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경혜공주(敬惠公主) - 조선 제5대 문종의 적녀

야촌(1) 2011. 8. 25. 16:57

■ 경혜공주(敬惠公主)

   [생졸년] 1435년(세종 18) ~1473년(성종 4) 12월 30일

   [묘의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고읍마을.

 

문종(文宗)의 적 장녀로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이다.

영양위(寧陽尉)증 의정부 영의정(贈 議政府 領議政)정종(鄭悰)에게 하가하였다.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인생은 보통 백성의 삶보다 훨씬 기구했다.

세종 18년(1435) 봄에 태어난 경혜공주는 일곱 살 때인 세종 23년(1441) 어머니 권씨가 단종을 낳다가 사망하면서 권씨 집안의 여종인 어리니(於里尼)에 의해 길러졌다.

 

16세 때인 세종 32년(1450) 형조참판을 역임한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인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혼인하는데, 이 혼인 또한 비극으로 점철된다. 부왕 문종이 재위 2년(1452)만에 의문사한 것은 곧 불행으로의 서막 이었다.

 

만17세의 자신이나 만11세의 어린 동생(단종)이 숙부 수양의 야심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종 1년(1453) 수양은 김종서를 때려죽이는 이른바 계유정난이란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주 부부는 당연히 단종편에 설 수밖에 없었고 비극은 정해진 운명이 되었다.

수양은 단종을 지지하는 왕족들을 귀양보내면서 왕위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는데, 단종을 키웠던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와 그 소생인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이 귀양가면서 영양위 정종도 영월로 귀양 가게 되었다. 두려움을 느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겼으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동생이 왕위를 빼앗기고 남편까지 귀양가자 공주는 병석에 눕는 것으로 항의했다.

상왕 단종은 세조 1년(1455) 윤6월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 “영양위의 공주가 병석에 누웠다고 내게 고해왔는데 아마도 그 뜻은 영양위를 돌아오게 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왕의 청탁을 받은 세조는 영양위를 서울로 불러들이는 시늉을 했다가 다시 수원과 통진으로 유배 보냈다.

 

그러자 공주는 남편을 따라 유배지로 갔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등이 동생을 복위시키려던 상왕복위기도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공주 부부의 처지는 더욱 궁박해졌다. 세조는 영양위 정종의 가산(家産)을 모두 몰수하고 그 종들까지 먼 지방의 종으로 보내 공주 부부의 수족을 잘랐다.

 

세조는 공주 부부를 전라도 광주로 이배(移配)시키고 재위 3년(1457) 10월에는 끝내 단종을 죽여 버리고 공주를 더욱 핍박했다. 공주의 유배지에는 목책이 설치되었으며 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겼고 열흘에 한 차례씩만 식량이 공급되었다.

 

집 안에는 우물을 파서 일체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양위 정종은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세조 7년(1461) 7월 승려 성탄(性坦) 등을 유배지에 불러들였다는 이유로 의금부로 끌려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나는 충신이다”라고 말했다고 『세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세조는 그해 10월 친형 문종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카 사위 정종의 목숨을 빼앗고 공주를 순천의 관비(官婢)로 떨어뜨렸다. 극귀(極貴)의 신분에서 가장 천한 관비로 전락했으나 공주는 굴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는 이때 수령이 사역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대청 의자에 앉아 “나는 왕의 딸이다……

어찌 감히 내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다는 말이냐?”라고 꾸짖었다고 전하고 있다.

 

관비로 전락했을 때 공주는 임신 중이었는데 경혜공주의 존재 자체가 세조 정권의 큰 부담이었다.

야사에는 세조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지시했는데, 정희왕후 윤씨가 여장(女裝)으로 위장해 살렸다고 전할 정도로 문종의 유일한 핏줄에게 가해진 탄압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세조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국 세조는 공주가 서울에서 살아도 좋다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주는 살아남아 1남1녀를 길렀다.

 

성종 때 문신 이승소(李承召)가 쓴 『경혜공주 묘지(敬惠公主墓誌)』는 ‘공주는 모든 곤욕을 맛보았다……

불평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적고 있다. 공주는 성종 4년(1473) 만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공주의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악귀(惡鬼)같은 삼촌을 만나 온갖 곤욕과 슬픔을 다 맛본 경혜공주의 일생은 그래서 필부의 보통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경혜 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단종의 친누이이기도 하다.

 

참판 정충경의 아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에게 하가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윤면(尹沔)이 공주를 위해 새로이 짓는 집 때문에 30여채의 민가가 철거된다고 아뢰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경혜 공주의 남편 정종은, 단종 폐위와 사육신 사건으로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공주의 병을 이유로 잠시 도읍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경혜공주 또한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으나 순천부사가 관비의 노역을 시키려 하자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세조는 경혜 공주에게 집과 재산,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예종에 이르러서는 경혜 공주 내외의 아들을 종친의 예로 서용하였다. 경혜공주는 1473년(성종 4) 12월 30일 졸하였으며 성종은 부의(賻儀)로 쌀· 콩 아울러 70석(碩), 정포(正布) 50필, 종이 1백권, 석회(石灰) 60석, 촉랍(燭蠟) 30근을 내려 주게 하였다.

 

글쓴이 ㅣ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경혜공주(敬惠公主) 묘. 우측이 남편 영양위의 설단이다.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읍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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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탄집(三灘集) 卷之十四/이승소(李承召)

저자 생졸년 : 1422(세종 4)~1484(성종 15)

 

●경혜공주 묘지명(敬惠公主 墓誌銘)

 

이승소(李承召) 찬

 

敬惠公主。文宗恭順大王之女。母權氏。卽顯德王后。後乃追廢焉。安東大姓。高麗太師諱幸裔孫。資憲大夫中樞院使諱專。娶太傳文憲公崔沖十二世孫副正諱鄘之女。以永樂戊戌生后。宣德辛亥。以選入侍文宗于儲宮。乙卯。生公主。庚午。下嫁鄭悰。悰贈領議政貞度公諱易之孫。刑曺參判諱忠敬之子也。景泰乙亥。悰以罪竄于光州。公主從焉。備嘗困辱。在常人亦所不堪。而略無怨悱之色。朝夕執婦道。益虔不懈。悰竟抵死。公主哀毀盡節。撫育遺孤。人莫不哀其數奇而欽其婦則。天順辛巳。世祖遣中官。召還京師。特賜奴婢五十口。命給一品祿以終身。成化乙酉。賜宅一區。己丑。睿宗又賜奴婢五十口。大王大妃尤加眷愛。時時召入內。或累日不出。癸巳冬十有二月。遘疾。上遣內醫。幷賜藥治之。不效。二十八日某甲。卒于第。享年四十。訃聞。上命有司弔祭賜賻。官庀葬事。越明年甲午三月某甲。窆于高陽某山某向之原。公主生一男一女。男眉壽。今爲敦寧府參奉。女幼。銘曰。凡人之生。其壽夭窮達。有數存焉於其間耶。抑蒼茫無端而。不可必耶。夫以王女之貴。而不得享其祿。有肅雍之德。而不永于年。何耶。雖然。天之報施。疏而不失。流光餘慶。將必俟後胤而益大歟。吾於此驗天命之不僭云。

 

옮긴이 : 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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