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중국의 이씨연원과 발전.

야촌(1) 2010. 12. 17. 16:41

■ 중국의 이씨연원과 발전(中國의李氏淵源 發展) 

    ◎이씨의 연원에 관한 몇 가지 학설.

 

1. 영성(嬴姓)에서 기원했다는 설이다.

   요(堯)임금 때 황도[臯陶 : 일명-구요(咎繇)]가 일찍이 대리大理(士라고도 함)라는 관직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백익

   [伯益(일명-大費)]이 영성을 사성 받았다.

 

그 후 자손들이 우(虞), 하(夏), 商(상), 三代에 걸쳐 대리라는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그 자손들의 당시의 풍습에 따라 관직으로 성씨를 삼아서 이씨(理氏)라 하였다. 理氏를 李氏로 바꾼 사람에 관해서는 이이정(李利貞)이라는 설과 이귀(李耳)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이정(李利貞)이 은나라 말기에 紂王의 폭정을 피하여 어머니 계화씨(契和氏)와 함께 伊侯之墟(지금의 하남성 서부지역, 伊侯가 살다가 폐허가 된 곳)로 피신하였다.

 

참고로 伊侯之墟에 관하여 지금의 하남성 洛陽市 伊川縣 平等鄕 平等村 동쪽, 지금의 하남성 洛陽市 伊川縣 伊水가, 하남성 洛陽市 嵩縣 伊水가, 하남성 安陽市 등의 설이 있다. 이이정과 그의 어머니 契和氏는 도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산에 있는 자두를 먹어서 허기를 채웠다.

 

은나라가 망하고 나서 契和氏의 고국인 陳(수도는 지금의 하남성 周口市 淮陽縣)나라와 멀지 않은 苦縣(지금의 하남성 周口市 鹿邑縣)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이이정은 자두나무의 은혜를 고맙게 여겨서 理氏에서 李氏로 바꾸었다.

 

이 설은 당나라 때 李延壽가 최초로 주장한 것이다. 두 번째 설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姓氏考略』의 내용에 근거하면 주나라 이전에는 史書에 이씨가 보이지 않는데, 노자 이후에 史書에 이씨가 보인다고 한다.

 

이이는 이이정의 후예인데, 조상들이 대대로 理官을 지냈다. 理자와 李자는 古音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곧 李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청대의 유학자 秦嘉謨에 의하면 옛날에는 理, 里, 李자가 서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2. 자두나무를 가리켜서 성으로 삼았다는 설이다.

  『史記正義』는 『玄妙內篇』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자의 어머니가 노자를 81년 동안 임신하였다가 자

  두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왼쪽 겨드랑이를 갈라서 노자를 낳았다.” 이 설은 노자를 이씨의 득성시조로 간주하는 것이다.

 

지금의 河南省 周口市 鹿邑縣의 민간전설에 의하면 노자의 어머니가 노자를 81년 동안 임산하였다가 자두나무 아래에서 노자를 낳았는데, 노자를 낳았을 때 노자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기 때문에 노자의 어머니가 노자를 ‘나의 늙은 아들[我的老兒子]’이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서 ‘老子’라고 하였다. 노자는 태어나자마자 자두나무를 가리키면서 스스로 성을 이씨라고 하였다.

 

3. 자두나무 토템설이다.

  『東夷源流史』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씨는 大理라는 관직으로 인하여 理氏 성을 얻게 되었다. 훗날 理徵이 난을 피하여 자두를 먹어서 목숨을 부지하였기 때문에 李氏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그가 먹었던 것은 야생 자두인데, 理氏가 이 야생 자두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자두나무를 神樹로 삼았으며 또한 토템나무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씨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자두나무를 심어서 상징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풍습은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오고 있다. 예를 들어서 李白의 집에는 桃李園이 있었으며, 당나라 황궁의 뜰에는 자두나무를 많이 심었다.” 자두나무 토템설은 중국 北方李氏의 연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4. 호랑이 토템에서 기원했다는 설이다.

   이러한 설은 이씨의 토템이 자두나무가 아니라 호랑이라는 것이다. 노자가 태어났던 陳나라와 楚나라의 토템은 호랑이인데, ‘李耳’는 초나라 말로 ‘호랑이’라는 설이다. 전한 말기의 揚雄은 『方言』第八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호랑이[虎]는 陳, 魏, 宋, 楚 지역에서는 혹 그것을 ‘李父’라 부르며, 江, 淮, 南楚 지역에서는 그것을 ‘李耳’라 부르는데 혹은 그것을 ‘於䖘’라 부른다.” 龔維英이 지은 『原始崇拜綱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李耳 또한 초나라 말인데 호랑이라는 뜻이다. 노자의 고국인 진나라가 초나라에 멸망당하였기 때문에 노자는 초나라 사람이 되었다.

 

진나라는 바로 淮河유역에 속하는데 호랑이를 ‘李耳’라 부른다.” 노자의 다른 이름이 李耳인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李耳는 아마도 진나라와 초나라 민간에서 호랑이를 부르는 말일 것이다. 지금 진나라의 옛 땅의 민간에는 노자는 庚寅年에 태어났고 호랑이띠라고 전해져 온다.

 

당시의 苦縣 일대의 방언에서는 호랑이를 ‘狸兒[LI Er]’라고 불렀는데, 친척들과 이웃들이 노자를 농담조로 狸兒라 불렀다. 훗날 점차로 ‘李耳[LI Er]’로 바뀌었다. 호랑이 토템설은 중국 南方李氏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5. 老姓에서 기원했다는 설이다. 이러한 설은 주로 노자의 성씨에 대한 고증으로부터 기원한다. 즉 노자는 성이 李氏가

   아니라 老氏이며, 이씨가 노씨로부터 기원했다는 설이다. 고문자학자 唐蘭은 노자의 성이 李, 이름이 耳라는 주장은 불확실하다고 생각하였다. 郭沫若, 馬敍倫, 陳獨秀 등도 당란의 이 설에 동의하였다. 高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시에 子라 칭해졌던 사람들, 예컨대 공자, 증자, 묵자, 맹자, 장자, 혜자 등은 모두 그 성을 칭하였다.

