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비운의 천재 독립운동가‘이상설’ - 불꽃처럼 피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다

야촌(1) 2013. 4. 8. 14:24

 비운의 천재 독립운동가‘이상설’ - 불꽃처럼 피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다. 

 

 

다 태워라, 하나도 남기지 마라


헤이그 밀사로 이준은 알아도 이상설은 모른다. 미국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과 윤병구는 알아도 이상설은 모른다. 시베리아 독립운동사에선 유인석이, 성명회 활동에선 유인석과 김학만이 더 유명할 뿐 이상설의 이름은 숨겨져 있다.

 

그는 안중근이 말하던 당대 최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는데 왜 후손들에게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1917년 3월초 낯선 땅 연해주에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일화를 대략 소개하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해진다.

 

“모든 것이 미완성이다.

내가 후세에 무슨 면목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

동포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이에 내 모든 것을 이미 불태워 없애버리고 말았다.

지금 당장 남은 것은 내 육신뿐이니 이것도 불로 태워 죽은 찌꺼기조차 남기지 말라.

내 국토를 잃었으니 어디에 누를 끼치겠는가?”

 

유지를 받들기 위해 모인 13명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남긴 이상설의 마지막 유훈이었다. 그의 소신은 “패자는 선두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로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고종의 밀사로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권을 잃게 한 자책으로 그는 자신의 불충성과 부족함을 놓고 평생을 괴로워했다.

 

그는 과연 그렇게 부족한 인물이었을까?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처형당하기 전에 이상설에 대해 논평한 바 있는데 그 논평의 일부가 전해져 온다.

 

“이범윤과 같은 인물 1만 명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게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를 몇 차례나 만나 봐도 그릇이 크고 사리에 통하며 대신의 그릇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세계 대세에 통하며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발달을 기도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은 이 분일 것이다…”

 

이범윤은 간도 독립운동의 대명사다. 그는 이상설과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간도를 몸으로 지켜낸 위대한 분이다. 그를 1만 명 모아도 안 된다는 이야기는 지나친 과장일 것이다. 게다가 옥중 안중근의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 나와 전해진 것이어서 어느 정도 정확한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대한독립운동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비중을 생각할 때 이상설의 인물 위치나 크기가 어떤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 대학자이자 천재 정치가


이상설은 원래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7세 때 부유한 전직 관료의 양자로 들어가 학문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그는 1895년 25세의 나이에 갑오문과에 급제했는데 주변의 유학자들로부터 이율곡의 뒤를 이을 정도로 빼어난 유학 실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것은 그가 서양학문에도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후일 고종 황제의 정치고문이던 허버트 박사와 교류하면서 영어, 불어를 독학하고 구미의 정치학과 경제, 문화, 화학, 수학을 두루 섭렵했고 법학, 천주교의 서학까지를 통달해 당대 최고의 천재라 불리게 됐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보자. 항일운동을 정신적으로 이끌었던 이 신문 주관 베텔의 칭송이다.
“대한의 학자 중 제 일류이니 재성(才性)이 절륜하고 동서학문을 다 밝게 깨달았다.”

 

그가 어느 정도로 대한제국에서 주목 받는 지도자 감이었는가를 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 그가 뛰어난 실력을 보이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그를 환대한 기록이 있으며 26대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즈벨트도 그를 사적으로 접견했고, 영국 학사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주기도 했다. 또 독일 황제는 그에게 권총을 선물할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런 외견적인 능력 외에도 그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한 번 결심하면 반드시 실천에 옮기는 강한 실천력과 언행이 늘 일관해 흠을 잡을 수 없었다는 점으로 동료나 후배들의 존경을 받게 됐다.

 

언행일치 리더십으로 존경 한 몸에 받아


이상설은 급제 후에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몇 번이나 사임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은 채 실력을 쌓다가 1803년부터 관직에 나갔다. 1905년 9월 법무협변으로 임명됐고 11월에는 의정부 참찬으로 승진했다. 그 달 17일 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5차례에 걸쳐 사직 상소를 내고 일본의 부당함과 매국노들의 파렴치한 행적을 비판했다.

 

고종실록의 기록을 옮겨 보면 이상설의 서슬 시퍼런 매국노들에 대한 성토를 엿볼 수 있다.
“업드려 아뢰건대 신이 이번 조약 체결을 볼 때 이는 무효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팔아 먹은 도적들을 처벌하십시오. 전대미문의 이적 행위를 한 이들은 매국의 도당들입니다.

