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石灘 李存吾先生祀壇碑銘 - 譯文

야촌(1) 2011. 12. 18. 21:43

■ 석탄선생사단비명(石灘先生祀壇碑銘) -  譯文

 

아! 선생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인물이다.

평생의 지절(志節)을 보건대 열일추상(烈日秋霜)보다도 늠늠(凜凜)하고 태산교악(泰山喬嶽)보다도 높으니, 하늘이 선생을 낳게 한 것이 우연치 않은 것이다.

 

고려말기(高麗末期)에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요망한 신돈(辛旽)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니 선생과 같은 직도(直道)가 어찌 협박을 당하고 요사(夭死)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고려오백년간관(高麗 五百年 諫官)중에 제일가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고 알게 된 것이다.

 

선생(先生)은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諱) 알평(謁平)으로 시조(始祖)를 삼고 휘 숙진(淑眞)은 상서중승(尙書中丞)이요, 휘 예(芮)는 감찰규정(監察糾正)이요, 휘 손보(孫寶)는 장령(掌令)이요, 휘 길상(吉祥)은 사재감승(司宰監丞)이니, 이분들은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고(祖考)와 및 선고(先考)이다.

 

비(妣)는 온양방씨(溫陽方氏)이니 판도판서(版圖判書) 대제학(大提學) 서(曙)의 따님이다.

선생(先生)이 충혜왕(忠惠王) 2년 신사(辛巳) 1341년에 출생(出生)했으니 휘는 존오(存吾)요 자(字)는 순경(順卿), 호(號)는 석탄(石灘)이다. 자품이 단정하고 결백하며 간고하고 진중하였다.

 

어버이를 일찍 여의고 학문에 힘썼는데 어릴 때에 여주고산(驪州孤山=여주의 산이름)에 우거했다.

십이도(十二徒)에 나아가 강물이 붓는 시를 지었는데 「젋은 들판이 모두 물 속에 잠겼는데 고산만은 의연하게 홀로 우뚝 서있네」라는 글귀가 있으니 아는 이들이 훌륭하게 여기었다.

 

공민왕(恭愍王) 9년 경자(庚子) 1360년에 국자진사(國子進士)로써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한(史翰)에 보직 되어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반남 박상충(潘南 朴尙衷) 제현으로 더불어 서로 좋아하여 강론 하기를 빈 날이 없으니 대개 포은(圃隱)은 선생보다 네살이 위이고 선생과 같은 과거에 급제했다.

 

병오년에 우정언(右正言-從六品)이 되었는데 이때에 신돈(辛旽)이 국권을 잡아 능멸하고 참람되어 괘도에 벗어났다.

공민왕(恭愍王)이 아들이 없어 덕풍군 의(德豊君 義)와 우상시 안극인右常侍 安克仁)의 딸을 선택하여 왕비(王妃)를 삼고 신돈(辛旽)과 함께 참관 하는데 신돈(辛旽)이 높은 의자에 버젓이 않아 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은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드디어 상소문을 초잡아 서울에 올라가 동료(同僚)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요망 스런 물건이 나라를 그릇치고 있으니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니 여러 낭관(郞官)들이 두려워 하고 움추리어 감히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이 그 인척 좌사간 정추(左司諫 鄭樞)에게 말하되 『형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하니 정추(鄭樞)가 따랐다. 상소문(上疎文)이 올라가자 왕(王)이 크게 성을내어 불사르라 명하고 선생을 불러 꾸짖는데 이때에 신돈(辛旽)이 왕으로 더불어 의자를 마주하여 앉아 있었다.

 

선생이 눈을 부릅뜨고 신돈(辛旽)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처럼 무례한고』 하니 신돈(辛旽)이 깜짝 놀래어 부지중에 의자에서 내려오니 왕은 더욱 성을내어 선생과 정추(鄭樞)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찬성사 이춘부(贊成事 李春富), 밀직부사 김란(密直副使 金蘭), 첨서밀직 이색(簽書密直 李穡), 동지밀직 김달상(同知密直 金達祥)을 명하여 국문하라 하고 이에 좌우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그 성낸 눈이 두렵다.』 했다.

 

춘부(春富)등이 선생에게 이르기를『네가 이직 젓내나는 동자(童子)로 어찌 자발적으로 알았을까? 반드시 몰레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니 숨김없이 고백하라!』하니 선생이 말하기를『국가에서 무지한 동자로 간관(諫官)에 두지 않았으니 감히 말하지 않고서 국가를 저 버릴 수가 있으랴』하니 선생이 이때에 나이 26세였다.

 

이에 목은 이선생(牧隱 李先生)이 효춘부(孝春富)를 조절하여 극력 신구하므로 드디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하니 나라 사람들이 말 하기를『참된 정언(正言)』이라 하였다.

 

무신년(戊申年)에 공주(公州)의 석탄(石灘)으로 퇴거하여 호를 삼고 석탄(石灘)의 노래를 지었다. 이로부터 언로(言路)가 막히고 신돈(辛旽)은 더욱 사납고 날뛰었다.

 

선생이 근심하고 분개하여 병환이 위독 하였다. 좌우(左右)로 하여금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 하기를『신돈(辛旽)이 아직도 치열한가? 신돈(辛旽)이 망해야 나도 망한다.』하고 역황(易簧=스승이나 훌륭한 이가 죽음을 뜻함)에 이르니 이같이 하기를 두어번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신해년(辛亥年) 1371년 5月 12日에 돌아가니 나이가 겨우 31세였다. 돌아간지 석달만에 신돈(辛旽)이 베임을 당했다. 왕(王)이 그 충성을 생각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正三品)을 증직하고 국조(國朝=李朝)에 들어와서 자제 경절공(景節公)이 귀하게 되므로 자헌대부 계림군(資憲大夫 鷄林君-正二品)을 추증 받았다.