 

하지만 유독 노자만이 ‘老聃’이라 칭하고 ‘李聃’이라 칭하지 않았다. 또한 ‘老子’라 칭하고 ‘李子’라 칭하지 않았다. 따라서 “노자의 원래의 성이 老氏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6. 소수민족이 이씨로 성을 바꿈으로써 이씨가 된 경우이다. 삼국시대에 제갈량이 서남지방의 소수민족을 평정하고 나서

   그들에게 趙, 張, 楊, 李氏 등을 사성하였다. 선비족 중에는 복성인 叱李氏가 있었는데, 한화된 후 이씨로 성을 바꾸었

   다.

 

   이 선비족 이씨는 洛陽李氏이다. 北魏시대에 代北의 복성 중에 高護氏가 있었는데, 효문제를 따라 중원으로 들어온 후

   이씨로 바꾸었다. 回族, 苗族, 壯族, 蒙古族, 瑤族, 白族, 畬族, 猶太人 후손 이씨도 있다.

 

7. 타성에서 이씨로 성을 바꿈으로써 이씨가 된 경우이다. 관련 자료에 의하면 당나라의 건국 공신들 중에서 徐, 丙, 安,

   杜,胡, 弘, 郭, 麻, 張, 董, 羅, 鮮于, 阿布, 阿跌, 舍利, 朱邪 등의 성을 가진 장수들에게 국성인 이씨를 사성하였다고 한

   다.

 

중국 이씨의 世系

 

黃帝軒轅氏: 중화민족의 공통 시조이다.

少典의 아들인데, 본래의 성은 公孫이다. 有熊(지금의 하남성 鄭州市 新鄭市)에서 출생하고 창업하고 도읍을 정했기 때문에 有熊氏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姬水(渭河 유역, 지금의 陝西省 延安市 黃陵縣 沮河 혹은 陝西省 武功縣 漆水河)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고 한다.

 

軒轅之丘(지금의 하남성 鄭州市 新鄭市 서북쪽, 일설에는 지금의 陝西省 武功縣)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軒轅氏라고도 한다. 장기간 姬水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姬姓으로 改姓하였다. 황제헌원씨의 릉은 陝西省 延安市 黃陵縣 소재지 북쪽 橋山에 있는데 일명 橋陵이라고도 한다.

 

昌意: 黃帝軒轅氏와 嫘祖의 次子이자 顓頊高陽氏의 아버지이다. 若水(지금의 사천성 雅礱江)에서 살았으며, 蜀山氏의 딸 昌僕을 아내로 맞이하여 顓頊高陽氏를 낳았다. 昌樂(지금의 하남성 濮陽市 南樂縣 서북쪽 吳村 일대) 일대가 창의의 封地였다.

 

남락현 서북쪽에 昌意城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若水에 관해서 사천성 雅礱江과 金沙江이 만나는 지점, 사천성 雅安市 滎經縣, 사천성 攀枝花市, 사천성 宜賓市 등 몇 가지 견해가 있다. 顓頊高陽氏: 昌意와 昌僕의 아들이다. 동이족의 수령이다.

 

若水(지금의 사천성 雅礱江)에서 태어났으며, 실제로는 窮桑(지금의 산동성 日照市 兩城鎭 지역)에 거주하였다. 처음에 高陽(지금의 하북성 高陽縣 동쪽, 일설에는 하남성 開封市 杞縣 동쪽)에 봉해졌기 때문에 高陽氏라고도 한다.

 

帝邱(지금의 하남성 濮陽市 동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거주하였다. 사후에 東郡 濮陽 頓丘 성문 밖의 廣陽里(지금의 하남성 安陽市 內黃縣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0km 쯤에 있는 梁莊鎭 三楊莊 土山의 남쪽)에 묻혔다.

 

이씨의 遠祖이다. 전욱고양씨의 후손으로는 陳, 袁, 田, 王, 胡, 夏, 童, 陸, 顧, 錢, 鄒, 倪, 顔, 蘇, 郗, 寇, 連, 廖, 董, 關, 龍, 彭, 程, 雙, 韋, 熊, 能, 荊, 羅, 靳, 藍, 莊, 嚴, 景, 葉, 苗, 白, 屈, 項 등의 성씨가 있다.

 

臯陶: 원명은 庭堅이며, 자는 隤이다. 偃땅(지금의 산동성 濟寧市 曲阜市)에서 태어났다. 偃姓이며, 이씨의 血緣 시조이다. 동이족의 수령이다. 일설에는 少昊金天氏의 曾孫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소호금천씨의 이름은 摯이며, 嬴水(지금의 嬴汶河)에서 태어났다.

 

金德으로 왕이 되어 다스렸으며, 窮桑(지금의 산동성 제녕시 곡부시 일대)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훗날 偃땅(지금의 산동성 濟寧市 曲阜市)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요의 父系는 동이족 少昊氏族이며, 母系는 황제헌원씨의 손자인 顓頊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臯陶는 상고시기의 위대한 사상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사학계와 사법계에서는 그를 중국의 ‘司法鼻祖’로 간주한다.『元和姓纂』ㆍ『北史』ㆍ『新唐書』「宗室世系表」의 내용에 근거하면 전욱고양씨가 大業을 낳았다. 大業이 女華를 낳았고, 女華가 臯陶를 낳았다고 한다.

 

혹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이씨를 전욱고양씨의 직계 후예라고 하기도 한다. 新唐書』권70「宗室世系表」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씨는 嬴姓으로부터 나왔다. 전욱고양씨가 大業을 낳았다. 大業이 女華를 낳았으며, 女華가 臯陶를 낳았다.

 

고요의 자는 庭堅으로 堯임금 때 大理가 되었다. 고요가 益을 낳았으며, 익이 恩成을 낳았는데 후손들이 虞ㆍ夏ㆍ商代에 대대로 대리가 되어 관직명으로 성씨를 삼아서 理氏라 하였다. 紂임금 때의 인물인 理徵의 자는 德靈이며, 翼隷中吳伯이 되었는데, 직간을 하다가 주임금에게 용납되지 않아서 미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

 

그의 아내인 陳國 출신의 契和氏와 그의 아들 理利貞이 伊侯之墟에서 난을 피하였는데, 자두(木子)를 먹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되어서 마침내 理씨를 李氏로 바꾸게 되었다. 利貞 역시 契和氏의 딸을 얻어서 昌祖를 낳았는데 陳나라의 大夫가 되었는데, 苦縣에다 가정을 꾸렸다.

