 西人은 이어서 金壽興 ·金壽恒 등의 巨物 政治人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罷職되고, 또는 流配되어 西人은 朝廷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權大運 ·金德遠 ·睦來善 ·呂聖齊 等의 南人이 得勢하였다. 이 換局의 餘波로 閔妃는 廢黜되고, 張禧嬪은 正妃가 되었다.
41)甲戌換局
1694년(肅宗 20) 廢妃閔氏 復位運動을 反對하던 南人이 禍를 입어 失權하고 少論과 老論이 再執權하게 된 事件. 甲戌獄事 또는 甲戌更化라고도 한다. 當時 西人인 金春澤과 韓重爀 등이 廢妃閔氏의 復位運動을 展開했는데, 執權派인 南人은 이를 契機로 反對黨인 西人 一派를 逐出할 目的으로 金春澤 등 數十 名을 逮捕하여 鞠問하였다.
南人은 1689년의 己巳換局으로 執權했는데, 이때 그들은 閔氏 廢黜의 遠因이 된 昭儀張氏 所生의 元子定號에 贊成했던 것이다. 그런 판국에 만일 閔氏가 復位하여 다시 王妃가 되면 南人은 또 失權하게 되므로 閔氏를 支持하는 金春澤 등을 몰아내려 한 것이다.
처음에 肅宗은 張氏를 寵愛하여 禧嬪(禧嬪張氏)을 삼았으며 아들을 낳자 나중에는 王妃로까지 冊封하였으나, 張氏가 차차 放恣한 行動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閔氏를 廢한 일을 뉘우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肅宗은 도리어 閔黯의 처사를 미워하고 金春澤 등의 復位運動을 옳게 여겨, 閔黯을 賜死하고 그의 一黨인 權大運 睦來善·金德遠을 流配하였으며, 동시에 閔氏를 支持했던 少論의 南九萬·朴世采·尹趾完 등을 朝廷의 要職에 登用하였다.
한편, 己巳換局 이후 王妃가 된 張氏를 禧嬪으로 降等시켰고 그때 閔氏를 支持하여 2번이나 上疏를 올렸다가 賜死한 宋時烈을 비롯하여 金壽恒 등에게는 爵位를 내렸다. 이 獄事의 打擊으로 南人은 完全히 政權에서 밀려나 다시 擡頭할 機會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西人이 實權을 잡게 되었으며, 그 後부터는 老少論 간에 爭論이 頻繁하게 일어났다.
42)正言
朝鮮時代 司諫院에 있던 正6品職. 定員은 2名으로 모두 文官이었다. 王에게 諫諍·論駁하는 일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高麗時代에 있던 左·右 正言을 1392년(太祖 1) 7월 左·右 拾遺(습유)로 復原했다가, 1401년(太宗 1) 7월 다시 左·右 正言으로 定해졌다. 〈經國大典〉에는 左·右 正言이 아닌 正言으로만 실렸다. 司諫院의 正言 以上 大司諫까지의 官員을 모두 '臺長(대장)'이라고 일컬었다.
43)李麟佐의 亂
朝鮮 後期 李麟佐 등의 少論이 主導한 反亂. 일어난 해의 干支를 따서 戊申亂이라고도 한다. 少論은 景宗 年間에 王位 繼承을 둘러싼 老論과의 對立에서 一段 勝利하였으나, 老論이 支持한 英祖가 卽位하자 威脅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朴弼顯 등 少論의 過激派들은 英祖가 肅宗의 아들이 아니며 景宗의 죽음에 關係되었다고 主張하면서 英祖와 老論을 除去하고 密豊君 坦(탄)을 王으로 推戴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南人들도 一部 加擔하였다.
한편 이들의 擧兵에는 流民의 增加, 盜賊의 熾盛, 基層 民衆의 抵抗的 雰圍氣가 重要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叛軍은, 地方의 士族과 土豪가 指導하고 中間階層이 呼應하며, 一般 軍士는 占領地의 官軍을 動員하거나 賃金을 주어 動員하는 形態로 構成되었다.
李麟佐는 1728년(英祖 4) 3월 15일 淸州城을 陷落하고 景宗의 怨讐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宣傳하면서 서울로 北上하였으나 24일에 安城과 竹山에서 官軍에 擊破되었고, 淸州城에 남은 勢力도 上黨城에서 朴敏雄 等의 倡義軍에 의해 무너졌다.
嶺南에서는 鄭希亮이 擧兵하여 安陰·居昌·陜川·咸陽을 占領하였으나 慶尙道觀察使가 指揮하는 官軍에 討伐당했다. 湖南에서는 擧兵 前에 朴弼顯 等의 加擔者들이 逮捕되어 處刑당하였다. 亂의 鎭壓에는 兵曹判書 吳命恒 등 少論 人物들이 積極 參與하였으나, 以後 老論의 權力掌握이 加速化하였고 少論은 再起不能의 狀態가 되었다.
이 事件 以後 政府에서는 地方勢力을 억누르는 政策을 强化하였고 土着勢力에 대한 守令들의 權限이 커져갔다. 또한 이때 叛軍이 軍士를 동원한 여러 方式은 뒤의 洪景來의 亂으로 이어졌다.
44)均役
朝鮮時代 軍役의 負擔을 輕減하기 위하여 만든 稅法. 1750년(英祖 26) 從來 人丁 單位로 2필씩 徵收하던 軍布가 여러 弊端을 일으키고, 農民 經濟를 크게 威脅하는 지경에 이르자 2疋의 軍布를 1疋로 減하기로 하는 한편, 均役廳을 設置, 減布에 따른 不足財源을 補充하는 對策을 마련하게 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漁箭稅·鹽稅·船稅 등을 均役廳에서 管掌하여 補充한다는 등의 均役法이 制定되어 1751년 9월에 公布되었다.
軍役은 처음에 16歲부터 60歲까지의 良人에게 賦課하여 이를 正軍과 保人으로 나누어 番上하는 正軍을 保人이 經濟的으로 돕게 하였다. 正軍의 番上制가 解弛해지면서 中宗 때부터는 番上대신 布를 바치게 하는 軍布制가 이루어지더니, 壬辰倭亂 後 募兵制가 實施되면서 軍役은 軍布 2疋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어 軍役으로서의 軍布는 國家財政에 큰 比重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朝鮮 後期 軍政의 紊亂으로 돈 있고 勢力있는 良人은 官吏와 結託하여 軍役을 免除받고, 無力하고 가난한 良人만이 軍役을 지게 되었다. 따라서 不足한 軍布를 補充하기 위해 이미 死亡한 軍役 對象者에게도 그 몫을 家族에게서 徵收하는 白骨徵布, 16세 未滿의 어린아이에게까지 軍布를 徵收하던 黃口簽丁(황구첨정), 軍布 負擔者가 逃亡하면 親戚에게서 軍布를 徵收하던 族徵, 이웃에 連帶責任을 지워 軍布를 徵收하던 隣徵 등 갖은 秘法이 橫行하였다.
後에 均役廳 句管堂上으로 任命된 洪啓禧에 의하면 50萬이 져야 할 良役을 10萬餘 名이 負擔하는 狀態에 이르게 되자 곳곳에서 農民의 農村 遊離現狀이 두드러진다 하였다. 軍役의 改善策은 孝宗·仁祖 以後 繼續 講究되어 肅宗 때에는 軍布徵收를 人丁 單位로 하지 않고 家戶 單位로 하여 兩班에게도 徵布하자는 戶布論, 軍布를 廢止하고 土地에 附加稅를 賦課하여 그 費用을 充當하자는 結布論, 有閑良丁을 摘發하고 兩班子弟 및 儒生에게도 徵布하자는 游布論(儒布論), 軍布를 廢止하고 每人當 錢貨로 徵收하자는 口錢論과 軍門의 縮小로 軍事費를 減縮하자는 등 論議가 紛紛하여 家戶當의 戶布制와 家戶單位의 戶錢制가 有力하였다.
그러나 兩班層의 强硬한 反對로 實現을 보지 못하고, 軍布를 半으로 줄이자는 減匹論이 擡頭하였다. 1742년(英祖 18)에는 良役査正廳을 두어 良役의 實態把握에 努力하는 한편 良人의 戶口調査를 하였으며, 1743년에는 이 調査를 바탕으로 領議政 趙顯命에게 良役實摠을 만들게 하여 各 道에 印頒하도록 命하였다.
1748년 이 作業이 完了되어 全國의 良丁數와 軍布必需를 調査 收錄한 良役實總(처음에는 良役査定冊子)이 頒刊되어 軍布를 減匹할 境遇의 不足한 軍布數를 알게 되자, 英祖는 1750년 5월 弘化門에 親臨하여 在朝 諸臣 및 서울 5部의 坊民에게 良役變通의 意見을 물었다. 英祖는 民意에 따라 戶錢制를 實施하려 하였으나 反對가 너무 많아 實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여러 臣下의 反對를 무릅쓰고 均役廳(原名은 均役節目廳)을 設置하여 軍布 2疋을 1疋로 減匹한다는 宣布를 하고 이에 따라 각 軍門에 不足한 軍布를 補充해 주는 給代財政의 마련을 講究하게 하였다. 1751년 9월 頒布된 均役의 內容은 軍布減匹에 따른 給代財政으로,
① 軍門을 合치고 軍事費를 節約하는 減革으로 얻는 財源이 약 10萬 兩,
② 宣惠廳과 地方官廳 經費의 一部를 均役廳 財源으로 移劃(移越)하여 얻는 財源 約 7만 냥,
③ 놀고 있는 閑丁을 收括(수괄)하여 每人當 宣武軍官布 1匹씩을 賦課하여 얻는 財源 5만 냥,
④ 漁場 및 漁箭稅·鹽稅·船稅의 收稅로 얻는 10萬 兩,
⑤ 土地 每結當 쌀 2말 혹은 5錢씩을 田稅에 賦課하여 얻는 40萬 兩,
⑥ 地方官의 私用으로 쓰던 隱結과 餘結을 國家收入으로 轉用하여 얻는 5萬 兩 등 모두 80만 냥으로 軍布의 減
匹에 따른 不足財源을 마련하였다.
여기에서 減革은 軍門의 支出을 줄인 것이고 移劃(移越)은 經常財政이 아니므로, 이것을 뺀 60여만 냥을 각 衙門·軍門 및 各 道에 支給하였다. 이렇게 하여 軍布 1疋이 減해졌으나, 軍布의 根本的인 性格에는 變動이 없었으므로 軍役對象者의 逃亡은 如前하였으며, 逃亡者·死亡者의 軍布가 免除되지 않아 이를 다른 良人이 2重·3重으로 負擔함으로써 軍布減匹 政策은 實效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良人들은 繼續되는 무거운 軍役에 不滿을 품고, 哲宗 때는 農民反亂으로 發展하게 되었다.
45)羅州 掛書事件
1755년(英祖 31) 少論의 尹志 등이 일으킨 謀逆 사건. 乙亥獄事라고도 한다. 尹志는 肅宗 때 科擧에 及第하였으나, 1722년(景宗 2) 壬寅誣獄을 일으킨 金一鏡의 獄事에 連坐되어 1724년 羅州로 귀양갔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老論을 除去할 目的으로 아들 光哲과 羅州牧使 李夏徵, 李孝植 等과 謀議하여 同志糾合에 나섰다.
이들은 數次의 變亂으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部類들과, 小論 중에서 벼슬을 지낸 집안들을 吸收하고, 우선 民心動搖를 위하여 1755년 나라를 誹謗하는 글을 羅州客舍에 붙였는데, 이것이 尹志의 所行임이 發覺되어 擧事하기 前에 붙잡혀 서울로 押送되었다.
尹志는 英祖의 直接 審問을 받고 2月에 朴纘新·金潤·趙東鼎·趙東夏 等과 같이 死刑당하였으며, 李匡師·尹得九 等은 귀양갔다. 그 밖에도 尹志의 一黨인 沈鼎衍이 나라를 誹謗하는 글을 써서 逮捕되기도 하였다.
46)抄啓文臣(초계문신)
朝鮮 後期에 奎章閣에 特別히 마련된 敎育 및 硏究課程을 밟던 文臣들. 正祖가 卽位 直後 奎章閣을 設立한 것은 歷代 國王 및 本人의 影幀과 著述, 親筆 等을 保管한다는 점을 標榜하였지만, 政治的으로 勢力 基盤을 强化하고 文化的으로는 理念과 政策의 硏究를 振興하려는 目的을 지니고 있었다.
그 具體的인 裝置로서, 才能있고 젊은 人物들을 議政府에서 選拔해 國王에게 報告[抄啓]한 후 奎章閣에 所屬시켜 學問을 硏磨하게 한 것이다. 이 制度는 朝鮮 前期의 賜暇讀書制의 傳統을 이어받은 것이며, 運營 方式은 《臣講製節目》에 規定되어 있다.
37歲 以下의 堂下官 中에서 選拔하여 本來 職務를 免除하고 硏究에 專念하게 하되, 1個月에 2回의 口述考査[講]와 1回의 筆答考査[製]로 成果를 評價하였다. 正祖가 親히 講論에 參與하거나 直接 試驗을 보여 採點하기도 하였다.
敎育과 硏究의 內容은 勿論 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나 文章 形式이나 空論에 빠지는 것을 警戒하고 經典의 참뜻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40歲가 되면 卒業시켜 익힌 바를 國政에 適用하게 하였다.
1781년(正祖 5)부터 1800년까지 10차에 걸쳐 138人이 選拔되었고 勢道政治下에서 中斷되었다가, 憲宗이 正祖를 모델로 國王權 强化 政策을 推進하던 中 1847년(憲宗 13)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56人을 選拔한 바 있으나 後代로 이어지지 못했다.
正祖 때에는 丁若鏞·洪奭周(홍석주)·金載瓚(김재찬) 등 當代 最高의 學者와 官僚들을 排出하여 그들이 19世紀의 政治와 文化를 主導하였다. 《抄啓文臣題名錄》에 全體 名單이 整理되어 있다.
47)大誥(대고)
≪書經≫의 編名. 周나라 武王이 死亡하자 成王이 어린 나이로 卽位하였는데 周公이 政丞으로서 조카인 成王을 補佐하였음. 이 때 殷을 監視하러 나가 있던 管叔•蔡叔 등이 ‘周公이 나라를 넘본다.’는 流言蜚語를 퍼뜨리고 이를 大義名分으로 삼아 反逆을 일으켰음. 周公이 이들을 討伐하려 하자 여러 臣下들이 反對하였음.
