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계 이봉수 묘갈명(石溪 李鳳壽 墓碣銘)
이창우(李昌雨)는 나의 오래된 친구이다.
영주(瀛洲-흥양)의 거친 바닷가에서 4백여 리를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의 방조(傍祖)인 참판공(參判公)에 미치니, 이르기를, 『공은 우리 집안에서 충의를 다하여 공훈을 세운 분으로 마땅히 조정의 표창과 천양(闡揚)을 받았어야 함에도 그 자손들이 영락(零落)한 지가 수백 년이 되어 묻혀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한을 품고 있던 바입니다.』라고 하며, 감히 청하기에 내가 병이 들어 불후(不朽)의 글월을 지을 수 없노라고 사양하였으나 창우(昌雨)의 청이 간곡하여 그치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봉수(鳳壽), 자(字)는 덕로(德老), 호(號)는 석계(石溪)라고 하였다.
성은 이씨이니 경주(慶州)의 세가(世家)로 신라(新羅)에서 태사(太師)를 지내신 휘(諱)가 알평(謁平)인 분이 그 시조이다.
상서(尙書)를 지낸 휘가 핵(翮)인 분과 평리(評理)를 지낸 휘가 인정(仁挺)인 분은 고려조에서 이름이 있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장령(掌令-正四品)을 지낸 휘가 극평(克平)이며, 호가 경은(耕隱)인 분이 기묘사화 때에 남쪽으로 숨어들어 진양(晋陽)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정암(靜庵-조광조) 선생의 유배지인 능주(綾州)로 따라가서 도의를 강구(講究)하고 연마하였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이 어른이 휘(諱)가 형창(亨昌)인 분을 낳았는데 생원(生員)이 되었고, 또 욱(郁)이라는 분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正三品)를 지내고, 호는 보한당(保閒堂)으로 퇴계(退溪-이황), 담재(湛齋-김인후) 등 제현(諸賢)들과 종유(從遊)하였으며, 휘가 동명(東明)이란 분은 호가 춘와(春窩)로 참판(參判-從二品)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들이 공의 삼세(三世-증조부, 조부, 부친)가 되신다.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 경서(慶瑞)란 분이 그 부친이다.
공은 선묘조(宣廟朝) 계유년(癸酉年, 1573)에 태어났는데, 천품(天稟)이 호걸스럽고 괴위하며, 지용(智勇)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의 유훈(遺訓)으로 활쏘고 말달리는 기예를 배웠으며, 종제(從弟-4촌동생)인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방직(邦稷)과 더불어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의 팔진법을 연습하였다.
나이 약관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종제와 더불어 충무공(忠武公)을 가서 뵙고는 말하기를,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 용맹을 시험해볼 만 합니다.』하고는 미리 적을 막을 계책을 강론하니 이공(李公)이 그 의기(義氣)를 높이 사서 드디어 군무(軍務)를 위임하니 이에 중요한 진포(津浦)를 취하여 철쇄(鐵鎖)를 준비하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 망대(望臺)를 쌓았다.
옥포(玉浦)· 당포(唐浦)· 사량(蛇梁)의 사이에서 싸워서 승승장구로 적을 섬멸하여 공훈을 세워 누차 장계로 포상을 받아 특별히 판관(判官-從五品)에 제수되었고,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正三品무관직), 주부(主簿-從六品), 첨정(僉正-正三品)을 지냈다.
갑술년(甲戌年, 1634)에 62세로 졸하니 부인인 김해 김씨 홍우(弘宇)의 따님과 함께 장흥(長興) 장서면(長西面-오늘날 長平面) 와곡(瓦谷-옛날 기와를 만들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의 오좌(午坐)의 언덕에 합장하였으니 선조(先兆)에 따른 것이다. 후에 형조참판(刑曹參判-從二品)을 추증하였다.
부족하나마 공의 사실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과 삼강록(三綱錄)에 분명하게 실려있으나 그 곧은 충정과 탁월한 절의(節義)가 아직도 조정의 표창을 받는 은전을 입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10세손인 방우(芳雨)· 화우(和雨)가 선조의 훌륭한 공적이 오래도록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을 통탄하여 바야흐로 돌을 다듬어 (글을) 새겨 표게(表揭)하려 하기에 그를 위해 명(銘)을 짓노라.