 

창조가 彤德을 낳았으며, 彤德의 曾孫 碩宗은 周나라 康王 때 苦縣을 식읍으로 받게 되었다. 碩宗의 5世孫 乾은 자가 元果인데, 周나라 때 上御史大夫가 되었으며, 益壽氏의 딸 嬰敷를 얻어서 耳를 낳았다. 耳는 字가 伯陽이며 一字가 聃인데, 周나라 平王 때 太史가 되었다.” 참고로 臯陶의 世系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황제헌원씨→창의→전욱고양씨→대업→女華→고요(고요의 어머니 여화가 전욱고양씨의 손녀라는 설, 고요의 모계 위

   주로 설명, 『元和姓纂』ㆍ『北史』ㆍ『新唐書』「宗室世系表」의 설)→백익

 

2. 소호금천씨→◎→◎→고요(고요의 증조부가 소호금천씨라는 설, 고요의 부계 위주로 설명)→백익

 

3. 황제헌원씨→창의→전욱고양씨→◎→女修+大業→고요(고요의 어머니 여수가 전욱고양씨의 손녀라는 설, 『史記』ㆍ

  『路史』의 설)→백익

 

4. 황제헌원씨→창의→전욱고양씨→◎→女修→고요+女華(고요의 어머니 여수가 전욱고양씨의 손녀이며, 그의 부인이

   여화라는 설, 『史記』「秦本紀」의 설)→백익

 

5. 황제헌원씨→창의→전욱고양씨→◎→◎→大業→고요(고요의 아버지가 대업이며, 대업이 전욱고양씨의 외증손이라는

   설)→백익

 

6. 황제헌원씨→소호금천씨→◎→◎→고요(소호금천씨가 황제헌원씨의 아들이며, 고요는 소호금천씨의 증손자라는

   설)→백익

 

7. 황제헌원씨→淸→소호금천씨→◎→大業→고요(소호금천씨가 황제헌원씨의 손자이며, 고요는 소호금천씨의 증손자라

   는설)→백익

 

8. 태호복희씨→該+여와씨족의 수령 皇娥→소호금천씨→◎→◎→고요(소호금천씨가 태호복희씨의 후손이며, 고요는 소

   호 금천씨의 증손자라는 설)→백익

 

9. 태호복희씨→該+여와씨족의 수령 皇娥→소호금천씨→女修→고요(고요의 어머니 여수가 소호금천씨의 딸이라는

   설)→백

 

10. 황제헌원씨→창의→전욱고양씨→仲容→夷→武恒→伯辛→고요(고요가 황제헌원씨의 직계 후손이라는 설)→백익

 

11. 소호금천씨→여수→대업→고요(고요의 아버지가 대업이라는 설)→백익

 

12. 황제헌원씨→창의→전욱고양씨→칭→노동→오회→육종→昆吾(大業)→고요(고요의 아버지가 대업가 대업이 육종의

     아들이라는 설)→백익

 

이상의 세계를 종합하여 고요의 부계와 모계를 정리해보자면 고요의 부계는 소호금천씨→◎→◎→고요로 이어졌으며, 모계는 황제헌원씨→창의→전욱고양씨→大業→女華→고요로 이어졌다. 즉 고요의 부계는 소호씨족이며, 고요는 소호금천씨의 증손자이다. 고요의 支子와 손자의 이름은 일실되어 알 수 없다.

 

동이족은 人夷, 鳥夷, 郁夷 등의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 중에서 조이가 영성이다. 고요의 모계는 황제헌원씨족이다. 황제헌원씨의 둘 째 아들 창의가 전욱고양씨를 낳았다. 전욱고양씨는 대업을 낳고 대업의 딸이 女華이다.

 

여화는 고요를 낳았다. 일설에는 소호금천씨를 황제헌원씨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소호를 靑陽氏라고 부른되서 비롯된 오해이다. 당시에 청양씨라고 불린 사람은 소호청양씨와 황제의 아들 帝嚳靑陽氏가 있었다.

 

소호청양씨는 다른 말로 소호금천씨라고도 하며, 제곡청양씨는 다른 말로 제곡고신씨라고도 한다. 참고로 제곡청양씨의 다섯 번째 아들 揮가 중국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제곡고신씨의 후손으로는 堯, 契, 后稷 등이 있다.

 

그는 요임금과 순임금 때 大理(사법장관)가 되었다. 偃땅(지금의 산동성 濟寧市 曲阜市)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堯임금이 偃姓으로 사성하였다. 일설에는 臯陶가 지금의 山西省 洪洞縣 甘亭鎭 士師村(일명 臯陶村) 혹은 臯城(지금의 安徽省 六安市) 출신이라고도 한다. 山西省 洪洞縣 甘亭鎭 士師村에 臯陶의 故里가 있다고 한다.

 

禹임금이 고요를 臯城(지금의 安徽省 六安市)에 봉하였다. 우임금은 아울러 帝位를 고요의 아들인 백익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지만 우임금의 아들인 啓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臯城(지금의 安徽省 六安市)은 偃姓 고요부족의 활동무대이자 거주지였다.

 

臯陶는 요, 순, 우임금과 함께 ‘上古四聖’이라 칭해진다. 고요의 자손들은 대대로 大理라는 관직을 세습하였기 때문에 商代에 이르러 당시의 관습에 따라 관직으로 성씨를 삼아 理氏라 하였다. 당현종은 이씨의 혈연 시조가 고요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天寶 2년(743년)에 그를 ‘德明皇帝’로 추봉하였다.

 

지금의 安徽省 六安市 소재지 동쪽 二十里鋪 小廟村에 고요의 古墓가 있다고 한다. 고요에게는 아들이 3명이었다. 맏아들 백익은 舜임금으로부터 嬴땅(지금의 산동성 萊蕪市 羊里鎭)을 식읍으로 받았다. 참고로 嬴땅은 지금의 산동성 萊蕪市와 泰安市 교차 지점에 있었다. 嬴城의 故地는 지금의 산동성 萊蕪市 羊里鎭 城子縣村에 있다.

