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찰(監察) 이군(李君) 묘갈음기(墓碣陰記)
생졸년 : 1562년(선조 25)~1633년(인조 11)/壽72歲
공은 휘는 이건(以健), 자는 성지(誠之), 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중고(中古) 시대의 명인(名人)으로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된 원(黿)의 4대손이다.
증조부 수(洙)는 군수를 지냈으며, 조부 개윤(愷胤)은 의영고 영(義盈庫令)을 지냈다. 부친 홍업(弘業)은 소경대왕(昭敬大王) 24년(1591)에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아 경성도호부 판관(鏡城都護府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임진년(1592, 선조25)에 우리나라가 큰 난리를 겪었을 때 함경도에서는 백성들이 모두 배반을 하고 왜적의 형세가 갈수록 강해져서 두 왕자가 모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각 고을에서 앞다투어 자신의 수령을 포박하여 왜적에게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선부군 또한 반란군에 의해 포박당해 적들에게 넘겨졌고 가족들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난리를 맞자 선부군이 생각하기를 ‘집안이 온전하게 보존될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는 미리 공에게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북쪽 지방 깊숙한 곳으로 피난을 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대부인은 무사할 수 있었다.
공은 가족들이 변을 당한 소식을 듣고 울면서 대부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우위장(右衛將) 오응태(吳應台)의 군중으로 가서 종군하였다. 그곳에서 공은 선부군이 적의 군중에서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이번에는 또 대신들의 윽박에 의해 행재소(行在所)에서 죄를 얻었다는 소식과 모친 이씨(李氏)와 아내 윤씨(尹氏)가 난리 중에 모두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선부군이 계신 곳으로 왔다.
그곳에서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고 대신들의 구원에 힘입어 선부군이 죽음에서 풀려나 길주(吉州)에 유배되었고, 그 후 4년이 지나 상의 관대한 처분을 받아 사면되었다. 이로 인해 북청(北靑)의 거산역(居山驛)에서 우거하였다.
1년이 지나 선부군이 별세하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른 후 7년이 지나 대부인이 별세하였다. 공이 난리와 우환을 당하여 고생과 어려움 속에서 전후로 상을 치른 것이 9년이나 되었다.
광해군 2년(1610)에 봉자전 참봉(奉慈殿參奉)에 제수되었고 조지서 별제, 의금부 도사, 내섬시 직장,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워진 뒤로 총애받는 신하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 때, 공은 강직하게 맞서 권세가들에게 굽실거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공은 관직을 잃은 뒤로 벼슬살이를 단념하고 임단(臨湍)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임단에 선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72세에 별세하니, 숭정 6년(1633, 인조11) 모월 모일이다.
전 부인은 군수 윤극인(尹克仁)의 따님으로, 난리 중에 절개를 지키다 죽었으며 딸 둘을 낳았다. 사위
두 사람은 홍직(洪溭)과 정호제(丁好悌)인데, 정호제는 진사이다.
후 부인은 파평(坡平) 윤삼성(尹三省)의 따님으로, 어질고 지극한 성품을 지녀 노복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었다. 전 부인의 사위 홍직의 부부가 모두 죽고 그들 사이에 딸 둘이 있었는데, 혼인을 할 때까지 부인의 손에 양육되었다.
부인은 공보다 열다섯 살 아래로, 공이 별세한 지 8년 뒤에 부인이 별세하니, 숭정 14년(1641, 인조19) 모월 모일이며 향년 65세였다. 아들 언무(彦茂)는 훌륭한 행실로 이름이 났으며, 사위는 윤상(尹相)이다. 언무의 아들은 셋으로, 태래(泰來), 태양(泰陽), 태만(泰萬)인데, 태래 또한 훌륭한 선비였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공에게는 또 서출의 아들 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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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소경대왕(昭敬大王) : 선조(宣祖)의 시호이다.
[주02]함경도에서는 …… 되었고 : 전주(全州)에서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된 국경인(鞠景仁)이란 자가 있었
는데, 그곳에서 아전으로 있다가 1592년 5월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함경도에 침입하여 회령에 박
두하게 되자 경성부(鏡城府)의 아전으로 있던 숙부 국세필(鞠世弼), 명천(明川)의 아전 정말수(鄭末守) 등
과 함께 고을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칭 대장이 되어 이곳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온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그
리고 그들을 수행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결박하여 가등청정 진영에 넘겨주어
조정에 대한 한풀이를 하였다. 《宣祖實錄》
[주03]대신들의 …… 얻었다는 : 왜장 가등청정이 강화 문서를 작성하여 포로가 된 두 왕자와 신하들에게 강제로
서명하게 한 뒤 그 문서를 조선에 전달하기 위해 같은 시기에 잡혀온 이홍업을 지목하여 그로 하여금 문서
를 가지고 행재소가 있는 의주(義州)로 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홍업은 적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행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다. 《宣祖實錄 25年 10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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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監察李君墓碣陰記
公諱以健。字誠之。姓李氏。本慶州人。中古名人贈承政院都承旨黿之四世孫也。曾大父洙。仕至郡守。大父愷胤。爲庫令。父弘業。我昭敬二十四年。以持平。忤於當路者。貶鏡城都護府判官。明年壬辰。東方大亂。咸鏡道皆叛。賊勢益強。二王子皆被執。郡縣爭縛長吏以迎賊。先府君又爲叛卒所縛降。家皆陷。當亂。以爲家全不全。不可知。嘗命公以太夫人。避亂窮北深處。以故太夫人得全。公聞變泣辭太夫人。往從右衛將吳應臺軍中。聞先府君還自賊中又爲大臣所拘持。在行在所得罪。而母李氏,妻尹氏。亂中皆自殺云。遂來先府君所。上疏訟冤。賴大臣救之。流吉州。四年。上寬赦之。因寓居北靑居山驛一年。先府君歿。旣反葬之。七年。太夫人歿。公當亂離憂患。積苦艱難。前後持喪又九年。光海二年。爲奉慈殿參奉。歷造紙署別提,義禁府都事,內贍寺直長,司憲府監察。旣光海政亂。嬖婞用事。公抗直。不肯卑事權貴。以此罷。公旣失職。絶意仕宦。自老於臨湍。爲丘墓鄕故也。年七十二歿。崇禎六年某月某日。前夫人。郡守尹克仁之女。亂中旣守節死之。而生二女。其二壻。洪溭,丁好悌。好悌進士。後夫人。坡平尹三省之女。又賢有至性。恩義信於僕妾。前夫人壻洪溭。夫妻皆亡。有二女。育於夫人。以至成嫁。夫人少於公十五歲。公歿八年。夫人歿。崇禎十四年某月某日。爲六十五歲。男彥茂。以善行聞。壻尹相。彥茂之子三人。泰來,泰陽,泰萬。泰來亦善士。不幸早殀。公又有庶出子二人。
출전 : 記言別集卷之十九 : 미수 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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