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덕수이씨 유래

야촌(1) 2008. 10. 9. 23:19

■ 덕수 이씨 유래

 

덕수이씨 시조 이돈수 세계도(이순신장군 집안).

 

덕수 이씨는 조선시대에 105명의 문과 급제자와 정승 7명,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냈으며 중종에서 영조때까지의 300년간이 가장 융성했다.

 

덕수(德水)는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 속해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는 고구려시대의 덕물현(德勿縣) 또는 인물현(仁物縣)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덕수현(德水縣)으로 개칭하였다. 후에 해풍군(海豊郡)과 합하여 풍덕부(豊德府)로 승격하였으나, 나중에 개성부(開城府)를 제외한 구(舊) 개성군(開城郡)과 합하여 개풍군(開豊郡)이 되었다.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시조(始祖) 이돈수(李敦守)는 고려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셨으며,2세조 양준(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보승장군(興威衛保勝將軍)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되었다.

 

그 후 3 세조 소( )가 고려 고종(高宗)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시여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와 지삼사사(知三司事)· 세자내직랑(世子內直郞) 등을 역임했다.

 

개풍군 중면 덕수리 군장산(開豊郡中面德水里軍壯山) 아래에 있는 3 세조 소의 묘(墓)는 공자(孔子)를 낳게 한 이산(尼山)을 닮았다는 여니산(如尼山)을 주산(主山)으로, 동쪽에 군자암(君子岩), 북쪽에 성인암(聖人岩), 서쪽에 대장암(大將岩), 남쪽에 성현암(聖賢岩)을 거느린 야자형(也字形)의 명당(明堂)으로 소문이 난 명당(明堂)이다.

 

3 세조(소)의 아들 형제 중 장자인 윤온(4世)이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을 세워 선충경절공신(宣忠勁節功臣)에 책록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추증되어,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되셨다.

 

이때부터 우리후손들은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모시고 누대로 세거(世居)해온 덕수(德水)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명현(名賢)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내신 선조를 살펴보면, 고려 말에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에 올라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졌던 5세조 천선(千善 : 윤온의 아들)이 뛰어나셨고 4세조 윤번(允蕃)의 증손이신 7세조 변(邊: 수사재시사 공진님의 아들)이 유명하다.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하신 변(邊)은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시고 궤장을 하사 받았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한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렀다. 특히 변(邊)은 "내 평생에 남을 속인 일이 없다"고 떳떳하게 자부하셨다.

 

변(邊)의 손자 9세조 거(琚)는1480년(선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과천(果川)등지에서 탐관오리를 다스렸고,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내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언관(言官)으로 있을때 부정이 있으면 벼슬의 상하를 가리지않고 탄핵하여 호랑이 장령(掌令)으로 알려졌다.



또 의석(宜碩: 10세)의 증손이신 율곡(栗谷) 이(珥-13세)가 특출하였으니, 이(珥)는 1536년(중종 31) 부친 찰방(察訪) 원수(元秀)와 어머니 신부인(申夫人: 기묘명현 신명화의 딸)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던 날 밤에 어머니 신씨가 꿈을꾸셨는데, 흑룡(黑龍)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와 침실로 날아 들어왔기 때문에 어릴때의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부르기도 했다.

 

율곡(栗谷)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아셨다고 하며, 세살때 외조모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묻기를 "이것이 무엇 같으냐"하시니, "붉은 가죽주머니속에 부서진 구슬을 넣었도다(紅皮囊入紅珠)"하시고 답하시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시고 주야로 해통해 하시던 율곡은 어느날 연히불가(佛家)의 글을 보시고 그 사생설(死生設)에 깊이 느낀바 있었고 그 학문의 간편청정(簡便淸淨)함을 기뻐하여 세상일을 버릴생각을 했다.

 

열아홉 되던 해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 여러 벗들에게 글을 보내어 고별하고, 이내 절(寺)에 거주하면서 계(戒: 5계와 250계가 있는데 이를 지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함)와 정(定 : 마음에 동요됨이 없고 안정된 것)을 굳게 하여 침식까지도 잊고 생활하다가 그후 얼마 안되어 불교가 이치에 가까운듯 하면서 진(眞)을 혼란하게 함을 알고, 불교 학문을 모두 버리고 유학(儒學)에 전심했다.

 

22세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여, 행(11세)의 증손 안인(安仁)을 두었는데, 임진왜란후 면천(沔川)에 초당(草堂)을 짔고 벼슬의 뜻을 버린후 학문에만 진력했으며, 행(荇)의 현손 식(植: 안성의 아들)은 광해군(光海君)때 여러관직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에 올랐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 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다시 등용되고 대제학(大提學)과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으며,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돌아와 대사헌(大司憲) 및 형· 이· 예조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특히 식(植)은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으며, 한학(漢學)에 정통하시어 <한문사대문장가(漢文四大文章家)>의 한사람으로 손꼽히었다.