 

둘째 아들 仲甄은 六땅(安徽省 六安市)에 봉해졌다. 셋째 아들은 偃땅(지금의 산동성 濟寧市 曲阜市)에 봉해졌다. 백익은 고요가 죽은 이후에 嬴땅에 봉해졌다. 고요의 후예 성씨로는 李, 趙, 黃, 徐, 馬, 梁, 蕭, 沈, 廖, 鍾, 汪, 康, 秦, 葉, 阮, 江, 段, 龍, 葛, 費, 瞿, 谷, 廉, 時, 舒, 甄, 耿, 陽, 裴, 解, 車, 房, 藍, 原, 桑, 蒲, 宗, 巴, 勞, 酈, 寧, 諸葛, 繆, 英, 益, 逯, 鹽, 祁, 理,里, 相里, 京, 恩, 利, 儋, 聃, 眈, 徵, 崇, 段干, 老, 老陽, 柱, 丙, 廣武, 老萊, 賀蘭, 堅吾, 大野, 徒何 등이 있다.

 

伯益: 嬴姓의 공동 시조이다. 새를 토템으로 하는 동이족의 수령이다. 伯翳, 柏翳, 柏益, 伯鷖, 化益이라고도 하며, 費땅(지금의 산동성 臨沂市 費縣)에 봉해졌기 때문에 大費, 費侯라고도 한다. 고요의 맏아들인데, 舜임금으로부터 嬴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는 원래 舜임금의 畜馬官이었다. 말을 기르는데 공이 많아서 舜임금이 嬴姓으로 사성하였다. 주로 활동한 지역은 山東省 日照地域이다. 山東省 日照市 東港區 濤雒鎭 天台山에는 백익의 ‘大王陵’이 있다. 참고로 嬴姓14氏는 趙, 黃, 徐, 馬, 梁, 鍾, 秦, 江, 葛, 費, 瞿, 谷, 廉, 繆이다.

 

영성 14씨에 이씨는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성의 시조는 伯益(大費)인데, 이씨의 혈연시조인 臯陶는 백익의 부친이며 偃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씨는 嬴宗이기 때문에 嬴姓 14씨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李氏는 嬴姓이 아니라 嬴宗이다.

 

참고로 『元和姓纂』ㆍ『北史』ㆍ『新唐書』「宗室世系表」의 내용에 근거하여 백익까지의 세계를 정리하면 황제헌원씨→창의→전욱고양씨→대업→여화→고요→백익으로 그 계보가 이어졌다. 혹자는 백익의 세계가 황제헌원씨+方雷氏→淸+類氏→소호청양씨→

 

◎+高陽氏의 딸→大業+少典氏의 딸→臯陶→伯益+舜임금의 딸→大廉, 若木, 恩成으로 이어졌다고도 한다.

 

『漢書』「地理志」와 『說文解字』는 소호금천씨를 嬴姓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더 많은 사료들에서는 영성의 득성 시조를 伯益으로 간주하였다. 伯益은 大廉(秦ㆍ趙씨의 조상), 若木(徐ㆍ黃ㆍ馬씨의 조상), 恩成(江ㆍ李씨의 조상)을 낳았다.

 

◈理徵 : 李利貞의 아버지이다. 은나라 말기에 翼隷中吳伯이 되었다. 

◈李利貞 : 원명은 接力이며,기원전 1070년에 태어났다.得姓 시조이다. 은나라 말기에 紂王의 폭정을 피하여 어머니 契

   和氏와 함께 伊侯之墟(지금의 하남성 서부지역 伊水가, 이후가 살다가 폐허가 된 곳, 일설에는 洛陽市 嵩縣 伊水가 혹

   은 洛陽市伊川縣 伊水가)로 피신하였다.

 

   은나라가 망하고 나서 契和氏의 고국인 陳(수도는 지금의 하남성 周口市 淮陽縣)나라와 멀지 않은 苦縣(지금의 하남성

   周口市 鹿邑縣)에 정착하게 되었다. 李利貞 이후 이씨는 역사상 91명의 제왕을 배출하였다.

 

   중국 역사만 놓고 보더라도 12개 정권에 60여명의 제왕을 배출하였다.

   또한 중국 역사에서 단일 성씨로는 가장 많은 69명의 재상을 배출하였다.

 

◈李耳 : 자는 伯陽이며, 시호가 聃이다. 周나라 靈王 1년(기원전 571년) 음력 2월 15일(降聖節)에 태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周나라 靈王 2년(기원전 570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대략 기원전 471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史記』에는 李耳를 李利貞의 11세손이라 하였다. 『元和姓纂』에도 이이

   가 이이정의 11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13세손 혹은 17세손이라고도 한다.

 

   『唐書』「李氏通族世表」에는 이이가 이이정의 13세손이라 기록되어 있다. 『唐書』「李氏通族世表」에 의하면 이씨

   의 득성시조 이이정에서 정사에 기록된 최초의 이씨인 이이까지의 世系는 다음과 같다.

 

   李利貞→李昌祖→李彤德→李裕→李代→李珍→李炳→李碩宗→李遂→李文明→李奎→李乾→李耳

   이석종은 서주시대에 大夫가 되었는데, 周나라 康王이 苦땅(지금의 하남성 서주시 녹읍현)을 채읍으로 하사하였다.

   이건은 周나라 宣王 때 御使가 되었다. 최신의 연구에 의하면 이이는 이이정의 17세손이라고 한다.

 

   최신의 연구에 의하면 이이정에서 이이에 이르는 世系는 다음과 같다.

   李利貞→李昌祖→李彤德→李慶→李承→李碩宗→李顯→李爽→李環鼎→李爵→李寅龍→李熙宏→李堯性→李輝→李

   連順→李乾→李耳

 

   陳나라 苦縣 厲鄕 曲仁里(지금의 河南省 周口市 鹿邑縣 太淸宮鎭 太淸宮, 일설에는 安徽省 亳州市 渦陽縣 閘北鎭 鄭店

   村 天靜宮) 사람이다. 陳나라는 훗날 楚나라에 병합되었다. 厲鄕은 賴鄕, 瀨鄕이라고도 하였다.

