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춘(李起春)
1541년(중종36년)-1597년(선조 30), 조선 전기의 고령(高靈) 출신의 유학자로,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계욱(季郁), 호는 옥산(玉山)이다.
어릴 때부터 성현지학(聖賢之學)을 강구(講究)하여 학문과 덕행이 높았으며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송암(松菴) 김면(金沔),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逑), 현풍의 대암(大庵) 박성(朴惺), 인동의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등의 당세 명현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들은 가까운 이웃 고을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릴 적부터 글을 읽고 논하였는데, 중년 이후에 학문과 행의가 성숙해지자 도의지교(道義之交)로서 계합하게 되었다.
훗날 이들을 낙강칠현이라 불렀는데, 이는 1589년 5월 이들 일곱 사람이 개산포에서 사망정(四望亭)에 이르는 낙동강 위에서 선유(船遊)하면서 ‘만경창파욕모천(萬頃滄波欲暮天)’이라는 시구 7자로 분운작시(分韻作詩)한 7편의 시가 당시는 물론이고 훗날에도 널리 전파되면서 연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송암 김면의 의진(義陳)에 참전하였다.
한강 정구가 제문을 보내어 학문과 덕의(德義)를 칭송하였으며, 후손인 도사(都事) 이진상(李震相)이 행장을 찬하였다. 1666년(현종 7) 사림들이 도암서원(道巖書院)에 제향을 하였다. 묘갈명은 승지(承旨) 장석신(張錫藎)이 찬하였다.
묘(墓)는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의 고방우건좌(高方右乾坐)에 있다.
[참고문헌]
『고령군지』(고령군지편찬위원회, 1996)
『성산이씨세보편찬위원회』, 『성산이씨세보』(대보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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