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덕봉 이종길 묘표(德峯 李宗吉 墓表). 제정공 7대손

야촌(1) 2010. 4. 11. 03:05

대전광역시 삼정동 경주이씨 입향조 제정공 달충(達衷)의 7대손

 

↑경주이씨 25世 이굉 묘(배 홍주이씨 합분) 대전 삼정동의 입향조가 된다.

   이촌(李村)은 이분의 후손이다.

 

 

 

 

 

 

 

 

 

 

德峯 李公墓表(諱 宗吉)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사간원(行司諫院) 대사간(大司諫) 황호(黃㦿)는 짓고.

◇연창후인(延昌後人) 박후석(朴後奭)은 글을 쓰다..

◇비의 규 모 : 높이 134cm, 비신 높이 122cm, 폭 56cm, 두께 14cm

 

  출처 : 국조 인물고 권41 사자(士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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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봉 이공묘표(德峯 李公墓表)

 

덕봉(德峯) 이공(李公)이 세상을 떠난 지가 30년이 되었는데, 창원(昌原) 황호(黃㦿)가 그를 위해 묘표(墓表)하기를, 「이 사람은 표(表)할 만하다. 표(表)라는 것은 그 이름을 드날리고 그 의리를 권장함이다. 

 

죽은 이를 표하여 산 이를 권장하고 선진(先進)을 표하여 후진(後進)을 권장하며 향리(鄕里)를 표하여 향리를 권장하고 향리를 권장하여 나라를 풍속화하는 것인데, 공(公)은 그것이 갖추어져 있다. 어찌 그를 위하여 표를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資質)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장성하자 어버이에게 효도할 줄을 알아서 공경을 다하여 봉양하기를 어느 곳에서나 어떤 방법으로든 가리지 않고 하니, 부모(父母)가 일컫기를, 「장한 아들이다.」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란(倭亂)이 일어나자 공의 아버지께서 의주(義州)에 가서 임금을 근왕(勤王) 하고 있을 때에 공은 어머니를 모시고 난을 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그리고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과 이듬해인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사람끼리 잡아먹는 지경이었는데, 공은 집에서는 농사를 짓고 나가서는 장사를 하여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녀(子女)를 기르며 많은 가족에게 굶주려 부황(浮黃)이 나지 않게 하였고 혜택이 이웃에까지 미치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왜적이 재차 발동하여 호서(湖西) 지방으로 밀고 들어와서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자 공이 아버지와 숲 속에 숨었는데, 그만 아버지께서 적을 만나 적이 칼로 치자 공이 달려들어 아버지를 감싸고 부르짖어 울며 목숨을 바꾸려하니, 적이 의롭게 여겨 놓아주었으나 아버지는 이미 칼에 맞아 상처가 깊어 열흘 만에 숨을 거두시니 공이 장사를 지내고 복(服)이 끝나자 마침내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과거 공부를 그만두며 말하기를, 「내가 병난(兵難)에 아버지와 함께 죽지 못했으니, 나는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하였다. 그런데 무슨 마음으로 세상에 서겠는가?」 하였다.

 

《소학(小學)》을 읽다가 왕부王裒)의 일에 이르러서는 문득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고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이 쇠퇴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간 부모를 섬김에도 생존과 같이 해서 재계하고 정성들여 오래도록 더욱 돈독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효도한 내력이다.

 

공에게는 두 아우가 있었는데 분가(分家)를 요구하였지만 차마 떠나 보내지 못하고 한집에 함께 살았으나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고 잘못이 있으면 자기 탓으로 돌렸다. 산업(産業)을 가르고 노비를 돌아가며 부리도록 하여 두루 돕되 조금도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또한 두 분의 종형(從兄-사촌형)이 있었는데 공이 항상 아버지처럼 섬겼으니, 이는 그가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경한 내력이다.

 

공은 일가 간에 화목하고 향리(鄕里)간에 후덕하여 남의 급한일 구하기를 자기의 일보다 심하게 했다. 친구와는 믿음으로 하되 교우를 취함에 있어서는 모두 한 세대의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를 장덕(長德)이라 하지 않겠는가?

 

공이 여러 아들을 가르치되 곡진하게 타이르며 의(義)의 방법(方法)으로 이끌었다. 혹 말이 세상의 정령(政令)과 사람의 장단(長短)을 평론(評論)하는 데에 미치면 반드시 엄하게 책망하고, 오직 시(詩)ㆍ서(書)ㆍ경(經)ㆍ사(史)만을 공부시켜 독실히 실천하고 힘써 배워서 마침내는 세우는 바가 있게 하였으니, 어진 부형(父兄)이라 하지 않겠는가?

 

아! 공의 덕과 행실이 그 인륜(人倫)을 극진히 함에 가까우니, 이처럼 표(表)하는 것이 권장되는 것이 있지 않겠으며, 자손들에게 그 선조(先祖)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지 않겠으며,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에 대해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으며, 그 마을 사람들이 사모하고 본받음이 있지 않겠는가? 이로부터 나라에 풍동(風動)됨이 있을 터이니, 반드시 이 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살펴보건대, 이씨(李氏)는 경주인(慶州人)이다. 비조(鼻祖) 알평(謁平)은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신라에서 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여러 대를 전하여 우리 세조조[光廟朝]에 이르러 계림군(鷄林君) 양희공(襄僖公) 흥상(興商)은 공의 6대조이다. 