그러나 成王이 이를 물리치고 ‘管叔의 무리를 征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혀 百姓들에게 誥하는’ 內容으로 大道를 敷衍한 글을 지어 天下에 널리 頒布하였음. 그 글의 이름이 大誥로 ≪書經≫ 周書에 들어있는 編名임.
48)辛亥通共
1791년(正祖 15)에 各 市廛의 國役은 存續시키면서 都價商業에 대해 公式的으로 禁亂廛權을 禁止시킨 措置. 1791년이 辛亥年이었으므로 辛亥通共이라 한다. 朝鮮 中期 以後 農村 人口의 都市 流入으로 都市 商業의 樣相이 變化하기 始作하였다.
한편 市廛商人의 都家商業에 打擊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成長해온 零細私商人層의 不斷한 攻勢와 細窮民의 反撥 및 都價商業의 弊端으로 都價商業 全體에 대한 새로운 措置가 취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當時의 左議政인 蔡濟恭은 都價商業의 弊害를 指摘하면서 六矣廛 以外의 모든 市廛에게 禁亂廛 專賣權, 즉 都價權을 許容하지 말며, 設立 30年 未滿의 市廛은 이를 廢止할 것을 建議하였다. 이 建議가 받아들여져 實施하게 되었는데, 이 措置는 朝鮮의 商業 發展史上 한 契機가 되었다.
49)禁亂廛權
朝鮮 後期 六矣廛과 市廛商人이 亂廛을 禁止할 수 있는 權利. 市廛이 가진 本來的 特權이라기보다, 朝鮮 後期 商業發展과 더불어 成長한 非市廛界 私商人層인 亂廛과의 競爭에서 有利한 位置를 確保하려고 市廛商人이 政府와 結託하여 確保한 强力한 獨占商業特權이다.
亂廛은 廛案(肅宗 32년부터 實施한 制度로, 市廛에서 取扱한 物種과 商人의 住所, 姓名을 登錄한 商行爲者의 臺帳)에 登錄되지 않은 자나 販賣를 許可받지 않은 商品을 城안에서 販賣하는 行爲였다.
朝鮮 後期 以來 亂廛의 登場은 곧 崩壞的 御用商人인 市廛商人의 商權을 侵害하였고, 이에 市廛商人은 自身의 商業的 特權을 維持·保護하려고 亂廛 禁止를 政府에 要請하였다. 政府는 財政收入을 늘릴 目的에서 國役을 負擔하는 六矣廛을 비롯한 市廛商人에게 서울 都城 안과 都城 아래 十里 以內의 地域에서 亂廛의 活動을 規制하고, 特定 商品에 대한 專賣權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禁難廛權을 附與하였다.
즉, 禁難廛權은 市廛側으로서는 새로이 成長하는 非市廛系 商人인 亂廛 또는 私商과의 競爭을 排除하고 利潤을 獨占할 수 있고, 그것을 認定한 政府로서는 이를 통해 商業界에 대한 把握度를 높이고 特定商人의 資本을 育成함으로써 稅收入을 增大시키는 方策이었다.
그러나 禁難廛權의 實施는 朝鮮 後期 以來 擴大된 商品貨幣經濟의 發展을 가로막는 障碍物이 되어, 都市 消費者뿐만 아니라 市廛體系 안에 包攝되지 못한 私商層에게 큰 被害를 주었다. 또한 權勢家·宮房 등과 結託한 私商都賈의 勢力이 점차 擴大되면서, 禁難廛權의 革罷에 대한 輿論이 높아졌다.
이에 政府는 18世紀 末境 通共發賣政策을 취하여, 六矣廛을 除外한 一般 市廛이 가진 禁難廛權의 特權을 革罷하고, 六矣廛에서 取扱한 商品을 除外한 모든 商品을 자유로이 販賣하게 되었다. 以後 市廛商人이 禁難廛權을 되찾으려고 여러 가지 勞力을 기울였지만, 政府에 의해 번번이 拒絶되었다.
이처럼 朝鮮 後期 禁難廛權의 出現과 革罷는 朝鮮 社會를 支配한 封建的 商業秩序의 崩壞였고, 農業生産力의 發展과 都市 人口 增加에 따른 商品貨幣經濟 發達의 反映이었다.
50)金忠壯遺事
金德齡 (1567~1596). 本貫 光山. 字 景樹. 諡號 忠壯
51)林忠愍實記
林慶業(1594년~1646년)은 朝鮮 中期의 名將으로 親明排淸派 武將이었다. 字는 英伯, 號는 孤松, 諡號가 忠愍이며, 本貫은 平澤이며, 忠州 出生이다.
52)梁大司馬實記
梁大樸(1543년 ~ 1592년)은 朝鮮 中期의 義兵長으로 字는 士眞, 號는 松巖 竹巖 荷谷 靑溪道人, 諡號는 忠壯, 本貫은 南原이다.
53)稗官小品
稗官은 民間에서 蒐集한 이야기에 創意性과 潤色을 더한 散文文學. 뒤에 小說 發達의 母胎가 되었다. 小品은 에세이
54)洪景來의 亂
19世紀 初 洪景來·禹君則(우군칙) 등의 主導로 平安道에서 일어난 넓은 意味에서의 農民 叛亂. 朝鮮 後期에 社會·經濟的인 力量이 成長함에 따라 여러 社會矛盾에 대한 抵抗의 雰圍氣가 擴散되어 갔다.
敎育 機會가 늘어남에 따라 知識人이 量産되고, 經濟力을 바탕으로 武士로서 立身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政府에서는 文武 科擧의 及第者를 크게 늘렸지만, 從來의 官職體制와 人材 登用 方式으로는 더 以上 그들을 包攝할 수 없어 不滿 勢力은 점점 늘어났다.
1728년(英祖 4)의 李麟佐亂은 主導層이 비록 過激한 小論 中心의 支配層이었지만 中間層 및 下層民들이 積極 參與함으로써 基層 勢力의 抵抗이 激化되는 樣相을 反影하였다.
特히 平安道는 活潑한 商業 活動을 바탕으로 빠른 經濟 發展과 力動的인 社會相을 보이고 있었으나 政治權力으로부터 疏外되어 地域民들의 不滿이 더욱 컸다. 龍岡의 平民 出身으로 儒敎와 風水地理 등을 익힌 知識人이자 勇力을 갖춘 壯士인 洪景來는 蜂起 10년 전부터 各處를 다니며 社會 實情을 把握하고 同僚들을 糾合하였다.
그리하여 비슷한 性格의 知識人이자 商人인 禹君則 , 名望있는 兩班 家門 出身의 知識人 金士用·金昌始, 驛奴 出身의 富豪로서 武科에 及第한 李禧著, 壯士로서 平民 出身의 洪總角과 沒落한 鄕族 出身의 李濟初 等이 最高 指揮部를 構成하였다.
이들의 身分과 生業은 매우 多樣할 뿐 아니라 複雜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勇力을 갖춘 知識人이 總指揮를 하고 抵抗的 知識人이 參謀를 맡았으며, 富豪가 蜂起 資金을 대고 뛰어난 壯士들이 軍士 指揮를 擔當하는 形態가 되었다.
그 밑에 平壤의 楊時緯, 寧邊의 金雲龍을 비롯한 壯士들이 軍士 指導者로 參與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洪景來의 組織活動에 의해 蜂起의 隣近 地域뿐 아니라 멀리 平安道 南部 및 黃海道로부터 모여든 人物들이었으며, 蜂起 當時 30~40명 가량이 積極的으로 抗爭하였다. 博川의 金惠哲, 安州의 羅大坤 등 商人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參與하였다.
商人들은 특히 蜂起 準備 段階에서 資金을 調達하고 軍卒을 모으는 데 絶對的인 成果를 올렸다. 主導 勢力은 또한 鐵山의 鄭敬行, 宣川의 劉文濟 등 淸川江 以北 各處의 權力을 쥐고 있는 名望家들과 行政 實務者들을 包攝하여 內應勢力으로 삼았다.
그들은 蜂起軍을 맞아들이고 자기 地域의 行政을 擔當하였다. 嘉山의 大定江 隣近 多福洞에 秘密 軍事 基地를 세워 內應勢力을 包攝하고 軍事力과 軍費를 마련한 主導層은 1811년(純祖 11) 12월 18일에 蜂起하였다.
洪景來가 平西大元帥로서 本隊를 指揮하여 安州 方面으로 進擊하고, 金士用은 副元帥로서 義州 方面을 攻掠하고, 金昌始와 禹君則이 謀事, 李濟初는 北進軍 先鋒長, 洪總角은 南進軍 先鋒長, 李禧著는 都摠을 맡았다.
結約을 맺어 署名한 人員에서 自意가 아니었던 자들을 除外하면 蜂起 當時 軍事 指揮者와 主要 內應者는 約 60명이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一般 軍卒은 商人들이 雲山의 金鑛에서 일할 鑛夫들을 求한다는 구실로 賃金을 주어 끌어들인 人物들로서, 대개 嘉山·博川 地域의 땅없는 農民이나 賃金勞動者들로 構成되었다.
蜂起軍 本隊는 嘉山·博川·泰川을 별다른 抵抗 없이 즉시 占領하였고, 北進軍도 郭山·定州를 占領한 후 어려움 없이 宣川·鐵山을 거쳐 이듬해 1월 3일에는 龍川을 占領함으로써 義州를 威脅하였다.
占領한 邑에는 該當 地域의 土豪·官屬을 留陣將으로 任命하여 守令을 代身하게 하였고 旣存의 行政 體系와 官屬을 利用하여 軍卒을 徵發하고 軍糧·軍費를 調達하였다. 蜂起軍은 淸川江 以北의 여러 邑에서 氣勢를 올렸으나 要害處인 寧邊에서 內應勢力이 發覺되어 處刑되고 警戒態勢가 整備됨으로써 兵營이 있는 安州에 兵力을 集中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時間을 遲滯하게 되었다.
그 사이 戰列을 整備한 安州의 官軍과 12월 29일 博川 松林에서 激突하였으나 敗하였고 그날 밤 定州城으로 退却해 들어가 籠城을 始作하게 되었다. 無慈悲한 官軍의 掠奪과 殺戮이 행해지는 가운데 蜂起軍 指揮部가 함께 行動하자고 力說하였기 때문에 定州城에는 博川·嘉山의 一般 農民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北進軍 역시 義州의 金見信·許沆(허항)이 이끄는 義州 民兵隊의 反擊을 받은 데다 松林戰鬪에서 勝利한 氣勢를 몰아 進擊하는 官軍에게 郭山 四松坪에서 敗戰함으로써 軍士를 解散하고 主要 人物들은 定州城에 들어갔다.
그 후 定州城의 蜂起軍은 서울에서 派遣한 巡撫營 軍士와 地方에서 動員된 官軍의 聯合 部隊에 맞서 戰鬪를 繼續하면서 오랫동안 城을 지켰으나, 땅굴을 파들어가 城을 破壞한 官軍에 依해 1812년 4월 19일 鎭壓되었다.
이때 2,983명이 逮捕되어 女子와 少年을 除外한 1,917명 全員이 一時에 處刑되었고, 指導者들은 戰死하거나 서울로 押送되어 斬首되었다. 指導者들이 내세운 蜂起의 理念은 世上을 救援할 鄭眞人을 받들어 事業을 벌인다는 讖緯說이 가장 重要한 몫을 하였으며, 土豪 官屬을 향해서는 地域 差別과 政治的 矛盾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强調하기도 하였다.
한편 土地問題 等 社會改革의 具體的인 內容을 提示하지 못하여 展開 過程에서 一般 農民들의 自發的인 參與를 끌어내지 못하고, 단지 穀食 分配 등을 通해 貧民을 불러 모으는데 그친 것이 커다란 限界였다.
그러나 이 叛亂은 當時 社會 發展을 바탕으로 支配體制의 外部에서 成長한 知識人과 壯士들이 主體的으로 蜂起를 主導했다는 点에서 中世 末期의 支配體制를 허물어가는 데 重要한 段階가 되었다. 그 後로도 社會 變革 勢力은 民衆들의 希願을 담아 洪景來가 죽지 않고 섬에서 蜂起를 準備한다고 主張하는 狀況이었다.
55)五家作統法
朝鮮時代 다섯 집을 1統으로 묶은 戶籍의 補助組織. 1485년(成宗16) 韓明澮의 發意에 따라 採擇되어 《經國大典》에 올랐는데, 이에 의하면 漢城府에서는 坊 밑에 5家作統의 組織을 두어 다섯 집을 1統으로 하여 統主를 두고, 坊에 管領을 두었다.
地方은 亦是 다섯 집을 1統으로 하고 5統을 1里로 해서 若干의 里로써 面을 形成하여 面에 勸農官을 두었다. 主로 戶口를 밝히고 犯罪者의 索出, 稅金徵收, 賦役의 動員, 隣保의 自治組織을 꾀하여 만들었으나, 時代에 따라 運營實績이 한결같지 않아 1675년(肅宗 1)에는 '五家作統法 21條'를 作成하여 組織을 强化하였다.
後期에 이르러 戶牌와 더불어 戶籍의 補助手段이 되어 役을 피하여 戶口의 登錄 없이 移徙 ·流離하는 등의 慢性化된 流民과 盜賊의 隱匿을 防止하는 데 利用하였고, 顯宗 때에는 統의 連帶責任을 强化하여 가톨릭敎徒를 摘發하는 데 크게 利用하였다.
56)三朝寶鑑
朝鮮時代에, 趙寅永 등이 王命에 따라 編纂한 冊. 正祖와 純祖, 追尊된 文祖 3代 동안의 治績을 收錄하였다. 憲宗 14년(1848)에 刊行되었다. 14券 4冊.
57)三政의 紊亂
朝鮮 後期 田政·軍政·還穀(糧穀貸與) 등 3大 國家財政을 둘러싼 政治腐敗. 田政의 紊亂은 雜多한 土地稅의 不當한 賦課와 그 徵收를 둘러싼 行政的 橫暴를 말하고, 軍政의 紊亂은 軍役 賦課의 不當性이며, 還穀의 紊亂은 政府貸與穀의 貸與와 還收를 둘러싼 地方官吏들의 弄奸을 말한다. 이와 같은 財政行政의 紊亂은 特히 安東金氏의 勢道政治 때 甚하였으며 洪景來의 亂, 壬戌民亂 등 農民叛亂을 誘發하였다.
