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재사당 적거유허비(再思堂 謫居遺墟碑)

야촌(1) 2008. 11. 16. 14:22

↑재사당 이선생 적거유허비(再思堂李先生謫居遺墟碑)

 

재사당(再思堂) 이선생의 적거 유허지(謫居遺墟地)인 이곳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복암 마을은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오른쪽의 비석이 1604년(선조 37) 외증손 우복룡[禹伏龍,1547∼1613)]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던 때에 세운 입명 비(立命碑)이고, 왼쪽의 작은 비석은 1731년(정조 7) 방손 이형곤(李衡坤. 1672~1733, 좌의정 화곡 경억의 손자)이 나주목사로 부임해 이명곤[李明坤, 1685년(숙종 11)~1750년(영조 26)]과 함께 세운 적거 유허비(謫居遺墟碑)이다.

 

적거 유허비의 비문은 나주목사 이형곤(李衡坤)의 부탁으로 전의인 이조판서 대제학 이덕수(全義人 吏曹判書 大提學 李德壽) 공이 지었다. 맨 앞쪽의 좌측에 있는 비는 1979년[2000?]년에 후손 정읍 문중에서 세운 유허비 및 입명 비 중수기념비이다.

 

재사당(再思堂)의 입명 비(立命碑)의 규모는 비신(碑身) 높이 120㎝, 넓이 56㎝, 두께 19㎝, 위에 이수는 넓이 85㎝, 높이 50㎝, 폭 40㎝의 돌에 특이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적거 유허비는 폭 48㎝, 높이 120㎝, 두께 21㎝의 크기로 이수 없이 비신 만 있다.

 

역사적 사실(史實)이 깊이 베인 이 두 개의 비(碑)는 지금은 보호 관리도 극히 미흡(未洽) 한 상태로 나주시 노안면 야산(野山)의 숲 속에 묻혀 있어 가끔 찾는 사학자(史學者)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재사당의 후손들은 물론 향촌(鄕村) 유림(儒林)들과 지방정부(地方政府)의 관심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再思堂李先生謫居遺墟碑

再思堂李先生少遊店畢齋之門以氣節文學顯名於燕山朝及史禍作與寒暄濯纓諸名賢俱罹奇禍至今譚者爲之氣短其事略見於淸陰金文正所撰碣文中矣蓋先生坐議謚戊午始謫關西之郭山三年而移羅州至甲子被禍州之東十里地名伏巖至今傳爲先生所居先生外曾孫禹監司伏龍曾牧是州就遺㠊堅短碑以識之歲久而稍剝蝕至 聖上卽位之二年丁未先生七世孫衡坤繼牧是州摩挲感慕旣又惜其不載謫居遘禍之歲月恐後人無所考据將別治石以記而천屬筆於余余少之時遍行四方至名賢所居之鄕必求見其遺跡而無能有識之者輒爲之帳然以恨今人士之南行過是州者賴此片石將有以想像先生之遺風於荒榛野草之間徘而徊有不忍去者李君斯擧其於表先懿牗末俗顧豈不大哉凡天下之事必其接於耳目而後乃能動乎其中雖義烈所就其跡炳然苟曠日不交於前鮮有不浸㤀此又李君微意之所存也李君之堂弟明坤適牧光州亦與聞其役云(李德壽)

 

[국역]

재사당 이선생은 젊어서 점필재[김종직]에게 글을 배웠으며 기개와 절조 문장과 학문으로서 연산조에서 명성이 뛰어났고, 사화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한훤 김굉필, 탁영 김일손과 같은 여러 이름난 어진이들이 함께 뜻밖의 불행을 만났으니, 지금에 와서는 말하기에도 지쳐버렸다.

 

그의 사적은 대강 청음(문정공 김상헌)이 지은 비문 속에서 보았지만 대체로 선생은 시호를 의정한 것으로 죄를 입어 무오년(1498)에 처음 관서 땅 곽산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나주에 이르러 화를 입었다.

