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축문. 제문

삼사당 영정 봉안문

야촌(1) 2008. 7. 4. 12:55

■삼사당 영정 봉안문

 

중국의 도학이 우리나라에 들어 왔다.

누구의 공이냐? 우리 문충 이시다.

 

주역으로부터 정주의 글을 간접으로 받아 연구하고 실천했다.

군신의 회합은 역사의 그대로요 국제간 교섭은 관중에 못지않다.

 

태산북두 같이 더욱 높고 광풍제월처럼 오래 명랑하다.

존주비민의 홍업은 청사에 빛나고 충효 누인의 지덕은 자손에게 끼치었다.

 

오직 이 신궁을 마침내 준공하니 백년간 징상이 오늘에 이뤄졌다.

더구나 이 기지는 심상한바 아니다.

 

이 목은의 강학 다 던 곳과 백이제가 주거하던 터가 각각 서북으로 밀접 되어 있음은 예기치 않았던 기적이다. 길일을 택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큰 소를 잡아 공손히 제향 한다.

 

후손 예환 근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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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환(李禮煥)

 

1772년(영조 48)∼1837년(헌종 3) 때의 조선후기 학자로. 자(字)는 치화(致和), 호(號)는 난국재(蘭菊齋), 또는 수안(洙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익재 재현(益齋 齊賢)의 후손으로. 중조 21世 석성현감(石城縣監) 마곡(麻谷) 숙지(俶祉)의 13대 손이다.

 

송치규(宋穉奎)의 문인이고, 학행(學行)으로 관찰사(觀察使)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으며. 문명(文名)이 높았고 저서로 난국재집(蘭菊齋集)이 있다. 오늘날 보령시 주산면에서 세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