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가천의대 이길여 총장

야촌(1) 2011. 11. 8. 02:40

"난 바람개비… 바람이 거셀수록 더 빨리 돈다"
"남자는 필요없어요… 난 공주니까, 모두가 날 사랑하니까"

 

 

"들일 한창이던 여름이었어. 새참을 광주리에 정성스레 담아 머리에 이고 나갔지. 근디 광주리를 내려놓으니 밥하고 반찬은 온데간데 없고 누런 놋숟가락만 가득하지 뭐여. 워메 이게 뭔 조화여. 내 얼마나 기가 차고 놀랐는지 아냐?"

그해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 이서방네 정미소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아들 없는 설움을 오늘에야 갚으랴 싶었다. 태몽(胎夢)마저 그럴 듯했다. 이번엔 고추가 틀림없으렷다. 그런 집안 공기가 아이 태어난 순간 썰렁해졌다.

"뭔 벼슬했다고 처 자빠져 있능겨!" 시어머니가 둘째딸 낳고 누운 며느리에게 외쳤다.

이길여(李吉女) 가천대총장이 처음들은 세상소리는 이랬다.

 

어머니는 가여운 젖먹이에게 맹세했다. "오냐, 어느 아들 못지않게 키우고 말 것이여!"
모정(母情)은 기적을 낳는 모양이다. 어린 길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백점 아닌 성적표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 어른 반대 무릅쓰고 호남명문 6년제 이리여고에 보내니 내리 전교 1등도 모자라 서울대 의대에 떡 하니 합격한 것이다.

처음 세운 24평 병원이 지금 인천·양평·철원에서몇만평으로 뻗어갔다. 세계적인 연구소를 1000억씩 들여 세우더니 인수한 4개 대학을 하나로 묶어 전국 10대 사학(私學)으로 키우겠다며 하루종일 지도를 들고 희망을 디자인하고 있다.

제 손으로 받은 아이 몇십만, 그의 병원에서 새 삶을 찾은 이가 100만명이 넘고 그가 만든 일터에서 밥 먹는 이가 무려 5000명이다. 놋숟가락 수북한 태몽을 현실로 만들기까지 그가 쓴 폭풍연대기(暴風年代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카메라 앞에 서면 여성은 모두 소녀가 되는 모양이다. 이길여 총장은 새파란 재킷을 입고 나타나

   자신이 일군 가천대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 했다. 단풍 아름다운 동산에서 이 총장이 미래를 말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나는 공주다!

"공부든 일이든 목표를 이루려면 하루 4시간 이상 자면 안 됩니다. 나머지 시간엔 최대한 집중하고 몰입해야죠. 자기만의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목표를 다 이룬 다음에는 또 뭘 할 것인가, 그게 인생입니다."

―총장을 '여자 정주영(鄭周永)'이라 비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퀴리부인처럼 노벨상 타겠다고 다짐한 적은 있어요. 그분과 견주긴 그렇고…, '바람개비'같은 삶이라고 할까."

―바람개비라뇨.

"바람개비는 바람이 거셀수록 더 빨리 돌잖아요. 전 절대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거예요. 계속 도전할 겁니다, 쓰러질 때까지."

―저서를 보면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남다릅니다.

"그 시절 여자는 초등학교만 보내도 감지덕지했지요. 고교 진학 때 모두 반대했는데 어머니가 어른들과 사생결단을 냈어요. 집에서 학교가 있는 이리(裡里)행 기차가 하루 딱 두 번인데 연착을 밥 먹듯 했어요.

 

오후 5시 반에 하교해 밤 12시쯤 집에 돌아올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때마다 전 소나무 위에서 공부했어요. 남들 수다 떨 때. 그리했으니 월반(越班)도 한 거고요. 중요한 건 꿈꾸는 것, 도전하는 겁니다."

