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가선대부병조참판 행 낙안군사공묘갈명(二十一世)
(贈嘉善大夫兵曹參判 行 樂安郡事公墓碣銘)
창산 성낙서 찬(昌山 成樂緖,1905~1988/제헌 국회의원, 충남지사 역임)
유(維)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자득성래(自得姓來)로, 원유대서(遠有代序)하야 구재(具載) 가선대부(嘉善大夫) 제주도안무사(濟州都按撫使) 휘(諱) 신(伸)의 지비(之碑)하니, 안무공(按撫公)은 공(公)의 아버지요.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조부(祖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여흥군사(驪興郡事) 증사간(贈司諫) 휘(諱) 덕림(德林)이요. 증조(曾祖)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호(號)는 운와(雲窩)이고, 휘(諱)는 달존(達尊)이요. 고조(高祖)는 추충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우정승(右政丞)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 시(諡)는 문충(文忠)이고, 호(號)는 익재(益齋)이며, 휘(諱)가 제현(齊賢)이요.
오대조(五代祖)는 검교정승(檢校政丞) 임해군(臨海君) 시(諡)는 문정(文定)이고, 호는 동암(東菴)이며, 휘(諱)가 진(瑱)이라.
공(公)의 휘(諱)는 계번(繼蕃)이요. 자(字)는 지실(之實)이니, 태조 갑술년(太祖 3년-1394)에 나시어 계묘년『癸卯年,1423년(세종 5)』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낙안군사(樂安郡事)를 역임 하였다.
천성(天性)이 청정렴결(淸正廉潔)하고, 강직무사(剛直無私)하여, 항상 명분(名分)을 세우고 충의(忠義)를 숭상(崇尙)하여 당세(當世)에 명성(名聲)이 적적(籍籍)하였으나, 세종(世宗) 기사년『己巳年,1449년(세종 31)』 五월 임소(任所)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五十六이라.
장자(長子) 윤인(尹仁)이 귀(貴)하게 되어 증직(贈職)이 추서(追敍)되었다.
배(配)는 무송윤씨(茂松尹氏) 현감(縣監) 상(常)의 여(女-딸)이다.
六男一女를 생(生)하니, 장남(長男) 평안감사(平安監司) 윤인(尹仁)을 비롯하여, 장수현감(長水縣監) 재인(在仁)과 호군(護軍) 존인(存仁)과 대사헌(大司憲) 유인(有仁)과 처인(處仁)과 평시령(平市令) 원인(元仁)의 차서(次序) 육곤계(六昆季-여섯형제)요. 여(女-딸)는 여흥(驪興) 민성(閔惺)의 처(妻)이다.
창평현령(昌平縣令) 공린(公隣)은 장남(長男) 감사(監司)의 출(出)이요.
생원(生員) 공준(公準)과 이조좌랑(吏曹佐郞) 공형(公衡)과 사정(司正) 공권(公權)과 순천부사(順天府使) 공신(公信)과 통례(通禮) 하음(河陰) 봉인(奉寅)과 최릉(崔陵)과 영광(靈光) 김섬(金銛)의 처(妻)는 장수현감(長水縣監) 출(出)이요.
공석(公奭)과 곽태주(郭泰周)의 처(妻)는 호군(護軍) 출(出)이요.
공근(公近)과 부사(府使) 청주(淸州) 한사개(韓士介)의 처(妻)는 대사헌(大司憲) 출(出)이요.
찰방(察訪) 공규(公規)와 진사(進士) 공구(公矩)와 공종(公鍾)과 생원(生員) 공승(公繩)과 순흥(順興) 안효세(安孝世)의 처(妻)는 평시령(平市令) 출(出)이다.
장손(長孫) 공린(公隣)의 자는 정수(禎叟)인데,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의 여서(女婿)로 연루(連累)되고, 또 그 三子 원(黿)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관련(關聯)되어 삼십여년간(三十餘年間) 금고(禁錮) 되므로 관(官)이 창평현령(昌平縣令)에 그첬으나, 팔별몽사(八鼈夢事)로 여덟 아들을 무육[撫育-(웃사람이)잘 돌보아 사랑하여 기름]하엿다.