 

증조부(曾祖父)는 대(玳)이고, 조부(祖父)는 성호(成瑚)이며, 아버지는 굉(宏)으로 홍주이씨(洪州李氏) 광호(光豪)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융경(隆慶) 정묘년(丁卯年, 1567년 선조 즉위년) 12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公)의 휘(諱)는 종길(宗吉)이고, 자(字)는 군적(君迪)이며, 덕봉(德峰)은 그의 호(號)이다.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 5월 9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겨우 51세였다. 회덕(懷德)의 형강(荊江) 북쪽 삼정동(三政洞) 해좌 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먼저 수안이씨(遂安李氏) 몽열(夢說)의 따님에 장가들어 부덕이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고 1남을 두었으니 국배(國培)인데 또 일찍 죽고 계배는 은진송씨(恩津宋氏)니 숙(琡)의 따님인데 2남 1녀를 두었으니 덕배(德培)는 현령이고 다음은 극배(克培)이니 재주있어 과거 재목으로 일컬어졌다.

 

따님은 오익준(吳益俊)에게 출가했다. 덕배가 4남 4녀를 두었으니 정익(廷翊)과 경익(慶翊) 창익(昌翊) 양익(陽翊)이고 4녀는 숙(?) 이공(李公) 나머지는 어리다. 극배는 1남 1녀를 두었으니 사익( 翊)이고 녀는 정필(鄭 )이다. 오익준(吳益俊)이 1남 2녀를 두었으니 현국(顯國)과 정지호(鄭之浩)요, 다음은 성취하지 못했다.

 

정익(廷翊)이 2남을 두었으니 선의(善意)와 현의(顯意)이다. 송유인(宋孺人)은 옛날 법도 있는 자녀이라 글을 알고 예법을 익혔으며 더욱 소학(小學)을 익혀서 공에게 시집온 후 시어른을 공경하고 동서들과 돈돈하며 전실 아들 어루만지기를 매우 지극히 하니 사람들이 전실 소생인줄을 모르게 되었다.

 

전유인의 친정 동생이 의탁할 곳이 없으므로 공에게 권해서 데려다가 시집보냈고 직접 현령하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 아버지의 엄격함과 같았다. 시종 무태(無怠)하였다. 갑술(甲戌 : 1574)년 9월 22일에 출생해서 무신(戊申 : 1668) 7월 6일에 돌아갔고 공과 함께 같은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유인 같은 분인 옛날에 일컫는 여사(女士)로서 표할만 한 자로다. 현령군(縣令君)이 비록 낮은 자리에서 잠겨 있으나 명성이 훌륭하니 장차 나타내어 묘소에 빛냄을 기다리면서 다만 그 큰 사실만을 표시하노라.

 

[문헌]

漫浪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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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德峯 李公墓表 - 漫浪 黃㦿

 

德峯李公歿三十年所。而昌原黃某爲之墓表曰。斯可以表矣。夫表者。揚之名而勸之義也。表死以勸生。表先以勸後。表鄕以勸鄕。勸鄕以風國矣。公其備矣。曷不爲之表哉。公生而有美質。稍長知孝於親。敬養無方。父母稱曰能子。壬辰島夷難作。公家大人勤王義州。公奉母夫人避兵。克免于刳。甲乙歲極凶人相食。公入耕出賈。仰事俯育。俾百口無菜色。以及于隣比。丁酉賊再動。闌入湖西殺掠。公與家大人隱林藪間。家大人遇賊。賊加之刃。公抱持號哭。爭命一劍。賊義而捨之。業刃殊矣。十日乃歿。公旣葬服除。遂絶意世事。廢擧子業。而曰余不得與余父同死于兵。余其非人子。而何心立於世。每讀小學至王裒事。輒廢卷流涕。痛終身不衰。其事亡也如存。齊明潔誠。久而彌篤。斯其爲孝也。公有弟二人。求分而不忍離。同居而無間言。有過而歸諸已。割產業轍婢侍而周之無少吝。又有兩堂兄。公常父事之。斯其爲友悌也。公與宗黨睦。與鄕里厚。趣人之急。甚己之私。與朋友信。而所取交皆一世聞人。其不謂長德哉。公敎諸子。諄諄引以義方。或語及世之政令。人之長短。必嚴責。惟詩書經史是課。篤行力學。竟有所立。其不謂賢父兄者哉。嗟夫。公之德之行。幾乎其盡倫乎。表若是。其不有勸者乎。其子孫不有念其先者乎。生者不有愧于死者乎。其鄕之人不有慕而效者乎。自是而風之國。未必非斯表也歟。按李氏慶州人。鼻祖謁平。與羅祖同時。自羅洎麗。冠冕赫世。累傳而入我光廟朝。鷄林君襄僖公興商。於公六代祖也。曾大父曰玳。大父曰成瑚。考曰宏。娶洪州李氏。某官光豪之女。以隆慶丁卯十二月三日生公。諱宗吉字君迪。德峯其號。終于萬曆丁巳五月九日。得年僅五十一。葬于懷德荊江之陽三政洞亥坐巳向之原。公先娶遂安李氏。夢說之女。有婦道夭。擧一男曰國培。又夭。繼配恩津宋氏。琡之女。生二男一女。曰德培。文科今爲縣監。次克培。稱才擧人。女吳益俊。德培有四男三女。星章,奎章。女趙璛。餘幼。克培有一女幼。吳益俊有一男二女幼。宋孺人故法家子。通書史閑禮防。尤習小學。旣歸于公。▒尊章敦娣姒。撫前孺人之子甚至。人不知其異出。前孺人之弟孤無依。勸公迎歸嫁遣。親授縣監書。視父嚴。始終無違德。生于某年某月某日。歿于戊申七月六日。與公同原葬。噫。若孺人者。其古所謂女士。而亦可以表者矣。縣監君雖沈埋下寮。而聲望藹蔚。其將顯揚而賁墓道也。有待焉。第表其大者云。

 

漫浪集卷之九 / 碑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