 

   太淸宮鎭은 鹿邑縣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太淸宮鎭을 옛날에는 猶龍鎭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지역은 한 때 안휘성 亳州에 속하기도 하였다. 李耳는 이씨의 공인된 先祖이다. 주나라 수장실의 柱下史를 역임하

   였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도가학파의 창시자이다. 일명 老子라고도 한다.

 

   노자의 성명에 관하여 『史記』로부터 시작하여 학술계에서는 많은 다른 견해가 있었는데, 그것을 대략 다음의 네 가지

   학설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이거나 조금 이른 시기의 老聃이라는 설

   둘째, 노자는 초나라 사람인 老萊子라는 설

   셋째, 노자는 전국시대 초기의 魏나라 장군인 李宗의 부친인 李耳라는 설

   넷째, 노자는 전국시대 중기의 周나라 太史儋이라는 설

 

   司馬遷은 『史記』「老子韓非列傳」에서 “노자는 楚나라 苦縣 厲鄕 曲仁里 사람이다. 姓은 李이며, 이름은 耳이고, 字가

   聃이다.”라고 말하였다. 노자의 또 다른 자로는 伯陽이 있다. 河上公은 “노자의 이름은 重耳이며, 자가 伯陽이며, 陳나

   라 苦縣 厲鄕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노자의 자가 伯陽이고, 諡號가 聃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황실에서는 노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겼다. 唐高宗

   乾封 1년(666년)에 太上玄元皇帝에 추봉되었다. 唐玄宗 天寶 2년(743년)에는 大聖祖太上玄元皇帝에 추봉되었다. 天

   寶 3년(744년)에는 開元天寶聖文神武應道皇帝에 추봉되었다.

 

   天寶 8년(749년)에는 聖祖大道玄元皇帝에 추봉되었다. 天寶 18년(759년)에는 大聖祖大道金闕玄元皇帝에 추봉되었다.

   北宋 眞宗 大中祥符 6년(1013년)에는 太上老君混元上德皇帝에 추봉되었다. 중국의 북방이씨와 남방이씨 모두 노자를

   그들의 조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이는 何氏, 古氏 두 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宗, 室,

   宋, 寶, 究, 宇 등 모두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李曇: 이이의 8세손이다. 趙나라의 柏人侯에 봉해졌다. 훗날 秦나라에 들어가서 御使大夫를 역임하였다. 사후에 柏人

            (지금의 河北省 邢台市 隆堯縣)에 안장되었다.

 

◈李崇 : 이이의 9세손이며, 隴西房의 시조이다. 그는 秦나라의 隴西守를 역임하였다. 南鄭公에 봉해졌다.

 

◈李璣 : 이이의 9세손이다. 그는 秦나라의 太傅를 역임하였다.

 

◈李牧 : 이이의 10세손이며, 趙郡房의 시조이다. 이기의 둘째 아들 李牧은 趙나라 장군이 되었는데, 군공으로 武安君

             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조군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조군방이 되었다.

 

◈李廣 : 이이의 15세손이며, 전한의 명장이다. 농서태수를 지냈으며, 사람들은 그를 ‘飛將軍’이라고 불렀다. 이광의 祖籍

              地는 隴西郡 狄道 東川 槐里(지금의 甘肅省 臨洮縣 東川 二十里鋪의 槐樹里)이다. 成紀(지금의 甘肅省 天水市

              秦安縣)는 그의 제2의 고향이다.

 

◈李暠 : 이이의 36세손이다. 北凉 天璽 2년(400년) 西凉을 건국하였다. 시호는 武昭王이며, 묘호는 太祖이다. 당나라

              때, 興聖皇帝에 추증되었다.

 

◈李虎 : 代北 武川(지금의 내몽고 武川縣) 사람이다. 西魏의 八柱國의 한명이었다. 최후에는 太尉를 역임하였다.

              宇文覺에 의해서 北周가 건국되고 나서 唐國公에 추봉되었다. 당고조 이연의 조부이다. 西魏정권에 의해서 선

             비족의 성씨인 大野氏를 사성 받았다. 이호의 손자인 당고조 이연이 隋나라 文帝 때 본성인 이씨로 復姓하였

            다.

 

◈李淵 : 이이의 43세손이며, 당나라를 건국한 황제이다. 전한의 명장 李廣, 16국 시기의 西凉의 개국 군주 李暠의 후손

              이다.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省 天水市 秦安縣) 사람이다. 祖籍은 趙郡 隆慶(지금의 河北省 邢台市 隆堯縣)이

              다. 廟號는 高祖이다. 참고로 중국 정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이씨인 李耳에서부터 당나라 고조 李淵까지의 세

              계다음과 같다.

 

          李耳→李宗→李同→李兌→李躋→李恪→李洪→李興族→李曇→李崇→李瑤→李信→李超→李仲翔→李伯考→李

          尙李廣→李敢→李禹→李丞→李先→李長宗→李君况→李本→李次→李軌→李龍→李艾→李雍→李柔→李合→

          李→李暠→李歆→李重耳→李熙→李天賜→李虎→李昺→李淵

 

◈李奇 : 이씨의 入閩 시조이다. 그의 원적은 河南 歸德州이다. 그는 河南 歸德州에서 江西 竷州 石城으로 이주하였다

              가 다시 福建 汀州府 寧化 石壁村(지금의 福建省 寧化縣 石壁鎭)으로 이주하였다.

 

◈李火德 : 이기의 맏아들인 李珠의 넷째 아들이다. 字는 炳鳳이며, 號가 閩海이다. 상항이씨의 시조이다. 그는 福建 汀州

                 府寧化 石壁村(지금의 福建省 寧化縣 石壁鎭)에서 태어났으며, 21세 때 福建 上杭縣 勝運里 豊朗村(지금의

                 福建省 龍巖市 上杭縣 稔田鎭 豊朗村 楊梅洞)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집안은 隴西房에 속하며, 당고조 李淵

                 의 손인 송대의 명재상 李綱의 후손이다.