58)興宣大院君
朝鮮 後期의 王族·政治家. 이름 李昰應(이하응). 字 時伯. 號 石坡. 諡號 獻懿. 英祖의 五代孫이며 高宗의 아버지이다. 1843년(憲宗 9) 興宣君에 封해지고, 1846년 緩陵遷葬都監의 代尊官이 된 후 宗親府 有司堂上·都摠管 等 閑職을 지내면서 安東金氏의 勢道政治 밑에서 不遇한 生活을 하였다.
王族에 대한 安東金氏의 監視가 심하자 保身策으로 不良輩와 어울려, 破落戶로서 宮道令이라는 卑稱으로까지 불리며 安東金氏의 監視를 피하는 한편, 哲宗이 後嗣가 없이 病弱해지자 趙大妃에 接近하여 둘째 아들 命福(高宗의 兒名)을 後繼者로 삼을 것을 許諾받았다.
1863년(哲宗 14) 哲宗이 죽고 趙大妃에 의해 高宗이 卽位하자 大院君에 봉해지고 어린 高宗의 攝政이 되었다. 大權을 잡자 安東金氏의 主流를 肅淸하고 黨派를 超越하여 人材를 登用하였으며, 腐敗官吏를 摘發하여 罷職시켰다.
47개 書院을 除外한 全國의 모든 書院을 撤廢하고, 國家財政의 浪費와 黨爭의 要因을 없앴으며, 《六典條例》 《大典會通》 등을 刊行하여 法律制度를 確立함으로써 中央集權的인 政治 紀綱을 樹立하였다.
備邊司를 廢止하고 議政府와 三軍府를 두어 行政權과 軍事權을 分離시켰으며, 官服과 庶民들의 衣服制度를 改良하고 奢侈와 浪費를 抑制하는 한편, 稅制를 改革하여 貴族과 常民의 差別 없이 稅金을 徵收했으며, 租稅의 運搬過程에서 造作되는 地方官들의 不正을 뿌리뽑기 위해 社倉을 세움으로써 百姓들의 負擔을 덜어 國民들의 生活이 다소 安定되고 國庫도 充實해졌다.
反面,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願納錢을 發行하여 百姓의 生活苦가 加重되었으며, 1866년(高宗 3) 丙寅洋擾에 이어 1871년 辛未洋擾를 일으키고 天主敎徒에 대한 無慈悲한 迫害를 가하는 등 鎖國政治를 固執함으로써, 國際關係가 惡化되고 外來文明의 吸收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攝政 10년 동안 反對勢力이 形成되어, 며느리인 明成皇后가 反對派를 包攝하고 高宗이 親政을 計劃하게 되자, 1873년 그의 失政에 대한 崔益鉉의 彈劾을 받았다. 이에 高宗이 親政을 宣布하자 雲峴宮으로 隱退하였다.
1882년 壬午軍亂으로 다시 政權을 잡고 亂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明成皇后의 策動으로 淸나라 軍士가 出動하고 톈진[天津]에 連行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年間 幽閉되었다. 1885년 歸國하여 운현궁에 蟄居하면서 再起의 機會를 노리던 中 1887년 淸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結託하여 高宗을 廢位시키고 長男 載冕(재면)을 擁立하여 再執權하려다가 失敗하였다.
1894년 東學農民運動으로 淸日戰爭이 일어나자 日本에 의해 迎立되어 親淸派인 事大黨을 逐出하고 甲午改革이 始作되었으나, 執政이 어렵게 되자 淸나라와 通謀하다가 쫓겨났다. 淸日戰爭에서 勝利한 日本의 勢力이 强盛해졌으나, 3국(獨逸·프랑스·러시아)의 干涉으로 친러파가 登場하여 閔氏 一派가 得勢하자, 1895년 日本의 策略으로 다시 政權을 掌握하였다.
이때 明成皇后가 日本人에게 弑害되어 日本 公使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本國으로 召還된 후 政權을 내놓고 隱退하였다. 1907년(光武 11) 大院王에 追封되었다.
59)當百錢
興宣大院君 政權이 1866년(高宗 3)에 發行한 貨幣. 1866년 10월 右議政 金炳學의 提議에 따라 禁衛營에서 11월 6일 鑄造, 發行하여 1867년 6월 17일 中止될 때까지 鑄造總額은 약 1천 6백만 냥이었다.
當百錢은 模樣과 重量이 當時 通用되던 常平通寶의 5,6배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當百錢 1매의 名目價値는 實質價値의 約 20倍에 達할 程度로 代表的인 惡貨였다. 朝鮮政府가 이러한 惡貨를 發行한 것은 當時 國家財政의 危機와 密接한 關聯을 가진다. 朝鮮 後期 以來 國家의 財政支出이 날로 擴大되는 反面에 財政收入은 오히려 縮小되고 있어서 政府로서는 이러한 危機를 打開해야 했다.
더구나 大院君執權期(1863∼1873)에는 안으로는 失墜된 王室의 權威를 回復하려고 景福宮重建事業을 벌이고, 밖으로는 西歐 列强의 侵掠에 對備하여 軍隊를 增强하고 軍費를 擴張하는 事業을 벌여야 했다. 政府는 이러한 問題를 一時的으로 打開하는 方案으로 惡貨를 發行하여 名目價値와 實質價値의 差額을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政府는 當百錢의 流通을 圓滑하게 하려고 이 惡貨를 모든 工事去來에서 從來의 常平通寶와 함께 通用하게 하고 各 官廳에서는 經費를 支出할 때 當百錢 2/3, 常平通寶 1/3의 比率로 通用하게 하였다.
그 결과 當百錢 發行 初期인 1866년 12월경에 7∼8냥에 지나지 않았던 米穀 1섬의 價格이 1∼2년 사이에 약 6倍로 暴騰하였다. 當百錢 發行으로 말미암아 弊端이 매우 심하게 되자 政府는 1867년 5월 當百錢 鑄造를 中斷한 狀態에서 서울과 서울 밖 각 官廳의 公納과 사사로운 債務報償 등에 모두 當百錢을 쓰되, 1냥(100푼) 이하 去來에는 常平通寶, 1냥 以上 去來에는 當百錢을 使用하도록 하는 등 그 流通領域을 넓혀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努力은 아무 效果를 보지 못했으며, 1868년 5월 崔益鉉의 上疏로 當百錢 通用을 禁止시키고 말았다. 結局 當百錢의 發行은 財政難을 打開하지 못하고 오히려 物價昻騰과 體制危機를 가져왔다.
60)丙寅洋擾
1866년(高宗 3) 大院君의 天主敎徒 虐殺 ·彈壓에 對抗하여 프랑스艦隊가 江華島에 侵犯한 事件. 大院君은 丙寅年(1866) 正初부터 天主敎 禁壓令을 내려, 몇 個月 사이에 프랑스 宣敎師 12명 가운데 9명을 비롯하여 南鍾三·丁義培 等 韓國人 天主敎徒 8,000여 명을 虐殺하였다. 5월 朝鮮을 脫出한 리델 神父는, 中國 톈진[天津]에 駐屯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司令官 로즈 提督에게 韓國에서 일어난 天主敎徒 虐殺事件을 알렸다.
報告를 받은 베이징[北京] 駐在 프랑스 代理公使는 淸國政府에 公翰을 보내어 韓半島로 進擊할 決心을 表明하고, 이후 어떠한 事態가 發生하든 淸國政府는 이에 干涉할 수 없다고 通告하였다. 淸國 總理衙門事務의 公翰을 通해 프랑스 動態를 알게된 大院君은, 天主敎徒에 대한 彈壓을 더욱 强化하는 한편 邊境의 守備를 굳게 하였다.
9월 18일 리델 신부와 韓國人 信徒 3명의 案內로, 로즈 提督이 引率한 프랑스軍艦 3隻은 仁川 앞바다를 거쳐 楊花津을 通過하여, 서울 近郊 西江에까지 이르렀다. 極度로 緊張한 朝廷에서는, 御營中軍 李容熙에게 標下軍 ·訓局馬步軍을 거느려 京仁沿岸을 嚴重 警備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艦隊는 이러한 警備態勢에 不利함을 느꼈는지, 9월 25일 江流 ·沿邊만 測量하고 中國으로 退去하였다. 그러나 10월 로즈 提督은 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艦隊 7隻과 600名의 海兵隊를 이끌고 富平府 勿淄島(물치도: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中 4隻 艦艇과 海兵隊가 江華府 甲串津(갑곶진) 鎭海門 附近의 高地를 占據하였다. 프랑스군은 漢江水路의 封鎖를 宣言하고, 16일 全軍이 江華城을 攻擊하여 交戰 끝에 이를 占領하고, 武器 ·書籍 ·糧食 등을 掠奪하였다.
朝鮮은 李景夏 ·申櫶(신헌:申觀浩) ·李基祖 ·李容熙 ·韓聖根 ·梁憲洙 등 武將들에게, 서울을 爲始하여 楊花津 ·通津 ·文殊山城 ·鼎足山城 등을 守備하도록 하였다. 19일 일단 프랑스측에게 檄文을 보내어, 宣敎師 處斷의 合法性과 프랑스함대의 不法 侵犯을 들어 退去할 것을 通告하였다.
로즈는 回答을 통하여 宣敎師 虐殺을 極口 非難하고, 그 責任者를 嚴罰할 것과, 全權大臣을 派遣하여 自己와 條約의 草案을 作成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文殊山城을 偵察하려다 미리 潛伏, 待機中인 韓聖根의 小部隊에게 27명이 死傷되는 등 처음으로 莫大한 人命損失을 입었다.
이로부터 民家 ·軍營을 가리지 않고 無差別 砲擊을 가했으며, 이러한 蠻行은 黃海道 延安(黃海道에 있는 邑名)에까지 미쳤다. 11월 7일 프랑스 海兵 160명은 大領 올리비에의 指揮로 鼎足山城을 攻掠하려다가 潛伏 ·待機 중인 梁憲洙가 이끈 500명 射手들에게 일제히 射擊을 받아 死亡 6, 負傷 30여 명의 損失을 입고 간신히 甲串으로 敗走하였다.
鼎足山城에서의 慘敗는 프랑스군의 士氣를 크게 沮喪시켜, 로즈 提督도 朝鮮 侵攻의 無謀함을 깨닫고 撤收를 決定하였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個月 동안 占據한 江華城을 撤去하면서, 長寧殿 등 모든 官衙에 불을 지르고 앞서 掠奪한 銀金塊(當時 貨幣로 換算하여 3만 8000달러)와 大量의 書籍 ·武器 ·寶物 등을 가지고 中國으로 떠났다.
이로써 世界情勢에 어두운 大院君은 그 氣勢를 돋구어, 全國에 斥和碑를 세우는 등 鎖國攘夷 政策을 더욱 굳히고, 天主敎 迫害에도 拍車를 가하였다. 그러나 歐美列强은 이를 契機로 朝鮮을 淸國의 從屬國家가 아닌 獨立한 主權國家로 認識하여, 從來의 韓 ·淸 關係를 再檢討하였다. 프랑스군이 奪取한 많은 書籍 ·資料 등은, 뒷날 유럽사람들이 韓國 ·東洋을 硏究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61)辛未洋擾
1871년(高宗 8) 美國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號 事件을 빌미로 朝鮮을 開港시키려고 武力 侵掠한 事件. 當時 對아시아膨脹主義政策을 推進한 美國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事件을 契機로 두 차례 探聞航行을 實施하면서 제너럴셔먼호 事件에 대한 膺懲과 朝鮮과의 通商關係 樹立을 目的으로 1871년 朝鮮을 侵略하였다.
駐淸全權公使 F.F.로우가 全權을 委任받고, 朝鮮遠征을 命令받은 아시아艦隊 司令官 J.로저스는 軍艦 5隻, 艦載大砲 85門, 海軍과 陸戰隊員 總 1,230名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港口를 出發하였다.
19일 南陽灣에 도착한 美軍은 뱃길을 探査하면서 北上, 勿淄島(물치도)를 自國 艦隊의 碇泊地로 정하였다. 美軍은 朝鮮에 探測 承諾을 一方的으로 通告한 뒤 서울의 關門인 江華島 海峽 水路의 測量과 偵察을 目的으로 두 隻의 軍艦을 派遣하였다.
當時 밖으로 强力한 鎖國政策을 實施하던 興宣大院君은 美軍의 不法 領海侵犯을 警告하고 卽時 撤收를 要求하였다. 美軍이 警告에도 不拘하고 廣城鎭으로 接近해오자 朝鮮軍은 警告用 砲擊을 가하였고 이에 美軍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美軍은 朝鮮軍의 警告用 射擊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朝鮮政府에 謝過와 損害賠償을 要求하였다. 朝鮮政府가 이를 拒否하자 美軍은 6월 10일 軍艦 2隻을 앞세우고 陸上 戰鬪隊員 644명을 江華島의 草芝鎭에 上陸시켜 武力으로 占領하고, 이어 德津鎭 ·廣城鎭을 차례로 占領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廣城鎭戰鬪에서 美軍 亦是 被害가 많아 이튿날 勿淄島로 撤收하였다.
美軍은 이곳에서 朝鮮政府를 相對로 威脅的인 外交的 手段으로 朝鮮을 開港시키려 하였으나, 興宣大院君의 强硬한 鎖國政策과 朝鮮 民衆의 抵抗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結局 美國의 아시아艦隊는 朝鮮에서 아무런 成果없이 日本으로 撤收하였다. 이 事件을 契機로 興宣大院君은 서울의 鐘路와 全國 各地에 斥和碑를 세워 鎖國政策을 더욱 强化하였다.
아직 封建的 體制에 머물러 있던 朝鮮이 强力한 軍事力을 앞세운 프랑스와 美國의 두 차례에 걸친 武力侵略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西歐 列强의 侵掠에 맞서 民族的 危機를 克復하려는 朝鮮 民衆의 反侵掠 意志 때문이었다.
62)明成皇后
朝鮮 高宗의 皇后. 本貫은 驪興, 姓은 閔氏로, 1851년(哲宗 2) 京畿道 驪州에서 태어났다. 贈 領議政 致祿의 딸이다. 9세 때 孤兒가 되어 本家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興宣大院君의 夫人 府大夫人 閔氏의 推薦으로 王妃에 揀擇·冊封되었다.
