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觀瀾李先生旌孝閣記
(觀瀾先生은 李承曾을 말함).
신유한(申維翰) 撰
余齔時。從先人已聞雞林古有君子觀瀾先生。以孝行聞。朝廷屢徵不就云。盖余誦名於二百年後。詢其文獻則蕩于燹。洎白首而拾於桑梓耆舊窹歌弗諼之跡者僅二三。謹按皇明嘉靖己亥。先生生于府南鳳凰㙜下。天資篤實。志行淑特。事父母以不若曾閔爲恥。餘力而攻文章。苕華燁煜。嘉靖戊午。擢司馬兩試。聲駸駸顯矣。旣而嘆曰科擧之塗。令人心梏。吾何以奪吾志。遂不復應。專心於力行孝弟。日用言動。率由天理。葬親而廬墓三年。足跡未嘗一踐家室。哭泣哀悲。人不堪聞。虎至苫下。屢以鹿豕供奠。時有抄盜肆行。聚倘剽刦。州縣不能禁。盜過其里。輒相戒勿令孝子驚動。望風辟去。鄕閭仰之。樹巨石爲碑。高丈餘。顯刻曰孝子里。今其石面三字若新。志於碑陰者。磨滅不可攷。字細故也。先生之學。如錦絅而日章。爲明王所知。一命以寢郞。再命以典籤。皆力辭不赴。晩景自號曰觀瀾。而置別業于金鶴山下水流環碧處。築室曰樵漁窩曰三會堂。築土溪上曰盟鷗㙜。今猶故址的歷。有先生詠歌之什若干篇在人口。其詩爽朗絶俗。彷彿乎西湖處士梅鶴之風。比先生易簀而朝命旌閭。竪之先生舊宅孝子里。今上己巳春。先生六代孫世重世胤。與其子姪德觀景觀及同源族若干人。日拊跡而噫。以棹楔年久陊剝。撤而新之。爰有采棟朱欄。翼然煌然。以庇風雨。扁曰㫌孝閣。是其㫌門與扁閣。皆府尹趙公明鼎筆也。役旣竣。又以記文屬余。維翰起拜曰於戱盛哉。惟先生令名偉蹟。具載三綱行實輿地勝覽東京志。申以我宣廟㫌閭之命。炳烺宇宙。百行之源。卓卓爲堯孔所大。斯足以通天壤匝古今。媲三光而不墜矣。尙何恨平生著述與學問講磨之籍逸於兵火爲哉。顧諸賢之爲此擧也。亦于先生有光。遠近觀者。孰不曰諸賢襲先生餘敎。貧而好禮。若余之童而誦仰。七旬于今者。固不敢以文拙辭。謹書如右。
[자료출전]
◇청천집(靑泉集)
첨성대 좌측 뒤로 문호사가 보인다.
경주 첨성대 옆 27호 고분앞에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문호사라는 사당이다. 문호사는 조선중기(1515-1599) 성리학자 관란(觀滿) 이승증(李承曾)선생의 서원 유적지로,공의 충효정신을 받들기 위하여 제향하는 곳이 다.
문호사(汶湖社)와 정효각(旌孝閣)
문호사(汶湖社) 와 정효각(旌孝閣)
관란 이선생 정효각(旌孝閣)
관란이선생정효비
아래에 문호사 안내판의 내용을 옮긴다.
문호사는 조선중기[1515-1599] 성리학자 관란(觀滿) 이승증(李承曾)선생의 서원 유적지로,공의 충효정신을 받들기 위하여 제향하는 곳이다. 선생은 신라(新羅) 좌명공신 (位命功臣) 인 휘(講) 알평(講平)의 후손으로,중종(中宗) 10년(1515)에 경주부 중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뛰어난 충효를 기려 세인들은 그의 시묘(侍墓) 살던 지명 (地名)을 충효(忠孝)마을로 불렀다. 중종 37년(1542)에 보문보(普門狀)를 막아내 한발에 대비한 공덕이 오늘날까지 빛나고 있다. 명종(明宗) 13년(1558) 사마양시 (司馬兩試)에 합격하고도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 전후 일곱 차례나 관직 의 제수를 사양하여 세칭(世稱) 칠징사(七微士)로 존칭(尊稱)되고,오직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시다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78세의 노령임에도 경산 자인(慶山 慈仁)에서 창의(倡義)하여 적진(敵陣)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대구지역 사림(士林)에 격문(撤文)을 보내 ‘무릇 선비는 충성과 효도가 있을 뿐이니 어찌 나라가 이토록 위급한데 대구에 의기(義氣)가 적연(寂然)한가’ 하니,이를 본 대구 청도 등지의 선비들이 뒤따라 일어나 향토를 지키는데 함께했다.
선조 32년(1599) 85세로 고종(考終)하시니,나라에서 정려(施間)를 내리고 사림(士林)은 사우를 지어 제향(祭享)하였다. 순조 21년(1821)에 후손들은 공의 유고를 모아 관란 이선생문집(觀潤 李先生文集)을 발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공의 유적인 문호사(汉湖社)와 정효각 그리고 창의비가 있다. 九容箴. 九思箴, 六有箴, 三畏箴, 造化論, 易論, 詩格論 외 시 30여 편이 있다.
참고문헌 : 동경지,삼강론,여지승람,경주읍지,신라의 얼,경주풍물지 리지,관란이선생문집
사진 출처: 카메라둘러메고 대한민국방방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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