그녀의 따뜻한 청진기
청진기 따뜻이 데워서 환자들 가슴에 댔습니다
그러자 24평짜리 병원, 인천·양평·철원으로…

그녀에게 나이는 없다
나이 밝히는 것 싫어요 인생은 얼마 살았냐보다
뭘 하느냐가 중요하니까… 전 달릴 거예요, 끝까지

―그건 무슨 소린가요.


"제가 6학년(지금의 고3) 때 6·25가 터졌어요. 경기여고, 이화여고생들이 피란 왔습니다.

제가 전교 1등이란 소릴 들었는지 아이들이 묻더군요. '어느 대학 가 무슨 전공할 거야.' 전 거침없이 말했어요.

 

'서울의대 가서 의사 될 거야.' 아이들뿐 아니라 함께 피란 온 서울학교 선생님들이 피식 웃었어요.

그걸 보고 오기가 솟았습니다. '오냐 두고 봐라, 내가 가나 못 가나'라고요."

―'오냐 두고 봐라'라며 이를 가는 게 모녀의 버릇 같습니다.

"그게 바로 꿈이고 도전입니다."

―총장이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 두 가지라더군요. 하나가 신문에 나이 쓰는 거라는데.

"저 아직 처녀잖아요. 그런데 왜 그리들 나이 밝히는 걸 좋아하는지. 미국 은 안 그런데 한국·일본만 그래요. 나이가 뭐 중요해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영어에도 '하우 올드 아 유(How old are you?· 너 몇살이니)'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거 한국식 영어예요. 미국에선 거의 안 써요. 이번에도 쓰지 마세요."

―얘기 나온 김에 또 싫어한다는 질문하겠습니다. 여지껏 결혼 안 한 게 딸이라고 구박한 아버지 때문입니까.

"아버진 한량(閑良)이었어요. 맨날 밖으로 돌고 아들 낳겠다고 첩도 뒀고요. 세 살 위 언니(이귀례·규방다례 무형문화재)는 아버지가 좋다던데 전 재미있는 기억이 없어요. 그렇다고 아버질 싫어한 건 아니에요. 대학생 때 미팅도 꽤 했고 절 선망하는 남자도 많았대요. 전 잊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미국 유학시절 청혼을 받기도 했죠.

"링컨컨티넨탈 몰 정도의 재력에 얼굴 하얀 미남이었어요. 저보다 두살 위였는데 어느 날 새벽 2시쯤 제 기숙사 근처 벤치에서 청혼하더니 무릎을 베고 눕는 거예요. 이상한 게, 조금 전까지 함께 춤추던 사람 얼굴이 플라타너스 잎에 비친 달빛 때문인지 시체(屍體)처럼 보였어요. 어떻게 그 좋던 남자가 이리 보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나…, 그날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결혼 안 할 팔자(八字)라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TV에서 성악가 조수미를 본 적이 있어요. 나이 오십 다되도록 결혼 안 한 걸 자랑스레 얘기하더군요. '어, 저 아이 나 어릴 때랑 똑같네'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병원에도 그런 여의사가 있어요.

 

왜 결혼 안 하느냐고 물으니 '선생님, 전 마음먹으면 내일이라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조수미나 그 의사나 다 공주과(科)인데 난 '원조 공주(公主)'거든.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공주한테 무슨 남자가 필요해요, 전부들 날 사랑하는데."

―주변에 남자만 있는 걸 보면 공주가 맞는 것 같습니다. 여비서는 한명뿐이고 외출하면 보통 4~5명의 남자들이 병풍처럼 호위하잖아요.

"어? 그런가. 나 남녀차별 안 하는데."

 

 

↑이 총장의 목표는 타임지 커버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 염원을 담아 미리 타임지에 등장한 사진을 만들어 집무실에 걸어놓았다. / 이태경 기자

 

◇따뜻한 청진기

"내가 인터뷰 꽤 많이 했는데 기자들 표현력이 모자란 거 같아요. 저랑 18년 동안 일한 간호부장이 있어요. 독일에 갔다가 광부(鑛夫)랑 결혼한 인데, 그러더군요. '선생님 의사할 때를 쓴 부분들이 꼭 버선 위를 긁는 것 같다'고요."