그러나 宮人 李氏에게서 完和君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하는 興宣大院君과 對立, 興宣大院君의 反對派를 糾合하면서 閔氏 戚族을 政府 要職에 앉히고 勢力 基盤을 착실히 다졌다.
1873년 日本에서 征韓論이 擡頭되면서 內外政勢가 緊迫해지고, 景福宮 重建으로 民生苦가 加重되는 等 興宣大院君의 失政이 繼續되자, 그를 彈劾하기 위해 儒林의 巨頭 崔益鉉을 同副承旨로 拔擢하였다.
이어 興宣大院君派의 反對 上疏와 主張을 排斥하고, 高宗에게 親政을 宣布하게 함으로써 政權의 基盤을 確固하게 다진 뒤, 大院君派를 肅淸하고 鎖國政策을 廢하여 日本과 修交하였다. 1882년 壬午軍亂으로 身邊이 危殆롭게 되자 宮闕을 脫出, 花開洞 尹泰駿의 집을 거쳐 忠州·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避身 生活을 하였다.
이 渦中에 興宣大院君이 中殿의 國喪을 宣布하자, 尹泰駿을 高宗에게 密派하여 自身의 健在를 알리고 淸나라에 支援을 要請하게 하였다. 청나라 軍隊의 出動으로 軍亂이 鎭壓된 뒤 다시 興宣大院君을 몰아내고 政權을 다시 잡았다.
1884년 金玉均·朴泳孝 등 開化派가 甲申政變을 일으켜 失脚하자, 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淸나라가 介入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開化黨 政權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日本 勢力의 浸透가 强化되면서 金弘集 등 親日 內閣이 得勢하고, 1894년 7월 日本 勢力을 등에 업은 興宣大院君이 再登場하면서 甲午改革이 始作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接近하여 日本 勢力을 追放하려고 하였다.
이에 日本 政府의 使嗾를 받은 駐韓 日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10월 8일 日本 浪人을 宮中에 潛入시켜 景福宮 玉壺樓에서 그녀를 亂刺弑害하고, 屍身은 宮闕 밖으로 運搬 燒却하였다. 이 事件이 바로 乙未事變이다.
하지만 最近 弑害場所가 玉壺樓가 아니라 景福宮 長安堂과 坤寧閤(곤령합) 사이에 있는 마당이라는 主張이 提起되기도 했다. 그 뒤 廢位되어 庶人으로 降等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復號되었고, 1897년(光武 1) 明成이라는 諡號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國葬으로 淸凉里 밖 洪陵에 묻혔다.
그러나 1980年代 以後 明成皇后에 대해 再評價作業이 일어나면서, 乙未事變이 미우라 고로의 單獨犯行, 또는 그의 後援을 받은 民間人들이나 日本 浪人들의 犯行, 興宣大院君과 明成皇后의 權力鬪爭의 産物이라는 說이 支配的이었는데, 차츰 이러한 通說이 바뀌기 始作한 것이다.
63)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1875년(고종 12) 9월 日本 軍艦 운요號의 不法侵入으로 發生한 朝鮮軍과 日本軍의 衝突事件. 江華島事件이라고도 한다. 朝鮮側의 對日門戶開放에 대한 微溫的인 態度에, 日本은 列强勢力에 앞서 朝鮮 進出을 試圖한 計劃이 遲延되었다.
그 打開策으로 朝鮮當局을 武力으로 屈服시키고자 軍艦 30隻을 朝鮮沿海에 派遣하기로 決定하였다. 이와 같은 武力威脅政策의 一環으로 운요號를 朝鮮沿海에 派遣, 8월 21일 江華島 東南쪽 蘭芝島 附近에 碇泊하고 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軍人을 分乘시켜 沿岸을 偵探하면서 江華島의 草芝鎭 砲隊까지 接近하였다.
이에 草芝鎭 砲隊에서는 砲擊을 가하고 운요號에서도 猛暴擊으로 膺受하여 砲의 性能이나 砲術이 그들에 비해 떨어지던 草芝鎭을 破壞하고, 永宗鎭에도 猛暴擊을 加하고 그들의 陸戰隊까지 上陸시켜 殺人·放火·掠奪을 恣行하였다.
그 결과 朝鮮軍은 戰死者 35명, 捕虜 16명을 내고 僉使(첨사) 李敏德 以下 400~500名에 이르는 守備兵은 모두 敗退하였고 大砲 35門, 火繩銃 130餘梃과 그 밖에도 無數한 軍器 등을 掠奪당하였으나 日本側은 2명의 輕傷者를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日本은 이 砲擊戰의 責任을 朝鮮側에 씌워 全權大使를 派遣해서 詰問함과 아울러 武力을 背景으로 開港을 强要하였다. 이에 따라 兩國 間에는 江華島條約이 締結되어 朝鮮의 開國이 이루어졌다.
64)江華島條約
1876년(高宗 13) 朝鮮과 日本間에 締結된 修好條約. 韓日修好條約 ·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이 條約이 締結됨에 따라 朝鮮과 日本 사이에 從來의 傳統的이고 封建的인 通文關係가 破壞되고, 國際法的인 土臺 위에서 外交關係가 成立되었다.
이 條約은 日本의 强壓 아래서 맺어진 最初의 不平等條約이라는 데 特徵이 있다. 大院君의 鎖國政策에 맞서 開化論者들은 富國强兵을 위해서 開化思想을 導入하고 門戶를 開放하여 對外通商을 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이즈음 朝鮮 朝廷 內에서의 權力鬪爭으로 大院君이 下野하게 되자 이러한 國內의 政況을 探聞한 日本은 1875년 通交交涉을 위해 朝鮮에 使臣을 派遣해왔으나 交涉은 成立되지 않았다. 이에 日本 政府는 測量을 憑藉하여 軍艦 운요호[雲揚號]를 朝鮮 近海에 派遣하여 釜山에서 永興灣에 이르는 東海岸 一帶의 海路測量과 아울러 艦砲示威를 벌였다.
또한 운요호를 江華島 앞바다에 再次 出動시켜 草芝鎭의 守備兵들이 發砲하는 事態를 誘發하게 하였다. 1876년 征韓論이 擡頭되던 日本 政府에서는 全權大臣 一行을 朝鮮에 派遣하여 운요호의 砲擊에 대하여 詰問함과 아울러 開港을 强要하였다.
2月에는 日本 使臣 一行이 軍艦 2隻, 運送船 3隻에 約 400名의 兵力을 거느리고 江華島 甲串에 上陸하여 協商을 强要해왔다. 이에 朝鮮 政府는 國際關係의 大勢에 따라 修好通商의 關係를 맺기로 決定하고 申櫶(신헌)을 江華島에 派遣하여 日本 使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協商하게 한 結果, 修好條約이 締結되었다.
日本의 武力示威 아래 締結된 條約은 모두 12個條로 되어 있는데, 그 內容에는 日本의 政治的 ·經濟的 勢力을 朝鮮에 浸透시키려는 意圖가 反映되어 있다. 第1條에서 朝鮮은 自主國으로서 日本과 平等한 權利를 가진다고 規定되어 있으나, 이의 目的은 朝鮮에서 淸나라의 宗主權을 排擊함으로써 淸나라의 干涉없이 朝鮮에 대한 侵掠을 恣行할 수 있는 길을 摸索하는 데 있다.
제2조에서 條約이 締結된 후 朝鮮 政府는 20個月 以內에 釜山과 그 밖의 2개 港口를 開港할 것을 規定하고, 2개 港口의 選定은 日本의 任意에 맡길 것을 主張하였다. 그 結果 東海岸에는 元山이, 西海岸에는 仁川이 各各 選定되었으나, 다만 仁川港으로부터의 米穀 輸出만은 禁止되었다.
또한 第4條와 第5條에서는 開港場 內에 租界를 設定하여 그곳에서의 日本 商人의 自由로운 貿易과 家屋의 造營 等 居住의 便宜를 提供할 것을 規定하였다. 第7條에서는 日本이 朝鮮의 沿海 ·島嶼 ·岩礁 등을 자유로이 測量하고 海圖를 作成할 수 있도록 規定하였다.
第8條와 第10條에는 開港場에서의 日本人 犯罪者들에 대해 現地에 派遣된 日本領事가 裁判한다는 治外法權의 條項이 明示되었다. 이 條約에 規定되어 있는 바와 같이 日本은 開港場을 通해서 日本人을 朝鮮에 浸透시키고, 여기에 租借地를 確保하여 日本勢力의 前哨地로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治外法權을 設定하여 日本人 商人들의 不法的이고 放恣스런 行動에 대해서 朝鮮의 司法權이 미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不平等한 條約으로 하여 朝鮮은 西洋 여러 나라와 通商을 始作하게 되고, 門戶를 開放함으로써 西洋의 新文明을 輸入하는 反面에 列强의 侵掠을 받게 되는 始發點이 되었다.
65)紳士遊覽團
朝鮮 後期 1881년(高宗 18) 日本에 派遣한 視察團. 1876년에 韓日修好條約이 締結되자 金綺秀를 修信使로 日本에 派遣하였고, 그 뒤 1880년에는 金宏集(金弘集) 등 修信使 一行이 다시 日本에 派遣되었다. 그들은 日本에서 西洋 近代의 技術的 成果를 살피고 돌아와서 日本의 文物制度를 배워야 한다고 强力히 主張하였다.
이에 政府에서는 朴定陽·嚴世永·姜文馨·趙秉稷·閔鍾默·趙準永·沈相學·魚允中·洪英植·李元會·金鏞元·李헌永 등을 定式 委員으로 하고 그 밑에 각각 이들을 補助하는 隨員과 通事·從人 각 1명씩을 帶同하게 하여 平均 5명으로 1班을 編成한 紳士遊覽團을 派遣하게 되었다.
이들 紳士遊覽團은 약 4個月 동안 日本에 滯在하면서 도쿄[東京]·오사카[大阪], 그리고 때로는 이와 隣接한 地方에까지 나가 文敎·內務·農商·外務·大藏·軍府 等 各 省의 施設과 稅關·造幣 등의 각 分野 및 製絲·蠶業 等에 이르기까지 視察하고 歸國하였다.
66)壬午軍亂
壬午軍亂은 1882년(高宗 19年; 壬午年) 陰曆 8月에 江華島條約 締結 以後 日本의 後援으로 組織한 新式軍隊인 別技軍과 差別待遇, 俸給米 延滯와 不良米 支給에 대한 不滿 및 憤怒로 옛 訓練都監 所屬의 舊式 軍人들이 일으킨 兵亂 및 抗爭이다. 처음에는 偶發的이었으나, 나중에는 興宣大院君의 指示를 받아 閔氏 政權에 對抗하면서 日本勢力에 대한 排斥運動으로 擴大되었다.
1876년 江華島條約의 締結로 興宣大院君의 鎖國政策은 漸次 崩壞되고 대신 國內의 政勢는 開國, 開化로 向하게 되었다. 開國 問題를 둘러싸고 政府는 大院君을 中心으로 하는 守舊派와 國王과 明成皇后 側의 戚族을 中心으로 하는 開化派로 나뉘어 對立하였다.
閔氏 政權은 門戶 開放 政策에 따라 日本을 비롯한 西洋 列强과의 通商關係를 連이어 樹立하였는데, 이 開國政策은 守舊派의 反撥은 勿論 保守的인 立場에 있는 大多數 百姓들의 反撥을 샀으며, 이에 따라 社會的 混亂과 不安은 增幅되었다. 興宣大院君은 이러한 政勢를 利用하여 李載先 逆謀事件을 企圖, 政權 奪取를 노렸으나 失敗하였다.
이런 雰圍氣 속에서 開化政策에 따른 制度의 改革으로 政府機構에는 開化派 官僚가 大擧 起用되었으며, 1881年 日本의 後援으로 新式軍隊 別技軍을 創設하였다. 1882年에는 從來의 訓練都監·龍虎·禁衛·御影·摠戎(총융)의 5營을 武衛營·壯禦營(장어영)의 2營으로 改編하는데, 여기에 所屬하게 된 옛 營門의 軍兵들은 自己들보다 越等히 좋은 待遇를 받게 된 新設 別技軍을 倭別技(왜별기)라 하여 憎惡하였다.
옛 軍營 所屬 軍人들에게는 軍糧이 正常的으로 支給되던 興宣大院君 執政 時代와는 달리 13個月 동안 軍料가 未支給되어 不滿은 高調되었고 不穩한 氣運이 감돌았다. 軍兵은 閔氏 政權 以後 頻繁하게 일어나는 軍料 未拂 事態의 原因이 宮中 費用의 濫用과 戚臣들의 貪汚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特히 軍料 管理의 責任者인 宣惠廳 堂上·兵曹判書 閔謙鎬와 京畿道 觀察使 金輔鉉(김보현)에 대해 깊은 怨恨을 가지고 있었다
7월 19일(陰曆 6월 5일), 全羅道 漕米(전라도 조미)가 到着되자 宣惠廳(선혜청) 都捧所(도봉소)에서는 우선 武衛營(무위영) 所屬의 옛 訓練都監 軍兵들에게 1個月分의 給料를 支拂하게 되었다. 그러나 宣惠廳 庫直의 弄奸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斗量도 折半 程度밖에 되지 않았고, 이에 激忿한 武衛營 軍兵들은 軍料의 受領을 拒否하고 是非를 따지게 되었다.
閔謙鎬의 下人인 軍料 支給 擔當者가 不遜한 言動까지 하자 軍兵들은 激怒하였다. 옛 訓練都監 砲手 金春永·柳卜萬·鄭義吉·姜命俊 等을 先頭로 한 軍卒들은 宣惠廳 庫直과 武衛營 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都捧所를 瞬息間에 阿修羅場으로 만들었다. 이를 都捧所事件이라 한다.
한편, 이 消息을 들은 閔謙鎬가 主動者 逮捕令을 내렸고, 곧 金春永·柳卜萬 等 4, 5名의 軍人이 捕盜廳에 잡혀갔다. 直後 그들이 酷毒한 拷問을 當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中 2名이 곧 死刑되리라는 所聞이 퍼지게 된다. 이 所聞을 接한 軍兵들은 金長孫·柳春萬(柳卜萬의 동생)을 筆頭로 投獄된 軍兵의 救命運動을 展開하기 위해 通文을 作成하였다.