 

중국 이씨의 천사(遷徙)

 

先史, 三代: 하남성 정주시 신정시→사천성 아롱강→산동성 일조시 양성진→하남성 복양시→산동성 제녕시 곡부시→산동성 임기시 비현→하남성 주구시 녹읍현

 

◈先秦 : 감숙성, 하북성, 산서성, 사천성, 섬서성으로 이주함

◈漢代, 三國 : 산동성, 강서성, 요녕성, 영하회족자치구, 강소성, 호남성, 호북성, 운남성으로 이주함

◈唐代 : 복건성, 강소성, 강서성, 사천성, 운남성, 해남성, 광동성, 광서장족자치구로 이주함

◈宋代 : 절강성, 강소성, 상해, 강서성, 호북성, 호남성, 복건성, 광동성, 광서장족자치구로 이주함

◈明淸代 : 대만성, 일본, 싱가폴,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으로 이주함

◈近代 : 미국, 영국, 프랑스로 이주함.

 

 

중국 이씨의 발상지(發祥地)와 주요 군망(郡望)

 

苦縣(지금의 河南省 周口市 鹿邑縣): 중국 이씨의 發源地이다. 역대로 鳴鹿, 苦, 賴陵, 武平, 父陽, 谷陽, 鹿邑, 濄州, 眞源, 仙源, 衛眞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鹿邑縣은 隋나라 開皇 18년(598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참고로 녹읍현의 명칭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춘추 : 陳나라 鳴鹿(지금의 鹿邑縣 辛集鄕)→楚나라 苦縣

◈전국 : 秦나라 苦縣

◈전한 : 淮陽國 苦縣→賴陵

◈후한 : 陳나라 苦縣

◈삼국 : 苦縣

◈晉 : 谷陽縣

◈북제 : 武平縣

◈수 : 谷陽縣→谷陽縣→鹿邑縣→濄州

◈당 : 眞源縣→仙源縣→眞源縣

◈송 : 衛眞縣

◈원 : 鹿邑縣

◈명 : 鹿邑縣

◈청 : 鹿邑縣

 

『廣韻』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에 근거하면 이씨의 군망은 농서군, 조군, 돈구군, 중산군, 광한군, 광릉군, 양성군, 강하군, 양군, 남양군, 발해군 등 13개이다.

 

隴西郡(치소는 지금의 甘肅省 定西市 臨洮縣): 시조는 李崇이다. 그는 이이의 9세손이며, 隴西房의 시조이자, 황제의 51세손이다. 隴西李氏의 發祥地이다. 隴西李氏의 祖籍地는 隴西郡 狄道 東川 槐里(지금의 甘肅省 臨洮縣 東川 二十里鋪의 槐樹里)이다. 이곳은 전한의 명장 李廣의 고향이다.

 

成紀(지금의 甘肅省 天水市 秦安縣)는 이광의 제2의 고향이다. 진안현은 고대신화에서 인류의 시조인 伏羲(太昊/太皞, 성씨는 風氏, 『사기』에는 동이족이라 서술되어 있음)와 女媧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한대와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농서이씨의 명성은 조군이씨에 미치지 못한 감이 있다.

 

농서이씨는 당대 國姓이 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당대에 농서이씨는 10명의 재상을 배출하였다. 당대 전기까지는 농서이씨와 조군이씨를 나란히 언급하다가 당대 중기 이후에 이씨의 군망을 언급할 때는 농서이씨를 조군이씨보다 더 먼저 언급하였다.

 

송대, 명대, 청대에 이씨의 군망을 언급할 때 주로 농서이씨를 언급하였다. 당대 이후에 이씨의 인구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오늘날 중국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단일 성씨로는 최대 성씨가 되었다.

 

참고로 농서(隴西)는 농산(隴山)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농산은 六盤山 남단의 별칭이다. 농산의 별칭으로는 隴首, 隴坻, 隴頭, 隴坂 등이 있다. 秦나라 昭王 27년(기원전 280년)에 최초로 농서군이 설치되었다. 일설에는 昭王 28년(기원전 279년)에 농서군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최초로 농서태수를 역임한 사람은 隴西房의 시조 李崇이다.

 

농서군은 진시황 26년(기원전 221년)에 36군을 설치할 때 설치된 郡의 하나이다. 치소는 감숙성 臨洮縣에 있었다. 그 관할 지역은 지금의 감숙성 隴西縣, 成縣, 岷縣, 天水市, 甘谷縣 등이었다. 秦漢代 이전의 농서군은 지금의 감숙성 蘭州, 天水, 隴南, 秦安 지역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진대의 농서군의 관할 지역은 지금의 감숙성 蘭州市, 定西市, 天水市, 隴南地區의 일부와 臨夏의 일부지역이었다.

 

한대에도 치소가 지금의 감숙성 임조현에 있었는데, 羌族의 침입으로 인하여 치소를 지금의 감숙성 襄武縣으로 옮겼다. 훗날 치소를 다시 감숙성 임조현으로 옮겼다. 농서군은 隴西→凉州→秦州→河州→凉州→雍州→秦州→渭州→隴西→渭州 등으로 변천을 반복하였다. 참고로 隴西郡 郡望으로는 李, 時, 辛, 彭, 董, 牛, 艾, 邊, 權, 關, 米, 閔, 禹, 第五 등이 있다.

 

趙郡(치소는 지금의 河北省 邯鄲市 서남쪽): 시조는 李牧이다. 그는 이이의 9세손이며, 趙郡房의 시조이자, 황제의 51세손이다. 이기의 둘째 아들 李牧은 趙나라 장군이 되었는데, 군공으로 武安君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조군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조군방이 되었다.

 

唐代 이전까지는 조군이씨의 명성이 농서이씨보다 더 높았다고도 한다. 唐代에도 조군이씨는 농서이씨에 버금가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당대에 조군이씨는 17명의 재상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내몽고, 동북지역의 이씨들은 조군이씨의 후손들이 많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이씨와 琉球(지금의 오키나와)의 이씨들은 조군이씨에 연원하는 경우가 많다. 유구로 이주한 이씨들은 모두 복건성 사람들이었다. 참고로 조군은 후한 建安 17년(212년)에 趙國(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邯鄲市)을 바꾸어서 趙郡으로 설치한 것이다.