―언제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나요.

"소녀적 길에서 개나 고양이가 피 흘리는 걸 보면 그렇게 불쌍했어요. 그때마다 데려와 치료해줬어요. 우리 시절엔 아프면 무당이 됫박에 쌀 넣고 흰 광목으로 싸 살살 문질러줬는데 나도 그 흉내 많이 냈지요."

―그건 장난 같은데.

"몇 가지 사연이 있어요. 어릴 적 친한 친구 순이가 장질부사로 사망했는데 아이들은 애장이란 걸 합니다. 그애 아버지가 광목에 둘둘만 시체를 지게에 지고 가는 게 어찌나 슬프던지. 제 아버지도 서른넷에 폐렴으로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신종 플루같은 거였어요.

 

갑자기 고열이 나더니 닷새 만에…. 그런 일들을 겪으며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어요. 초등학교 때 교의(敎醫) 이영춘 박사님에게 받은 영향도 있었고요."

―부친의 사망이 중 2때쯤인데 공부에 지장은 없었나요.

"정미소하며 꽤 넓은 땅에 농사까지 지었으니 부농(富農)이었지요. 저 공부시키느라 판 전답이 꽤 됩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한창 전쟁 중이었습니다.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필사적으로 유학을 떠나려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쟁은 제게 큰 빚을 남겼어요. 또래 남자들이 그때 거의 의용군으로 나갔습니다. 나가면 곧 죽는 시대잖아요. 전 여자라 피했지만 그 빚을 꼭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애국(愛國)을 강조하는 건 그런 이윱니다."

―졸업하고 바로 개원(開院)했습니까.

"1년간 군산도립병원에서 무료봉사했어요. 거기서 만난 퀘이커 의료봉사단의 골든이란 영국인 의사를 잊을 수 없어요. 입과 코에서 피고름이 흐르던 환자가 왔는데 석션(Suction·흡입관)을 못 찾자 입으로 빨아내는 겁니다. '진정한 봉사'가 뭔지를 처음 본거지요. 그 후 적십자병원에서 수련의로 있다가 친구 따라 인천에 가 개업한 거죠."

―그게 지금 길병원의 원조가 된 자성(慈聖)병원이죠.

"그 친구가 병원을 차렸는데 진짜 목표는 빨리 시집가는 거였어요. 6개월 만에 결혼해 결국 저 혼자 하게 됐지요."

―어떻게 했기에 환자가 물밀듯 밀려든 겁니까.

"정성을 다하는 것, 환자를 사랑하는 것 외에 뭐가 있겠어요. 전에는 마취하면 죽었다 살아나는 걸로 알았잖아요. 전 사시나무처럼 떠는 환자를 껴안고 토닥이면서 '연애할 때 생각하라' '지금 남편 말고 숨겨둔 애인 없냐'고 흰소리를 했어요. 그럼 긴장이 확 풀리잖아요."

―환자가 진료 기다리는 시간만큼 짜증 날 때가 없습니다.

"전 계단을 세 개씩 뛰어다녔어요. 항상 온수(溫水)로 손을 덥히고 장갑, 청진기도 따뜻하게 해놓았죠. 전 가천의대 학생들에게 졸업선물로 꼭 청진기를 줍니다. 제가 그걸 따뜻하게 만들어 썼듯 아이들도 그러라고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치료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눈보라 치는 겨울었는데 병원 안이 굉장히 춥더라고요. 살펴보니 한 환자가 문을 열고 몸을 반쯤 안으로 들여놓은 거예요. 진료 못 받을까 봐 그랬다는 소리 듣고 시간을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오기는 나의 힘
딸 낳고 구박당한 어머니 "오냐, 두고봐라 아들보다 더 잘 키울거여"
1등 놓친 적이 없는 딸, 서울의대 꿈 조롱받자 "오냐, 가나 못가나 봐라"

의술은 나의 길
섬에 배 타고 왕진 갔더니 한 젊은 여인 애 낳다가 남편도 없이 저 세상으로…
붉은 노을 보며 다짐했죠 "평생 병원 한번 못 가보는 가난한 이에 仁術 펼치자"

돈은 나의 길, 아니다
재벌 되려고 했으면 영종도 평당 10원 할 때 섬 전체를 샀을 겁니다
정치권 유혹도 많았지만 교육·의료 외엔 관심 없어…
내 꿈은 세계적 인재 키워 愛國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게 바퀴와 무슨?