덕수이씨의 또 다른 유명 인물로는 무맥(武脈)을 형성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12세)이 있으니 그는 1545년(인종1) 한양(漢陽)에서 정(貞:11세)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1579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이르고,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봉해졌다.

 

특히 충무공은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나 용장(勇將)으로 임진왜란때 출전하는 전투마다 승리를 하였고, 적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으니, 곡창지대 전라도 일대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는데 큰공을 세웠다.

 

무인 (武人)으로서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후손들에게 <대장부가 세상에나서 쓰이게되면 국가에 죽음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밭을 가는것도 족하다 하시고. 권귀에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도적질 한다면 나는 심히 부끄러워할 것이다.> (大丈夫生用則效死不用則耕於野足矣 若取媚權貴李竊)라 유훈(遺訓)을 남겨 대대로 지키도록 당부 하셨다.

 

충무공의 조카 완(莞)은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아군의 사기를 위하여 시신를 배안에 숨겨두고 독전 (督戰)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올라 이괄(李适)의 난을 토평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올랐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의주(義州)에서 청병(淸兵)과 전투를 하다가 손가락에 적의 화살을 맞아 더 싸울수 없게되시자,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

하며 한탄 하고는 탄약을 쌓은위에 종제인 신(藎)과 함께 누워 불을 질러 폭사(暴死)했다.

 

또한 충무공의 5대손 봉상(鳳祥)은1702년(숙종 28) 무과(武科)에 급제후, 형조 참판(刑曹參判)· 포도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다가 권신(權臣) 이광좌(李光佐)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좌천되어 영조(英祖)때 일어난 이인좌(李麟佐)난때 난군에게 피살되었다.

 

장신에 길고 장엄한 수염과 호탕한 음성으로 주위를 압도하였던 봉상의 죽음에 어머니 정씨(鄭氏)는 "내 아들이 선조의 유훈에 어김없이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통곡할 필요가없다" 하고는 울지를 않았다고 한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춘영(春英)이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안승우(安承禹)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단양(丹陽)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을 격파했고, 류인석(柳仁錫)의 막하에서 중군(中軍)이 되어 조령(鳥嶺)· 달천(達川)· 안보(安保) 등지에서 일본 연합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내금위장(內禁衛將) 민하(敏夏)의 아들 세영(世榮)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했으며, 민화(敏華)와 일영(鎰永)도 항일투쟁과 방공전(防共戰)에 혁혁한 훈공을 세워 명문 덕수이씨의 전통을 더욱 빛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한에 총 15,711가구, 50,486(남:26641명 여:23845명)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계파(系派)

 

◇감사공휘경용파(監司公諱景容派)
◇군수공휘양신파(郡守公諱良晨派)
◇문정공휘식파(文靖公諱植派)
◇ 문혜공휘안눌파(文惠公諱安訥派)
◇ 병사공휘권파(兵使公諱권派)
◇ 부장공휘원순파(部長公諱元諄派)
◇북계공휘목파(北溪公諱穆派)
◇사의공휘원복파(司議公諱元福派)
◇사직공휘정철파(司直公諱廷喆派)
◇생원공휘의연파(生員公諱宜衍派)
◇승지공휘의영파(承旨公諱宜榮派)
◇어모공휘용파(禦侮公諱溶派)
◇옥산공휘우파(玉山公諱瑀派)
◇용제공휘행파(容齊公諱荇派)
◇우계공휘광파(雨溪公諱洸派)
◇율곡공휘이파(栗谷公諱珥派)
◇율리공휘요신파(栗里公諱曜臣派)
◇의정공휘경민파(議政公諱景閔派)
◇장령공휘인궤파(掌令公諱仁軌派)
◇적성공휘자하파(積城公諱自夏派)
◇정제공휘번파(定齊公諱번派)

◇주부공휘찬파(主簿公諱찬派)
◇죽곡공휘선파(竹谷公諱璿派)
◇직장공휘원겸파(直長公諱元謙派)
◇집의공휘포파(執義公諱포派)
◇참판공휘희신파(參判公諱羲臣派)
◇첨정공휘총파(僉正公諱叢派)
◇충무공휘순신파(忠武公諱舜臣派)
◇판서공휘경헌파(判書公諱景憲派)
◇하원군휘심파(河源君諱심派)
◇학생공휘오파(學生公諱오派)
◇함종공휘백복파(咸從公諱百福派)
◇해풍군휘극파(海豊君諱극派)
◇현감공휘아파(縣監公諱莪派)
◇호군공휘명파(護軍公諱蓂派)
◇효정공휘경증파(孝貞公諱景曾派)

 

野村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