7월 22일(陰曆 6월 8일), 이최응이 別破陣을 動員하여 暴動을 鎭壓할 것을 國王에게 建議했다는 所聞이 퍼졌다. 事件에 加擔한 軍兵들은 더욱 興奮하였으나, 일단 7月 23日(陰曆 6월 9일), 金長孫과 柳春萬을 선두로 한 武衛營 軍兵들이 武衛隊長 李景夏의 집에 가서 閔謙鎬의 不法과 抑鬱한 事情을 呼訴하였다.
그러나 李景夏는 軍料 管轄의 權利가 없다는 것을 내세워 便紙 한 통을 써주고 閔謙鎬에게 直接 呼訴하도록 하였다. 이 時點에서 李景夏는 暴動을 일으킨 軍人들의 直屬 上官이었으나, 自身이 處理해야 할 問題를 回避해 버린 셈이다.
閔謙鎬의 집 앞에서 軍兵들은 問題를 일으켰던 都捧所 庫直을 發見하여 閔謙鎬의 집안으로 亂入하게 되었으나 閔謙鎬와 庫直은 찾지 못한 채 家財道具와 家屋을 모두 破壞했고, 더 以上 돌이킬 수 없다고 判斷한 軍兵들은 本格的으로 暴動을 일으켰다.
閔氏 政權의 報復을 豫想한 金長孫과 柳春萬 등은 雲峴宮으로 달려갔다. 興宣大院君을 만난 그들은 事情을 說明하고 自身들을 이끌어 달라고 要請하였다. 이는 시아버지(興宣大院君)와 며느리(明成皇后)의 葛藤이 一介 軍兵까지도 그 事情을 다 알정도로 심했음을 證明하기도 한 것이었다.
興宣大院君은 이러한 軍民의 騷擾 事態에 대해 武衛營 軍卒 張順吉 等에게 命하여 表面上으로는 曉諭宣撫(효유선무)하는 態度를 取하여 밀린 軍料의 支給을 約束하며 解散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金長孫과 柳春萬 등을 불러 密啓(밀계)를 指令하고 心腹인 許煜(허욱)을 軍服으로 變裝시켜 軍民들을 指揮하게 하였다.
大院君과 連結된 軍民들은 좀 더 大膽하고 組織的인 行動을 開始하여 一部는 東別營의 武器庫를 부수고 武器를 掠奪하여 捕盜廳에 亂入한 후 金春永·柳卜萬 등을 救出하고 이어서 義禁府를 襲擊하여 斥邪論者인 白樂寬 等 罪囚들을 釋放시켰다.
다른 一隊는 京畿監營을 襲擊하여 武器를 掠奪하고 나머지 一隊는 江華留守 閔台鎬를 비롯한 戚臣과 開化派 官僚의 집을 襲擊 破壞하였다. 그날 저녁에는 日本 公使館을 包圍 襲擊하였다. 日本 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 日本 公館員 全員은 仁川으로 逃避하였고, 公使館 建物은 불타버렸다.
또 한편의 軍民들은 別技軍 兵營 下都監을 襲擊하여 日本人 敎官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工兵 少尉를 殺害하고 日本 巡査 등 日本人 13名을 殺害하는 等 日本 公使館 襲擊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날의 暴動은 끝났다.
7월 24일(陰曆 6月 10日)은 興宣大院君의 密命에 따라 敦寧府領事 興寅君 李最應과 護軍 閔昌植을 殺害하고, 昌德宮 敦化門에 肉薄한 後 곧 明成皇后를 除去하기 위해 闕內로 亂入하였다. 亂軍들은 闕內 到處에 흩어져 明成皇后와 戚臣들을 搜索하던 中 宣惠廳 堂上 閔謙鎬와 京畿道 觀察使 金輔鉉을 發見하여 殺害하고 繼續 明成皇后의 行方을 찾았다.
이러한 危急한 狀況에서 宮女의 옷으로 變裝한 明成皇后는 武藝別監 洪啓薰(홍계훈)의 도움으로 忠州 長湖院의 忠州牧使 閔應植의 집으로 避身하였다. 한편 軍民들의 亂動을 朝廷에서는 閔謙鎬의 報告에 依해 單純한 都捧所의 軍料紛爭으로 생각했으나 戚臣들의 집들이 襲擊·破壞되고 軍民이 大擧 暴動에 參加하게 되자 武衛隊長 李景夏를 東別營에 보내어 賑撫시켰으나 失敗하였다.
뒤늦게 朝廷은 事態의 責任者를 問責하여 宣惠廳 堂上 閔謙鎬, 都捧所 堂上 沈舜澤, 武衛隊長 李景夏, 壯禦隊長 申正熙 等을 罷職시키고 武衛隊長 後任으로 大院君의 長子 李載冕(이재면)을 任命하였다(그러나 이미 閔謙鎬는 殺害된 뒤였다).
일단 이렇게 하여 民心을 收拾하는 한편, 上護軍 趙寧夏의 提案에 따라 別技軍 領兵官 尹雄烈(尹致昊의 아버지)을 通해 日本公使 앞으로 書翰을 보내어 軍變事實을 通告하고 自慰策을 講究하도록 要求하였으나 이미 公館員 全員은 仁川으로 脫走한 뒤였다.
亂民들이 闕內로 進入을 하게 되자 國王은 事態의 收拾을 위해 大院君의 入侍를 命하였고 이에 따라 大院君은 府大夫人 閔氏와 長子 李載冕을 帶同하고 入闕하였는데 이때 許煜(허욱)의 指揮下에 舊 訓局兵 200명이 大院君을 護衛하였다.
大院君은 事態收拾의 責任을 맡고, 王命으로 事實上의 政權을 掌握하게 된다. 곧이어 國王의 自責敎旨가 頒布되어 軍變의 正當性이 合理化되었고, 大院君은 이를 契機로 軍人들을 撫摩하여 事態收拾에 나섰다.
우선 軍兵의 要請에 따라 武衛營·壯禦營과 別技軍을 革罷하고 5營을 復舊시키도록 하였으며, 統理機務衙門(통리기무아문)을 革罷하고 三軍府를 設置하였다. 또한 軍兵들에 대해 軍料의 支給을 公約하고 戚族의 除去를 爲한 人事措置를 斷行하여 李載冕으로 하여금 訓練隊長, 戶曹判書, 宣惠廳 堂上을 兼任하게 하여 軍事力과 財務 權力을 掌握하게 하고 中央의 各 部署와 地方의 觀察使 等 守令들에 새로운 人物을 登用하였다.
興宣大院君이 起用한 人物은 大蓋(대개) 南人 系列의 老政治家들이며 人材의 補充을 위해 投獄되었거나 定配당한 罪囚들을 釋放시키는 措置를 斷行하였다. 한편 一部 軍人들이 明成皇后의 處斷을 主張하고 解散을 拒否하자 大院君은 明成皇后의 失踪을 死亡으로 斷定하고 明成皇后 喪을 公布하였다.
淸과 日本의 介入
한편 明成皇后의 國喪을 强制 進行함에 따라 興宣大院君의 政治的 實權은 短縮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淸나라는 宗主國으로서 屬邦(속방)을 保護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 機會에 日本에 빼앗겼던 朝鮮에 대한 優越한 旣得權을 回復하려 하였다.
마침 壬午軍亂 當日 地方으로 逃亡갔던 明成皇后와 그 一族이 開化派 官僚 金允植, 魚允中을 淸나라로 보내 淸나라에게 援助를 要請한 것(陰曆 6월 19일)을 핑계로, 陰曆 6월 27일에 馬建忠이 이끄는 陸軍 4,500명이 陸路로, 8월 20일(陰曆 7월 7일) 淸나라 海軍 提督 吳長慶이 丁汝昌, 金允植을 帶同하여 南陽灣(남양만)으로 上陸해 朝鮮에 進駐하였다.
吳長慶은 8월 25일(陰曆 7월 12일) 興宣大院君을 兵營으로 招請하였다가 軍亂 煽動의 背後者라 하여 톈진(天津)으로 拉致한다. 大院君 拉致 後 다시 閔氏 政權이 復活하였고, 淸軍은 8월 29일(陰曆 7월 16일) 王十里와 梨泰院 一帶를 攻擊하여 170餘 名을 逮捕하고 11名을 死刑시키는 等 軍亂 鎭壓에 나섰다.
한편 日本에 倒着한 하나부사(花房義質) 公使가 軍變의 事實을 日本 政府에 報告하자 日本은 곧 軍艦 4隻과 步兵 1個 大隊를 朝鮮에 派遣하였으나 淸의 迅速한 軍事行動과 兵力 差異로 因해 對抗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日本 公使가 이끄는 日本軍 大隊 兵力이 서울로 進駐한 것은 陰曆 6월 29일이었다. 大院君이 淸나라에 의해 除去되었기 때문에 朝鮮側에 대한 强硬한 態度로 責任을 물어 8월 30일 (陰曆 7월 17일) 濟物浦條約을 締結하게 되었다.
結果 및 評價
軍變으로 始作한 이 事件이 對外的으로는 淸나라와 日本의 朝鮮에 대한 介入을 擴大시키는 國際問題로 변하였고 對內的으로는 甲申政變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外勢를 빌려 軍亂을 鎭壓한 閔氏 政權은 結局 自主性을 잃고, 政權 維持를 위해 淸나라에 依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댓가로 淸나라의 숱한 干涉을 받게 되었다.
또 日本과는 7월 17일 壬午軍亂의 뒤처리로 損害賠償金을 主 內容으로 하는 濟物浦條約 및 朝日修好條規續約을 締結함으로써 自主權을 더욱 잃게 되었다. 청나라는 以後 朝鮮의 內政에 積極的으로 干涉한다. 곧, 袁世凱(원세개)가 指揮하는 軍隊를 常駐시켜 朝鮮 軍隊를 訓練시키고, 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顧問으로 派遣하여 朝鮮의 內政과 外交에 깊이 干與하였다.
또, 朝鮮에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締結하여 청나라 商人의 通商 特權을 規定하고, 經濟的 浸透에 積極的으로 나섰다. 日本이 後援한 甲申政變은 이러한 狀況을 打開하기 위한 日本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甲申政變은 失敗로 돌아갔고, 日本은 淸日戰爭 때까지 淸나라의 獨走를 지켜봐야 했다.
새로운 解釋
2006년 7월 1일, 明成皇后의 避亂 行蹟이 적힌 壬午六月日記가 發見되었다. 避亂 當時 明成皇后를 護從한 누군가가 作成한 것으로 보이는 이 日記에는 1882년 陰曆 6월 13일부터 1882년 陰曆 8월 1일까지 51일간의 記錄이 담겨있는데, 明成皇后의 宿所와 日程, 健康 狀態 등이 詳細히 記錄되어 있다.
이 中 淸軍이 서울에 入城한 陰曆 7월 16일의 記錄에는 '明成皇后가 사람을 시켜 京城에 붙은 榜文을 베껴오도록 했다'는 內容이 들어있는데, 이는 明成皇后가 淸에 連絡을 취해 介入을 誘導했다는 旣存의 學說에 正面으로 對峙되는 것이다. 現在 이 資料는 大田廣域市 한밭圖書館 大田廣域市鄕土史料館이 所藏하고 있으며, 2008년 12월 2일 恩津 宋氏 霽月堂家 寄託遺物 特別展示會에서 처음으로 民間에 公開되었다.
67)甲申政變
1884년(高宗 21) 金玉均을 비롯한 急進開化派가 開化思想을 바탕으로 朝鮮의 自主獨立과 近代化를 目標로 일으킨 政變. 朝鮮 後期 以來로 朝鮮時代의 社會는 안으로는 封建體制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資本主義의 近代社會로 나아가려는 政治·經濟·社會的 變化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武力을 앞세워 通商을 要求하는 歐美 資本主義 列强의 侵掠 威脅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一部 中人出身 知識人과 兩班官僚들 사이에서는 朝鮮社會의 社會經濟的 矛盾을 깨닫고 世界歷史의 發展方向에 따라서 社會를 이끌려는 開化思想이 形成되었다. 이 思想에 따라 內外政治를 改革하려고 結集된 政治勢力이 開化派이다.
金玉均·朴泳孝·徐光範·洪英植 등의 兩班 出身 靑年知識人은, 19世紀 中葉 朴珪壽·吳慶錫. 劉鴻基(本名 劉大致) 등의 思想과 그들로부터 받은 西歐社會에 관한 文明書籍을 통해서 實學思想의 肯定的 要素와 世界情勢의 흐름 및 資本主義에 관한 새로운 知識을 習得함으로써 朝鮮社會의 改革에 눈을 뜨기 始作하였다.
開港 以後 開化派들은 閔氏政權의 開化政策에 參與하면서 漸次 金玉均을 中心으로 結集하여 開化思想을 現實政治에서 實現하려는 하나의 政治勢力 즉, 開化派를 形成하였다. 그런데 開化派 안에서는 改革의 窮極的 方向을 같이 하면서도 實現方法에서 立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金弘集·魚允中·金允植 등의 穩健開化派는 富國强兵을 위해 여러 改革政策을 실현하되, 閔氏政權과 妥協 아래 淸과의 事大外交를 從前대로 繼續 維持하면서 漸進的인 方法으로 遂行하자는 立場이었다.
反面에 急進開化派는 淸에 대한 事大關係를 淸算하는 것을 優先課題로 삼고 閔氏政權도 妥協의 對象이 아닌 打倒의 對象으로 삼았다. 開化派는 開港 후 展開되는 나라 안팎의 情勢變化에 關心을 가지면서 忠義契를 통하여 同志를 糾合하는 한편, 改革運動의 手段으로서 當時 西歐의 近代文物에 關心을 表明하던 高宗에게 積極 接近하였다.
특히 1880년 이래 朝鮮政府의 海外視察政策, 즉 日本修信使와 紳士遊覽團의 派遣, 淸으로의 營繕司 派遣 등에 朴泳孝 ·金玉均 등 開化派가 積極 參與함으로써 世界의 政勢흐름과 새로운 文明을 直接 確認하고 自覺을 넓혀 나갔다.
또한 開化派는 兩班의 子弟뿐만 아니라 廣範한 層의 靑年을 募集하여 日本의 軍事士官學校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등에 留學하게 하여 近代的인 軍事學과 學問 ·思想 등을 배우게 하였다. 朴泳孝는 1883년 8월 外務衙門아래 博文局을 設置하여 近代的 新聞인 《漢城旬報》를 發行하였다.