"예전 여자들이 옷을 많이 입었잖아요. 그거 벗으려면 한참 걸려요. 전 침대를 세 개 놓고 저쪽 옷 벗을 동안 이쪽보고 옷 다 벗으면 의자를 바퀴로 쑥 밀고 다음 환자 보는 식으로 시간을 줄였습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체력은 어떻게 유지했습니까.

"제 산부인과의 미역국이 유명한데 다 제 언니 작품입니다. 퇴원한 환자 남편이 주전자 들고 많이 왔는데 정작 전 맛볼 시간이 없었어요. 언니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전지분유에 계란 노른자 하나 올려 링거 줄 꽂은 컵을 줬는데 그걸 마실 시간도 부족했어요."

 

 

↑가천대 캠퍼스 곳곳에는 이 총장의 손길이 닿아있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학생들이 불편할까 봐 고안한 딱정벌레 버스는 현대자동차가 만들지 못하자 중국 업체에 주문해 들여온 것이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붉은 저녁 노을의 기억

"전에는 아내가 입덧하면 남편도 입덧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아내와 같이 산통(産痛)하는 사람도 봤고요. 지금은 어떠냐. 후배들은 못 봤다는 거야. 의사가 환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지금 사람들은 뭔가 다른지."

―예나 지금이나 출산은 큰일입니다.

"한번은 얼굴이 새까만 삼십대 남자가 새벽에 병원으로 뛰어들어왔어요. 가방 챙겨 따라나섰는데 월미도 여객선 터미널에서 영종도행 배를 타는 겁니다. 섬에 내려서도 한참을 걸었어요. 점심때 도착해보니 젊은 여자가 핏기없는 얼굴로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 이불을 들치니 피범벅이 된 채로 그만…. 임신중독증이었죠."

―허탈합니다.

"그이는 남편도, 의사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어요. 갈 땐 희망이 있었는데 올 때는 붉은 저녁 노을 본 기억밖에 없어요. 제가 적자를 감수하고 양평, 철원, 백령도병원을 인수한 건 그런 경험들 때문입니다. 평생 병원 한번, 의사 얼굴 한번 못 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게 제 평생 고민이었어요."

―불과 몇십 년 전인데 우리는 모두 잊고 있습니다.

"자궁외임신 환자가 왔는데 친정어머니가 짐을 주섬주섬 싸는 겁니다. 병원비가 없다면서요.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그때부터 '우리 병원은 보증금이 필요 없다'는 문구를 써 붙였어요. 친구나 선배들은 '저러다 곧 망한다'고 수군댔지만요."

―밀린 치료비 갚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신문지에 망둥이 몇 마리 말아오는 사람도 있고 쌀, 옥수수, 감자, 짚신에 옷감 짜오는 사람도 있고. 전 그걸로 환자 야식해주거나 파티했어요. 보증금 안 받는다고 진료비 떼인다고 망하는 병원은 없습니다. 오히려 환자가 더 찾아오니까요."

―그래도 개중엔 황당한 환자가 있지 않습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전 컴플레인(Complain·항의)받은 적이 없어요. 의사들에게 전 항상 이렇게 말해요. '왜 의사가 돼 불평을 사느냐. 전교 1등도 들어오기 힘든 의대에 와 그 고생해서 의사 됐는데 왜 불평을 사느냐'고요. 환자를 가슴으로 대할 땐 항의가 있을 수 없어요."