공의 충성스럽고 곧은 절개여! / 維公忠貞。
임금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도다. / 王愾是敵。
충무공(忠武公)의 진영을 좇아서 / 隨忠武陣。
칼을 휘둘러 왜적을 섬멸하였네. / 揮劍殲賊。
당포(唐浦)와 옥포(玉浦)에서 / 唐浦玉浦。
승리를 거두어 수급을 베어 바쳤네. / 乘勝獻馗。
빛나고 빛난 것이 특별히 포상받아 / 煌煌特褒。
공훈록에 책록되고 자급이 올랐다네. / 錄勳陞格。
세상에 드러나고 묻히는 것에는 때가 있으니 / 顯晦有時。
공에게 무슨 해가 되거나 득이 되리 / 公何損益。
영가 권순명 지음(永嘉 權純命 撰)
-------------------------------------------------------------------------------------------------------------------------------------
[原文]
石溪 李鳳壽 墓碣銘
永嘉 權純命 撰
李昌雨余久要也。跟余瀛洲荒濱四百程。語及其傍先祖參判公曰。公吾家勳忠人。宜得褒闡於朝家。而因姓孫零替數百年。沈屈無傳。誠所茹恨。敢以請。余辭病莫能以不朽。昌雨請勤不已。按公諱鳳壽。字德老。號石溪。姓李慶州世家。以新羅太師諱謁平爲上祖。尙書諱翮。評理諱仁挺顯於勝朝。入本朝。掌令諱克平。號耕隱。己卯禍南遯入晋陽。從綾州靜庵先生謫所。講磨道義。是公高祖。是生諱曰亨昌生員。曰郁文參議號保閒堂。從退溪湛齋諸賢遊。曰東明號春窩贈參判。是爲公三世。妣長水黃氏慶瑞其父。公生以宣廟癸酉。天資豪偉。智勇超倫。以家庭遺訓學弓馬之藝。與從弟兵參邦稷。練習武侯八陣法。年弱冠。當壬辰。與從弟往見忠武公曰。丈夫當此世。可試其勇。預講扞禦之策。 李公許以氣義。遂委軍務。乃取要津備鐵鎖。登高峯築望臺。戰於玉浦唐浦蛇梁之間。乘勝長驅。殲賊樹功。屢被狀褒。特除判官。錄原從勳。登科官宣傳主簿僉正。甲戌卒壽六十二。與其配金海金氏弘宇女。合窆于長興長西面瓦谷午坐原。從先兆也。後贈刑曹參判。闕公事實昭載湖南節義錄與三綱錄。而其貞忠卓節。尙未蒙朝家之褒典。詎不惜哉。公十世孫芳雨和雨。痛先懿之久不暴白於世。方斲珉而表揭。爲之銘曰。
維公忠貞。王愾是敵。隨忠武陣。揮劍殲賊。唐浦玉浦。乘勝獻馗。煌煌特褒。錄勳陞格。顯晦有時。公何損益。
--------------------------------------------------------------------------------------------------------------------------------------
[참고자료]
1. 묘소의 소재지
원래 묘소는 전남 장흥군 장평면 와곡에 있었는데, 장흥군 행정당국이 2004년 주변 40만평이 넘는 27홀 짜리
장평 골프장 인허가를 내면서 부득히 전남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 사초마을 선영으로 이장하여, 매년 음력 10월
15일 후손 이상익(H.P : 061-857-9347) 종친께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2. 과거 급제에 대하여
과거 급제시기에 대하여 보첩에는 무과 등과 내용만 기록되 있고, 시기는 기록이 없다. 『호남절의록』에는 임
진왜란 이후인 계묘년(癸卯年, 1603)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603년(선조 36) 식년시(式年試) 방목에 이름은 보
이지 않는다. 앞으로 고정이 요하는 대목이다.
3. 석계공(石溪公)의 세계도(世系圖)
16世 평리성암공 인정(仁挺) →17世 헌납공 규(樛) →18世 검교공 의반(依班) → 19世 병부랑공 신문(藎文)
→20世 부랑공 효순(孝純) → 21世 애일당공 천석(天錫) → 22世 생원공 현(玄) → 23世 첨지공 산포(山浦)
→ 24世 경은공 극평(克平) → 25世 생원공 형창(亨昌) → 26世 보한당 욱(郁) → 27世 춘와공 동명(東明) →
석계공 봉수(鳳壽)
野村 李在薰
'■ 경주이씨 > 묘갈,묘비,묘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退思菴 李潤 墓表.神道碑銘 - 국당공후 문정공파 (0) | 2012.01.08 |
---|---|
石灘 李存吾先生祀壇碑銘 - 譯文 (0) | 2011.12.18 |
오산 부원군 이탕 묘갈명.영모록 - 국당공후 문정공파 (0) | 2011.09.29 |
낙안 군사공 이계번 묘갈명(21世) (0) | 2011.05.03 |
소경공 이지회 묘단비명/21世 (0) | 2011.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