 

묘소(墓所)는 장단 대덕산 자좌원長湍 大德山 子坐原)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 되었다. 서원(書院)과 사우(祠宇)에 배향된 곳으로는 부여(扶餘)에 의열사(義烈祠)와 공주 공암(公州 孔巖)의 충현서원(忠賢書院) 무장(茂長)에 충현사(忠賢祠)와 여주(驪州)의 고산서원(孤山書院)이요.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임금이 그를 칭찬하며 사기에 대서특서(大書特書)와 명인(名人)들이 지은 시(詩)가 아 ! 또한 성대 하도다. 아! 선생의 바른 학문과 곧은 기운, 곧은 충성, 큰 절개는 진실로 천고(千古)에 등대할이가 드문데 운명이 곤궁하고 시대에 맞지 않았으며 하늘이 빼앗기를 빨리하여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세대를 의논하며 그 덕행을 상고하여 보면 거듭 탄식할 일이다.

 

고려(高麗)가 이미 망하고 태조(太祖)가 혁명하매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불교(佛敎)를 배척하여 집집마다 충의(忠義)를 세우고 호호마다 절영(節烈)을 일삼아 빛나는 정치와 교화가 실상 선생이 의논한 바에 암합함이 있으니 선생의 도가 비록 한때에는 굴했으나 만대(萬代)에 펴게된 것이다.

 

전(傳=中庸)에 이르기를『국가(國家)가 장차 흥왕하매 반드시 상서로운 일이 있다.』하였으니 선생을 일컬음인가?

선생(先生)의 효우(孝友)가 천성에서 우러났는데 백씨(伯氏)가 일찍이 도적에게 살해를 당했다. 뒤늦게 들어 알고 즉시 분상하여 장사를 지내려 하니 시체가 이미 백골이 되어서 알 수가 없는데, 선생이 백씨의 손가락이 여섯이므로 찾아 장사 지내고 드디어 관에 알리어 그 도적을 다 제거하였다.

 

배위는 여흥민씨(驪興閔氏)니 판도판서 선(版圖判書 璿)의 따님이요. 묘소는 또한 전하지 못하였다. 설하에 二男一女를 낳았으니 맏이는 즉, 경절공 래景節公 來)니 신우왕(辛禑王) 九年에 태종(太宗)으로 더불어 같은 과거에 급제 하였으며 뒤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참여하고 벼슬이 병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집현전 대제학 겸세자좌보객(兵曹判書 藝文館大提學 集賢殿大提學 兼世子左寶客)에 이르렀으며 태종묘정(太宗廟庭)에 배향했다.

 

다음 차자 채(採)는 어사감승(御史監丞)인데 숙부(叔父)인 존중(存中)에게 출계(出系)하였다.

딸은 권근(權近)에게 시집 갔다. 손자와 증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묘연한 나 후생이 동종의 후손으로 선생을 깊이 앙모 했더니 하루는 여러 후손들이 묘소를 실전함으로 한을 삼아 광주(廣州)의 경절공 묘산(景節公 墓山)에다 부인과 함께 단을 만들고 제향을 올리어 추모하는 정성을 펴니 실상 옛 사람의 묘소를 바라보고 설단하는 예를 따른 것이다.

 

일을 이미 마무리 하매 종손 종악(鍾岳)이 그 아우 종대(鍾岱)와 족제 종철(族弟 鍾哲)로 하여금 나에게 비석에 기록할 것을 요구 하면서 이르기를『이런 등의 문자를 지금 세상에 가히 더불어 상의할 곳이 없을뿐더러 자네는 문헌공 초려(文憲公 草盧) 선생의 후손인즉 종족의 의가 자별하니 그대를 놓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 청함이 더욱 간곡함으로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그 사적이 문집(文集)과 국사가첩(國史 家牒)에 기재된 것을 간추려 상(上)과 같이 서술하고 명(銘)으로 삼으니 명(銘)에 이르되

 

고려말(高麗 末)에 충현(忠賢)은 선생이 우뚝 하였으니,

밝기는 일월(日月)과 같고 높기는 山岳(산악)과 같았네.

 

요망스런 중이 국권을 주름 잡으니 나라는 하나인데 임금은 둘이네.

선생이 통쾌하게 배척하니 상소로 항쟁하고 성낸 눈이로다.

 

매의(買誼)는 장사(長沙)에서 굴하였고 제망지(薺望之)는 감옥에 갇혔네.

물러와 감추었으니 여울 물소리 들리는 곳이었네.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니, 병은 이에 따라 위독 하였네.

신돈(辛旽)이 죽어야 내가 죽는다 말 하였으니, 누구인들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요.

 

자자하게 구비(口碑)를 이루었고 빛나고 빛나게 사기에 실렸네.

정문을 세워 풍교를 심었고, 사우(祠宇)를 지어 제향을 올리었네.

 

굴하면 펴지고 가면 오는 것이니 이치가 어찌 어긋남이 있으리요.

요소가 실전되었으니 세대는 요원하고 한은 극진 하였네.

 

단소를 모으고 비석을 세우니 무갑(武甲)의 기슭이네.

제수를 정성으로 받들어 천억년(千億年)을 내려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