―그렇게 밀려드는 환자를 놔두고 미국유학을 갔습니다.

"대학생 때도, 병원 할 때도 꿈은 미국 가는 거였어요. 대학에서 몇년 배운 의술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거든요. 즉시 못 떠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어머니께 또 손내밀 순 없잖아요."

―미국이 꿈꾸던 모습이던가요.

"하와이, 시애틀을 거쳐 꼬박 하루 만에 뉴욕케네디공항에 도착했을 때 정말 감탄했어요. '이런 게 하늘과 땅의 차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메리이머큘레이트병원은 더 대단했어요. 60년대 우리는 주삿바늘을 만들지 못해 재활용하다 뭉툭해지면 숫돌에 갈아 쓸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천국을 4년 만에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난한 우리나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떠날 때 제 치맛자락 붙들고 울던 환자들과 어머니도 생각났고요. 미국에선 말렸죠. '곧 영주권도 나올 텐데'라면서요. 미국인 스승은 귀국 후 항상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주셨어요. '네 자리는 아직도 남겨두고 있다'는 문구와 함께요."

―그러다 1975년 다시 일본유학을 떠납니다.

"귀국 직후 전 거대한 환자의 숲에 갇혀 있었어요. 그런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띵'하며 '어? 난 뭐야.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이게 뭐야'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벤츠 타고 일직선을 질주하다 커다란 바위에 부닥친 것 같은, 일종의 우울증이었죠. 그래서 다시 떠났어요, 니혼대(日本大)로."

―거기선 병리학을 연구했지요.

"킴멜스틸 박사라고 당뇨병의 세계적 권위자가 있는데 제 스승인 다케우치 다다시 교수가 그분 제잡니다. 거기서 박사학위도 받았지만 더 큰 소득도 있었어요. 의료선진국인 일본을 보며 귀국하면 꼭 종합병원을 세워야겠다, 무의도(無醫島)나 무의촌(無醫村) 같은 곳에 병원을 만들어야겠다, 좋은 의사를 길러내기 위해 교육에 힘써야겠다는 세 가지를 그때 결심한 겁니다."

◇나는 바람개비다

"1977년 6월 전 재산을 출연해 의료법인을 설립하려 할 때 어머니가 말하셨어요. '여태 결혼도 안했는디…여자 혼자 살라믄 돈이라도 있어야지. 니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디 늘그막에 돈꺼정 없으면 뭣에 의지해 살라고 그러냐.'"

―진짜 의료법인은 왜 만든 겁니까.

"의료법인은 소유 개념이 없어요. 병원을 사회에 헌납한다고 생각해야 할 수 있는 거죠. 손익을 묻는 분들이 많았는데 답은 세월이 말해줬지요. 계속 발전했으니까요."

―한창 길병원이 커갈 때 도산한 양평병원을 맡았습니다.

"서울의대 후배 중 이성우 복지부 의정국장이 있었는데 만나재요. 해외경제협력기금을 받아 세운 양평병원이 2년간 방치됐는데 선배가 맡아달라더군요. 현장은 폐허였어요. 가득한 거미줄에 여기저기 철근이 튀어나와 있고. 안 되겠다 싶어 되돌아 나오는데 할머니 몇분이 치맛자락을 붙들고 우시는 거예요.

 

'우리 할아범이 중병에 걸렸는데 큰 병원에서 주사 한번 맞고 죽는 게 소원이랍니다'라면서.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그날 인수를 결정했어요."

―몇년간 적자를 감당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인천에서 벌어 양평에 쏟아붓는 식이었지만 후회는 없어요. 양평 출신인 후배를 원장으로 보냈는데 몇 년 전부터 흑자가 됐습니다. 아예 독립채산제로 그 친구에게 맡겼더니 요즘은 용돈도 가끔 주던데요? 100만원씩이나."

―양평 길병원 적자볼 때 철원, 백령도병원도 맡았습니다.