이 新聞을 통해서 開化派는 나라 안팎의 政勢에 관한 消息은 물론, 歐美의 立憲君主制와 三權分立의 優越性 등 그들이 指向하는 改革의 內容을 宣傳하였다. 그런데 閔氏政權이 部分的인 開化政策을 實現하고 朝鮮에 대한 日本과 淸의 侵奪이 强化되면서, 開化派의 平和的 改革努力은 壁에 부딪혔다.
1882년 壬午軍亂은 守舊的인 閔氏政權과 急進開化派의 關係를 政治的으로 急速히 冷却시켰다. 閔氏政權의 要請으로 淸나라는 朝鮮에 出兵하여 蜂起를 鎭壓한 뒤 軍隊를 駐屯시키며 朝鮮侵掠을 劃策했고, 閔氏政權은 淸에 依支하여 政權維持를 꾀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政治勢力으로 成長한 開化派는 큰 威脅的 存在였다.
이 때문에 閔氏政權은 開化派에 대한 政治的 壓迫을 가하였다. 이런 政勢 아래 閔氏政權에 參與하면서 平和的으로 一大改革을 꾀하려던 開化派의 政治的 立地는 크게 縮小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봄 安南問題를 두고 形成된 淸과 프랑스의 對立關係는, 開化派에게 다시 한번 自身들의 뜻을 펼 수 있는 有利한 政勢를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淸과 프랑스 사이에 戰爭이 일어나자 淸은 朝鮮에 駐屯하고 있던 淸軍 3,000餘 名 가운데 折半을 撤收시켰다. 急進開化派는 이러한 政勢變化와 日本의 接近에 다시 勇氣를 얻었다.
1884년 9월 17일, 朴泳孝의 집에서 金玉均은 政變을 일으켜 權力을 잡자고 主張하였다. 그들은 이제 閔氏政權의 親淸守舊政策에 對抗하여, 從來의 平和的 方法에 依한 改革에서 閔氏政權을 打倒하고 一時에 權力을 掌握하여 改革을 實現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洪英植이 總辦(총판)으로 있던 郵政局 開設 披露宴을 利用하여 擧事하기로 決定하고, 日本士官學校의 留學生, 從來의 新式軍隊 가운데 自身들의 影響 아래 있는 朝鮮軍人을 動員하기로 하는 等 政變을 위한 準備를 서둘렀다.
開化派는 政變을 일으켰을 때 閔氏政權을 庇護하는 淸軍의 反擊에 대한 軍事問題와 自身들이 改革政策을 實現하는 데 必要한 財政確保問題를 日本을 利用하여 解決하고자 하였다. 日本 亦是 開化派의 軍事·財政 問題를 도와, 朝鮮進出에 걸림돌이던 淸과 閔氏政權을 내몰고 朝鮮侵掠에 優位를 차지할 속셈으로 日本軍隊의 動員과 借款을 日本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約束하였다.
1884년 10월 17일 午後 6詩頃, 急進開化派들은 郵政局 祝賀宴을 利用하여 閔氏戚族 勢力을 除去하는 政變을 일으켰다. 이들은 王과 王妃를 昌德宮에서 景祐宮으로 옮겨 日本軍 200名과 50餘 名의 朝鮮軍人으로 護衛케 하여 政權을 掌握하였다.
政變에 成功한 開化派는 閔氏勢力을 除去했다. 開化派와 王室은 새政府 構成을 爲한 人物 排定에 着手하는 한편, 各國 公使館에도 政變의 뜻을 傳達하고 支持를 要請하였다. 急進開化派는 이튿날인 10월 18일 새政府 組織과 構成員을 發表하였다.
새政府는 形式的으로는 王室과 聯合한 形態를 取했지만 實際로는 開化派가 改革推進을 爲한 重要한 자리를 掌握한 急進開化派의 權力이었다.
最高 權力機關인 議政府의 左議政에는 洪英植이, 軍事·司法·警察·外交·通商·人事·財政 등 政府 中樞機關의 자리에는 金玉均(戶曹參判)을 비롯하여 朴泳孝(前後營使 兼 左捕將), 徐光範(左右營使,右捕將 兼 外務督辦 代理), 徐載弼(兵曹參判 兼 正領官), 朴泳敎(都承旨) 등이 配置되었다. 이어 10월 19일에는 새정부가 앞으로 斷行할 改革政治의 內容을 담은 14個條로 된 '新政綱'을 發表하였다.
그 內容은,
① 大院君을 早速히 歸國시키고 淸에 대한 朝貢 虛禮를 廢止할 것,
② 全國의 地租法을 改革하고 奸吏를 根絶하며 貧民을 救濟하고 國家財政을 充實히 할 것,
③ 內侍部를 廢止하고 才能있는 者만을 登用할 것,
④ 前後 奸吏와 貪官汚吏 가운데 顯著한 자를 處罰할 것,
⑤ 各道의 還上米는 永久히 免除할 것,
⑥ 奎章閣을 廢止할 것,
⑦ 時急히 巡査를 設置하여 盜賊을 防止할 것,
⑧ 惠商公局을 廢止할 것,
⑨ 前後의 時期에 流配 또는 禁錮된 罪人을 다시 調査하여 釋放시킬 것,
⑩ 4營을 합하여 1營으로 하고 營 가운데서 壯丁을 뽑아 近衛隊를 급히 設置할 것, 陸軍 大將은 王世子로 할 것,
⑪ 一切의 國家財政은 戶曹에서 管轄하고 그 밖의 財政 官廳은 禁止할 것,
⑫ 大臣과 參贊은 날을 정하여 議政府에서 會議하고 政令을 議定·執行할 것,
⑬ 政府 6曹 外에 不必要한 官廳을 廢止하고 大臣과 參贊으로 하여금 이것을 審議 處理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內容을 갖는 政綱은 金玉均을 비롯한 急進開化派가 그 동안 朝鮮의 改革을 위해서 發展시켜온 開化思想과 그에 따른 政治的 改革活動의 總體的 表現이었다. 甲申政變은 '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景祐宮에서 昌德宮으로 居處를 옮긴 明成皇后가 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援兵을 要請하였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名의 軍士를 이끌고 10월 19일 午後 3時境 政變을 일으킨 開化派를 攻擊하였다. 이때 戰勢가 不利하다고 判斷한 日本은 開化派와의 約束을 저버리고 日本軍人을 撤收시켰다.
結局 洪英植·朴泳敎 등은 淸軍에게 射殺되고 金玉均·朴泳孝·徐光範·徐載弼 등 9명은 日本으로 亡命함으로써 甲申政變은 이른바 3日天下로 막을 내렸다. 政變이 失敗한 뒤 日本側은 公使館이 불타고 公使館 職員과 居留民이 犧牲된 데 대한 責任을 朝鮮政府에 물었고, 1885년 1월 9일 두 나라는 朝鮮의 日本에 대한 謝意 表明, 賠償金 10만원 支拂, 日本 公事官 修築費 負擔 등을 內容으로 하는 漢城條約을 締結하였다.
또한 日本은 1885년 4월 18일, 淸나라와 朝鮮에서 淸·日 兩國軍 撤收, 將來 朝鮮에 變亂이나 重大事件이 일어나 淸·日 어느 한쪽이 派兵할 경우 그 사실을 相對方에게 알릴 것 등을 內容으로 하는 톈진[天津]조약을 締結하였다. 이 條約으로 日本은 淸나라와 같이 朝鮮에 대한 派兵權을 얻게 되었고, 10년 뒤 일어난 東學農民運動 때 日本의 派兵 구실이 되었다.
三日天下로 끝난 甲申政變은 開化派가 위로부터 試圖한 最初의 改革運動이었다. 新政綱에서 具體化된 開化派의 改革 構想은 政治面에서 對外的으로 淸나라와 從屬關係를 淸算하려 하였고 對內的으로 朝鮮王朝의 專制主義 政治體制를 立憲君主制로 바꾸려 한 政治改革이었다. 社會面에서도 門閥을 廢止하고 人民平等權을 制定하여 中世的 身分制를 淸算하려 하였다.
經濟面에서는 開化派들이 地主田戶制를 維持하는 線에서 國家財政를 强化하려고 地租法의 改革만을 내세웠다. 商工業面에서도 資本主義的 企業의 育成 問題나 資本主義 體制로의 轉換 問題를 積極的으로 提示하지는 못하였다. 甲申政變이 失敗한 直接的인 原因은 淸軍의 干涉때문이었다.
그 밖에 政變 自體가 民衆에 뿌리박지 못한 開化派의 위로부터의 改革이었다는 점도 한 몫을 하였다. 한 例로 地租法 改革方針은 從來의 地主制를 認定한 위에서 稅制改革의 次元에서만 土地問題를 提起함으로써 當時 反封建 鬪爭에 가장 徹底한 利害關係를 가지고 있는 民衆을 考慮하지 못하였고, 그 結果 政變 當時 民衆의 支持를 받지 못하였다.
이는 急進開化派의 大多數가 封建 大地主에 基盤을 둔 階級的 限界에 基因한 것이었다. 나아가 開化派의 階級的 限界는 地主制 存續을 바탕으로 朝鮮社會의 植民地化를 劃策하던 歐美列强과 鬪爭할 內的 根據를 薄弱하게 하여 歐美列强의 侵略性에 徹底하게 對應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곧 政權奪取와 改革에 日本을 利用하려던 그들의 主觀的 意圖에도 不拘하고 侵掠者를 援助者로 끌어들이게 되었고, 結局 日本의 背反으로 政變을 失敗로 이끈 또 하나의 原因이 되었다. 그러나 甲申政變은 이러한 限界에도 不拘하고 나라의 富國强兵을 위한 近代的인 國家와 社會建設을 目標로 하는 것이었고, 段階的으로나마 國民主權主義를 指向한 最初의 政治改革運動이었다는 데 그 意義가 있다.
68)톈진조약[天津條約]
中國 톈진에서 淸國과 여러 外國間에 맺은 條約의 總稱. 最初의 톈진條約은 애로號事件에 關聯하여 1858년 6월, 러시아·美國·英國·프랑스 等 各 4個國과 淸國이 맺은 4個의 條約이다. 이 4個條約은 모두가 片務的 最惠國條款이 揷入되어 있으므로 同一한 條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典型的인 對英國條約의 內容은 大略 다음과 같다.
① 外交使節의 베이징[北京] 常駐,
② 內地旅行과 양쯔강[揚子江] 通商의 承認,
③ 새로운 貿易規則과 關稅率 協定(이로써 阿片貿易이 合法化되었다),
④ 開港場의 增加,
⑤ 그리스도敎의 公認 등이다. 이 밖에 英國과 프랑스 兩國에 對하여 合計 600만 兩의 賠償金과 그 支拂이 完了
될 때까지 廣東省城의 保障占領 등이 있다.
英國·프랑스와의 條約은 1860년 英國·프랑스 聯合軍의 베이징 占領 後, 베이징 協定과 同時에 批准 交換되었다. 이 밖에 主要 톈진條約으로서 1871년 淸·日 兩國이 相互 對等한 立場에서 맺은 領事 裁判權을 相互認定하고 最惠國條款을 包含하지 않는 것을 特色으로 하는 通商條約, 朝鮮의 甲申政變에 關聯하여 朝鮮으로부터의 청·일 兩國 軍隊의 撤兵을 約束한 1885年의 톈진협정(淸·日),
청·프戰爭에 關聯하여 1886년 맺은 톈진條約(청·프, 淸은 베트남이 프랑스의 保護國임을 認定하였음) 等이 있다. 그리고 1860년대 獨逸·포르투갈·덴마크·네덜란드·에스파냐, 1870년대 페루·브라질과 맺은 톈진條約이 있다.
69)甲午改革
1894년(高宗 31) 開化黨이 執權한 이후 從來의 文物制度를 近代的 國家形態로 고친 일. 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2차에 걸쳐 蜂起한 反封建·外勢排斥運動으로서의 東學農民運動이 實現되지 못한 가운데 이를 鎭壓할 目的으로 政府는 淸 ·日 兩國에 援兵을 要請하였다.
그러나 東學農民軍의 勢力이 弱化됨에 따라 兩國은 더 이상 朝鮮에 駐屯할 必要가 없게 되었다. 이에 淸은 日本에 대해 共同 撤兵할 것을 提案하였으나, 日本은 오히려 兩國이 共同으로 朝鮮의 內政을 改革하자고 提案하였으나 淸의 拒絶로 會談은 決裂되었고 淸日戰爭이 勃發하게 되었다.
日本의 勝利로 끝난 戰爭의 結果 朝鮮에서의 淸의 宗主權은 否認되었고, 代身 日本의 支配를 全的으로 認定해 주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締結함으로써 淸國의 朝鮮에 대한 勢力은 完全히 除去되었다. 以後 日本은 單獨으로 朝鮮에 대한 內政改革을 要求하였는데, 이는 侵掠政策 推進上 責任의 所在를 分明히 밝히고, 方向을 設定할 수 있는 確立된 政府가 必要했기 때문이었다.
日本 軍隊는 王宮을 包圍하고 大院君을 앞세워 閔氏一派를 逐出하였으며, 金弘集을 中心으로 하는 穩健開化派의 親日政府를 樹立하여 國政改革을 斷行하였다. 이 改革은 老人亭會談에서 日本公使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個條 改革案의 提出로 始作되었는데, 朝鮮 政府는 校正廳에 依한 獨自的인 改革을 하고 있다는 理由로 一旦 拒絶하였다.
그러나 1894년 7月부터 大院君의 攝政이 다시 始作되어 제1차 金弘集內閣이 成立되었으며, 金弘集·金允植·金嘉鎭 등 17명의 會議員으로 構成된 軍國機務處라는 臨時 合意機關이 設置되었다.
이 機關은 中央과 地方의 制度·行政·司法·敎育·社會 등 諸般問題에 걸친 事項을 3個月 동안 208件을 審議 議決하는 改革의 主體勢力이 되었으며, 政治制度의 改革을 斷行, 開國紀元을 使用하여 淸과의 對等한 關係를 나타냈고, 1次改革 때에는 中央官制를 議政府와 宮內府로 區別하고 從來의 六曹를 八衙門으로 改編, 이를 議政府 直屬으로 하였다.
2次改革 때는 議政府를 內閣이라 고치고 7府를 두었다. 人事制度는 文武官을 改編하고 月俸制度를 樹立하였으며, 科擧制度를 없애고 새로운 官吏任用法을 採擇하여 從來의 文武·班常의 區別을 廢止하였다. 地方制度의 改革은 8道를 23府로 고쳤다가 다시 13道로 고쳤다.
