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오부인 여흥민씨 묘지명 병서 - 간이 최립
(碧梧夫人驪興閔氏墓誌銘 竝書)
[생졸년] 1569년(선조 2)~1609년(광해군 1) /향년 41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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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공(李公)의 처 정부인(貞夫人) 민씨(閔氏)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내가 서경(西京)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을 적에, 지금 평안도관찰사로 재직 중인 이공(李公)이 부인상을 당하였다. 그런데 장차 영구(靈柩)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즈음에, 방백이 부인의 묘지명을 써 달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이에 내가 혼자서 생각하기를, ‘내조(內助)한 미덕이 누가 보아도 인정할 만큼 훌륭하기 때문에 이렇게 청하는 것이리라.’ 하였다. 공은 원래 겸약(謙約)을 위주로 집안을 이끌어 오면서 시종일관 그런 자세를 견지하였으니, 한마디라도 부화(浮華)한 내용이 없을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공이 말하기를,
“저의 처는 향리에서 생장하다가 나이 19세에 저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저의 처에게 무슨 특기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기야 했겠습니까마는, 부도(婦道)를 제대로 행하면서 집안일을 질서 있게 다스린다는 것만은 대강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친께서 일찍이 저에게 ‘나를 잘 섬기고 있으니, 너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셨으므로, 삼가 그런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 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제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함께 서울로 와서 살게 되었는데, 남쪽 변방이 병화(兵禍)를 입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급히 청주(淸州)로 돌아가서 모친의 안부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서울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서로 연락이 끊긴 나머지 다시 생사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약간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제 처의 조모(祖母)와 백숙부(伯叔父)가 그때까지도 각자 서울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제 처가 그곳으로 가는 대신에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저의 백부에게 급히 달려가 의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제천(堤川)의 향리까지 와서 만나 볼 수가 있었는데, 그동안 어렵고 힘든 먼 길을 찾아오면서 겪은 고초는 차마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제 처는 뿔뿔이 흩어진 난리 통에서도 미혹되지 않고 올바른 길을 좇아 스스로 보전될 수가 있었는데, 제 처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저 역시 당초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내를 더욱 중히 여기면서 공대(恭待)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1년도 채 되기 전에 지금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기에, 내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시(詩)에 이르기를 ‘잘못하는 일도 없도록 하고 잘한다고 해서 나서는 일도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야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하겠지만, 잘한다고 해서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역시 그렇게 하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으로 말하면 이미 부도(婦道)를 알고서 집안일을 제대로 다스렸을 뿐만이 아니라, 시어머님에게도 사랑을 받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인이 자기 부군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유순하고 현숙한 그 품행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변고를 당하여 사태가 급박해졌을 때에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근본정신을 미루어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부군에게 중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평소에 시(詩)와 예(禮)의 학문을 연구하여 참으로 경중을 아는 사군자(士君子)의 행동과도 같은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옛날에 뛰어난 학행을 지녔던 어느 여성들에게 비교하더라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이니, 어찌 칭찬하는 말을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하였더니,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대체로 살펴보건대, 부인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로서,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휘(諱) 경남(敬男)의 딸이요,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 효증(孝曾)의 4세손인데, 만력(萬曆) 신축년(1601, 선조 34)에 정부인(貞夫人)으로 봉해졌다.
경연(慶衍)이라는 이름의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제 겨우 11세이고, 세 명의 딸 가운데 장녀는 사인(士人) 이창운(李昌運)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기유년(1609, 광해군 1) 겨울에 41세의 나이로 평양(平壤) 관아에서 세상을 떠나, 이듬해 모월 모일에 진천현(鎭川縣) 모좌(某坐) 모향(某向)의 언덕에 안장(安葬)되었다.
방백공의 이름은 시발(時發)이요. 자(字)는 양구(養久)이며, 경주(慶州)가 본관으로 청주(淸州)에 선영이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방백의 가문으로 시집와서 / 室于大藩。
집안일 알뜰하게 경영하였고 / 屬始經營。
난리의 와중에도 바른길 찾아와서 / 來陪縞茀。
다시금 안락하게 영광을 누리신 분 / 汔復燕榮。
어린아이들 아직 양육해야 하고 / 苗秀在毓。
더구나 태아도 자라고 있는 터에 / 矧腹未生。
피난길 벗어나 부군을 따라와서 / 昔竄謹從。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뜨셨는가!? / 胡卒冥行。
울창하게 우거진 그대의 무덤 앞에 / 佳城鬱鬱。
소리 죽여 우는 사람 그 누구인가 / 誰與呑聲。
이렇게 글을 지어 빗돌을 묻었나니 / 鑽辭埋石。
혼령께서는 부디 알아주시기를 / 神理尙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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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平安道觀察使李公妻貞夫人閔氏墓誌銘 幷序 - 崔岦(최립)
以岦寓西京也。今居守方伯李公哭夫人。將歸其喪。宿戒以幽堂之刻。於是竊意內助之懿有足徵者爲請焉。公故謙約帥家。始終以之。宜毋一言之華則。曰夫人生長鄕貫。年十九而歸某。何有美故可紀。獨粗知婦道。治家事有序。母夫人嘗以語某曰。是善事我。不負汝。謹識之而已。居數年。某釋褐入仕。挈之在京。聞國南垂被兵。遽歸省母于淸。未有以處家。而京城俄亦不守。不復相聞死生矣。乃後稍得之。則夫人祖母及伯叔父。尙各家于京。夫人不以爲歸。而携持一弱女。走托于某之伯父。得以相將達堤鄕。間關之狀。不忍言。夫人卽播蕩之際。不迷所宜。從以自全。及此則某亦初不謂也。就加敬重。期不替。而今已矣。岦嘆而言曰。詩曰無非無儀。閨房之行。無非則固有。而以善自見。亦匪可欲也。夫人旣知婦道。而治家事有以媚于姑氏。夫人有以不負于夫子。其柔淑之行。已足以出於尋常。及爲變故所迫矣。則惟其推本於三從之地。以能取重於一移之天。有若素所講明詩禮之學。眞知輕重士君子之行。求之女史。不在後覺之倫。豈得已於稱述也哉。公泣曰。然。蓋夫人驪興閔氏。成均進士諱敬男之女。驪川府院君孝曾之四世孫。萬曆辛丑。封貞夫人。有子一人名慶衍。始十一歲。女三人。長適士人李昌運。餘幼。己酉冬。年四十一。卒于平壤衙中。翌年▣月▣▣日▣▣葬于鎭川縣▣坐▣向之原。方伯公名時發。字養久。系出慶州。而先兆在淸州云。其銘曰。
室于大藩。屬始經營。來陪縞茀。汔復燕榮。苗秀在毓。矧腹未生。昔竄謹從。胡卒冥行。佳城鬱鬱。誰與呑聲。鑽辭埋石。神理尙明。
<끝>
[주01] 잘못하는 …… 한다 :
원문은 ‘무비무의(無非無儀)’로,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보인다.
[주02] 삼종지도(三從之道) :
옛날에 여자가 집에 있을 때에는 부친을 하늘처럼 모시면서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서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던 도리를 말한다. 《儀禮 喪服》
간이집 > 簡易文集卷之九 / 稀年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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