"철원 주민들의 소원이 첫 번째가 통일, 두 번째가 병원이었어요. 3개월간 찾아왔기에 제가 두손 들었죠. 백령도도 사정이 너무 열악해서…. 백령길병원에 근무하던 의사 한 분은 제 손으로 직접 받은 아이였어요. 2001년 인천시로 넘길 때까지 사연이 많았습니다."

―그러는 한편 1994년엔 경기전문대학과 신명여고를 인수했습니다.

"경기전문대는 옛 경기간호학교로 1939년 설립됐어요. 가장 오래된 간호학교였는데 경영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마침 간호사를 양성할 꿈도 있은데다 '내가 맡으면 돼'라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가천의대는 1996년 들어 수도권성장관리권역 내에 의대를 설립할 수 있게 돼 설립한 거고요."

―가천이란 이름은 어떻게 나온 건가요.

"제가 '길'자를 좋아해요. 그래서 '길대학'으로 만들려다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유승국 박사님께 작명해달라고 부탁드렸죠. 가천(嘉泉)은 '솟아오르는 샘'이란 뜻인데 '가회합례 수세인천(嘉會合禮 壽世仁泉)' 즉, '참 아름다운 마음으로 바른 삶 이루게 하고 마르지 않는 생명으로 온누리를 건강하게 한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교육과 의술이 복합돼 있죠. '가'자를 해자(解字)해보면 이길여의 '길(吉)'이 열번이나 '더해진다(加)'는 뜻이고요."

―1998년 인수한 경원대, 경원전문대와 가천의대 등이 전부 가천대로 통합됐습니다.

"글로벌 사학으로 키울 작정입니다. 지금 성남캠퍼스가 7만평 정도인데 23만평으로 늘릴 거고요. 전 집무실에서 항상 지도를 봐요. 디자인을 직접 하니까요. 학교와 이어진 지하철역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고 교내를 오가는 딱정벌레차도 직접 고안한 거고요. 하와이에 글로벌 캠퍼스도 인수했어요. 호텔을 개조한 건데 영어몰입교육을 시킬 겁니다. 영어만은 서울대생보다 잘한다는 소리 들을 수 있게요."

―병원 경영 못지않게 재테크도 잘한 것 같습니다.

"전부 언니가 관리해줬는데요? 돈에 관심 있었으면 오래전에 영종도를 다 샀을 겁니다. 환자 중에 영종도 부녀회장이 있었는데 '곧 케이블카 놓일 테니 땅 좀 사라'는 거예요. 평당 10원이래나. 당시 가진 돈으로 전체를 사고도 남던데요. 그랬으면 지금 재벌 돼 있겠죠."

―병원, 대학에 이어 세계적인 연구소도 설립했습니다.

"병원이나 대학의 수준은 연구(R&D)로 결정되니까.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지만 보람을 느낍니다. 조장희 박사가 맡은 뇌과학연구소는 세계적인 학자들도 부러워하니까요."

―성공한 사람들이 보통 다른 분야로 외도(外道)를 합니다.

"아, 그 사람이요. 제가 부모라면 말릴 겁니다. 전 교육과 의료 외엔 한눈 판 적이 없어요. 정치권에서 유혹은 많았지만요."

이길여는 몇 년 전 언론에 연재한 회고록 제목을 '나는 120까지 살겠다'고 정하려 했다고 한다. 부는 바람을 도전으로 여겨 응전(應戰)하는 바람개비처럼, 채찍 맞을수록 빨리 도는 팽이처럼 쓰러지는 날까지 사는 게 목표라고 했다.

한반도 곳곳에 거대한 자취를 남긴, 칭기즈칸을 닮은 여인의 목소리가 4시간 반 대화 중 딱 한 번 갈라졌다. "인간이 불멸(不滅)의 존재는 아니지요"라고 물을 때였다. "자식이 없으니…제가 없어도 재단에 문제가 없도록 안배해놨어요."

문갑식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출처 : 쑹샤오핑중국노트

글쓴이 : 쑹샤오핑중국노트 원글보기