地方官으로부터 司法權과 軍事權을 剝奪함으로써 橫暴와 腐敗를 막아 地方行政體制를 中央에 隸屬시키는 近代 官僚體制를 이룩하였다. 經濟的으로는 財政에 관한 一切의 事務를 度支部(탁지부)에서 管掌하여 財政의 一元化를 꾀하였다.
또 新式貨幣章程에 의한 銀本位制度를 採擇하고 租稅의 金納化 實施와 度量衡을 改編하여 日本式으로 統一하였다. 軍事制度는 軍隊數와 武器의 制限 등 枝葉的인 것만을 改革하여 1910년 國權이 被奪될 때까지의 兵力이 불과 9,000名 程度에 지나지 않아 獨立國家로서의 軍隊機能은 微弱하였다.
司法制度는 行政機構에서 分離시켜 裁判所를 設置하고 二審制가 採擇되었다. 1審 裁判所로서 地方裁判所와 開港場裁判所를, 2審 裁判所로는 高等裁判所와 巡廻裁判所를 設置하였고, 王族에 대한 刑事裁判을 위해서 特別法院을 두었다.
서울에 警務廳을 두어 首都의 治安을 擔當하고 地方은 各 道 觀察使 아래 警務官을 配置하여 治安을 맡아 行政과 警察權을 區分하였다. 이 改革의 重要한 內容은 社會的인 改革에 있다. 班常의 階級打破, 門閥을 超越한 人材의 登用, 人身賣買의 禁止, 賤民待遇의 廢止 等 傳統的인 兩班體制 下에서의 身分制度를 撤廢하였다.
이 外에 罪人의 拷問과 連坐制의 廢止, 早婚禁止, 自由意思에 의한 寡婦의 再婚, 養子制度의 改定, 衣服制度의 簡素化 등 因襲的인 傳統을 近代的인 것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은 甲午改革은 朝鮮 開國 以後 500年을 이어온 舊制度를 一新한 制度上의 近代的 改革으로서의 性格을 지니고 있으나, 日本의 侵略的 意圖에 따라 强行된 他律的인 改革이므로 國內의 抗日勢力은 크게 反撥하였다.
또한 日本의 資本主義가 浸透할 수 있는 契機를 마련해 주게 되었고 이와 함께 親러的인 勢力이 登場하여 乙未事變을 일으키는 結果를 낳게 되었다.
70)洪範十四條
甲午改革 後 高宗이 宣布한 14個 條項으로 된 政治革新의 基本綱領. 日本의 後援으로 保守勢力을 克復하고 開化를 推進해오던 開化黨은 드디어 金弘集 內閣을 誕生시키고 內政을 整備, 一連의 改革을 斷行하였다.
1895年(高宗 32) l月 7日, 高宗은 世子와 大院君 ·宗親 및 百官을 거느리고 宗廟에 나아가 먼저 獨立의 誓告文을 告하고 이를 宣布하였다. 다음날에는 이를 全國民에게 頒布하였다. 誓告文 ·洪範 14條는 近世 最初의 純한글체와 純漢文體 및 國漢文 混用體의 세 가지로 作成하여 發表하였는데, 純한글체에서는 洪範 14條를 ‘열 네 가지 큰 法’이라 表記하였다.
그 內容은 다음과 같다.
① 淸國에 依存하는 생각을 끊고 自主獨立의 基礎를 세운다.
② 王室典範을 作成하여 大統의 繼承과 宗室 ·戚臣의 區別을 밝힌다.
③ 國王이 正殿에 나아가 政事를 親히 各 大臣에게 물어 處理하되, 王后 ·妃嬪 ·宗室 및 戚臣이 干與함을 容納
치 아니한다.
④ 王室事務와 國政事務를 分離하여 서로 混同하지 않는다.
⑤ 議政府와 각 衙門(아문)의 職務權限의 限界를 明白히 規定한다.
⑥ 賦稅는 모두 法令으로 定하고 名目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租稅賦課와 徵收 및 經費支出은 모두 度支衙門(탁지아문)에서 管掌한다.
⑧ 王室은 率先하여 經費를 節約해서 각 衙門과 地方官의 模範이 되게 한다.
⑨ 王室과 각 官府에서 사용하는 經費는 l년간의 豫算을 세워 財政의 基礎를 確立한다.
⑩ 地方官制度를 速히 改正하여 地方官吏의 職權을 限定한다.
⑪ 널리 資質이 있는 젊은이를 外國에 派遣하여 學術과 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將校를 敎育하고 徵兵制度를 定하여 軍制의 基礎를 確立한다.
⑬ 民法 및 刑法을 嚴正히 定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罰하지 말며, 百姓의 生命과 財産을 保護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人材를 登用한다.
71)三國干涉
淸日戰爭의 講和條約인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서 認定된 日本의 랴오둥반도[遼東半島] 領有에 反對하는 러시아 ·프랑스 ·獨逸의 共同干涉. 淸日戰爭에서 勝利를 거둔 日本은 1895년 4월 17일 淸國과의 사이에 講和條約을 調印 ·批准하였다.
그런데 條約 內容을 본 러시아 ·프랑스 ·獨逸 3國은 4월 23일 이 條約에서 日本에 割讓하도록 되어 있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淸國에 返還하도록 日本 政府에 强力히 勸告하였다. 駐日 러시아 公使가 日本의 外務省 次官 하야시 다다스[林董]에게 修交한 覺書에 의하면, 干涉의 趣旨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日本이 所有하는 것은 單純히 淸國의 首都를 危殆롭게 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同時에 朝鮮國의 獨立까지도 有名無實하게 하는 結果가 되어, 이는 將來 極東의 永久的인 平和에 대한 障碍를 주는 것으로 認定하며… 따라서 러시아 政府는… 日本政府에 勸告하노니 랴오둥반도를 確然히 領有하는 것을 抛棄(포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되어 있었으며, 프랑스 ·獨逸 公使의 覺書도 이와 大同小異하였다. 러시아는 더욱 積極性을 띠어 軍艦을 고베에 派遣하여 示威行動에까지 나섰다.
當時의 日本은 3國 列强을 相對로 하여 싸울 만한 戰力이 없었기 때문에 內閣會議 結果 首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英國과의 사이에 會議를 開催하고 이 勸告를 처리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外相인 무쓰무네미쓰[陸奧宗光]는 將來 다른 事件으로도 列國의 干涉을 招來할 憂慮가 있다고 判斷하여, 그 意見에 反對하고 結局 시모노세키조약은 그대로 締結하고, 랴오둥반도[遼東半島] 返還問題는 別個로 取扱할 것을 決定하도록 하였다.
그 후 무쓰무네미쓰[陸奧宗光]는 英國 ·美國 등 干涉에 參加하지 않았던 列國에 呼訴하여 事態를 懷柔하려 劃策하였으나 成功하지 못하고 마침내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淸國에 返還하고, 5월 5일 이 事實을 3國에 通告하였다. 返還條約은 11월 8일 淸 ·日 兩國間에서 締結되고 그 對象으로 淸國으로부터 4,500만 원의 補償金이 支拂되었다.
이 返還은 淸日戰爭에 勝利하여 國威高揚에 醉해 있던 日本 國民들의 國內 輿論에 커다란 衝擊을 안겨다 주었다. 한편 3國干涉은 유럽 列强에도 淸國을 分割하는 端緖를 열어주어, 1898年 3月에는 獨逸軍이 자오저우만[膠州灣]에 上陸하였고, 프랑스 ·英國 등 列國도 앞을 다투어 軍隊를 派遣하여 租借地를 要求하였으며, 러시아는 滿洲에 鐵道 敷設權을 獲得하고,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租借하였다
72)第一次韓日協約
1904年(光武 8) 8月, 日本이 內政改善이라는 구실 아래 顧問政治를 實施하기 위해 韓國을 强壓해서 締結한 協定. 公式名稱은 ‘外國人傭聘協定’이며, 韓日協定書라고도 한다.
이 해 러시아와 戰爭을 일으킨 日本은 2월 韓國政府를 武力으로 强壓해서 韓日議政書를 締結하고 韓半島를 그들의 軍事基地로서 確保하고, 戰爭이 日本에 決定的으로 有利하게 기울자 韓國의 財政 ·外交政策을 刷新하기 위해서 外國顧問을 招聘하여야 한다고 主張하고 이에 관한 協定締結을 强要하였다.
强壓에 못이겨 外部大臣 李夏榮, 度支部大臣(財務長官) 閔泳綺는 日本人 財政顧問 1명과 日本이 推薦하는 外國人 外交顧問 1名을 招聘한다는 內容의 議案을 提出하여 이를 土臺로 1904年 8月 22日 外部大臣 署理 尹致昊와 日本公使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外國人傭聘協定’을 締結하였다.
그 內容은
① 韓國政府는 日本政府가 推薦하는 日本人 1名을 財政顧問으로 하여 韓國政府에 傭聘하고, 財務에 관한 事
項은 一切 그意見을 물어 施行할 것,
② 韓國政府는 日本政府가 推薦하는 外國人 1명을 外交顧問으로 하여 外部에 傭聘하고 外交에 관한 要務는
一切 그 意見을물어 施行할 것,
③ 韓國政府는 外國과의 條約締結, 其他 重要한 外交案件, 즉 外國人에 대한 特權讓與와 契約 등의 處理에 관
하여는 미리 日本政府와 協議할 것 등이다.
이에 따라 財政顧問에 메카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大郞], 外交顧問에 美國人 스티븐스(須知分:뒤에 田明雲義士가 暗殺)가 就任하고, 이듬해에는 韓國政府가 自進 招請한다는 形式으로 軍事顧問에 노즈 진부[野津鎭武], 警務顧問에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後], 學部參與官에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를 就任케 하였다.
이로써 韓國의 財政 ·外交 ·軍事 ·警察 ·文敎 等 重要 政策은 그들의 魔手에 依해 造作되고, 日本은 곧 이어 다음 侵掠段階인 第2次韓日協約(乙巳條約)의 工作에 들어갔다.
73)乙巳條約
1905년(光武 9) 日本이 韓國의 外交權을 剝奪하기 爲해 韓國 政府를 强壓하여 締結한 條約. 第2次 韓日協約·乙巳五條約·乙巳勒約 等으로 불린다. 제3차 러일협약(露日協約) 締結을 契機로 러시아와 日本이 妥協하여 日帝의 韓國 進出은 經濟的인 面에 主力하게 되었다.
淸日戰爭의 結果 日本이 淸國으로부터 받은 賠償金은, 韓國의 鐵道敷設權을 漸次 獲得하고 鑛山·森林·漁業·港市·溫泉 等에서 얻은 갖가지 利權과 함께 韓國의 金輸出·商貿易까지 掌握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滿洲를 占領하던 러시아에 대해 英日同盟을 締結한 英國과 日本이 撤收要求를 하는 等 滿洲를 둘러싼 國際的인 關係는 더욱 微妙하게 進行되었다.
1903년 4월 러시아군이 滿洲의 馬賊과 함께 韓滿國境을 넘어서 龍岩浦를 强制 占領하자 日本은 卽刻 러시아의 撤收를 要求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러시아는 오히려 韓半島를 北緯 39도선을 中心으로 分割占領할 것을 提案하였으며, 日本側에서는 이를 拒否하였다. 이러한 國際的인 狀況 아래서 1904년 1월 23일 韓國政府는 嚴正 中立國임을 海外에 宣布하였다.
2월 6일 39度線 問題와 滿洲問題로 對立하던 러시아와 日本이 國交를 斷絶하여 8일 뤼순[旅順]에서 첫 砲聲이 울렸고 이튿날 새벽 日本軍이 仁川에 上陸, 서울로 入城하고 10일 대러시아 宣戰布告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日本은 戰爭狀態에 들어갔다. 러·일전쟁의 開始와 함께 23일 日本의 强要로 攻守同盟을 前提로 한 韓日議政書가 締結되었다.
議定書는 6個條로서 第2,3條에 韓國 皇室의 安全과 獨立 및 領土保全을 保證한다고 되어 있으나 其他 條項은 모두가 主權國家의 主權을 無視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日本側의 勝利로 기울어지자 韓國政府는 5월 18일자의 詔勅으로 韓國과 러시아 사이에 締結되었던 一切의 條約과 協定을 廢棄한다고 宣布하는 同時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會社에 割愛하였던 利權도 全部 取消하였다.
이로써 日本은 韓國에 대한 內政干涉을 深化시켜 8월 外部大臣 署理 尹致昊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公使 사이에 〈外國人傭聘協定〉을 締結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日帝의 韓國財政에 대한 直接的인 干涉이었다.
한편 美國 大統領 루스벨트의 調整으로 러·일 兩國의 講和會談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全文 15조, 追加 約款 2개조의 講和條約이 調印되었다(포츠머스회담). 한국에서의 日本의 優越權을 承認한 條約은 帝國主義 列强의 利權에 따라 獨立國家의 主權을 無視한 것이었고 列强이 일본의 韓國侵掠을 公式的으로 承認한 것이 되었다.
포츠머스會談의 內容上 戰勝의 代價로 不足한 것을 韓國에서 補充하자는 日本 自體 內의 輿論은 곧 1905년 11월 9일 日本特命全權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派遣하여 하야시公使와 駐韓日本軍司令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保護’를 强行하려 하였다.
外交權 剝奪을 內容으로 하는 新協約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外部大臣 朴齊純에게로 傳達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前後 3차례에 걸쳐 高宗을 謁見하였으며 11월 16일 貞洞의 孫鐸(손탁)호텔에서 參政大臣 韓圭卨(한규설) 以下 8大臣을 威脅하여 協約案의 可決을 强要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强要 아래 5時間이나 繼續된 17일의 御前會議에서도 結論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日本 憲兵 數十 名의 擁衛 아래 會議場에 들어가 大臣 各各에게 可否의 決定을 强要하였다. 이때 高宗은 다만 ‘政府에서 協商 措處하라’고 하여 責任을 回避했을 뿐이며 韓圭卨만 無條件 不可하다고 하였다.