 

慕容垂가 後燕을 건국하고 나서 建興 10년(395년)에 조군은 모용씨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모용수의 아들 慕容寶가 즉위하자 拓跋硅가 幷州(지금의 산서성 太原市)를 빼앗고 中山을 포위하고 常山의 여러 군을 빼앗았다. 조군의 치소는 房子(지금의 지금의 하북성 高邑縣 서남쪽)에서 平棘(지금의 하북성 石家莊市 趙縣)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마침내 北魏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頓丘郡(지금의 하남성 鶴壁市 浚縣 일대): 돈구이씨는 농서이씨의 분파이다. 시조는 전한의 명장 李廣의 손자 李忠이다. 秦漢代에 頓丘縣이 설치되었다. 西晉 武帝 때 頓丘郡이 설치되었다.

 

渤海郡(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滄州市 滄縣에 있었음, 지금의 하북성, 요녕성의 발해만 연안 일대에 해당함): 前漢 때 설치되었다. 中山郡(지금의 하북성 북부 石家莊市 正定縣 일대에 해당함): 중산이씨는 조군이씨의 분파이다. 시조는 이기의 셋째 아들 李齊이다. 춘추시대에는 中山國이었는데, 한나라 高祖 때 中山郡이 설치되었다.

 

廣漢郡(지금의 사천성 德陽市 廣漢市 일대에 해당함): 광한이씨는 조군이씨의 분파이다. 시조는 이광의 아버지 李尙이다. 한나라 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巴郡을 분할하여 설치하였다. 襄城郡(치소는 지금의 하남성 襄城縣에 있었음): 전국시대 때 魏나라의 읍이었으며, 秦나라 때 읍을 설치하였다. 西晉 때에 襄城郡이 설치되었다.

 

江夏郡(치소는 지금의 호북성 武漢市 新洲區에 있었음, 지금의 호북성 武漢市 일대에 해당함): 강하이씨는 조군이씨의 분파이다. 한나라 高祖 때 설치되었다. 梓潼郡(치소는 지금의 사천성 梓潼縣에 있었음): 후한 建安 22년(217년)에 廣漢郡을 나누어서 설치하였다.

 

范陽郡(지금의 하북성 涿縣과 北京市의 昌平區, 房山區 일대에 해당함): 범양이씨는 농서이씨의 분파이다. 삼국시대 때 魏나라가 涿郡을 범양군으로 개칭하였다. 梁郡(치소는 지금의 하남성 商丘市에 있었음, 지금의 하남성 商丘市와 안휘성 碭山縣 일대에 해당함): 한나라 高祖 때 원래의 진대의 碭郡을 梁國으로 개칭하였다.

 

삼국시대 때 魏나라가 한대의 양국을 양군으로 개칭하였다. 晉代에 다시 양국으로 개칭하였다. 남조시대 宋나라 때 다시 양군으로 개칭하였으며 치소를 지금의 안휘성 碭山縣으로 옮겼다. 北魏 때에 치소를 다시 옛날의 치소로 옮겼다.

 

南陽郡(지금의 하남성 南陽市 일대에 해당함): 전국시대 때 秦나라 昭襄王 때 南陽郡이 설치되었다. 지금의 하남성 南陽市 熊耳山 이남, 호북성 大洪山 이북 지역에 해당한다.

 

上杭(지금의 福建省 龍巖市 上杭縣): 동남 연해 지역 및 해외 이씨의 發祥地이다. 복건성 이씨의 조상은 李奇이다. 그는 李利貞의 82세손이다. 그의 원적은 河南 歸德州이다. 그는 河南 歸德州에서 江西 竷州 石城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福建 汀州府 寧化 石壁村(지금의 福建省 寧化縣 石壁鎭)으로 이주하였다.

 

이기의 맏아들인 李珠의 넷째 아들인 李火德(炳鳳)이 상항이씨의 시조이다. 그는 福建 汀州府 寧化 石壁村(지금의 福建省 寧化縣 石壁鎭)에서 태어났으며, 21세 때 福建 上杭縣 勝運里 豊朗村(지금의 福建省 龍巖市 上杭縣 稔田鎭 豊朗村 楊梅洞)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집안은 隴西房에 속하며, 당고조 李淵의 후손인 송대의 명재상 李綱의 후손이다. 李綱의 원적은 복건성 邵武인데 조부 때 江蘇省 武錫으로 이주하였다. 이 집안의 계보는

 

李耳→李宗→李同→李兌→李躋→李恪→李洪→李興族→李曇→李崇→李瑤→李信→李超→李仲翔→李伯考→李尙→李廣→李敢→李禹→李丞→李先→李長宗→李君况→李本→李次→李軌→李龍→李艾→李雍→李柔→李合→李昶→李暠→李歆→李重耳→李熙→李天賜→李虎→李昺→李淵→李世民→李治→李旦→李隆基→李世亨→李豫→李適→李誦→李純→李忱→李灌→李傑→李祝→李熙照→李韜→李英亮→李新成→李訓敎→李泰靑→李泳定→李綱→李責→李奎→李奇(孟)→李珠→李火德으로 이어졌다. 복건성, 광동성 및 대만 등지의 이씨들은 거의 대부분 농서이씨의 후손이다.

 

중국 이씨의 군망 분류

 

◈주요 郡望 : 隴西李氏, 趙郡李氏, 柳城李氏, 略陽李氏, 鷄田李氏, 武威李氏(京兆李氏), 代北李氏, 高麗李氏, 范陽李氏,

                      渤李氏, 西域李氏, 河南李氏, 京兆李氏

 

◈隴西李氏系 : 范陽李氏, 頓丘李氏, 申公房李氏, 丹陽李氏, 安邑李氏, 鎭遠將房李氏, 平凉李氏, 姑藏李氏, 敦煌李氏, 僕

                          射李氏, 絳郡李氏, 武陵(武陽)李氏

 

                         이중에서 단양이씨, 무릉이씨, 고장이씨, 평량이씨, 돈황이씨가 특히 유명하다.

                         錫山李氏, 三田李氏, 三李氏, 六田李氏, 白茫李氏 등은 당나라 종실의 후손 및 그 방계 후손이다.