장남 이조좌랑(吏曹佐郞) 오(鰲)를 위시하여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正三品)로 호가 사미정((四美亭) 구(龜)와 예조좌랑(禮曹佐郞) 증 도승지(贈都承旨)로 호가 재사당(再思堂) 원(黿)과 생원(生員) 타(鼉)와 진사(進士) 호가 장육당(藏六堂) 별(鷩)과 진사(進士) 증참판(贈參判) 벽(鼊)과 진사(進士) 경(鯨)과 봉직랑(奉直郞) 증사복시판관(贈司僕寺判官) 호 한당(閑堂) 곤(鯤)이 팔별차서곤(八鼈次序昆季)이며, 학생(學生) 찬(纘)과 생원(生員) 현(絃)과 이?(李 土+雍)의 처(妻)는 공준(公準) 출(出)이요.
강(絳)과 훈(纁)과 출계(出系) 영(英)과 안몽(安蒙) 및 고진(高震)의 처(妻)는 공형(公衡) 출(出)이요. 진사 김세장(金世璋)의 처는 공권(公權) 출(出)이요. 계자(系子) 훈(纁)과 함양(咸陽) 여세징(呂世澄)과 정종말(丁終末)과 최수종(崔守宗)의 처(妻)는 공신(公信) 출(出)이요.
유(鮪)는 공석(公奭) 출(出)이요. 계(桂)와 문(文)은 공근(公近) 출(出)이요. 노(魯)와 언(鰋)과 상(鱨)은 공규(公規) 출이요. 인의(引儀)는 공구(公矩) 출(出) 이요. 발(鱍)은 공종(公鍾). 말손(末孫)과 설극성(薛克誠)의 처는 공승(公繩) 출 이니, 여(餘-나므지)는 불진록(不盡錄-다 기록하지 못함)이라.
려조(麗朝)의 세가(世家)로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확립(確立)하는 가풍(家風)이 보첩(譜牒)에 조요(照耀-밝게 비치어서 빛남)하다. 죽산(竹山)의 수산곡(水山谷) 경좌원(庚坐原)에 공(公)의 묘(墓)가 있고, 배위(配位)는 그 계하(階下-섬돌의 아래)에 있다.
구유비(舊有碑)하니, 팔세손(八世孫) 좌의정(左議政) 경억(慶億)이 개수봉식(改修封植)인데, 년구파손(年久破損)되고, 자형(字形)이 마멸(磨滅)되어 문중물의(門中物議)로, 제손(諸孫)이 진성(盡誠)하여 비흥석상(碑興石床)으로 신건(新建)하고, 사실(事實)이 약기(略記)되었다.
명왈(銘曰-가로되)
빛나도다 이공(李公)이여!
이름 있는 선조에 어진 자손이로다.
선조의 빛나는 업을 이어 충(忠)과 의(義)가 높고 높았도다.
문(文)과 무(武)는 들리는 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워라.
벼슬은 외직으로 전전(轉轉)하였으니 나를 알 사람이 누구리요.
지내온 역경 속에 생기었던 일은
하늘에게도 말하기 어렵도다.
살아있을 때와 죽었을 때에, 은혜를 내린 것은
그 예(禮)가 진실로 융성하였도다.
인(仁)과 덕(德)이 자손에게 미쳐 흥(興)하고 성(盛)하였으니
무궁한 남은 은덕은 대대로 녹을 먹었도다.
이에 써서 유적을 나타내어 비석(碑石)에 새기었으니
천만년에 길이 알리노라.
옮긴이 : 李在薰
낙안공 계번(樂安公 繼藩) 묘(전면사진)
●이계번(李繼藩)
1394년(태조 3)~1449년(세종 31) 자는 지보(之寶), 향년 56歲. 1423년(세종 5) 무과 급제. 벼슬은 낙안군사(樂安郡事=從四品/오늘날의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지역의 郡守)를 역임중 1449년(세종 31) 5월에 임소에서 운명하였다.
장자 평안도관찰사 윤인(尹仁)이 귀하게 됨으로서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從二品)에 증직되었다. 묘는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근삼리 산51-1 수산곡 경좌(庚坐)인데 1666년(현종 7) 8세손 좌의정 경억(慶億)이 개수봉식(改修封植)하였는데 오랜 세월 풍우에 비문이 마멸되어 후손들의 성력(誠力)으로 1977년 개수입비하니 비문은 창령인 성락서(成樂緖, 1905~1988)선생이 찬하였다.
↑21世 낙안공 계번(樂安公 繼藩)의 묘비
↑21世 낙안공(樂安公)의 배위 무송윤씨 묘(茂松尹氏 墓)
현감 윤상(尹常)의 딸. 지평 윤식(尹湜)의 증손 묘(墓)는 부군의 묘 바로 아래이고 묘의 표갈(表碣)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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