韓圭卨에 同調한 사람은 度支部大臣 閑泳綺와 法部大臣 李夏榮이었고, 學部大臣 李完用을 비롯하여 軍部大臣 李根澤, 內部大臣 李址鎔, 外部大臣 朴齊純, 農商工部大臣 權重顯 등은 모두 責任을 高宗皇帝에게 轉嫁하면서 贊成을 表示하였는데, 이들을 乙巳五賦이라 한다.
이토는 强制 通過된 協約案을 宮內大臣 李載克을 통해 皇帝의 勅裁를 强要한 뒤 同日字로 한국 外交權의 接受, 日本 統監府의 設置 등을 重要內容으로 하는 條約을 外部大臣 朴齊純과 日本公使 하야시 사이에 締結 調印하고 18일에 이를 發表하였다.
이 條約의 締結 消息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皇城新聞》에 新聞社 社長 張志淵이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論說을 揭載함에 따라 全國에 알려져 國民들의 條約 締結에 대한 拒否와 日帝에 대한 抗爭이 全國 各地에서 일어났다.
議政府參贊 李相卨(이상설)의 上疏를 비롯하여 從1品 李裕承, 法部主事 安秉瓚, 原任議政大臣 趙秉世, 侍從武官長 閉泳煥, 前參贊 崔益鉉, 特進官 李根命, 宗廟提調 尹泰興, 承旨 李奭鍾, 儒林 李建奭 등이 强硬하게 上疏하였다.
한편 閔泳煥은 上疏로도 條約締結이 原點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遺書로써 全國民에게 警告하면서 自決 殉國하였고, 뒤이어 趙秉世, 前參判 洪萬植, 學部主事 李相哲, 平壤隊 一等兵 金奉學, 駐英公使 李漢應 등도 죽음으로써 日本에 抗拒하였다.
全國 各地에서 義兵運動이 展開되어 前參判 閔宗植이 洪州에서 擧兵한 것을 비롯하여 全羅道에서 崔益鉉이, 慶尙道에서는 申乭石(신돌석)이, 江原道와 忠淸道에서는 柳麟錫이 各各 義兵을 일으켰다.
그 외 李根澤·李完用·李址鎔 等을 暗殺하기 위해 個別的인 擧事를 하기도 하였다. 乙巳條約이 締結된 後 日本은 駐韓日本公使館을 撤廢하여 新設한 統監府로 移讓하고 各地에 있던 領事館은 理事廳으로 改編하는 <統監府 및 理事廳官制>를 1905년 12월 20일에 公布함으로써 서울에는 統監府가 開設되고 開港場과 主要 都市 13個所에는 理事廳이, 其他 都市 11개소에는 支廳이 設置되었다.
統監府는 從來 公使館에서 맡았던 政務 以外에도 朝鮮保護의 大權, 官憲의 監督權, 그리고 兵力動員權도 保有하였다. 또한 朝鮮의 施政을 監督하거나, 어떠한 政策의 施行도 要求할 수 있는 權利를 가지게 됨으로써 統監府는 名實共히 朝鮮保護의 最高監督機關으로 君臨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1906년 프랑스 파리法科大學의 敎授인 F.레이는 乙巳條約이 協商代表에 대한 高宗의 委任狀과 條約締結에 대한 批准書 등의 國際條約에 必要한 形式的인 要件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條約文의 첫머리에도 條約의 名稱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國際條約으로 認定하기 어렵다고 指摘하였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日本은 그 法的 有效性을 主張하고 있어 그 後에도 繼續 論難의 餘地가 되고 있다.
74)萬國平和會議
러시아 皇帝 니콜라이 2世의 提唱으로 世界平和를 圖謀하기 위하여 開催된 國際會議. 第1次는 1899年 26個國, 제2차는 1907년 44個國의 代表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會合, 軍備縮小와 平和維持策을 協議하였다.
그 結果 軍備縮小에는 失敗하였으나 國際紛爭의 平和的 處理條約, 有毒가스 및 特殊 彈丸의 使用禁止宣言 等이 調印되고 國際仲裁裁判所가 設置되었다.
特히 第2次 會議 때는 韓國에서 高宗의 密令으로 正使 李相卨 ·副使 李瑋鍾 ·李儁이 派遣되어, 韓國에 대한 日本의 不當한 干涉을 呼訴하고 韓國이 會議 參加에 對한 通報를 받지 못한 것을 抗議하는 密書를 傳達, 乙巳條約이 韓國 皇帝의 뜻이 아니고 日本의 强壓에 의한 것임을 暴露하여 破棄시키려 하였으나 日本의 妨害로 뜻을 이루지 못하여 그곳에서 李儁은 憤死하였다.
75)純貞孝皇后 尹氏
純貞孝皇后 尹氏(1894년 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大韓帝國 純宗의 繼后로 本貫은 海平이다. 朴泳孝, 李載覺 등과 함께 日本 政府로부터 侯爵 爵位를 받았던 親日 人士인 尹澤榮의 딸이다. 定式 諡號는 獻儀慈仁純貞孝皇后(헌의자인순정효황후)이다.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04年에 當時 皇太子妃였던 純貞孝皇后 閔氏가 死亡하자 1906년에 13살의 어린 나이에 東宮繼妃로 冊封되었고, 이때 아버지 尹澤榮과 純獻皇貴妃 嚴氏 사이에 巨額의 賂物이 오갔다는 風說이 돌았다.
이듬해인 1907년에 男便 純宗이 皇帝로 卽位함에 따라 그녀는 皇后가 되었다. 純貞孝皇后는 1910년 屛風 뒤에서 御殿 會議를 엿듣고 있다가 親日 性向의 大臣들이 純宗에게 韓日倂合條約의 捺印을 强要하자, 玉璽(옥새)를 自身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結局 큰아버지 尹德榮에게 强制로 빼앗겼고, 이후 大韓帝國의 國權은 日帝에 의해 被奪되어 滅亡을 맞게 되었다.
純宗의 地位가 李王으로 格下됐으므로 그녀도 李王妃가 되어 昌德宮의 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純宗이 崩御하자 大妃로 불리며 昌德宮의 樂善齋로 居處를 옮겼다
1950년 韓國戰爭이 일어나자, 昌德宮에 남아 皇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宮闕에 들이닥쳐 行悖를 부리는 人民軍을 56歲의 나이에도 不拘하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逸話가 있을 程度로 純貞孝皇后는 두려움을 모르는 女傑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戰勢가 急迫해지자 美軍에 의해 避難길에 오르게 되었고, 窮乏한 生活을 轉轉하던 끝에 1953년 南北이 休戰을 맞아 還宮하려 하였으나 大統領 李承晩이 사람들의 純貞孝皇后 에 對한 尊敬心을 두려워하여 還宮을 妨害하였기 때문에, 貞陵의 修仁齊로 居處를 옮겨야 했다.
1960년, 前 舊皇室 事務總局長 吳在璟의 努力으로 還宮에 成功하였고, 以後 日本에서 精神障碍人이 되어 歸國한 德惠翁主 및 懿愍太子(의민태자) 一家와 함께 昌德宮 樂善齋에서 지내며 讀書와 피아노 演奏로 消日하였다. 男便을 여읜 平生의 孤獨과 悲運을 달래기 위해 佛敎에 歸依하여 大地月이라는 法名을 받기도 하였다.
죽는 그 瞬間까지 溫和한 性情과 氣品을 잃지 않았던 純貞孝皇后는 大韓帝國의 마지막 皇后로서, 堂堂함과 冷徹함으로 皇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尊敬을 받았다. 昇遐할 때까지 英語 工夫에 게으르지 않았고(타임지를 읽을 程度였다고 傳한다),
國文學과 佛經 硏究에 渾身을 쏟는 등 배움에 대한 熱情이 남달랐다. 1966년 2월 3일, 昌德宮 錫福軒에서 心臟痲痺로 73살의 나이에 不遇한 一生을 마감하였다. 京畿道 南楊州市 金谷洞에 있는 裕陵에 純宗과 合葬되었다.
76)日新協約
丁未七條約이라고도 한다. 1907년(隆熙 1) 日本이 韓國을 倂呑하기 위한 마지막 措置로 强行한 7個項의 條約. 丁未七條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密使事件을 契機로 高宗을 强制 退位시킨 日帝는 形骸化한 大韓帝國의 國家體制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法令制定權 ·官吏任命權 ·行政權 및 日本官吏의 任命 等을 內容으로 한 7個項의 條約案을 提示, 아무런 障碍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名義로 締結 ·調印하였다.
條約의 內容은
① 韓國政府는 施政改善에 觀하여 統監의 指導를 받을 것,
② 韓國政府의 法令制定 및 重要한 行政上의 處分은 미리 統監의 承認을 거칠 것,
③ 韓國의 司法事務는 普通 行政事務와 이를 區分할 것,
④ 韓國高等官吏의 任免은 統監의 同意로써 이를 行할 것,
⑤ 韓國政府는 統監이 推薦하는 日本人을 韓國官吏에 傭聘할 것,
⑥ 韓國政府는 統監의 同意없이 外國人을 韓國官吏에 任命하지 말 것,
⑦ 1904년 8월 22일 調印한 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觀한 協定書 第1項은 廢止할 것 等이다.
또, 日帝는 條約의 後續措置로 行政實權을 掌握하기 위해 韓國人 大臣 밑에 日本人 次官을 任命하고, 警察權을 委任하도록 하였으며, 經費를 節約한다는 理由로 韓國軍隊를 解散하였다. 이 밖에 言論彈壓을 위한 ‘新聞紙法’, 集會와 結社의 自由를 剝奪하기 위한 ‘保安法’이 公布되는 등 10年에 名稱만의 大韓帝國의 國體를 抹消하기까지 4年間은 統監府에 의한 次官政治가 實施되었다.
그러나 이 條約은 日本이 高宗을 强制로 退位시킨 直後에 締結된 것으로 强壓的인 雰圍氣에서 非正常的으로 締結되었기 때문에 國際條約으로서의 法的 有效性에 疑問이 提起되고 있다.
77)東洋拓殖株式會社
1908년 日帝가 朝鮮의 土地와 資源을 收奪할 目的으로 設置한 植民地 搾取機關. 英國의 東印度會社와 같이, 日本政府의 直接的 支配下에서 그들의 特權에 基礎한 獨占的 特殊會社이다.
日帝는 1908년 議會에서 東洋拓植會社法을 通過시키고, 이를 韓國政府에 强要하여 1000만 원 資金으로 韓國에서 拓植事業을 目的으로 會社를 設立하고, 日帝는 이에 一定期間 相當額의 補給을 施行하고 韓國政府는 事業用地의 一部를 提供하기 위하여 國有地를 出資함으로써 韓國이 資源開發 殖産振興을 擔當하게 하며, 日本으로부터 善良 勤勉하고 經驗이 豊富한 農民을 利殖하고 進步된 農法을 示範함과 同時에 企業家에 대해서도 利子가 싼 資金을 供給하여 殖産事業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名目으로 設立하였다. 그러나 實際로는 朝鮮을 植民地化할 目的으로 創立되었기 때문에 韓國의 反應은 冷淡하였다.
會社가 設立되자 韓國政府로부터 土地 1만 7714町步를 出資받고, 1913년까지 土地 4만 7148町步를 헐값으로 買入하였다. 土地調査事業이 完了된 以後인 1920년 말에 會社 所有地는 耕作地의 3分의 1에 該當하는 9萬 7千餘 町步에 達하였다.
이와 더불어 日帝는 國有地를 强制로 拂下하여 莫大한 面積의 山林地를 가로채어, 1942年 末 16萬餘 町步의 林野를 所有하였다. 이와 같이 强制로 빼앗은 土地를 小作人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高率의 小作料를 徵收하고, 零細 小作農에게 빌려준 穀物에 대해서는 20% 以上의 高利를 秋收 때 現物로 거둬들였다.
또한 그 所有地는 日本人 移住者에게 싼값으로 讓渡되어 東洋拓植株式會社(以下 東拓)의 直營地 面積은 漸次 減少되었으나, 1937년 東拓이 直接 經營한 耕作地 面積은 6만여 町步에 達하였다. 東拓의 農業移民政策은 經濟的인 目的보다 政治的인 目的에서 推進되었다.
일본은 各種 特惠를 주고 1910∼1926년에 17回에 걸쳐 日本人 移民 希望者 約 1萬 名을 嚴選하여 朝鮮侵掠의 擔當者로 活用했다. 이들 移住民은 京畿·慶尙·全羅·黃海·忠淸道에 가장 많았는데, 그들은 朝鮮民衆을 搾取 壓迫한 日帝의 代辯者이며 앞잡이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26年까지 朝鮮人 貧農 約 29萬 9千이 土地를 喪失하고 北間島로 移住하였다.
한편, 東拓은 朝鮮民衆에 대한 苛酷한 搾取로 勢力이 擴大되자, 1917년 會社法을 改定하여 本店을 도쿄[東京]로 移轉하고 朝鮮에만 局限하던 侵掠 및 搾取의 對象과 範圍를 몽골·러시아령 아시아·中國·필리핀 및 말레이반도까지 擴張시켜 大陸에 대한 侵掠資金의 供給, 其他 拓植事業을 經營하였다.
東拓의 事業地域이 中國의 둥베이[東北]·네이멍구[內蒙古]로 擴大되었으나, 朝鮮에서의 東拓事業이 차지하는 比重은 壓倒的이었다.
1931년 滿洲事變과 1937년 中日戰爭을 惹起한 以後 日帝가 韓半島를 그들의 兵站基地化하기 위해 重工業에 集中 投資하자, 東拓도 鑛工業 部分에 關心을 기울여 電氣·炭鑛·製鐵 등 各 分野에 投資하였으나, 如前히 東拓의 事業 中心은 朝鮮의 農業에 대한 收奪이었다.
1920, 1930년대 農民의 激烈한 小作爭議는 東拓의 朝鮮民衆에 대한 收奪과 결코 無關하지 않았다. 또한 1926年 1月 義烈團員 羅錫疇 烈士가 東拓을 奇襲하여 爆彈을 投擲하는 事件은 바로 이러한 民族的 憎惡의 한 表現이었다.
'■ 역사 > 조선사(朝鮮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계보(1392~1910/518년) (0) | 2014.01.09 |
---|---|
<고려왕조실록>을 조작하여 고려사를 남긴 조선의 기록-高麗(Goli) (0) | 2013.11.28 |
朝鮮王朝 年代記 (0) | 2013.05.25 |
조선조의 왕대별 가계도 (0) | 2013.02.13 |
명성황후 시해 관련자들 (0) | 2012.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