 

 

◈趙郡李氏系 : 中山李氏, 穎川李氏, 遼東李氏, 江夏李氏, 漢中李氏, 襄城李氏, 常山李氏, 平棘李氏, 廣陵李氏

                         이중에서 요동이씨, 강하이씨, 한중이씨가 특히 유명하다. 광릉이씨는 강하이씨에서 분적하였다.

 

  三江李氏와 泉州李氏는 한중이씨의 후손이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이씨들 중에는 遼東李氏의 후손들이 있을 것

  으로 추측된다.

 

 

◈其他系 : 柳城李氏(金陵李氏), 代北李氏, 鷄田李氏, 武威李氏(京兆李氏), 洛陽李氏, 渤海李氏, 高麗李氏

 

중국 이씨의 지위와 인구 순위의 변천

 

◈漢代 : 五大 명문 성씨(張, 王, 李, 趙, 劉) 중의 하나

◈魏晉南北朝 : 북방의 五大 명문 성씨(王, 崔, 盧, 李, 鄭) 중의 하나

◈隋唐代 : 五姓七望(청하최씨, 박릉최씨, 범양노씨, 농서이씨, 조군이씨, 형양정씨, 태원왕씨) 중에서 이씨가 두 가문을

                 차지 하였음

◈唐代 : 1위, 참고로 당대에는 李, 崔, 盧, 鄭, 王씨를 귀족성씨라 하였음

◈宋代 : 2위(王, 李, 張, 趙, 劉, 陳, 楊, 吳, 黃, 朱)

◈元代 : 4위(張, 王, 劉, 李, 陳, 趙, 吳, 楊, 黃, 周), 참고로 원대에는 張, 王, 劉, 李, 趙씨를 5대 성씨라 하기도 하였음

◈明代 : 3위(王, 張, 李, 陳, 劉, 楊, 吳, 黃, 周, 徐), 참고로 명대에는 인재 배출 수를 근거로 하여 王, 陳, 張, 劉, 郭, 吳,

              楊,李, 胡, 朱씨를 10대 성씨라 하기도 하였음

◈淸代 : 2위(王, 李), 참고로 청대에는 陳, 李, 張, 黃, 何씨를 5대 성씨라 하기도 하였음

◈當代(1980년 전후) : 2위(王, 李, 張, 劉, 陳, 楊, 黃, 吳, 周, 趙)

◈當代(1982년) : 1위(李, 王, 張, 劉, 陳, 楊, 趙, 黃, 周, 吳)

◈當代(2006년) : 1위(李, 王, 張, 劉, 陳, 楊, 黃, 趙, 周, 吳)

◈當代(2007년) : 2위(王, 李, 張, 劉, 陳, 楊, 黃, 趙, 吳, 周)

◈當代(2008년) : 1위(李, 王, 張, 劉, 陳, 楊, 趙, 黃, 周, 吳)

◈當代(2009년) : 1위(李, 王, 張, 劉, 陳, 楊, 趙, 黃, 周, 吳)

 

이상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씨와 왕씨는 한대부터 당대까지 줄곧 5대 명문 성씨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왕씨는 송대 이후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인구수를 기준으로 1위 혹은 2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이씨도 송대 이후로 줄곧 인구 순위를 기준으로 한 4대 성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원대에 이씨가 인구 순위 4위로 밀려난 것은 중국 북방 지역의 전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씨는 남방보다 북방에 더 많이 집중되어 있었다. 원나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이씨의 인구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명대와 청대를 거치면서 이씨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인구 순위도 상승하게 되었다.

 

송대에 이씨는 주로 하북성, 사천성, 하남성, 산동성, 섬서성, 강서성, 산서성, 호남성 등지에 많이 거주하였다.

명대에 이씨는 주로 강서성, 산서성, 산동성, 절강성, 강소성, 하북성, 복건성, 하남성 등지에 많이 거주하였다.

 

이씨는 중국 역대 名人 배출 순위 제2위이다. 1980년대 들어와서 이씨는 중국의 제1위 대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단일 성씨로는 인구가 가장 많은 대성이 되었다.

 

1982년 中國의 인구센서스 통계에 의하면 이씨가 중국 제1위 대성이며 한족 인구의 7.9%를 차지한다고 한다. 제2위 대성은 한족 인구의 7.4%를 차지한 왕씨이다. 2003년을 기준으로 중국 한족 이씨의 인구는 대략 9,500만명 정도이다.

 

2007년 中國 公安部의 戶籍人口의 통계에 근거하면 중국 제1위 대성은 王氏이며, 제2위 대성이 李氏로 발표되었다. 이 통계는 홍콩, 마카오, 대만의 인구를 포함시키지 않는 통계이다. 중국 남방에는 왕씨보다 이씨가 더 많이 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씨가 중국 최대 성씨일 확률이 높다.

 

2008년 中國 國務院의 인구조사 위원회의 통계에 의하면 이씨가 중국 제1위 대성이며 한족 인구의 7.94%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씨는 주로 서북지역과 서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씨는 일반적으로 북방의 여러 省들에서는 8% 이상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방의 여러 省들에서는 일반적으로 8% 이하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동남지역의 여러 省들에서는 4% 정도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이씨의 주요 地域別 인구 순위는 다음과 같다.

 

◈섬서성, 사천성, 호남성, 해남성, 중경: 1위

◈하북성, 광동성, 산서성, 하남성, 요녕성: 2위

◈감숙성, 산동성, 호북성, 광서성, 강서성, 내몽고, 영하, 북경, 천진: 3위

◈강소성, 상해: 4위

◈복건성, 대만성: 5위

◈안휘성: 6위

◈절강성: 7위

 

한편으로 중국 이씨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은 하남성, 사천성, 산동성, 하북성, 광동성, 호남성, 호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이다. 참고로 한국과 베트남의 이씨 인구수를 포함시킬 경우 전세계의 이씨 인구수는 이미 1억을 초과하여 대략 1억 3천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이씨의 인구 순위는 중국에서는 제1위, 한국에서는 제2위, 홍콩에서는 제3위, 싱가폴에서는 4위, 대만에서는 제5위, 베트남에서는 제14위 성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