 

나주 동쪽으로 십리 되는 복암(伏巖)이라는 곳이 선생이 귀양 살이 하던 곳이라고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감사를 지낸 외증손 우복룡이 지난 날 이 고을을 다스릴 때에 귀양 살이하던 옛터를 찾아가 작은 비석(입명비)을 깎아 세워서 이를 알게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흘러서 점점 벗겨져 떨어져 나갔다. 영조가 즉위한지 2년 정미(1727) 칠 대손 형곤이 이 고을을 이어서 다스리게 되자 빗돌을 어루만지며 가슴 깊이 느껴 사모하며 또한 귀양살이를 하다 화를 만난 때의 사적을 써 넣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 하며 후세 사람들이 참고로 근거 삼을 만한 것이 없음을 저어하여 따로히 돌을 다듬어 세우고자 나를 보고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젊었을 때 두루 사방을 돌아다니며 이름난 어진이가 살던 고장에 이르면 반드시 그 옛 자취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능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없으면 갑자기 서운하고 섭섭하여 한탄하였다.

 

오늘날 학덕이 있는 명사로서 남쪽으로 이 고을을 지나는 사람은 이 비석에 힘입어 또한 선생의 남아있는 명성을 상상하며 거친 개암나무와 잡초우거진 사이를 돌아다니며 차마 떠나지 못해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이군이 이와 같은 선조를 나타내는 일을 하는 것은 타락한 풍속을 아름답게 인도하는 것이니 돌아 보건데 어찌 큰일이라 하지 않으리오. 무릇 세상일이란 반드시 그것을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듣고서야 그러는 가운데 생각하게 된다.

 

비록 외롭고 장열하게 나아간 바 그 자취가 빛나고 환하다 하더라도 만일 오랫 동안 앞에 나아가 접하여 보지 않으면 점점 멀어져서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점 또한 이군도 생각하는 바이다.

 

이군의 사촌동생 명곤이 광주목사로 있다가 마침 그 역사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같이 그 일에 가담하였다고 이르는 것을 들었다.

 

●우복룡(禹伏龍)

◇생졸년 : 1547년(명종 2)∼1613(광해군 5).

◇나주목사 재임기간 : 1602년(선조 35) 4월 3일 부터~1604년(선조 37)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현길(見吉), 호는 구암(懼庵) 또는 동계(東溪). 현령 효친(孝親)의 증손으로

, 할아버지는 순좌(舜佐)이며, 아버지는 숭선(崇善)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이형곤(李衡坤)

◇생졸년 : 1672. 11.04(현종13)-1697. 11. 22(숙종 23년) /향년 25歲

◇ 화곡 경억의 손자, 노포 인소(寅熽-화곡의 장남)의 차자(次子),

◇나주목사 재임기간 : 1727년(영조 3) 10월 13일 부터~1733년(영조 9) 4월 24일 까지

 

●이명곤(李明坤),

◇생졸년 : 1685 (숙종 11)- 1750(영조 26)

◇좌의정 화곡 경억의 손자. 이조판서 대제학 이인엽의 3男으로. 충주목사 및 ‧훈련원(訓鍊院) 도정(都

正)을 지냈다.

 

[참고문헌]

『나주목읍지』 1993)

『경주이씨 오촌공파현대보』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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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

 

◇경주이씨 24世

[생졸년] 미상(1471년 추정)∼1504년(연산군 10). 향년 33세

[문과] 성종(成宗) 20년 (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 (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1등(一等) 2위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7세손으로, 현령(縣令-從五品) 공린(公麟)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판서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그는 1480년(성종 11)에 진사에 장원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正九品)이 되었으며 1495년(연산군 1)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호조좌랑(戶曹佐郞-正六品)을 거쳐 봉상시(奉常寺-正三品衙門)에 재직하면서,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시호(諡號)를 문충공(文忠公)으로 의정(議定)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1498년(연산 4) 무오사화때 황해도 곽산(郭山)으로, 유배(流配)되었다,

 

그 후 2년 뒤인 1500년(연산 6)에 나주(羅州-오늘날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복암마을)에 양이(量移 : 먼 지방으로 유배했던 사람을 죄를 경감해서 가까운 지방으로 옮기는 것)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때 서울로 불러 10월 24일 참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