 

신은 분혈이 치솟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고종46권, 42년(1905, 대한 광무(光武) 9年) 11월 24일, ‘이상설이 한일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에서 발췌)

 

이상설은 조약 체결 전에 이미 민영환, 한규설 등을 찾아 다니며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 죽음으로 항의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협박과 회유로 조약이 맺어졌다. 감금돼 있다가 풀려난 이상설은 참정대신 한규설과 원로대신 민영환 등과 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며 투쟁에 돌입했다.

 

이후 조약을 원점으로 돌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민영환이 먼저 고종과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자결해버렸다. 이상설은 이 소식을 듣고 거리에 달려나가 “나도 국가에 충성치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머리를 땅에 찧어 자결을 시도했다. 이 당시 광경을 백범 김구가 보고 백범일지에 기록으로 남겼다.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민영환 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 길에 나서니 웬 40세쯤 돼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 상투바람으로 피 묻은 흰 명주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호위돼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상설이었다. 이날 시민들에게 응급처치를 당해 자살에 실패한 그는 두문불출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오직 충성, 밀지 받고 헤이그로 달려가


1906년 4월 18일 고종으로부터 황제의 수결(手決)과 어보(御寶)가 찍힌 백지위임장에 “어찌하든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전력을 다해 성취하도록 하라”는 밀지를 받아 밀사로 떠나게 됐다.


그는 성묘를 핑계로 감시를 벗어나 부산으로 간 다음 잠행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 갔으나 만국평화회의가 일년 연기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간도의 용정으로 가서 교포 청소년들을 모아 자주독립 정신을 가르쳤다.

 

1906년 이동녕 등과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노우키에프스크(煙秋)로 이주, 원동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우고, 간도(間島) 용정촌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교포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 와중에 다음 해 만국평화회의 회기일이 발표되자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 왔다. 거기서 만난 것이 이준이었다. 또 친러 정치가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합하여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참정관 이위종으로 한 대한제국 밀사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이위종의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갔으나 끝내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만국기자협회를 통해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공박, 세계의 언론에 호소했다.


또한 현지에서 울분으로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시립공동묘지에 안장한 이상설은 이위종과 함께 미국으로 가 항일운동을 본격화해 갔다. 이에 앞서 일본은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闕席裁判)을 열어 이상설을 주범으로 교살형에 처하고 이준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당시 순종실록 기록이다.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이 흉악한 의도로 음모를 품었던지 몰래 해외로 나가 스스로 밀사라 칭하고 못된 짓을 자행했으니 모두 사직케 하고 법에 의해 처벌하라.”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이 거짓되이 밀사라고 칭한 죄에 대하여 교형에 처하도록 하다”
(순종실록 1권, 즉위년 1907년 대한 융희 1년 8월 8일 기사)


또한 7월 18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가 고종 황제를 비난하고 황태자(양위 후 순종)의 섭정을 시작하도록 밤새 협박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로부터 사흘째 되던 20일 고종은 강제로 권좌에서 쫓겨나고 고종의 양위식이 거행됐다. 이 소식을 해외에서 들은 이상설은 눈물을 뿌리며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대해 항일운동을 공식으로 선언했다.

 

빼어난 리더십, 해외 독립운동 시발점 만들어


그는 1909년 4월까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지를 돌며 일본의 폭압적인 조약 체결을 폭로하고 국권회복을 호소했다. 그 때 그가 내건 구호가 바로 ‘대한제국의 영세중립국화’였다. 강대국 사이에서 약소국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영세중립국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 것이었다.

 

이 놀라운 발상은 결국 이뤄내지는 못했으나 당대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발상의 전환이자 대한제국의 이상적 생존법이었다는 점에서 제국들의 주목을 받았다. 다만 일본의 반대와 핍박으로 진전되지 못하고 이 제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이상설은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과 간도땅을 중심으로 해 본격적인 항일운동과 민족정신 교육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1909년 러시아 시베리아로 들어간 그는 국내와 수시로 접촉하면서 해외 한민족의 결속과 통합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성명회를 조직하고 외교적인 항일운동과 해외 거민에 대한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하자 일본은 다시 러시아에 압력을 넣어 이상설을 투옥하고 추방해 버렸다. 그는 2년을 떠돌다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가 그 유명한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도 창간했다.

 

그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주목 받는 것은 1914년에는 최초의 망명정부의 이름을 남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이 됐다는 점이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의 줄기를 하나로 뭉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1917년까지의 이상설의 삶은 동분서주,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애쓰는 고군분투의 노력이었다.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망은 2년 후 기미년 3.1 독립만세 운동으로 재현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졌으며, 결국 1945년 광복으로 이뤄졌다. 정부는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